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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명상 | 박항률(1950~)

2012. 10. 15.

 

 

  

 

정오의 명상


 

박항률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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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이 나갔다.
내가 아닌 내가 나를 찾는다. 내가 아닌 나여서 나를 모름에도 내 곁에 없는 나를 원망하며 나를 갈망한다.
둘로 나뉠 수 없는 것의 분리는 존재 자체를 불안하게 한다. 남은 나는 혼자서는 불완전하다고 여긴다. 뭔가 더 필요해. 항상 혼자 중얼거린다. 뭔가 더 필요해.
내가 나가버린 건 내 탓이다. 텅 빈 내가 지금 둘이 아님에 불안해하고 있다면, 떠나간 나는 둘이 함께 있음에도 완전하지 않음에 불안해했다.
나는 내가 아니면 그 무엇과도 하나일 수 없다. 나를 떠나 찾을 수 있는 것도 머물 수 있는 곳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나와 함께 여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 완전함은 남아 있는 나만의 바람일 지도 모르나, 적어도 나 이외의 어떤 것과도 하나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앉아서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확인이 필요하다. 실패할지라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실패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해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 부딪혀보지 않고 아는 척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로부터 한없이 자유로워진 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그 끝에 있는 나와 만나기 위해서. 나는 한없이 자유로워서 나로서는 떠남을 막을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나마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확신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떠난 나에겐 그것이 절망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순간의 공허함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비어 있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순간. 내가 내가 아니어도 되는 순간이다. 자유를 찾아 떠난 내가 또한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내가 없다는 불안 속에서도 자유가 주는 평화로움을 조금은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여유가 있어진 걸까? 불안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가끔은 익숙함, 또한 두려워진다.
정오, 나를 떠난 나를 인식할 수 있는 시간.
"김선각씨! 그만 일어나시죠!"
정오, 육체의 배를 채우면 곧이어 밀려오는 명상의 시간.
"식곤증도 정도가 심하면 경고 감이야!"
정오, 명상의 시간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정오, 외부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로서 깨어나는 시간.
"도대체 밤엔 뭐하는데 낮에 비실비실해!"
정오, 나를 잃은 나의 시간이 영원이 아니라 순간임을 깨닫게 하는 시간.

창을 연다. 바깥 공기가 더 후끈하다. 정신을 차리기엔 충분하지 않은 더운 기운과 함께 흰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든다. 나비도 더위를 피해 날아든 건지, 대낮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빌딩 사무실 책상 위를 날아다닌다. 창을 닫았다. 나는 나비를 가두고 나비는 스스로 갇혔다. 나는 문을 열 수 있지만 나갈 수 없다. 나비는 문을 열 수 없어도 나갈 구멍을 찾을 수 있다. 나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사무실 형광등 아래가 아니라 뜨거운 태양 아래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꽃 위를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선각씨, 정말 이럴 거야? 영 정신 못 차리겠거든, 세수나 하고 와!"
정오, 내가 나이기를 강요하는 시간.
        그리고 내가 나이기 싫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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