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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눈먼 암살자 1, 2 | 마거릿 애트우드

2020. 10. 3.
눈 먼 암살자 1

눈 먼 암살자 1

마거릿 애트우드

 

완벽한 구조의 삼중 액자로 그려낸,
한 여성의 비밀스러운 삶과 비극적인 가족사.


부커 상과 해밋 상을 수상한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대표작. 캐나다 최초의 페미니즘 작가로 평가 받는 애트우드는 다양한 작품에서 환경과 인권, 예술 외에도 여성의 삶을 비중 있게 다루며 현실의 문제들을 조명하고 있다. 그녀는 『눈 먼 암살자』에서 역시 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좇는 과정을 그리며 페미니즘, 계급과 빈부 차, 전쟁과 폭력에 대한 문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리스는 도산 위기에 처한 아버지를 위해 정략 결혼을 택하고, 그런 아버지마저 사망한 후에는 결혼을 반대했던 여동생 로라 역시 그들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저자는 서로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던 자매가 주위를 가득 채운 지저분한 욕망과 권위의식으로 인해 멀어지고 각자 다른 모습으로 희생되어가는 과정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그려낸다.

삼중 액자 구조를 띄는 이 작품은 촘촘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구성으로 시종 긴장감 있는 전개를 보여준다.

 

밑줄긋기 왈.

아이리스가 손녀에게 남기는 자서전.

로라(?)가 쓴 소설 “눈먼 암살자”.

소설 “눈먼 암살자”에서 “눈먼 암살자와 말하지 못하는 제물” 이야기.

 

 

1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케르만 시의 주민 모두를 살육하거나 눈멀게 만들도록 명령한 아가모하메드 칸, 그의 왕조를 상상해 보라. 그의 집정관들은 단호하게 임무를 수행한다. 그들은 거주민들을 줄 세우고, 어른들의 목을 자르고, 아이들의 눈을 도려낸다……. 그 후 눈먼 아이들의 행렬이 도시를 떠난다. 일부는 지방을 헤매고 다니다가 사막에서 길을 잃고 목마름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다른 일부는…… 케르만 시민의 종말에 대한 노래를 부르며…… 다른 정착지에 다다른다…….

— 리샤드 카푸친스키    

 

나는 헤엄을 쳤다, 바다는 끝이 없었다, 나는 해안을 볼 수 없었다. 타니트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내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오 사랑에 빠져 죽은 자들이여, 나를 기억하라.

— 카르타고의 장례 항아리에 새겨진 비문    

 

언어는 어두운 거울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다.

 — 실라 왓슨

 

제1부

 

다리

 

전쟁이 끝난 지 열흘째 되던 날, 내 동생 로라는 차를 몰던 중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로라의 부드러운 타원형 얼굴을, 그녀의 단정하게 쪽 찐 머리를, 그녀가 입고 있었을 옷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작은 깃이 달린 블라우스. 짙은 청색이나 금속성 회색 또는 병원 복도에 칠해진 녹색 같은 수수한 색깔의 옷. 회개의 색깔. 자신이 선택해서 입은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그녀를 감금하고 있는 듯한 그런 색. 엄숙한 희미한 미소. 마치 눈앞의 풍경에 감탄하듯 놀란 모습으로 치올라간 눈썹.

하얀 장갑, 본디오 빌라도와 같은 몸짓. 그녀는 내게서 손을 뗀 것이다. 우리 모두로부터.

 

시체 보관소에 가기 위해서는 베일이 달린 모자와 장갑이 필요할 것이다. 눈을 가릴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다.

 

“진정하고 어디가 아픈지만 말해 보렴.” 그녀는 말하곤 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어디가 아픈지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진정할 수 없다. 그들은 결코 울부짖음을 멈출 수 없다.

 

눈먼 암살자. 로라 체이서 著

레인골드, 제임스 앤드 모로 출판사, 뉴욕, 1947

 

그녀는 그의 사진을 단 한 장 가지고 있다.

[…]

그것은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그녀와 그 남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이다. 뒷면에는 연필로 ‘피크닉’이라고 쓰여 있다. 그의 이름도, 그녀의 이름도 아닌 그냥 ‘피크닉.’ 그녀는 이미 이름을 알고 있고, 그래서 적을 필요가 없다.

 

혼자 있을 때 그녀는 갈색 봉투를 다시 꺼낸다. 그리고 신문 기사 조각 사이에서 그 사진을 끄집어낸다.

그것을 탁자 위에 뉘어 두고 우물이나 물웅덩이 속을 들여다보듯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너머 그 무언가를 찾듯이, 자신이 떨어뜨렸거나 잃어버린 것,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아직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엇, 모래 위의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 무엇을 찾으려고 하듯이.

 

물에 잠겼지만, 아직 빛나는 것들.

 

제2부

 

눈먼 암살자

완숙달걀

 

“그 부족들은 유랑하는 동안 이따금 이 돌 더미를 지나치지.”

[…]

그 돌 더미는 그들의 다양한 언어로 각각 “날아다니는 뱀의 소굴”, “돌무더기”, “울부짖는 어머니의 거처”, “망각의 문”, 그리고 “부식된 뼈의 구덩이”라고 불리고 있어. 각각의 부족은 이에 대해 비슷한 일화를 들려주지. 그들에 따르면 돌 아래에는 이름 없는 왕이 묻혀 있다는 거야. 왕뿐만 아니라 그 왕이 한때 다스렸던 장엄한 도시의 유물도 함께. 도시는 전투 중에 파괴되었고, 왕은 승리의 표시로 붙잡혀 대추야자 나무에 목매달렸어. 달이 뜰 무렵 그의 몸은 절단되어 매장되었는데, 그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침략자들이 돌멩이를 쌓아 둔 것이지. 도시의 거주자들 역시 모두 죽임을 당했어. 전부 학살당한 거야. 남자, 여자, 어린이, 아기, 심지어 동물들까지도. 칼로 베인 후 조각조각 난도질당했어. 생명을 가진 어떤 것도 죽음을 모면할 수 없었지.

정말 끔찍하군요.

이 주위의 어떤 곳이든 일단 한번 파 보기만 하면 이런저런 끔찍한 이야기가 드러나지. 돈벌이에 좋은 일이지. 우리는 죽은 뼈 위에서 번성하는 거야.

 

도시의 진짜 이름은 침략자들에 의해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어. 이야기꾼들에 의하면, 바로 그 이유로 이 장소는 그곳의 파괴와 몰락을 나타내는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돌 더미는 고의적인 기억의 행위이자 고의적인 망각의 행위이기도 하지. 그 지역 사람들은 역설을 매우 좋아하거든. 다섯 부족은 서로 자신들이 승리를 거둔 침략자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들은 학살의 기억을 감미롭게 회고하지. 각 부족은 이 도시에서 행해진 부정한 관례에 대한 정당한 복수로써 그들 각자의 신이 자신들에게 학살을 명한 것이라고 믿고 있어. 악은 피로 정화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그날에는 피가 물처럼 흘렀고, 그래서 이후 이곳은 아주 결백한 곳이 되었겠지.

 

눈먼 암살자

공원 벤치

 

이그니로드들은 자신들 삶의 운명에 대해 분개했지만, 그 분노를 우둔함으로 가장해서 은폐했어.

 

눈먼 암살자

카펫

 

물은 언제나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물은 항상 아래쪽으로만 흘러.

 

카펫은 한결같이 어린 노예들에 의해 만들어졌어. 아이들의 손가락같이 작은 손만이 그렇게 정교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끊임없이 부과된 정밀한 노동 때문에 아이들은 여덟아홉 살 정도가 되면 모두 시력을 잃게 되었어. 그리고 그들의 실명은 카펫 상인들이 자신들의 상품 가치를 매기고 선전하는 기준이 되었지. “이 카펫은 열 명의 아이들을 실명하게 만든 겁니다.”

 

아이들이 실명을 하게 되면, 여자애나 남자애 할 것 없이 모두 포주들에게 팔렸어. […]

그들은 또한 자물쇠를 비집어 여는 데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 매음굴을 탈출한 아이들은 비밀스러운 살인에 종사하게 되었고, 고용 암살자로 인기가 높았지.

 

아이들이 앉아서 끊임없이 카펫을 짜고 있는 동안, 아직 그들의 시력이 온전할 동안, 서로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던 이야기들은 모두 미래의 삶에 관한 것들이었어. 그들 사이에는, 눈먼 자만이 자유롭다, 라는 속담이 떠돌고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살인자가 되잖아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카펫 상인이나 포주가 될 수는 없지. 밑천이 없었기 때문에 싫어하는 일을 할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어. 고달픈 운명이지.

그만해요.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말한다.

내 잘못도 아니야. 우리가 조상들의 죄를 지고 있는 거라고 해 두지.

그건 불필요하게 잔인해요. 그녀는 차갑게 말한다.

[…] 만일 당신이 사람들의 목을 베거나 굶어 죽어야 한다면, 어떤 쪽을 택하겠어? 혹은 생계를 위해 매우 인색하게 굴어야 한다면.

 

눈먼 암살자

립스틱으로 그려진 하트

 

뭘 하느라고?

나는 몰라요. 돈을 벌거나 쇼핑을 하거나 자선 사업을 하고 있겠죠. 무엇이든 그들이 늘 하는 일을.

 

그곳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어. 신은 항상 쓸모 있는 존재들이지. 그들은 거의 모든 것들을 정당화해 주거든.

 

이상적인 제물은 춤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론이었지. 품위 있고 서정적이며 조화롭고 우아한 소녀. 그들은 아무렇게나 죽임을 당하는 동물과는 달랐어. 자신들의 삶을 자유의지에 따라 내어놓는 것이었으니까.

 

제3부

 

시상식

 

일상적인 새벽 의식, 즉 타인들에게 온건하고 무던하게 보이기 위한 치장 작업.

