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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The Red Sun Gnaws at the Spider
후안 미로, Joan Miro, 1893-1983
관련 링크 네이버지식백과 http://bit.ly/Rw2eUV Works of Art http://joanmiro.com Wikipedia http://bit.ly/Rw16AB |
벌써 사흘째 잠복근무다. 녀석은 오늘 나타나겠다고 미리 예고했다. 녀석을 믿는다면 오늘 하루만 지키고 있으면 되지만, 범죄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저 아래 번쩍이는 빌딩과 아파트에 비해 볼품없고 초라한 이 산동네 으슥한 골목길에서 사흘째 버티고 있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녀석은 좀도둑이다. 자잘한 도둑질을 해댔고 몇 차례 내 손으로 잡아서 감옥에 보냈다. 돌아와서는 손을 씻고 착실하게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일을 벌였다. 전과가 쌓이면서 일하기도 어려워졌다. 일할 곳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원상태로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 환경이 그에게 결코 유리할 수는 없다. 첫 도둑질이 녀석의 인생 전체를 결정지어 버렸다. 잘못이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이었기에 조금만 힘이 들면 그는 계속 쉬운 선택을 반복한다.
가난은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 가난 속에서 행복한 이들은 만족을 아는 사람들뿐이다. 사람이란 게 원래 생겨먹은 게 만족을 모르는 족속이다. 가진 자들조차 만족하지 않는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의 만족에는 그 밑바닥에 체념을 깔고 있다.
녀석은 산동네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타고난 가난이다. 산 아래 펼쳐지는 휘황찬란한 불빛을 바라보면서 그 밝음을 누리며 살기를 꿈꾸는 아이였다. 이루기 어려운 꿈이었다. 할머니는 몸도 불편했다. 이제 아이가 청년이 되어 할머니를 돌봐야 한다. 첫 도둑질도 할머니를 위해서였다. 녀석은 할머니를 사랑했다. 할머니는 녀석이 할머니를 위한다는 핑계로 자꾸 삐뚤어져 가는 것을 슬퍼했다. 착실하게 살아가면 좋으련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항상 다시 시작되었다.
좀도둑인 녀석이 이번엔 큰 건을 터트렸다. 시내 큰 금은방을 턴 것이다. 보안시스템도 있고 CCTV도 있는 규모가 꽤 큰 곳이었다. 녀석은 전혀 조심하지 않았다. 유리를 깨고 들어가 순식간에 가장 값나가는 물건 두 개만 달랑 훔치고 경비업체에서 도착하기 전에 사라졌다. 녀석의 수법이 아니다. 간 큰 녀석도 아닌데다가 전문적인 도둑도 아니다. CCTV에 고스란히 모습이 잡혔다. 복면도 하지 않았다. 아예 잡힐 생각을 하고 덤벼든 것 같았다. 이번에 잡히면 녀석은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먼저 집을 찾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병원에 있었다. 큰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있지만, 병원비를 독촉받고 있었다. 병원에 있는 할머니는 의식이 없었다. 병원비를 물지 못하면 강제퇴원이 될 처지다. 그래서일까? 아니, 이해하지 않겠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나쁜 일을 해도 되는 좋은 이유는 없다. 형사라면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건 다음날 병원비는 계산되었다. 한동안은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손자는 없지만, 병실은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원한 것이 병실일 것 같진 않지만, 손자는 그것을 위해 일을 벌였다.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녀석은 말 그대로 좀도둑이다. 보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동안 떠돌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보석과 관련된 일은 없었다. 근데 이번 사건에서 녀석은 정확하게 가장 값나가는 물건 2개를 꼭 집어 들고 나갔다. 녀석의 행동이지만 녀석의 머리는 아니다. 내부에 누가 있다. 보석의 값어치를 아는 이, 그리고 녀석의 사정을 아는 이. 곧 금은방에서 판매를 책임지는 매니저를 잡아들였다. 그의 도박 전력이 꼬투리가 되었다. 그의 매제가 병원 원무과에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는 녀석을 알게 되었다.
배후를 잡아 도난물품은 찾았지만, 녀석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얼굴이 공개된 이상 곧 잡힐 것이다. 녀석은 내게 전화를 해서 오늘 자수하겠다고 말했다. 대신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꼭 내가 잡아갔으면 좋겠단다. 그냥 타고난 가난이 싫은 어찌할 바 모르는 반항아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뭔가 작심을 한 것 같다.
오늘이 다 지나가고 있다. 밤까지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속았다. 녀석이 나를 갖고 놀았다. 녀석을 믿었기에 보고도 하지 않았다. 이제 닷새째로 막 접어들고 있다. 굳이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골목에서 나와 산 아래 도시의 유흥가 불빛이 새벽녘 여명에 묻혀 하나둘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일출도 꽤 아름답다. 새빨간 뜨거운 무엇이 빌딩 위로 쏟아 오른다.
어느새 녀석이 내 곁에 서 있다.
“좀 늦었죠?”
“갈까?”
“이거 좀 부탁해요.”
녀석은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할머니 짐이에요. 할머니 좀 부탁해요.”
“내가 왜? 네 할머니잖아.”
“오래 못 견디실 거예요. 병원비는 넉넉하게 지불했어요. 혹시 모자라면 좀 도와주세요. 세상에 나오면 꼭 갚을게요.”
“할머니 때문이라고는 하지 마. 할머니도 슬퍼하실 거야.”
“알아요. 내 탓이죠. 알아요.”
“도대체 이 대책 없는 일을 왜 한 거야? 뻔히 잡힐 줄 알면서. 자수하지 않았어도 넌 잡혔을 거야.”
“모두가 상대에게 덫을 놓은 거죠. 그놈도 지 덫에 내가 걸렸다고 생각했을 테고, 형사님도 날 잡으려고 덫을 놓은 거예요. 결국, 저 집이 덫이죠. 하지만, 이 모든 건 내가 만든 커다란 덫이에요. 할머니는 그만 하라고 하셨고, 믿지 않겠지만 그만 하려고 했어요. 그놈이 그걸 제안하기 전까지는. 갑자기 커다란 거미줄을 짜기 시작했죠. 내 생애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CCTV에 얼굴을 노출했죠.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으니 잡는 건 시간문제죠. 훔친 보석은 그놈 몫이고, 내 몫은 병원비였어요. 다 해결됐죠. 형사님이 내 얼굴을 봤을 테니, 그놈이 잡히는 것도 시간문제고. 내가 똑똑하지 않다는 걸 가장 잘 아실 테니.”
“왜 나지? 내가 할머니를 모른 척하면 어쩌려고. 마지막을 혼자 손자도 곁에 없이 마무리하실 수도 있잖아.”
“못 보셨어요? 할머닌 의식이 없어요. 저 집에서 마지막을 맞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마지막이라도 조금 편안하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셨으면 했어요. 그리고 형사님. 형사님은 자신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형사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녀석이 잡히고 두 달 채 넘기지 못하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녀석이 마지막 한 말이 생각난다.
“이게 마지막인지 어떻게 알아?”
“마지막이에요. 이제 핑곗거리도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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