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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나 제왕의 생애 | 쑤퉁

2020. 10. 3.
나 제왕의 생애

나 제왕의 생애

쑤퉁 저/김택규

왕을 세우는 것도 쉽고, 왕을 폐하는 것도 쉬웠던 대섭궁
누구를 좋아하는 일도, 잊는 일도 모두 손쉬웠던 열네 살의 국왕 단백
눈물과 피로 아로새긴 한 생애의 비망록


“이토록 대담하고 기상천외한 서사는, 고매한 환상은,
예스럽고 우아한 정조는 어디서 왔을까.”
김숨(소설가)

밑줄긋기 왈.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제왕의 삶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단백. 줄타기 광대로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날아오르다.

 

제1부

 

1

 

“제왕의 삶은 쓸데없는 쑥덕공론 속에 지나간답니다.”

 

각공은 또 내게 말했다.

“폐하는 섭왕이십니다. 모든 것을 참는 법을 배우셔야 합니다.”

나는 각공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섭왕이면 왜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단 말인가. 사실 정반대여야 하지 않는가.

 

“혀를 잘랐으면 자른 거지요. 다만 궁 밖으로 소문이 퍼져서는 안 됩니다. 이미 관련된 자들에게 일러놓았습니다. 누구든 소문을 퍼뜨리면 혀를 자르겠다고 말이지요.”

가슴을 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듯했다. 알고 보니 황보부인이 벌하는 방식은 나와 똑같았다. 위안이 됐지만 한편으로 한 가닥 망연함을 느꼈다. 보아하니 나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셈이었다. 냉궁 여인 열한 명의 혀를 잘랐지만 황보부인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화살이 이미 쏘아졌으니 섭국의 재난이 머지않았습니다.”

 

2

 

“얘야, 어려서 왕이 된 것은 네 행운이자 불행이다.”

 

“폐하께서는 그곳에 가보고 싶으신가요?”

“그냥 물어본 거다. 내가 어디를 가고 싶든 난 가지 못한다.”

 

3

 

“숙부는 정말 멍청하오.”

달어는 딸꾹질을 한 번 하더니 내게 반박을 했다.

“제가 멍청하긴 합니다만 멍청한 사람은 귀한 운명을 타고났지요. 섭왕의 자손은 다 멍청하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역대의 군왕들은 대부분 멍청해 주색을 밝혔지요.”

나는 그의 황당한 논리를 바로잡았다.

“나는 주색을 탐하지 않으니 전혀 멍청하지 않소.”

달어는 또 껄껄 웃으며 말했다.

“폐하는 겨우 열네 살이지 않습니까. 폐하도 천천히 멍청해지실 겁니다. 똑똑하기만 하면 왕위를 지키기 어려우니까요.”

 

나는 연랑과 옷을 바꿔 입은 뒤, 연랑에게 금관과 용포 차림으로 역참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했다.

“정말로 누가 나한테 몰래 화살을 쏘는지 한번 봐야겠다.”

말을 채찍질해 질주하는 연랑의 자태는 그야말로 제왕처럼 위엄이 넘쳤다.

 

잠깐 옷을 바꿔 입었을 뿐인데도 내게 금관과 용포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건초 더미 위에서 연랑이 말 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낀 당혹감과 울적함을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섭왕의 복장을 다른 사람이 차려입어도 똑같이 어울리고 위풍당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관의 노란 옷을 입으면 환관이 되고 제왕의 용포를 입으면 제왕이 된다.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체험이었다.

 

4

 

아직 핏자국이 가시지 않은 새 지도를 보았다. 섭국의 영토는 본래 큰 새와 닮았는데 부왕 재위 시절에 큰 새의 오른쪽 날개가 동쪽의 서국徐國에게 잘렸고 이번에는 왼쪽 날개가 나 때문에 잘렸다. 이제 나의 섭국은 죽은 새처럼 더는 날지 못할 듯했다.

 

단문이 나보다 더 진짜 섭왕 같았다.

그것은 말 못할 내 마음의 병이었다. 나는 이처럼 스스로를 비하하는 의심을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연랑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위태로워 보여도 진정한 위험은 없었던 내 제왕의 생애 초반에 그러한 의심은 커다란 바위가 되어 깨지기 쉬운 내 왕관을 누르며 내 정신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나는 괴팍하고 고집 센 소년 천자가 되었다.

나는 예민했다. 나는 잔인하고 난폭했다. 노는 데만 열중했다. 사실 유치하기까지 했다.