 

스스로는 더 이상 맡을 수 없는 냄새를 내가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지친 피부와 탁하고 오래된 오줌 냄새 같은 것을.

 

“작은 행운들에 대해 감사해야 해.” 리니는 말하곤 했다. “우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 거죠?” 로라는 되물었다. “왜 행운들은 다 작은 거죠?”

 

그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오직 젊은이만이 아름다울 수 있기에. 못생긴 이들도, 심술궂은 이들도, 뚱뚱한 이들도, 여드름투성이인 이들조차도, 모두 아름다웠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젊은이들은, 성가신 존재들이다. 그들의 자세는 언제나 끔찍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보면 항상 슬픔을 쥐어짜거나 쾌락을 탐닉한다. ‘미소를 지으며 견디는’ 태도는 유행 지난 폭스트롯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행운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전쟁, 역질, 살인, 어떤 종류의 고난이나 폭력, 그것이 바로 그들이 존중하는 것이다. 피를 흘렸다는 것은 우리가 심각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킨 분노다. 곳곳의 교회 목사들은 그 책을 외설적이라고 비난했다. 공공 도서관에서는 서가에서 그 책을 치워 버려야 했고, 읍에 있는 유일한 서점에서는 그 책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 책이 검열 대상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당시 콘돔을 취급하던 것처럼 스트래트퍼드나 런던, 심지어는 토론토까지 몰래 나가 은밀히 그 책을 구해 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커튼을 닫아 놓고 비난하며, 혹은 음미하며, 혹은 탐욕적으로, 혹은 환희를 느끼며, 그 책을 읽었다. 심지어는 소설 따위에 손을 대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독서를 독려하는 방법으로 한 무더기 추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그들은 그 책에서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욕정, 음담패설, 자신들이 품어 온 최악의 의혹을 확인하는 것. 하지만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유혹당하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얄팍하고 무기력한 책. 이 괴상한 잔치의 초청받지 않은 손님으로서, 그 책은 무력한 나방과 같이 무대의 언저리를 퍼덕거리며 맴돌았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조심하기를.” 언어를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축복과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은제 상자

 

“죽고 싶다.”라는 소원을 말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제야 나는 이 소망이 진정으로 성취될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그에 대한 결심을 바꾼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어쩌면 다시 여기로 이사 오지 말아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리니가 항상 얘기했듯이 “이미 알고 있는 악마와 맞닥뜨리는 게 더 나은 것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대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두 사람이 있으면 공연히 안전하게 느껴지지. 하지만 ‘그대’라는 것은 도대체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다. 내가 알아온 모든 ‘그대’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읍을 떠나 버리든가, 배신을 하든가, 아니면 파리 목숨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너는 어디 있는가?

바로 여기에. 

 

로라는 어렸을 때 이 두 천사가 우리 둘을 나타내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이 천사상이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할머니의 뜻에 따라 세워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녀의 의견을 반박했다. 하지만 로라는 그런 추론에 결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실제로 보이는 형태, 즉 사물의 주변 사항이 아니라 그것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본질을 원했다.

 

그리고 로라, 여기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퍼져 있는 그녀의 존재. 그녀의 본질.

고기 먼지.

 

스스로 무언가 쓰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쓰이기를 기다리는 깨끗한 백지.

 

단추 공장

 

이 상품들이 도시에서 온 관광객들이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역사의 한 파편이라고 마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역사란 그렇게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고, 특히 이렇게 깔끔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는 결코 팔리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악취도 풍기지 않는 그런 과거를 선호한다.

 

우리와 신 상호 간에 존경심이 있어야 하며, 우리가 곤경에 처하게 되면 변호사를 부르듯 자연스럽게 신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변호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신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것은 극심한 고난이어야 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그와 지나치게 얽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분명 리니는 부엌에서는 신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할 일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아빌리온

 

뼈가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습한 날에는 종종 그렇다. 뼈의 통증은 역사와 비슷하다. 오래전 끝나 버렸지만 고통으로 반향이 되어 울리는 것.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인 리니로부터 나를 유업으로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신뢰받는 가신(家臣) 역할을 즐길 것이다.

 

죽은 자의 유품을 정리해 보면, 우리 자신이 죽을 때 비닐 쓰레기봉투가 기껏해야 몇 개나 필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그녀가 지닌 문화적 취향은 그녀에게 일종의 도덕적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문화가 사람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문화가 사람을 고양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여자들은 그렇게 믿었다. 오페라 극장에 가는 히틀러를 아직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애들리아 할머니는 돈을 보고 결혼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돈, 단추를 팔아 번 돈. 사람들은 그녀가 이 돈을 세련되게 정제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마치 기름을 정제하듯. (그녀는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당한 거야. 리니는 생강 과자 반죽을 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그는 마흔 살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큰 재산을 모았으며, 이제 돈의 진가를 맛보고자 했다. 그것은 옷에 대해 새 신부에게 간섭을 받고, 식사 예절에 대해 비판받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애들리아 할머니는 […] 엄청난 의지력으로 행복한 섬의 번드르르한 모사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진짜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상류 사회의 모임을 원했고, 예술가, 시인, 작곡가와 과학적 사상가 등등을 원했다. 그녀의 집안이 부유하던 당시, 영국에 있는 친척을 방문하는 동안 보았던 것처럼. 넓은 풀밭이 있는 황금빛 인생.

 

그렇게 해서 로라와 나는 그녀에 의해 양육되었다. 우리는 그녀의 집에서 자랐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가 만들어 놓은 그녀 자신에 대한 개념 속에서 자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녀의 개념 속에서.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그 개념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때 이미 그녀는 죽은 후였기 때문에 우리는 따질 수도 없었다.

 

그녀는 벤저민 할아버지의 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그 돈이 나오는 출처에 대해서는 그럴싸하게 꾸미고 싶어 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아들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기숙학교와 대학에서 배운 것은 자신들처럼 서툴게나마 라틴어도 읽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경멸감이었다.

 

혼수

 

“이거면 그녀의 문제가 해결되겠지.”

월터는 보트나 고장 난 차 엔진, 부서진 램프와 라디오 같은 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공구를 다루는 데 능숙한 남자가 만지작거려서 새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복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물건들을. 나는 왜 그것을 보고 안도감을 느끼는가? 월터가 집게와 톱니바퀴 도구를 가지고 내게도 그렇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신앙심과 동심으로 가득 찬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몇 살이었을까? “네가 알 바 아니야. 너보다는 세상을 많이 알고 있단다. 그거면 충분하지.”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추궁을 하기 시작하면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나에 관한 것은 나만 간직할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한때는 그런 말이 얼마나 현명하게 들렸던가. 지금은 얼마나 인색하게 느껴지는지.

 

나는 모든 것이 총천연색이고 선이 단순하며 모호한 구석이 없는 그림을 원했다. 아마 모든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런 것을 바랄 것이다. 엽서의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가치 있는 목표를 이루고자 했으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매혹적이고, 또 그렇게 위험한 이상들을!

 

그다음은 혼수 차례였다. 리니는 그 모든 것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즐겼다. 잠옷, 실내복, 그 위에 장식되어 있는 레이스의 종류, 모노그램이 수놓인 베갯잇, 침대보와 부인복. 찬장과 옷장 서랍, 수건 보관 장롱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가구들 속에 단정히 개켜져 들어갈 온갖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모든 섬유 제품들이 감싸게 될 육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리니가 생각하기에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옷감과 섬유 제품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고 나서 결혼식 후에는 전쟁이 일어났다. 사랑, 그다음은 결혼, 그다음은 재앙. 리니의 이야기 속에서 그것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어느 편도 승리하지 않은 채 전쟁이 계속되자 그는 점점 더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럽게 변해 갔다. 생각했던 대로 사태가 흘러가지 않았던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그의 사업은 점점 더 번창해 갔다는 점이다.

 

전쟁은 단추 사업에 유익하다. 전쟁 중에는 수많은 단추가 없어지고 또 떨어진 단추를 대신할 새로운 단추가 필요한 것이다. […] 재정적 관점에서 본다면 전쟁은 기적적인 불과도 같았다, 거대한, 연금술적 불. 거기에서 솟아나는 연기는 돈으로 변모했다. 적어도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하지만 이런 사실은 예전, 보다 자족적인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하지도 못했고, 정직함에 대한 자부심을 받쳐 주지도 못했다.

 

축음기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한다. 가솔린, 기름. 숲 전체를 태워 버리는 일을 그만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탐욕과 굶주림이 그들을 몰아갈 것이다.

 

 

 

1918년. 11월 11일. 정전 기념일.

보라. 이제 전쟁은 끝났다. 총성이 그쳤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때 묻은 얼굴에 젖은 옷을 걸치고서. 그들은 개인 참호와 더러운 굴에서 기어 나온다. 양편 모두 패배했다고 느낀다. 도시에서, 시골에서, 이곳과 바다 건너 저편에서, 교회 종들이 울리기 시작한다.(나는 그것을 기억한다. 종 울리는 소리를.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일 중 하나다. 참으로 이상한 체험이었다. 공중은 소리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온전한 한쪽 눈과 온전한 한쪽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은 수척하고 흉터로 뒤덮여 있고 광기가 서린 것처럼 보였다.

작별은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일이지만, 재회는 분명 더 힘든 일이다. 실제 육체는 그것의 부재가 드리우는 선명한 그림자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시간과 거리는 실제 선명함을 차츰 감소시킨다 — 그러다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도착한다. 인정사정없는 정오의 빛 아래서 모든 점과 땀구멍, 주름과 거센 털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렇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재회했다. 상대방이 그토록 많이 변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를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어떻게 원망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원망했다. 그 원망은 부당한 것이었다. 어느 누구를 비난할 수도, 어느 누구를 지적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사람이 아니었다. 허리케인을 탓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는 이해했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녀는 이해했고,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기도로 간구했고, 용서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있어 어머니의 용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었다. 용서의 엷은 안개 속에서 먹는 아침 식사. 용서와 더불어 마시는 커피, 용서와 함께 먹는 죽, 버터 바른 토스트 위에 놓여 있는 용서.

