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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칠하기/그림, 그리고

팔레트 | 모리스 위트릴로 (Maurice Utrillo, 1883-1955)

2012. 10. 15.

 

 

 

 

팔레트, Patette 


 

모리스 위트릴로

Maurice Utrillo, 1883-1955

 

  

 

 

관련 링크

네이버지식백과      http://bit.ly/Rw1zmq

Works of Art          http://www.utrillo.com

Wikipedia              http://bit.ly/Rw14bQ

 

 

그는 제멋대로인 화가다. 그리고 싶을 때 붓을 들고, 내키지 않으면 붓을 던져놓고 홀연히 사라진다. 예술가라는 족속이 원래 그러하다. 가둘 수 없고 강요할 수 없고 재촉할 수 없다. 자유로운 영혼이 그들의 특권이다. 매니저라는 족속이 또 이러하다. 예술가의 자유로움을 보장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의뢰를 받고 기한을 맞추기 위해, 티 나지 않게 가둬 놓고 강요하고 재촉한다. 그러나 절대 드러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주체는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매니저는 예술가를 다루면서 예술을 팔아야 한다.
드디어 화실 문이 닫혔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의뢰를 받고도 내키지 않으면 그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술가다운 태도다. 곁에서 지켜보는 나 같은 사람만 불안해할 뿐이다. 기일을 넘기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뭐든 처음이 있는 법이니까. 그에게는 마감이 없다. 예술가에게 마감을 정하는 것이 먹힐 리 없다. 그는 그리고 싶을 때 그릴 뿐이다. 그의 그림으로 밥 먹고 사는 우리 같은 사람이나 마감에 급급하며 안달할 뿐이다. 닫힌 화실 문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화실 문이 닫히면 안에서는 문을 잠그고, 밖에서는 자물쇠를 채운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서로 가둔다. 닫힌 문은 경계다. 화실은 제한된 공간이지만 그에게는 한없이 자유로운 깊고 넓은 공간이다. 그가 문을 잠그면 우리는 그의 공간에서 제외된다. 우리는 화실 밖에서 그림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린다.
문 아래에 식사가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만 통로가 있다. 예술가도 먹어야 한다. 그의 그림이 우리를 먹여 살리고, 우리는, 말 그대로, 그를 먹여 살린다. 그 통로가 유일한 소통이다. 통로를 통해 그림의 진행 상황을 점검한다. 식사가 들어가는 순간 방을 올려다보면 캔버스가 보인다. 화실을 꾸릴 때 캔버스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정해두었다. 그는 자유롭다 생각하고 나는 조종한다 생각한다. 그림은 의뢰인이 원하는 날짜에 전해져야 한다. 이는 그와 나의 관계가 유지되는 최소한의 요건이다.
그는 일주일째 팔레트에 물감만 섞고 있다. 캔버스는 아직 최초의 백지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보름이 남았다. 화상(畵想)만 떠오르면 그리는 과정은 빠르게 진행된다. 그동안 그와 진행했던 수많은 작업에서 봐왔다. 마감이 코앞에 닥치면 반복된 경험도 믿음이 가질 않는다. 머릿속 시계는 조바심내며 째깍댄다. 문제는 시계 소리가 내 귓가에만 들린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물감을 개고 있다.
일주일 남았다. 캔버스는 여전히 새하얗다. 이건 아니다. 지금은 색감만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다. 팔레트에서 만들어진 빛깔들이 이제 형체를 갖출 때이다. 파란 하늘도, 하얀 지붕도, 빨간 꽃도, 노란 나비도 될 수 있는 빛깔들. 팔레트를 떠나 화폭 위에서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는 빛깔들. 이제 붓은 팔레트를 떠나 캔버스로 옮겨올 때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순간이다. 밖에서는 안달이 나지만, 재촉할 수 없다.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려줄 수도 없다. 알려준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아니 달라질 수도 있다. 그는 그냥 도망가 버릴 테니까. 그가 문을 열지 않는 이상, 내가 문을 열 수는 없다.
3일 후면 의뢰인이 그림을 가지러 올 것이다. 오늘 아침까지도 그는 하얀 캔버스를 마주 보고 물감을 개고 있었다. 3일이라. 그가 3일을 남겨놓고 그림을 완성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언제나 조바심을 냈기 때문에 항상 아슬아슬하게 그림을 내놓곤 했다는 기억밖에 없다. 그게 3일인지, 일주일인지는 헤아리지 않았다.
이번 계약은 큰 건이라, 마감을 맞추지 못하면 손해가 크다. 지금은 계산해야 한다. 문을 열어야 하나? 그의 공간에서 그가 할일을 다 해준다면 그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문이 열린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피가 마르는 시간이다. 전화를 걸어야 하나?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원하는 그림을 얻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해야 하나? 이쪽이 움직일 가능성이 더 크다.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겠지만, 시도해볼 만하다. 이것 또한 내가 할 일이다. 예술가가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을 수 있도록 머리를 숙이는 일.
전화를 들었다. 갑자기 화실 쪽에서 큰소리로 나를 불러댄다. 무슨 일이지? 달려가 상황을 확인한다. 무슨 일이야? 식사를 넣어주던 이가 화실에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자물쇠는 아직 채워져 있다. 다급히 자물쇠를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사라졌고, 캔버스는 텅 비어 있다. 이 자식이! 한바탕 욕설을 퍼붓는다. 젠장, 창문을 이용한 모양이다. 다음에는 화실을 높은 층으로 올려야겠다.
의뢰인에게 계약파기를 알려야 한다.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게, 내주어야 할 것과 받아내야 하는 것들을 조율해야 한다. 나타나기만 해봐라, 이번엔 예술가고 뭐고 없다. 화가 나서 캔버스를 밀어버리고 돌아서 문으로 향했다. 한순간이지만 언뜻 뭔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다시 돌아서서 눈에 들어온 것의 실체를 찾는다. 캔버스 옆 보조탁자에는 그가 물감을 개고 있던 팔레트가 놓여 있다. 팔레트에는 한 폭의 풍경화가 완성되어 있었다.
나는 줄곧 텅 빈 캔버스를 보았지만, 그는 줄곧 팔레트를 채워나간 것이다. 캔버스로 옮겨오지 않고도 빛깔들은 태어난 그곳에서 생명을 얻었다. 그만의 특징을 드러내면서도 의뢰인이 만족할만한 작품이다. 그는 그림을 완성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림은 훌륭했다. 최초의 감상은 내 몫이다. 매니저의 특권이다. 완성된 작품을 최초로 보게 되는 권리, 훌륭한 작품일수록 그 권리는 빛을 발한다. 그의 예술은 내 손을 떠나면 상품이지만, 의뢰인에게 넘겨지기 전까지의 짧은 한순간 나만의 예술품이 된다.  짧은 한순간의 감동, 내가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이유다.
이제 의뢰인과 통화를 해야겠다.
이 특별한 작품은 조금 더 받아낼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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