 

제2부

 

1

 

“죄가 있든 없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죄는 다 사람이 짓고 또 사람이 정하는 건데.”

 

2

 

“혜비는 가지를 잘못 찾아온 아기새 같구나.”

 

3

 

그해 봄, 섭국 남부의 농촌은 메뚜기떼의 습격을 당했다. […] 논밭 사이에서 죽은 메뚜기를 찾아 모으면서 사람은 배가 고픈데 벌레는 배가 불러 죽었다고 불평했다.

 

어린 나이에 등극한 제왕으로서 국정과 궁정의 예의를 살피는 지식은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야심과 음모를 식별하기 위해 제왕에게 꼭 필요한 예민함과 경계심은 갖고 있었다. 나는 단문이 한 마리 늑대이며 상처 입은 늑대는 장차 더 흉악하게 변한다고 굳게 믿었다.

 

단문은 내 형제가 아니었다. 내게는 신하와 백성이 있을 뿐 형제는 없었다.

 

“자고로 영웅은 모두 억울한 원혼이 되었지. 수많은 이들이 음모와 정치의 제물이 되었네. 자네의 이런 죽음도 전혀 이상할 게 없네.”

 

4

 

“내게는 방법이 없다. 지고무상의 섭왕인데 어째서 아무 방법도 없는 것일까?”

 

5

 

걱정과 공포, 욕망이 합쳐져 죽음의 밧줄이 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 밧줄은 언제든지 누구라도 저승으로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부왕이 자기 스스로 죽었다고 믿었다. 자신의 손으로 목에 그 밧줄을 걸고 조여 죽은 것이다.

 

6

 

“너는 폐물 중의 폐물이자 산송장이다. 애당초 그들이 억지로 네 머리에 왕관을 씌웠지. 그것은 네 불행이자 섭국 백성들의 불행이었다.”

 

“담장을 넘어가라.”

단문이 말했다.

“바깥세상에 나가 서민이 돼라. 이것이 가짜 제왕에게 내리는 가장 훌륭한 징벌이다.”

 

제3부

 

1

 

천천히 『논어』를 집어들었다. 앞으로의 내 서민 생애에서 그것은 전혀 실용적인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또다른 하늘의 뜻임을 알았다. 나는 『논어』를 갖고 계속 떠돌아야 하는 것이다.

 

“폐하가 재위하실 때 저는 충성을 다했고 폐하가 재난을 당한 뒤에도 저는 옆에서 모시고 있어요. 하늘이시여, 제가 더 뭘 할 수 있지요?”

연랑의 반응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 나는 연민의 심정을 느끼며 착잡한 마음으로 연랑을 주시하면서 오랫동안 그와 나눈 깊고도 형언하기 어려운 정을 떠올렸다. 그것은 여러 가지 색깔의 비단 띠와도 같았다. 신뢰와 이용, 약속의 색채가 가득 그려진 그것은 일찍이 제왕과 환관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런데 그 비단 끈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음을 나는 똑똑히 깨달았다. 날카로운 칼에 찔린 듯 마음이 쓰라렸다.

 

“부자가 가난뱅이를 죽이고자 하면 가난뱅이는 방법이 없소. 그저 부자가 비명횡사하기를 바랄 뿐.”

 

이 세상은 더는 내 소유가 아니었다. 세상은 뜨겁고 희뿌연 도망의 길만 내주었다.

 

“당신은 어디로 가시오?”

“품주에 갑니다.”

나는 말했다.

“품주에는 비단을 팔러 가시오?”

“비단이 아니라 사람을 팔러 갑니다.”

나는 말했다.

“나를 팔러 갑니다.”

 

“저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여자예요. 하지만 궁 안팎의 세상 남녀들 중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죠?”

 

외로운 여행길에서 나는 나처럼 홀로 길을 가는 학자나 장사꾼을 숱하게 만났지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들과는 적막한 길에서 늘 대화를 시도했다.

“망했노라…… 망했노라……”

나는 공중의 새를 향해 외쳤다.

“망했노라…… 망했노라…… 망했노라……”

곧 새떼의 응답이 내 목소리를 덮었다.

 

2

 

비웃거나 놀리고, 함부로 평을 했다. 나는 이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 나는 공중의 밧줄 위에 있고 그들은 산송장처럼 영원히 인간세계 속에 머무른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내가 공중의 밧줄 위에 섰을 때만 지상의 중생을 멸시하고 나의 새로운 세계를 주재할 자신이 생긴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그 밧줄 위에서 인생의 마지막 꿈을 찾았다는 것도 알았다.