 

아버지는 이제 무신론자가 되었다. 참호 위에서 신은 풍선같이 터져 버렸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구더기가 들끓는 위선의 찌꺼기밖에 없었다. 종교는 군인들을 두드려 패는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경건한 헛소리만 지껄이는 자일 따름이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사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집 같은 가정에서는 종종 실제로 말해지는 것보다 침묵 속에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는 법이다. 꽉 다문 입술에, 한쪽으로 외면하는 머리에, 비스듬하게 던지는 빠른 눈짓에.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처럼 끌려 올라간 어깨에. 당연히 로라와 나는 문 밖에서 몰래 엿듣는 것을 즐겼다.

 

외모의 모든 부분에서 나는 아버지의 딸이었다. 나는 그를 더 많이 닮았다. 나는 찌푸린 표정과 집요한 회의적 태도를 물려받았다.(또한 결국은 훈장까지. 그는 훈장들을 내게 물려주었다.)

 

반대로 로라는 어머니의 딸이었다. 그녀는 어떤 면에서는 경건함을 가지고 있었다. 또 높고 깨끗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외모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나라면 차를 몰아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라면 그랬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빵 굽는 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음 날을 향하여.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바로 그 목표가 나를 죽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이것은 사랑과 같다. 특정한 종류의 사랑.

 

“네가 죽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먹지 마라.”

“네가 먹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죽이지 마라.”

“씹할 채식주의자들 — ‘모든 신들은 육식성이다.’ — 로라 체이스.”

 

“로라가 태어날 때 정말 오래 걸렸어. 마치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이 정말 현명한 생각인지 결정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단다.”

 

그녀를 괴롭혔던 것은 악의, 이 우주의 악의였다.

 

로라는 “달랐다.” ‘다르다’라는 것은 ‘이상하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리니를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을 계속 하곤 했다. “다르다니, 무슨 뜻이에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거지.” 리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 어쩌면 그녀도 똑같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안에 있는 똑같은 기이하고 비뚤어진 요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감춘 채 살아가지만 로라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에게 경악한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몰랐던 마지막 날 아침,

 

(어머니들, 그들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허수아비, 핀을 찔러 넣는 밀랍 인형, 허술한 도표. 우리는 그들의 독자적인 존재를 부정한다. 우리는 자신의 필요에 적합하도록 그들을 만들어 낸다. 우리들의 배고픔, 우리들의 소망, 우리들의 결핍에 따라. 나도 어머니가 되어 보았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알고 있다.)

 

검은 리본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엉켜 있지만 읽을 만한. 결국 나는 내 서명을 남기고자 하는 것인가?

 

왜 우리는 그토록 간절히 스스로를 기념하고자 하는가? 살아 있는 동안조차도 말이다.

 

우리는 그것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갈채, 질투, 존경? 아니면 종류를 불문하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단순한 주목?

우리는 최소한 증거물을 원한다. 건전지가 다 된 라디오처럼 우리 목소리가 결국 침묵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로라는 앞장서서 잔디밭 위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그녀는 밉살스러울 정도로 쾌활했다. 세상 근심이 전혀 없는 것처럼. 어머니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계속 그랬다. 주위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나보다 그녀에게 더 큰 연민을 느끼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로라가 우는 것을 보며 내가 만족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내가 괴로워하는 만큼 그녀 또한 괴로워하기 바랐다. 그녀가 어리다는 이유로 모든 것에서 면제되는 것에 신물이 났던 것이다.)

 

청량음료

 

“만일 무슨 일이 생기거든 로라를 돌보겠다고 약속해라.”

 

운명하기 전 주, 그 끔찍했던 아침 식사 시간에 어머니는 이상한 말을 했다. “속마음 깊은 곳에서는 너희 아버지는 너희를 사랑하신단다.” 그때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생각해 보건대 어머니의 말은 그것보다 더 복잡한 의미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을 수도 있다. 또한 하나의 짐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사랑이 “깊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그 위에는 엄청나게 많은 무엇이 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파헤치고 들어갔을 때 과연 나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 순금색으로 빛나는 단순한 선물은 아닐 것이다. 그 대신, 오래된 뼈 무더기 사이에서 녹슬어 가고 있던 쇠 부적처럼, 아주 낡고 치명적일 수도 있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은 일종의 액막이다. 하지만 아주 무거운 것이다. 내 목에 걸린 쇠사슬에 달려 있어서 지니고 다니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그것.

 

 

4

 

눈먼 암살자

카페

 

이곳에서는 어떤 냄새가 난다. 썩은 판자와 엎질러진 식초와 쉰내 나는 모직 바지와 오래된 고기와 일주일에 샤워를 한 번밖에 안 하는 이들의 냄새, 그리고 인색함과 속임수와 증오의 냄새. 그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당신 정말 친절하지 못하군요.

나는 친절한 거 싫어. 친절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증오해. 콧물 찔찔 짜면서 일이십 전짜리 자선을 하며 친절함을 찔끔찔끔 나누어 주는 선행가들. 정말 경멸스러워. 그는 말한다.

 

그럼 친절함 때문이 아니겠군요. 어쩌면 이기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나는 인정머리 없이 이기적일지도 모르죠. 그녀는 말한다.

그게 더 낫군. 당신이 탐욕스러운 게 더 마음에 들어.

 

그들은 내가 벽에 못 박히는 꼴을 무척 보고 싶어 할 거야. 나와 나의 나쁜 사상이.

 

눈먼 암살자

모충사 침대 덮개

 

 

여기가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인가요? […]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지. 그건 다른 거야.

 

그렇게 겁먹은 표정 하지 마. 이곳 물건들이 당신에게 묻어나지는 않을 테니. 그저 아무것도 손대지만 말아 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그녀는 숨 죽인 미소를 작게 머금으며 말한다. 나는 당신에게 손을 대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 묻어날 거예요.

 

그가 이 침대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차린다. 침대보를 바꾸었거나 적어도 베갯잇을 바꾸었을 것이고, 색이 바랜 담녹색 모충사 침대 덮개의 구김살을 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마음마저 든다. 그걸 보면 연민과 같은 고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굶주린 농부가 마지막 남은 빵 조각을 그녀에게 건네주는 것처럼. 그녀는 연민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가 어떤 면으로든 유약하다는 것을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오직 그녀만이 유약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오늘 당신은 이상할 정도로 심술궂군요.

자기 방어야, 하고 그는 말한다.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것을 그녀가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하게 되면 방어 수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범죄를 고백한 것처럼.

 

정적과 그의 숨소리, 그들의 숨소리,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아니, 지나치게 많은 소리를 내기 않기 위해 억누른 육체적 고투. 왜 쾌락의 소리는 고통의 그것과 그토록 비슷한 것인가? 마치 상처를 입은 이처럼. 그는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는다.

 

그녀는 담배를 갈색 유리 재떨이에 문질러 끈 다음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그에게 기대어 눕는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그의 목소리 듣는 것을 좋아한다. 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 웅얼거림 혹은 으르렁거림 같은, 혹은 깊은 땅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목소리. 그녀 자신의 심장 속을 흐르는 피 같은 — 말, 말, 말.

 

눈먼 암살자

청동 종

 

비록 파멸한 신의 인기가 높기는 하지만, 이 도시에 사는 어느 누구도 그에 관한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지 않아. 그래도 각 가정의 여자들은 진흙으로 그의 상을 만들고 남자들은 한 해 중 밤이 가장 긴 날 그의 상을 부수어 버려. 그러면 여자들은 다음 날 그의 상을 다시 만들지. 아이들용으로는 먹을 수 있는 달달한 빵으로 된 작은 신들이 있어. 탐욕스러운 입을 가진 아이들은 미래를 상징하지. 미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현재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리니까.

 

사람들은 예언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한 그 내용을 잊어버리기 마련이지.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과 처형이라는 수단을 또 써야 하는 걸까? 당연하지. 공공질서를 잡는 데 있어 유약하게 보이는 것은 실제로 유약한 것만큼이나 나쁘거든.

 

 

제5부

 

모피 코트

 

어머니가 죽었다. “삶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윗입술을 단호하게 펴고 슬픔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했다. 누가 그랬던가? 분명 리니가 그랬을 것이고, 아버지 역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우습게도 그들은 아랫입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랫입술은 꽉 깨물기 위한 것이다. 하나의 고통을 다른 종류의 고통으로 대치하기 위하여.

 

“모르는 게 약이란다.” 그것은 모호한 금언이다 — 때로는 모르는 것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생각하면서.

무슨 영문에서인지 아이들은 모든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자기 탓이라고 믿기 마련이고,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들은 불행하게 될 모든 징후를 보고도 행복한 결말을 믿는다.

 

어머니가 죽은 날 나는 무엇을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정말 어떻게 생겼는지도. 이제 어머니는 사진처럼 생겼을 뿐이다. […] 오후의 햇빛이 창을 통해 비스듬하게 들어와 마룻바닥에 그토록 고요하게 내려앉던 모습, 햇살 속에서 먼지 티끌이 안개처럼 부유하던 모습. 가구용 밀랍 광택제의 냄새, 그리고 시든 국화 향기, 그리고 계속 남아 있던 환자용 변기와 소독약 냄새. 이제 나는 어머니의 부재를 더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존재보다 한층 더.

 

로라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것을 배우고 있으며 나는 어린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지친 병사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에 대해 박물관 관리자와 같은 흥미를 보인다.

 

그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 이 동상은 1885년에 이르러서야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동상처럼 생겼다. 예술의 횡포란 이런 것이다.

[…] 지친 병사 동상이다. […] 영원히 젊고, 영원히 지친 모습으로, 그는 전쟁 기념비의 가장 위쪽을 장식하고 있다. 그의 피부는 햇빛 아래서 녹색으로 빛나며, 비둘기의 똥이 눈물처럼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린다.

