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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以前)

기억

2020. 8. 17.

작성일 : 2016. 01. 04.

기억이란 건 참 이상한 녀석이라서 가끔 제어되지 않을 때가 있다.

 

차를 후진하는데 뒤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서행이었고 뒷사람도 여유 있게 피했다. 시비도 없었고, 사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상관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높은 곳에 서면 현기증을 느낀다.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을 뿐, 떨어진 것도 다친 것도 아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흔하디흔한 일이다. 높은 곳이란 장소도 특정 장소가 아니다.

그만큼 구체적인 실체가 없는 기억이다. 그래서 잊어버린다.

 

거짓말. 뭔가 모면하려고 진심을 감추려고 거짓말을 한다.

가장 큰 거짓말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이면서 거짓이다.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다. 잊어버렸나 보다.

 

잊는다는 것은 선택받지 못한 기억이다.

정말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또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버려진 기억. 완전히 비워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 꼭꼭 숨겨둔 기억.

언제라도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기억. 꾹꾹 눌러두어서 떠오를 때 그 반동이 심한 기억. 어느 순간 삐져나올까 봐 두려운 기억.

 

기억은 이 모든 것을 자기의 거대한 동굴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은밀한 주름 속에 모아 놓는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 움베르토 에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어느 순간 갑자기.

운전할 때, 막 잠이 들 때, 대화하는 중에 퍼뜩.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것. 떨어져 죽는 것, 거짓말이 들통 나는 것.

일어나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스쳐 간다. 어깨를 움찔하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누군가 묻는다.

“왜 그래?”

존재 없는 기억을 뇌의 은밀한 주름 속에 쑤셔 넣으며 대답한다.

“왠지 잊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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