공중에서 내 균형 감각은 신기할 정도로 탁월했다. […] 나는 만면에 눈물을 흘리며 밧줄 한가운데에 서서 밧줄의 반동에 따라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내 몸과 영혼이 함께 솟구쳤다가 떨어져내렸다. 줄타기는 너무나 즐겁고 자유로운 기예였다. 재능을 타고났으나 삶 때문에 묻혀버렸던 아름다운 기예이기도 했다. 마침내 날 줄 아는 새가 되었다. 내 두 날개가 빗줄기를 맞으며 늠름히 펴졌다. 나는 마침내 날아올랐다.

“나를 봐라, 다들 나를 봐라!”

 

천주의 남왕 관저에서 나는 빛나는 제왕에서 무시무시한 재앙 덩어리로 전락했다. 추락하고 타올라 재난의 섭국 땅에 새로운 재난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세상을 피했지만 세상은 나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나는 평생 한을 품고 살아야 하리라.

 

인간은 모두 이 세상에서 힘든 여행을 할 운명이라는 것을.

 

천주에서 청계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처음으로 한 사람이 별 하나를 뜻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추락하는지 상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내 온몸의 불을 느꼈다. 그 불은 내 얇은 옷과 먼지바람 사이에서 은은히 타올랐고, 내 피곤한 사지와 평온한 영혼 사이에서 활활 타올랐다.

 

3

 

공기 중에 육욕과 돈냄새가 가득한 향현의 거리에서 나는 내 일생을 완전히 두 부분으로 나눴다. 제왕으로서의 삶은 이미 낙엽이 되어 대섭궁 담장 밑에서 조용히 썩고 있었지만, 절세의 광대로서의 나는 아홉 척 높이의 밧줄 위에서 세상에 등장했다. 나는 밧줄 위에 서서 무엇을 들었나? 북풍의 흐느낌과 환호, 예전의 내 백성들이 밑에서 미친듯이 기뻐하며 외치는 소리를. 그들은 내게 줄타기왕이라고, 걷고 뛰고 재주를 넘으라고 소리쳤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걷고 뛰고 재주를 넘었다. 밧줄 위에 멈춰 섰을 때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밧줄 위에 서서 무엇을 보았나? 나의 그림자가 향현의 석양 아래 빠르게 커지는 것, 내 영혼 깊은 곳에서 아름다운 흰 새가 날아올라 자유롭고 당당하게 사람들의 머리와 끝없는 하늘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나는 줄타기왕이었다.

나는 새였다.

 

“돌아와요, 섭왕. 내가 구 아가씨를 찾아줄게요. 돈은 한 푼도 필요 없어요.”

나는 그를 향해 남은 반쪽 소매를 흔들며 똑같이 고함쳐 답했다.

“아니, 찾지 말게. 가게 내버려둬. 영원히 찾지 않아도 되네.”

그것은 정말로 내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아름답지만 불우했던 나의 혜비는 이제 또 한 마리의 자유로운 흰 새가 되었다. 우리는 똑같은 하늘 아래 날아올랐고 만남도 헤어짐도 잠깐 손을 흔드는 것으로 족했다. 각자 얼마나 새를 동경하고 꿈꾸었는지 이로써 증명되었다.

길은 달랐지만 이른 곳은 같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앞다퉈 달려와 내가 줄타기왕으로 변신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 했다. 나는 그들이 보내는 환호를 이해했다. 파멸에 이른 그들의 생활에 내가 약간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천재지변과 전란이 겹친 섭국의 도회지와 농촌에 내가 약간의 생기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폐위된 군왕에 대한 사람들의 숭배는 감당할 수 없었다. 섭왕이라고 신들린 듯 연호하는 사람들 앞에 서면 흑표용관의 사기극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눈을 가렸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한때 왕관을 썼던 그 사람은 이제 해묵은 함정에서 벗어났지만 궁궐 밖의 숱한 백성들은 여전히 그 왕관에 속고 있었다. 대형 사기극의 설계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은 겨우 구해냈지만 순박하고 어리석은 그 사람들에게 나는 도저히 옳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없었다.

 

“뭐가 무서워요? 도읍 사람들이 우리 공연을 안 볼까봐 무서워요?”

“아니. 우리가 모르는 일들이 무서워.”

연랑의 말은 내 마음속의 두려움을 정확히 찔렀다

 

4

 

“어린 시절, 이 재난을 예측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때 너무 무서웠는데 그날이 정말 오고 보니 공허하기 그지없구나. 자, 내 손을 만지고 또 내 심장박동을 들어봐라. 지금 나는 물처럼 평온하다. 나는 서민이고 줄 타는 광대다. 내 앞에 있는 것은 망국 군주의 죄업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선택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무서울 게 없다.”