 

‘자진하여 최고의 희생을 한 이들을 위하여’라는 문구를 전면에 새기기를 원했다.

 

새김 문장으로 말하자면, 희생은 자진하여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죽은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왕국’으로 자기 목숨을 날려 보낼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 자신은 “우리가 잊지 않도록”이라는 문구를 선호했다. 우리의 망각에 책임을 부여하는 문구. 그는 너무 많은 빌어먹을 사람들이 빌어먹게 너무 잘 잊어버린다고 말했다.

 

“왜 그걸 기념비라고 부르는 거죠?” 로라는 물었다.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기 때문이지.” 리니는 말했다.

“왜요? 무엇 때문에요? 그들은 그걸 좋아하나요?” 로라는 물었다.

“그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한 거지.”

 

바이올런스 선생

 

시란 이유를 논하지 않는 거야. ‘아름다움은 진실이고 진실은 아름다움이다 — 그것이 그대들이 지상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이고, 그대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아버지가 요구한 것은 군대의 기준이었다. 깔끔함, 순종, 침묵, 그리고 눈에 드러나는 성적인 면을 감출 것. 비록 직접 언급된 적은 없었지만, 성적인 면은 초기에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는 것이 묵계였다.

 

착하게 미소를 지어 보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아이들이 흔히 그러듯 겁먹은 모습으로. 착한 것과 미소 짓는 것이 동일한 것이라도 되는 듯한 지시. 그것은 꾸중을 듣게 될 것이라는 위협 때문에 억지로 지은 미소다. 아버지의 꾸중과 위협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꾸중과 위협을 두려워했지만 그것을 피할 방법은 알지 못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유사 소년으로 변모되기를 아버지는 바랐다.

 

로라는 어스카인 선생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녀 자신이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도망가 버릴 것이다. 창문에서 뛰어내릴 것이다.

“그러지 마라, 우리 아기. 우리, 생각의 모자를 써 보자.”

 

심정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 몽테뉴.

 

한동안 로라는 어스카인 선생에게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는 그녀를 강하게 단속할 수 없었다. 그가 소리를 칠 때조차도 로라는 집중하지 않았다. 그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장미 봉오리와 리본 문양 벽지를 바라보거나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존재를 지워 버리는 능력을 계발했다. 한순간 상대방에게 집중을 하고 있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것이다. 혹은 상대방을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마법 지팡이를 휘두르듯이 쫓아 버리는 것이다. 사라져 버린 것은 로라가 아닌 상대방인 것처럼.

 

리니가 더러운 사진 같은 것을 가지고 신의 뜻을 이룬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신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만일 그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 점점 더 회의적인 마음이 들었다.

반면에 로라는 어스카인 선생이 재직하는 동안 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여전히 신을 두려워했지만, 성미 급하고 예측 불가능한 독재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그녀는 더 크고 더 멀리 있는 존재를 택했던 것이다.

 

거짓말과 속임수 외에, 은근히 무례하게 구는 법과 말없이 저항하는 법을 배웠다. 복수는 때를 기다리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배웠으며, 들키지 않는 법을 배웠다.

 

단추 공장 피크닉

 

그녀는 공원 벤치 가운데 쉽게 보이는 곳에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나를 채근했다. 한 시간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나 자신이 편지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든다. 이곳에 예치되고 저곳에서 수합되는, 그러나 수신자가 없는 편지.

 

연설 내용은 별 것 없었지만 행간을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기뻐해야 할 이유”는 좋은 것이었고, “낙관의 근거”는 나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낙관의 근거’를 네 번 말했지만, ‘기뻐해야 할 이유’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나의 감시를 좋아하지 않는 않는 로라를 지켜보는 일에 나는 싫증이 났다. 그녀의 과실에 대해, 그녀가 규율을 따르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지는 것에 싫증이 났다. 한마디로 책임을 진다는 것에 싫증난 것이다. 유럽으로, 뉴욕으로, 심지어 몬트리올로라도 떠나고 싶었다. 나이트클럽으로, 야회(夜會)로, 리니의 사교계 잡지에 나오는 온갖 흥미로운 곳으로. 그러나 나는 집에 있어야 했다. “집에 있어야 한다.” “집에서 필요한 존재야.” 그것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아니, 더 끔찍하게도 장송곡으로 들렸다

 

리니는 그리픈 씨가 느닷없이 들이닥쳤다고 느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친구보다는 적을 위해 더 많은 치장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는 리니가 “좋은” 청년이라고 부르는 사람, 즉 “가난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부유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뭐가 잘못됐는데요?” 나는 리니에게 말했다. 나도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발언의 기회도 없이 판단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그의 부모는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빵을 나눠 주는 사람

 

요컨대 이것은 당신이 완벽하게 언제나 숙녀여야 한다는 것, 빵을 나눠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 매력적인 집이군요. 너무, 너무나 잘 보존되었어요! 얼마나 멋진 스테인드글라스인지! 정말 세기말 풍이에요. 박물관에 사는 기분이겠군요.” […]

그녀의 말은 ‘구식’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항상 그 유리창이 상당히 멋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위니프리드의 판단이야말로 바깥세상의 판단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런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선고를 내리는 세상, 내가 합류하고 싶어 안달하던 바로 그 세상. 이제 그런 곳에 내가 얼마나 부적합한지 깨달았다. 얼마나 촌스러운지, 얼마나 조야한지.

 

“자신이 정말로 누군지 모른다니, 정말 끔찍하겠군요.” 나는 말했다.

“저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진정한 나’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쨌거나, 진정한 나라는 것이 무슨 의미죠? 가정 배경 뭐 그런 건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속물근성이나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죠. 나는 그런 변명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뿐이에요. 내겐 딸린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 어떤 것도 저를 붙들어 맬 수 없어요.” 알렉스가 말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던가? 그날 밤, 아빌리온의 선창에서, 불꽃놀이가 하늘을 빛으로 채우고 있었을 때?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작이란 갑작스럽게, 하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가온다. 그것은 옆으로 살그머니 다가와 그림자 속에 숨어 들키지 않고 기다린다. 그러다가, 이후에, 갑자기 일어선다.

 

수공 채색

 

“로라,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니? 왜 사진에 색칠을 해 대는 거지?” […]

“기괴해 보여. 아니면 아주 아프거나. 얼굴이 녹색이거나 담자색인 사람은 없어!”

로라는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건 그들의 영혼의 색깔이야. 그들이 가졌어야 하는 색깔이라고.”

 

로라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음치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음악이 연주되면 어떤 소리를 듣게 되지만,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듣는 것이다.

 

“그는 너무 나이가 많지 않니?” 나는 말했다.

[…] “뭘 하기에 너무 나이가 많다는 것인가? “영혼에는 나이가 없어.” 그녀는 말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잖니.” 리니가 말했다. 그것은 언제나 리니의 결정적인 논거였다. “그건 그 사람들 문제에요.” 로라는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거만한 성마름이 묻어 있었다. 타인들이란 그녀가 져야 할 십자가였다.

 

리니의 묘사 속에서 소녀 혹은 여자는 언제나 수동적이지만, 정글짐처럼 잡을 곳이 많이 달린 존재였다. 불가사의하게도 그 여자에게는 소리를 지르거나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충격, 혹은 분노, 혹은 부끄러움으로 그녀는 꼼짝달싹 못하고 마비되어 버렸다. 구조될 길은 전혀 없었다.

 

냉장 저장실

 

이미 알고 있는 악마가 더 나은 법이다.

 

다락방

 

우리는 도둑들 가운데 쓰러진 사람을 도랑에서 구해 낸 두 명의 작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였다. […] 나는 뒷전에서 집안일을 하느라 바쁜 마르다였고, 그녀는 알렉스의 발치에서 순전히 헌신하는 마리아였다.(남자들은 어떤 것을 선호하는가? 베이컨과 달걀, 아니면 숭배? 그가 얼마나 배가 고픈가에 따라 어떤 때는 전자를, 다른 때는 후자를 더 좋아하는 법이다.)

 

내가 언제나 뒤에 두고 도망가 버리고 싶던 모든 것들. 하지만 그것이 파괴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집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 자리에, 나를 기다리며, 변하지 않고 서 있기를 바랐다. 원할 때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는 나를 붙잡고 내 입에 키스를 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예상하고 있었던가? […]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과 같던가?

이제는 그렇다. 내가 유일한 생존자인 것이다.

 

임페리얼 룸

 

1935년의 1월과 2월. 한겨울. […] 차들이 길에서 미끄러져 도랑 속으로 빠졌다. 운전자들은 도움 받기를 단념하고 엔진을 계속 가동하다가 질식사했다. 죽은 노숙자들이 공원 벤치와 버려진 창고에서 마네킹처럼 딱딱하게 굳은 채 발견되었다. 빈곤에 대한 진열장 광고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처럼.

 

그날 밤 나는 호텔의 거대한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며 누워 있었다. 발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무릎을 바짝 당겨 끌어안고, 베개 위에 머리를 옆으로 하고 누웠다. 내 앞에는 무한대로부터 펼쳐진 풀 먹인 하얀 침대보가 북극의 쓰레기처럼 놓여 있었다. 그것을 횡단하여 길을 되찾고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몇 년 후 어떤 대담한 팀에 의해 발견될 것이다. 가던 길에서 넘어져 지푸라기를 움켜쥔 것처럼 한 팔을 활짝 펼치고 있고 얼굴은 바싹 마르고 손가락은 늑대에게 물어뜯긴 상태로.

 

내 추락은 끝이 없었다. 아래쪽으로 끝없이.

그러나 그런 끔찍한 기분은 아침의 청명한 햇빛이 비치면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 젊을 때는.

