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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칠하기/속깊은인터넷친구84

위안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더 나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낫기를 기대하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멈춰있는 시간이 분명 둘러둘러 굴러가는 시간보다 훨씬 짧음에도 멈춰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그렇다. 가끔 이 사람과 카풀을 한다. 내 차가 없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차를 얻어 타는 것이다. 그러나, 월요일. 모든 직장인들이 전날 휴일에 대한 보답으로 죽을 병이 아닌 이상 모두 직장으로 향하는 날이다. 도심의 러시아워. 꽉 막힌 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기다리지 못하고 멈춰 있지 못해서 언제나 더 나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름길이라 우기며 골목길로 들어선다. 더 이상 우회할 수 없는 외곬. 이건 어쩔 수 없다. 지각이다. 지금 단 .. 2012. 11. 27.
허허 일요일. 내가 가장 가장 싫어하는 날이다. 일요일 전날인 토요일이 가장 좋고, 월요일 전날인 일요일이 가장 싫다. 일요일엔 느즈막이 일어나서 밥 먹고 TV 보고, 밥 먹고 TV 보면 하루가 간다. 하루가 짧다는 걸 실감한다. 잠자리에 들면 마음이 답답하다. ‘행복에 겨워, 아! 행복해, 라고 소리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허허… 아! 행복해, 하고 먼저 소리질러보면 어떻겠나? 혹시 길 잃은 행복이 제 길을 찾아올지도 모르지.” 한밤중에 소리친다. “난 행복해!” 엄마의 목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달밤에 뭔 짓이고! 잠이나 자!” “저… 근데 뉘신지?”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다. 설마, 길잃은 행복은 아니겠지? 2012. 11. 27.
오드리 햅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다. 나도 오드리 햅번을 좋아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할리(오드리 햅번)는 1년 전에 이사 왔으나 여전히 짐 정리도 못하고 있고, 어디선가 주워온 고양이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하고 그냥 “캣”이라고 부른다. “난 내가 누군지 몰라요. 여기 있는 이 고양이처럼 이름도 없어요.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누구를 소유하지도 않아요.” 어느 날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가 내 곁으로 왔다. 나두 이 녀석을 이렇게 부른다. “캣.” 우람이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꼬모, 얜 개야!” 나도 할 말은 있다. “괜찮아. 나두 오드리가 아닌 걸, 뭐!” 나는 오드리 햅번을 좋아하고, “캣”이라는 이름의 개를 곁에 두고 있다. 2012. 11. 27.
미선 최고의 선전은 집요한 반복이다. “우리 신랑은, 나보다 일찍 퇴근하면 저녁을 준비해.” "요리는 신랑이 나보다 낫거든.” “내가 퇴근하면 물에 손도 못 담그게 해.” “좀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걸…” “아침엔 커튼을 열어 햇살로 나를 깨워주지.”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아이하고는 얼마나 잘 놀아주는지, 내가 다 샘이 난다니까.” 그녀의 말을 잠시 끊고 내가 묻는다. “그래서, 너 행복한 거지?” 그녀는 내 말을 무시한다. “요리는 신랑이 나보다 낫고.” “아침엔 커튼을 열어 햇살로 나를 깨워주고.” “아이하고는 얼마나 쿵짝이 잘 맞는데…” 집요한 반복은 자기체면이다. 2012. 11. 27.
구부장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필요하면 기억을 꾸며내기도 한다. 주로,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로 시작하는 기억은 가장 많이 꾸며내는 기억이나 가장 정확하다고 믿는 기억이다. 아침에 커피 한잔씩 앞에 놓고 구부장은 또,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땐 말야. 밤을 새워서라도 맡은 일은 마무리했어. 그건 힘듭니다, 아직 못했습니다, 이런 말은 꺼내지도 못했고, 하지도 않았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책임감이 없어요. 책임감이… 믿든 안 믿든 자네 마음이겠지만 말이야.” 언제부터 자리잡고 있었는지, 파티션 너머에서 실장이 부장을 부른다. “구부장!” “이거 내일까지 되지?” 조금 있으면 내일까지 해야 할 일의 정체를 알게 된.. 2012. 11. 27.
우람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 때가 있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 내게 한 때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만은 분명하다. 엄마가 할머니가 되면 딸보다 손녀가 우선이 된다. 우람이. 바로 이 녀석이다. 체중미달로 태어난 이 녀석은 오직 우람하게만 자라기를 바라는 온가족의 바람으로 인해 아람이나 아름이가 아닌 우람이가 되었다. 특히, 할머니는 손녀를 우람하게 키우기 위해 집안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냉동실에는 아이스크림이, 냉장고에는 과일이, 선반 곳곳에는 과자들이 쌓여갔다. 나보다 더 내 집을 내 집 드나들 듯이 하는 오직 한 녀석을 위해. 내가 특별히 식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난 즐겨 먹진 않지만 곁에 있으면 먹어치운다. 그날도 이제 막.. 2012. 11. 21.
그루 하느님은, 인간과는 달리 이성적이지 않다. - 움베르토 에코 -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그루터기다. 아낌없이 내주고도 마직막 쉼터까지 마련해주는 그루터기.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책임을 요구하지만, 엄마는 아직도 나를 책임지려고 한다. 아침 식사시간. 밥상 앞에서도 잠이 덜 깬 내게 엄마는 지난 밤을 이야기한다. “동네 사람 보기 창피하게 여자아이가 왜 이리 밤늦게 돌아댕기노!” 엄마에게 나는 여전히 아이다. 이런 소릴 들으면 서른 넘은 여자아이는 좀 민망하다. 그날 밤, 또 늦었다. 막 내일이 될 참이다. 약간 붉은 얼굴로 약간 흔들거리며 집으로 가는 길이다. 맞은 편에서 오는 인사불성의 취객이 나를 스쳐지나간다. 동네사람이 분명한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의 동네사람인 나 또한 그를 알지 못한다... 2012. 11. 21.
미루 미루다. 내 이름이다. 엄마는 꿈을 꾸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힌 온통 새하얀 시골마을에 오로지 미루나무 한 그루만이 푸르름을 간직한 채 우뚝 서있었다 한다. 3, 4월에 꽃을 피우고 한여름을 푸르르게 보내는 미루나무와 눈으로 뒤덮인 하얀 세상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으나, 그 범상치 않음이 뭔가를 기대하게 하는 태몽이었다고 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 조각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동요에서도 미루나무는 상쾌하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 등장한다. 엄마는 상쾌하고 평화로운 그런 아이를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미루야, 일어나!” 평화로움은 지속되지 않는다. “늦었다니까!” 상쾌하지도 않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는 내 귀에 속삭인다. “지각이다.” 대세를 거슬리기엔 너무나 평범.. 2012. 11. 21.
미루다 미루다 미루다 미루다 미루다 한적한 홈에 약간을 소란스러운 업데이트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2012.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