 

나는 걸어가며 두 손바닥을 살폈다. 손바닥이 검붉은 피에 물들어 아무리 비비고 지워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이상할 만큼 집요한 타인의 피라는 것을 알았다. 연랑과 옥쇄의 피이면서 폐비 대낭, 참군 양송, 태의 양동 그리고 변경에서 죽은 모든 장병들의 피였다. 그 피들이 특별한 손금이 되어 내 손바닥에 깊이 새겨졌다. 그런데 왜 죽음의 초대는 하필 나만 빠뜨린 것일까? 갖가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다 저지른 나를. 갑자기 어떤 슬픔이 엄습해와 내 마음을 움켜쥐었다. 나는 재난을 면한 그 도읍의 백성들과 한목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서민의 생애를 시작한 뒤 흘린 첫 눈물이었다.

 

5

 

섭국의 도읍이었던 섭경燮京은 팽국의 통치자에 의해 장주長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 장주 백성들은 이제 옷까지 팽국의 번잡하고 풍성한 복장으로 바꿔 입었다. 온 사방이 폐허인 곳에서 길을 골라 다니며 그들은 안색이 피곤하고 막막해 보였다. 백성들로서는 불안정한 생활이 여전히 계속되는 중이었다. 섭경이든 장주든 백성들은 대대손손 그곳에 살아왔고 앞으로도 조심조심 살아가야 했다.

 

나는 외로운 영혼처럼 대섭궁의 폐허 위를 떠돌았다.

[…]

“아저씨는 누구세요?”

소년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보며 물었다.

“왜 보물을 안 찾아요?”

“내가 바로 그 보물을 숨겨둔 사람이란다.”

 

나는 연랑과 옥쇄의 무덤 위에 누워서 거적을 이불 삼고 봉분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아무데서나 잠드는 짐꾼이나 거지는 영원히 되지 못할 것이라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너무나 피곤하고 졸려서 밝아오는 새벽빛 아래 전례없이 단잠을 잤다. 나와 하늘이 가까워서였는지 새가 나오는 꿈도 숱하게 꾸었다. 꿈에서 본 새들은 다 눈처럼 하얬다. 꿈에서 본 하늘은 다 끝없이 투명했다. 내가 꿈에서 본 새들은 다 하늘을 날아다녔다.

꿈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내 행낭은 다시 텅 비었다. 너덜너덜한 『논어』와 둘둘 감은 줄타기용 밧줄만 남았다. 서로 아무 상관 없는 그 두 가지 물건이 가장 적절히 내 일생을 정리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주의 골동품 시장에서 우연히 혜비를 다시 보게 되었다. 혜비는 머리를 산발하고 지저분한 얼굴에 수다스러운 모습이었으나 그녀가 미쳤다고 판단할 수 없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그 골동품 시장에 썩 잘 어울려 보였기 때문이다. 혜비는 행인들에게 정교하게 오려진 다양한 색상의 종이 한 묶음을 팔고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진짜 좋은 물건이에요.”

혜비는 불분명한 목소리로 절박하게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5대 섭왕의 연애시예요. 진품이에요, 좋은 물건이에요. 사도 절대 손해가 아니에요.”

 

혜비가 든 시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행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한 푼의 값어치도 없는 쓰레기였을 것이다.

따뜻한 봄날 오후였다. 골동품 거리의 혜비를 멀리서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박하와 난초와 먹냄새가 뒤섞인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향기는 오후의 골동품 거리를 있는 듯 없는 듯 떠다니고 있었다. 그 향기는 팔리길 기다리는 시 원고에서 나는 것도, 박복한 운명의 그 닳디닳은 여자에게서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 옛 삶의 마지막 추억에서 나는 향기였다.

 

6

 

나는 고죽산의 고죽사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일휴왕一畦王, 한 뙈기 땅을 다스리는 왕

 

고죽산은 점점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은 산 밑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날씨 좋은 아침이면 산중턱의 절에서 괴상한 승려가 소나무 두 그루 사이에 밧줄을 걸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승려는 밧줄 위에서 나는 듯이 걷거나 학처럼 조용히 멈춰 있었다.

그가 바로 나였다. 낮에는 줄을 탔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숱한 밤마다 고요히 『논어』를 읽었다. 때로는 그 성현의 책이 세상 만물을 다 아우르는 듯했고, 때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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