 

아르카디아 코트

 

나는 앞으로 무엇이 다가올지 알고 있다. 진창, 어두움, 독감, 검은 얼음, 바람, 장화에 묻은 소금 자국. 그렇지만 일말의 기대감이 있다. 전투에 대비한 긴장감.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겨울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대면한 후 다시 실내로 후퇴함으로써 그것을 격퇴할 수 있다.

 

“오빠와 나는 정말 좋은 친구야.” 그녀는 내게 비밀을 털어놓듯 말했다. 이후에도 거듭해서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것은 협박이었다. 그녀가 편안하고 신뢰하는 듯한 어조로 내게 건넨 대부분의 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신이 나보다 선점한 권리와 내가 언감생심 이해할 수 없는 헌신적 애정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혹시라도 리처드를 거역할 경우 그 두 사람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잘할 걸로 믿어. 자긴 너무나 ‘젊잖아.’” 위니프리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의 젊음이 내가 발휘할 통제력에 걸림돌이 되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은 통제하려는 욕망을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당신도 매력적일 수 있어. 그렇고말고. 약간만 노력하면 말이야.” 위니프리드는 말했다.

나는 비굴하게 분개하며 들었다. 내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로라와 나 둘 다 매력적이지 않았다. 우리는 매력적이기에는 너무 과묵했고, 때로는 너무 직설적이었다.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방법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리니가 우리를 지나치게 받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라면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소년들처럼 되기를 원했고, 이제 우리는 그렇게 된 것이다. 소년들에게는 매력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엇나갔다는 평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위니프리드는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먹는 것을 보고 있었다. 벌써부터 나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련의 형용사가 된 것이다.

 

그녀는 내가 안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걱정하기 마, 자기.” 그녀는 가망이 거의 없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며 내 팔을 쓰다듬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내게서 의지력이 새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행동에 대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았던 통제력이. (정말로! 이제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그녀는 일종의 매음굴 안주인이었다. 정말로 포주였다.)

 

그녀는 웃으며 일어서서 내게 새우색 입맞춤을 했다. 뺨이 아닌 이마 위에. 그것은 나를 주제에 맞는 자리에 못 박아 두는 행위였다. 내가 아이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명확히 해 두는 행동.

 

“지루하다는 표를 내도 괜찮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만 내보이지 마. 사람들은 상어처럼 그 냄새를 맡고 자기를 이용하려 들 거야.”

 

“언니가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말했다.

[…]

“왜 결혼해서는 안 돼지?”

“언니는 너무 어려.” 그녀는 말했다.

“어머니도 열여덟 살이셨어. 그리고 나는 거의 열아홉 살이 다 됐어.”

“하지만 어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신 거잖아. 어머니가 원하신 거였어.”

“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

그 말에 그녀는 잠시 멈췄다. “억지로 원할 수는 없는 거야.” […]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짜증이 났다. 그녀는 무슨 권리로 우는 것인가? 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그래도 어쨌든 언니는 좋은 옷은 입게 되겠네.” 그녀는 말했다.

그녀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좋은 옷을 입게 되리라는 희망은 나의 비밀스러운 위안이었던 것이다.

 

탱고

 

그토록 많은 돈이 들어간 그녀의 예식에 아름다움이란 필수였다.

(내가 ‘그녀’라고 쓰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거기에 참석했다는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사진 속의 여자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결말, 그녀가 한때 경솔하게 살았던 삶의 결과물이다. 반면 그녀는, 만일 그녀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기억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보다 내가 더 잘 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녀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앞을 내다볼 만큼 현명했다 하더라도 나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사람들은 행복한 결말을 보고 울 때와 같은 이유로 결혼식에서 운다. 확실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결사적으로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런 유치함을 벗어났다. 나는 환멸의 황량한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결혼 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 미소를 짓고 동의하며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롭게 그녀를 좋아하거나 싫어했고, 자유롭게 그녀에게 유혹되거나 유혹되지 않았고, 자유롭게 그녀의 공연, 드레스, 그리고 엉덩이를 인정하거나 불인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유롭지 않았다. 그녀는 노래 부르고 흔들어 대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이런 일을 한 대가로 돈을 받는지, 이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궁금해졌다. 가난하다면 가치 있게 여길 것이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로 ‘스포트라이트 아래’라는 표현은 굴욕의 정확한 형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내게 인식되었다. ‘스포트라이트’라는 것은 할 수 있다면 분명 피해야 할 무엇이었다.

 

그가 나와 함께 갑판 위에 있었으면 하고 특별히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외로웠고, 그래서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고, 무시당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6

 

눈먼 암살자

붉은 양단

 

그녀는 말을 할 수 없어. “나는 말을 할 수 없어요.”라는 말조차 할 수 없어.

 

결혼하지 않고 죽은 젊은 여자들의 상여 냄새. 낭비된 감미로움.

 

제 눈으로 당신을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이루어진 최고의 업적 몇 가지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들, 시간이 남지 않은 이들, ‘무기력함’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거야. 그들은 위험과 이익에 대한 계산을 할 필요가 없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현재라는 시점에 못 박혀 있거든. 절벽 너머로 내던져지면 떨어지거나 날아야 해. 어떤 희망을 부여잡게 되지. 아무리 가망성 없는 것이라도, 아무리 (이렇게 과도한 단어를 써도 된다면) 기적적이라 하더라도. 기적적이라는 것은 ‘모든 가능성에 반하여’라는 뜻이지.

그리고 오늘 밤이 바로 그런 시점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붉은 양단을 몸에서 떨어뜨리고 그의 손을 잡아 인도하지.

촉감은 시각, 말에 선행하는 거야. 그것은 첫 언어이자 마지막 언어며, 언제나 진실을 말해 주지.

이렇게 해서 말하지 못하는 소녀와 볼 수 없는 남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었어.

 

사실적이지 않고, 속이 부패한 부르주아적 미신이라고 하면서. 진저리나는 감상, 솔직한 육체성에 대한 과장된 빅토리아 시대적 변명이라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건가요?

나를 비난하지 마. 역사를 비난하라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계속 기록되어 왔어. 아니, 적어도 그런 단어들은.

 

젊은이들은 습관적으로 정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그들은 온갖 종류의 이상주의로 가득 차 있어.

 

나처럼. 나야말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야.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나를 가졌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에요.

 

눈먼 암살자

거리 소요

 

그녀를 교회 봉사자나 다른 유의 거만한 선행자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깨끗이 닦아 낸 손가락으로 자신들의 삶을 쑤셔 대고 질문을 하고 식탁에서 긁어모은 것을 가지고 생색내며 도와주는 이.

 

결국 그녀는 가면 없는 가면 추리극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녀 자신의 얼굴, 그것의 간계에만 의존할 수밖에. 이제까지 그녀는 충분히 연습을 해 왔다. 상냥하게, 냉정하게, 무표정하게 보이기. 양쪽 눈썹 치올리기. 이중간첩의 순진하고 투명한 눈길. 깨끗한 물과 같은 얼굴.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필요성을 피하는 것이다. 바보 같은 질문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

 

진정한 위험은 그녀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녀가 무엇을 허용할 것인지, 어느 정도까지 꺼리지 않고 할 것인지에 따라서. […] 그녀는 자신에게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증오한다. 그래서 그녀는 재회의 간격을 늘이고 그와의 만남을 제한한다. 그를 바람맞히고, 왜 자신이 나올 수 없었는지에 대해 작은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공원 벽의 분필 표시를 보지 못했다거나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는 식의. 존재하지 않는 드레스 가게의 주소, 허구의 오랜 친구가 서명한 엽서, 잘못 걸려 온 전화.

 

희생 제물이 되는 것, 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잠시뿐이라 하더라도. 경계 없이 존재하는 것.

 

그런 세부 사항에 대해 그는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아낀다. 그녀가 없는 곳에서 그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로맨스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을 때 발생한다. 로맨스는 이슬로 흐려진 창을 통해 우리를 들여다본다. 로맨스는 잡다한 일을 제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삶이 투덜거리고 훌쩍이는 대목에서 로맨스는 그저 한숨만 쉴 뿐이다. 그녀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것인가? 그의 더 많은 부분을?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인가?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여의게’ 될 것이다.

 

눈먼 암살자

관리인

 

그는 그녀의 목을 벨 것인지 영원히 사랑할 것인지 판단하는 중이었어요.

맞아. 그렇지. 흔히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이지.

 

그녀는 멜론처럼 차갑고, 신선한 생선처럼 희미한 짠맛이 나.

 

신보다 강하고 악마보다 더 사악한 것. 가난한 자들은 가지고 있고 부유한 자들은 결여하고 있으며, 먹으면 죽는 것은?

새로운 건데요.

맞춰 봐.

포기할래요.

무(無).

 

눈먼 암살자

얼음 위의 외계인

 

약간 떨어진 곳에서 기차가 구슬픈 소리를 내며 궤도를 바꾼다. 경적 소리가 먼 곳까지 길게 끌린다. 그 소리는 결코 ‘안녕하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한다. 기차에 올라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운을 건 모험이다. 그들은 순시를 돈다. 언제인지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현실을 보자면 지금 그는 그녀 때문에 이 장소에 붙박여 있다. 비록 기차처럼 그녀도 정시에 오는 법이 없고 언제나 떠나 버리지만.

 

어느 전직 교수가 그에게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언젠가 말한 적이 있고, 당시 그는 무척 우쭐했다. 이제 그는 다이아몬드의 본성에 대해 고찰해 본다. 비록 날카롭고 반짝이고 유리를 자르는 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반사된 빛으로만 빛날 뿐이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녀는 그에게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여자들은, 아니, 삶으로부터 아직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녀 같은 부류의 여자들은 그렇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다른 측면이 있을 것이다. 복수나 처벌을 하고자 하는 소망. 여자들은 특이한 방법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 스스로에게 대신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또는 남자가 자신의 상처를 한동안 인지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가해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자신이 상처를 받아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후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녀의 그런 눈, 그 순수한 목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때때로 그녀에게서 복잡하고 오염된 무언가를 어렴풋이 감지한다.

 

그녀는 러시아 사람이며 프리섹스가 신념이다. 엑스, 와이, 그리고 제트는 아직까지 그녀의 신념을 시험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 해 보고 싶어한다. 와이는 무의식적으로, 엑스는 죄의식을 느끼면서, 그리고 제트는 노골적으로.

 

한때 그는 더 큰 야망이 있었다. 더 진지한 야망. 사람의 삶을 정말 있는 그대로 써내는 것.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것, 굶어 죽을 수준의 임금과 빵과 육즙 방울과 추악한 음녀(淫女)의 얼굴을 한 싸구려 창녀와 얼굴에 발길질을 당하고 도랑에 구토를 하는 수준까지. 체제, 조직이 작동하는 방식, 그것이 조금이라도 생명력이 남아 있는 한 우리를 계속 살려 두는 방식,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소모해 버리고, 기계의 부품 혹은 술주정뱅이로 만들어 버리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쓰레기 속에 우리를 거꾸로 처박아 버리는지를 폭로하는 것.

[…]

그러나 보통 노동자들은 이런 것을 읽지 않을 것이다.

 

 

2

 

7

 

여행용 짐 가방

 

진실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쓰는 것을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훗날의 나 자신조차도.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글쓰기가 오른손의 검지에서 흘러나오는 잉크의 긴 두루마리처럼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왼손이 그것을 지우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을 풀어 놓는다. 나의 글을 풀어 놓는다. 종이 위에 내가 잣고 있는 이 검은 줄들을.

 

그 이후로 나는 법률 사무소의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전전했다. 각 젊은 세대에게 결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떠맡겨지지만 아무도 쓰지 않는 화려한 은제 찻주전자처럼.

 

접수계원은 말했다. 그들은 배려와 경멸을 가장 적절하게 섞어 말할 수 있도록 화술 수업을 받았을 것이다.

 

과거에는 문젯거리는 가정 내에서만 공유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문젯거리를 가져가기 좋은 곳이란 사실상 없는 것이지만.

 

그녀는 신을 좋아하거나 인정하거나 이해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과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비록, 가슴 아프게도, 나를 계속 외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 두 가지를 다 맛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녀는 무슨 임무 같은 것을 수행 중이다. 제3세계 빈민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것, 죽어 가는 이를 위로하는 것, 우리들의 죄를 속죄하는 것. 헛된 과업. 우리의 죄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이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헛됨, 그것이야말로 신이 말하는 바라고 그녀는 주장할 것이다. 신은 언제나 무익함을 좋아한다. 그것이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로라를 닮았다. 절대성을 향한 성향, 타협에 대한 거절, 저속한 인간적 결점에 대한 경멸. 그런 기질을 가지고 별 탈 없이 살기 위해서는 아름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괴팍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불구덩이

 

그곳에 가는 것이 그리 잦은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갈 때마다 바뀐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가 축적되어 내는 효과는 굉장하다. 마치 도시가 폭탄을 맞은 수준이었다가 무(無)에서부터 다시 지어진 것처럼.

 

토론토는 더 이상 신교도들의 도시가 아니다. 이곳은 중세의 도시다.

 

그들 세 명은 아름다웠다, 그 나이의 모든 소녀들이 아름답듯이.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은 피할 수도, 보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포의 신선함, 통통함 때문이다. 아무 노력 없이도 그냥 얻어지는 것이고, 순간적이며, 절대로 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얼굴을 잡아 뜯고 그려 댐으로써 개선하고 뒤틀고 축소하고, 자신을 불가능하고 상상적인 틀 속에 밀어 넣으려는 시도. 나도 한때 그랬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이 위장 수단인 양 앞에 던져 대는 하찮은 수다를 엿들었다. 어느 누구도 진심을 털어놓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믿지 않았다.

 

땅이 벽돌 같았다. 위니프리드의 부추김을 받아 나는 원예를 시작했다. 그녀는 취미를 가져야 한다며 내가 암석정원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식물을 죽이더라도 암석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 긴장을 자아냈다.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소망을 예상하지 못한 것. […] 그리고 점점 더 거대한 실타래로 여겨졌다. 마법 때문에 내가 운명적으로 매일매일 풀어내려고 애써야 하는 실타래. 나는 결코 풀어내지 못했다.

 

유럽에서 보낸 엽서

 

어떤 개발 업자가 그것에 인접한 공유지에 분양 아파트를 세우고 싶어 한다고 한다. 전망 때문에 최상품 위치라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전망이 감자보다 더 가치 있게 취급된다.

 

나는 다리 위에 서서 옆쪽, 물의 상류 쪽을 바라보았다. 사탕처럼 부드럽고 어둡고 고요하며 모든 위협적인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맞은편에서는 폭포, 소용돌이, 잡음이 들려왔다. 아래쪽까지는 상당한 거리다. 내 심장 상태와 현기증이 갑자기 느껴졌다. 그리고 숨 가쁨 역시. 마치 머리 위쪽까지 잠겨 버린 듯이. 그런데 무엇 속에 잠겼다는 말인가? 물은 아니었다. 보다 진한 것. 시간. 오래된 차가운 시간. 연못 속에 미세한 진흙처럼 켜켜이 쌓이는 오래된 슬픔. 

 

로라는 그런 의상을 보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 옷을 챙겨 넣는 것을 보고 이미 비웃었다. 엄밀히 말해 비웃음은 아니었지만. 로라는 진정으로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 필수적인 잔인함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연사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박물관에 가는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렇게 크고 많은 박제 동물들을 보는 것이 어째서 내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이제 와서야 궁금해진다. […] 박제된 동물을 동물원과 다소 비슷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 가는 곳.

 

국립 미술관에는 가 보았다. […] 이런 것이 주요한 범주인 것 같다. 여자와 남자, 나신과 착복. 어쨌든, 신은 그렇게 생각했다.(어릴 때 로라는 이런 질문을 했다. “하느님은 뭘 입죠?”)

 

밀월여행은 새로운 한 쌍이 서로를 더 잘 알게 되는 시간을 허락해 준다고들 하지만, 나는 날이 갈수록 리처드가 점점 더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스스로를 지워 버리고 있었다. 아니, 은폐였던가? 유리한 자리로의 퇴거. 그러나 나 자신은 형체를 갖춰 가고 있었다. 그가 의도한 형태.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조금씩 채색되고 있었다.

 

“당신은 왜 슬픈가요?”

“저는 슬프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이 보여 주는 동정에 갑자기 마음이 무너질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슬퍼하면 안 돼요.” 그는 구슬프고 완고한 바다코끼리 같은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랑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젊고 예뻐요. 나중에 슬퍼할 시간이 있을 거예요.” 프랑스인들은 슬픔에 관한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슬픔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비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슬픔에 관한 그의 말은 틀렸다. 젊을 때 슬퍼하는 것이 훨씬 낫다. 슬퍼하는 젊고 예쁜 여자는 위로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슬퍼하는 늙은 쭈그렁 할멈과는 달리.

 

“당신을 놀래 주고 싶었어. 당신이 세부적인 문제로 쩔쩔매는 걸 원하지 않았거든.” 리처드는 말했다. 다시 한 번 나는 부모들에게 배척당한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상냥하지만 야비한 부모, 결과에 몰두하면서, 모든 일에 있어 자신들의 선택이 옳다고 단정하는 부모. 리처드가 줄 생일 선물은 언제나 내가 원하지 않는 물건이리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아차렸다.

 

엷은 노란색 모자

 

그때 나는 서니사이드 놀이 공원에 있는 다우니플레이크 도넛 판매대의 창에 걸려 있던 표지판을 떠올렸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1935년 여름.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형제여,

너의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도넛을 응시하고 구멍은 바라보지 말라.  

 

구멍 도넛이라니, 역설적이다. 한때는 빈 공간이었던 것,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것조차 상품화한 것이다. 이제는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마이너스 분량, ‘무(無).’ 그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 물론 은유적으로 — 사용되는 것은 아닐지 나는 궁금했다. 무의 공간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존재로 바뀌는가?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 우리가 팔이나 다리를 사용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몸은 다른 할 일을 발견한다. 그것은 비틀거리고, 우리에게 굴복한다. 마치 눈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녹아 버린다. 석탄 두 덩이, 오래된 모자, 조약돌로 된 미소. 잘 부러지는 마른 가지로 된 뼈.

이 모든 것은 모욕이다. 약한 무릎, 관절염에 걸린 손가락 마디, 비정상적으로 부푼 정맥, 병약함, 무능함.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한 적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다. 머릿속에서 우리는 완벽한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다닌다.

 

취한

 

그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수리하고, 무엇을 바꾸고 하는 등의 목록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참 심란한 일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저 사람은 마치 이곳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는군.” 리니는 분개하며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소유하고 있는걸요.” 나는 대답했다.

 

그녀는 이미 마이라를 임신하고 있었다. […] 분명 어려운 시대였다. 당시에는 도덕적 충만함과 타락 사이에 어떤 방어벽도 없었다. 혹시라도 미끄러지게 되면 당연히 넘어지게 되고, 넘어지게 되면 허우적거리다가 파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기회를 잡기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취했다고 말했다.[…]

나는 의아해하며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어떤 모습 때문이지? 무엇이 그토록 취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전신 거울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내 뒷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물론 볼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처럼,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때 뒤에서 남자가 나를 보는 것처럼 스스로를 볼 수는 없는 법이다. 거울 속에서 내 머리는 언제나 어깨 위에서 뒤쪽으로 돌아가 있다. 교태가 가득한 유혹적인 자세. 뒷모습을 보기 위해 다른 거울을 하나 더 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수많은 화가들이 그리고 싶어 했던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거울을 쳐다보는 여자의 모습. 허영의 상징. 비록 그것이 허영일 가능성은 별로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더 많지만. 흠을 찾는 것. “내 어떤 모습 때문이지?”라는 질문은 “내가 뭐가 잘못된 거지?”라는 질문으로 쉽게 해석될 수 있다.

 

내 유일한 피난처는 화장실이었다. 그곳에서는 문을 잠그고 있어도 무례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목요일, 나는 알렉스 토머스를 보았다.

[…]

나는 보도에서 내려서 그를 향해 길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신호등 불이 다시 바뀌었다. 나는 도로 한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

그때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나를 보았는지 처음에는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물에 빠져 구조를 간청하는 사람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이미 나는 마음속에서 배반을 저질렀다.

그것이 배신이었던가, 아니면 용기 있는 행동이었던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 두 가지 모두 미리 계획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은 한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법이다. 이미 침묵과 어둠 속에서 그것을 거듭 연습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너무나 깊은 침묵, 너무나 깊은 어둠이라서 우리 자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앞은 보이지 않지만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춤을 추듯 앞으로 발을 내디딘다.

 

서니사이드

 

그들은 우리 집 문과 창문밖에 나오지 않는데도 사진을 찍어 댔다. 그들은 전화를 하고 인터뷰를 해 달라고 간청했다. 추문을 원한 것이다. […] 섹스나 죽음,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 그들이 염두에 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서니사이드는 […] 회전목마, 핫도그, 루트 비어, 사격장, 미인 대회, 공중목욕탕. 한마디로 말해, 저속한 오락 장소였다. 리처드와 위니프리드는 다른 사람들의 겨드랑이나 푼돈을 세는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내가 왜 그들보다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인 체하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나도 그런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러기를 바랄게.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어린 아가씨.”

“어린 아가씨”라는 말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질책이었다. 마치 어리다는 것, 그리고 아가씨라는 것이 무슨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나에게 향한 질책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걸 먹고 살아. 실제 삶에서는.” 로라는 말했다. 그녀가 왜 서니사이드에 이끌렸는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다른 사람들” — 로라에게 있어 지금까지 ‘다른’ 존재였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마찬가지일 그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을 섬기고 싶어 했다. 이 다른 사람들을.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합류하고 싶어 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었다. 나는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아 주었다. 어릴 때부터 늘 해 주던 오래된 몸짓. 제발 그만 울어. 내게 흑색 각설탕이 한 조각 있다면 그녀에게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흑설탕 단계를 훨씬 지나 버렸다. 설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지? 너무 늦어지기 전에?” 그녀는 울부짖었다. 적어도 그녀는 두려워할 줄 아는 통찰력이 있었다.

 

나는 내가 리처드를, 위니프리드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호랑이의 성안에서 쥐처럼, 벽 안쪽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기어 다니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침묵을 지키며, 머리를 숙이고. 그런데 아니었다. 나 자신을 너무 믿었다. 위험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호랑이라는 사실마저 몰랐다. 더 끔찍한 사실은, 나 자신이 호랑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로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실 따져 보면, 어느 누구라도 그럴 수 있다.

 

재너두

 

나는 “로라.” 하고 불렀다. 그늘 속에서 한 남자가 웃었다.

악몽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못 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꿈을 꿀 때까지 기다려 보라. 나는 비참한 마음으로 깨어났다.

마음은 왜 그런 짓을 하는가? 우리를 공격하고, 잡아 찢고, 손톱으로 파헤친다.

 

나는 숨을 들이쉬는 것을 좋아했다. 내 허파 안의 공간은 전적으로 내 소유인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아니, 믿는 척해야 했다. 아마도 뉴턴–도브스 씨 부부는 진짜 이야기를 자신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 스무 명에게 퍼트리고 있었을 것이다. 쉬쉬해 가며, 네게만 말하는 거라고 하며. 위니프리드가 그들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쑥덕공론도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상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신문에는 나지 않았다.

 

그녀와 나, 우리의 상대적 위치는 분명치 않았다. 아니, 그녀에게는 언제나 분명했고, 이제 내게도 점차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리처드에게 필요한 존재였고, 반면 나는 언제나 대치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할 일은 다리를 벌리고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잔인하게 들리는가? 사실 잔인했다.

 

대부분의 그런 모임이 그랬듯이 가장 무도회였다. 당시 사람들은 특이한 복장을 좋아했다. 제복만큼이나 좋아했다. 그 두 가지 모두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인 척할 수 있는 것.

 

악마 연인이 뭐야? 그녀는 알고 싶어 했다. 왜 바다에는 해가 없어? 왜 대양에는 생명이 없지? 왜 햇빛 찬란한 환락의 궁에는 얼음 동굴이 있지? 아보라 산은 뭐고, 아비시니아 처녀는 왜 그것에 대해 노래를 하는 걸까? 조상의 목소리는 왜 전쟁을 예언하는 거지?

 

성스러운 강은 살아 있다. 그것은 생명 없는 대양으로 흐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곳에서 삶을 마치는 것이다. 연인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악마 연인이다. 햇빛 찬란한 환락의 궁전에 얼음 동굴이 있는 까닭은 환락의 궁전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 후 그것은 매우 차가워졌고, 그다음에는 녹아 버렸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흠뻑 젖어 버렸다. 아보라 산은 아비시니아 처녀의 집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조상의 목소리가 전쟁을 예언하는 이유는 결코 입을 다물 수 없기 때문이고 틀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며, 전쟁은 언제고 확실히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다면 고쳐 달라.

 

“이건 단지 시에 불과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제나 알 수는 없는 법이야.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나 보지.” 나는 말했다.

“그건 그가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야. 그는 낙원의 젖을 마셨어. 언니가 너무 행복해하면 사람들은 언니를 두려워하게 돼 있어. 그런 식의 두려움. 그렇지 않아?” 로라는 말했다.

 

“네가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걸 포기해야 해. 가능한 일이 아니야. 너를 불행하게 만든 뿐이야.”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로라는 팔로 무릎을 감쌌다. “불행하다고. 도대체 언니가 ‘불행’에 대해서 뭘 알아?” 그녀는 말했다.

 

8

 

눈먼 암살자

육식 동물 이야기

 

당신이 등에 걸치고 있는 옷은 다른 사람의 거야. 그는 언젠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가볍게 응수했다. 하지만 내가 입으면 더 예뻐 보여요. 그리고 약간 화가 나서 덧붙였다. 내가 ‘뭘’ 하길 바라는데요? ‘어떻게’ 하길 바라냐고요? 정말로 내게 무슨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검은 긴 코트와 챙이 넓은 검은 모자 차림의 남자, 작고 예민한 눈을 가진 여자. 숄, 치마. 문법에 어긋나는 동사. 그들은 정면을 쳐다보지 않지만 빈틈없이 본다. 그녀는 이목을 끈다. 여자 거인. 밖으로 훤히 드러난 그녀의 다리.

 

바닥에 구겨져 있는 셔츠. 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은 언제나 욕망을 의미하는가?

 

이야기를 생각해 봤어요. 그녀는 말한다. 다음 부분을 지어냈어요.

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다고?

나는 언제나 나만의 생각을 갖고 있어요.

 

모든 이야기는 늑대에 관한 거야.

[…]

늑대에게서 도망치는 것, 늑대와 싸우는 것, 늑대를 잡는 것, 늑대를 길들이는 것. 늑대에게 던져지는 것, 혹은 늑대들이 나 대신 먹도록 다른 사람들을 내던지는 것. 늑대 무리와 함께 달리는 것. 늑대로 변하는 것. 가장 좋은 것은 우두머리 늑대로 변하는 것이지. 다른 괜찮은 이야기는 없어.

다른 얘기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고 그녀는 말한다. 당신이 나에게 늑대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늑대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 내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계획을 가진 그 수많은 사람들과 한패가 되지 말란 말이야. 진저리가 날 지경이야.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있을 거야.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당신이 굽실거리는 거 싫어. 그런데 제길, 당신 그걸 아주 잘한단 말이야. 분명 집에서 연습을 아주 많이 하겠지.

 

눈먼 암살자

아어아의 복숭아 여자들

 

내가 아는 얘기들은 다 이런 종류야. 슬픈 이야기들. 그러나 저러나, 논리적으로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모든 얘기가 슬픈 얘기야.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죽게 되잖아. 출생, 성교, 그리고 죽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까지도 못해. 불쌍한 녀석들.

그렇지만 그 중간에 행복한 부분도 있을 수 있잖아요. 출생과 죽음 사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결혼하고 작은 단층집에 정착하고 아이 둘을 가지는 거? 그 대목?

심술궂게 굴고 있군요.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어느 화창한 날 윌이 말했어.

분명히 내가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일 거야. 보이드가 말했어.

맛있고 커다란 구운 스테이크. 살짝 익혀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가득 쌓인 감자튀김. 그리고 차가운 맥주.

이하동문이야. 그리고 그다음에는 지노어에서 온 그 비늘투성이 개새끼들과 떠들썩한 난투를 벌이는 것.

 

이곳은 모든 모양과 형태에서 우리가 꿈꾸어 보았던 모든 사랑이야. 저 바깥, 우주의 다른 차원에서 전투를 하는 남자들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지.

 

이곳은 낙원이지만 우린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잖아.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곳이란 모두 지옥이야.

하지만 이건 지옥이 아니에요. 행복이에요.

[…]

그 두 사람을 그곳에 영원히 가둬 둘 건가요?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했을 뿐이야. 당신은 행복을 원했잖아. 당신의 바람에 따라서 그들을 가두어 둘 수도, 내보낼 수도 있어.

그럼 내보내 줘요.

밖에 나가는 건 죽음을 의미해, 기억해?

 

9

 

세탁물

 

나 혼자서 잘 꾸려 갈 수 있다는 허구를 우리는 함께 만들어 낸다. 아니, 그것은 급속히 허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허구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이제 그녀를 내리누르기 시작한다.

 

이 읍은 모든 것이 그대로 흘러나오는 체와 같다.

 

다른 사람이 나의 부족함, 얼룩과 냄새를 쑤셔 대는 것을 나는 원하지 않는다. 마이라가 그렇게 하는 것은 괜찮다. 나도 그녀를 알고 그녀도 나를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져야 할 십자가다. 내 덕분에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그녀가 그저 내 이름을 언급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기만 하면, 천사들은 몰라도 적어도 이웃 사람들은 그녀에게 관대함을 베풀어 준다. 그리고 천사들보다 이웃 사람들을 만족시키기가 훨씬 더 힘든 법이다.

 

나는 선함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선함이란 악함보다 훨씬 더 설명하기 힘들고, 그만큼 복잡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견디는 것이 때로는 어려울 수도 있다.

 

나는 선택한 세탁물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넣고 한 발짝 한 발짝씩 측면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지하 세계를 통해 할머니 집으로 향하는 빨간 모자처럼. 단, 나 자신이 할머니이며 나만의 나쁜 늑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어 들어가는 늑대.

 

깨어 있는 매 순간 생각하는 것이 자신이 살아야 하는 삶과 너무 동떨어진 것일 때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 리처드와 나의 삶은 그 당시로는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보이던 방식에 정착했다. 아니, 두 개의 삶의 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겠다. 낮의 삶과 밤의 삶. 그 두 가지 삶은 완전히 분리된 것이었고, 또 변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평온함과 질서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 삶, 그 모든 것의 표면 아래에서 세련되고 용인된 폭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에 가볍게 툭툭 쳐서 리듬을 만들어 내는 무겁고 잔인한 신발처럼. 매일 아침 나는 밤을 지워 버리기 위해 샤워를 했다. 리처드가 머리에 바른 것을 씻어 내기 위해. 향내가 나는 기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내 피부에 온통 묻어났다.

내가 그가 하는 밤의 행위에 무관심하다는 것, 심지어는 혐오감을 느낀다는 사실에 그가 신경을 썼던가?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협동보다는 정복을 선호했다.

 

나는 모래였다, 눈이었다, 누군가가 쓰고, 다시 쓰고, 손으로 지워 버리는.

 

재떨이

 

어떤 시점이 지나고 나면, 경험의 파괴 행위는 역전된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순수함을 입게 된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다. 그는 나를 무력한, 따라서 나무랄 데가 없는 늙은 노파로 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내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그냥 좀 생각을 하고 싶을 때마다 언니는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고 와서 나를 못살게 굴잖아. 그것 때문에 미칠 것 같아.” 그녀는 말했다.

“정말 너무해. 나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나는 너를 좋은 식으로 생각했는데, 나는 네게 가장…….”

 

로라를 제외하고 그 여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항구에 도착하던 날 배 전체에서 횡행했던 도둑질이었다. […] 편지지, 은제 식기, 타월, 비누 용기, 작품, 바닥에 사슬로 고정되지 않은 것은 모두. 어떤 이들은 심지어 수도꼭지를 뽑아 가기도 했고, 작은 거울, 문손잡이까지 가져갔다. 일등석 승객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심했다. 하긴, 부자들이란 언제나 도벽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런 약탈을 어떻게 정당화했던가? 기념품이라고 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기억할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념품 사냥이라니, 참 이상한 일이다. 아직 지금인데도 ‘지금’은 ‘그때’가 되어 버린다. 스스로가 정말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증거, 혹은 그런 증거가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무엇을 훔치는 것이다.

나는 재떨이를 하나 가져왔다.

 

머리가 불타는 남자

 

알약 따위에 의존하는 멍청한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무의식을 그렇게 싸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차드)는 언제나 그녀 쪽을 향해 성큼 내디뎠고, 언제나 움켜쥐려고 했고, 언제나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아버지였으며, 그의 머리에는 불이 붙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불이 켜진 크리스마스트리와 머리에 쓴 촛불 화환이 아버지 뒤에서 빛나고 있었을 뿐이다.

[…]

“너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 댔지. 아버지가 분장하고 계신다는 걸 넌 알아차리지 못했어.” 이제 나는 말했다.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어. 아버지가 평상시에 분장을 하고 계셨던 거라고 나는 생각했거든.” 로라가 말했다.

“무슨 뜻이야?”

“아버지 진짜 모습이 그거라고 생각한 거야. 겉모습 이면으로는 불타고 있다고. 언제나.” 로라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워터 닉시 호

 

“왜 돈을 벌게 되죠?” 나는 물었다. 나는 대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저 리처드와 위니프리드가 어떤 말을 하는지 보기 위해 순박한 질문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삶의 모든 영역에 그들이 들이대는 제멋대로 기준이 변하는 도덕적 잣대는 언제나 내 관심을 끌었다.

 

밤나무

 

이제까지 내가 쓴 것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 오류는 내가 서술한 내용 때문이 아니라 생략한 것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기 기록되지 않은 것 역시 하나의 존재다. 빛의 부재처럼.

 

물론 너는 진실을 원한다. 너는 내가 둘과 둘을 합쳐 놓기를 바란다. 그러나 2 더하기 2가 항상 진실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2 더하기 2는 창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2 더하기 2는 바람이다. 살아 있는 새는 이름표를 붙인 새 뼈가 아니다.

 

짙은 눈썹, 움푹 팬 눈두덩이, 검고 갸름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하얀 사선 같은 미소가 보였다. 세모꼴로 파인 목선 아래는 창백하게 보였다. 셔츠였다. 그는 손을 들더니 옆으로 흔들었다. 인사, 혹은 떠남을 표시하는 손짓.

이제 그는 떠나가고 있었고, 나는 그를 부를 수 없었다. 내가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그는 가 버렸다. 심장 주변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눈물이 내 얼굴을 타고 흘려 내렸다.

 

젊을 때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쉽게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에서 현재로 옮겨 다니며, 시간을 손아귀로 구겨서 던져 버린다. 우리 자신이 바로 초고속 자동차다. 사물을, 그리고 사람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고, 그것을 뒤에 내버려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되돌아오는 습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한다.

꿈속의 시간은 동결되어 있다. 한때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도망칠 수 없다.

 

10

 

눈먼 암살자

지노어의 도마뱀 인간

 

아마도 그는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자신의 이런 기대에 광적인 구석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것이며, 혹시 보낸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도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기대를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런 환상을 자아내는 것은 희망이며, 그런 신기루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리움이다.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 진공 속에서의 그리움. 어쩌면 그녀가 제정신을 잃고 있는 것일지도, 어쩌면 비정상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어쩌면 부서진 문, 강타당한 성문, 녹슨 금고처럼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흔들리게 되면, 안에 있어야 할 것이 밖으로 나오고, 밖에 있어야 할 것이 안으로 들어온다. 자물쇠는 힘을 잃는다. 파수꾼은 잠에 빠져든다. 암호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녀는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버림받은 것일지도 몰라. 버림받다, 그건 케케묵은 단어지만, 그녀의 상태를 적확히 표현해 준다. 그는 그녀를 저버리는 것을 상상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충동적으로 그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를 위해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는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눈먼 암살자

 

그녀는 빨지 않은 세탁물로 가득한 가방처럼 무겁고 더러워진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에 납작하고 실체가 없어진 듯한 느낌도 든다. 텅 빈 종이, 그 위에는 겨우 보일 만한 무채색 서명 자국이 있다.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저 접어 두었을 뿐이다. 희망을 항상 품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비밀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그녀는 도시를 걸어 다니고, 구불구불한 길과 더러운 미로를 더듬는다. 각각의 밀회 약속, 각각의 만남, 각각의 문과 계단과 침대. […] 심지어 그들이 다투고, 싸우고, 헤어지고, 괴로워하고, 재회하던 것까지. 서로에게 베여 상처 입고 스스로의 피 맛을 볼 때까지 어떻게 사랑했던가 하는 것도. 우리는 함께 있으면 황폐해져. 그녀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폐허 한가운데가 아니라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녀는 둥근 오(O), 근원적인 영(0)이다. 그곳에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규정하는 공간.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에게 도달할 수 없고,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고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밝게 미소를 짓지만 그 미소 뒤에 그녀는 없다.

 

당신은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삶을 살았어.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를 통하지 않고 그녀가 어떻게 그것에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눈먼 암살자

유니언 역

 

이제 그녀는 그가 꿈꾸는 것을 상상한다. 자신이 그에 대한 꿈을 꾸듯, 그녀에 대한 꿈을 꾸는 그를 상상한다. 젖은 석판석 색깔의 하늘을 통해 그들은 짙은 색깔의 보이지 않는 날개로 서로를 향해 날아간다. 찾고, 또 찾다가, 되돌아가고, 희망과 그리움에 의해 이끌렸다가 두려움에 좌절한다. 꿈속에서 그들은 어루만지고 서로에게 얽힌다. 그것은 충돌에 더 가깝다

 

기쁨이 그녀의 목을 그러쥔다. 공포와 구분되지 않는 기쁨. 그녀는 그를 볼 수 없다.

 

11

 

화장실

 

내가 이제까지 쓴 것을 들춰 보았다.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경박한 내용이 너무 많아서, 아니, 경박한 것으로 여겨질 소지가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수많은 옷, 이제는 유행에 뒤진 스타일과 색깔, 떨어진 나비 날개.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수많은 만찬. 아침 식사, 피크닉, 항해, 가장 무도회, 신문, 강에서 했던 뱃놀이. 그런 항목들은 비극과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삶에서 비극이란 단일한 긴 비명이 아니다. 그것에 이르도록 만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찮은 매 시간, 매일, 매년, 그런 다음 갑작스러운 순간이 도래한다. 칼부림, 총알 발사, 다리에서 추락하는 차.

 

그 연령대의 젊은 여자에게서 그런 공손함과 배려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신선한 일이었다. 그들은 경솔한 배은망덕만 내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라고 나는 사브리나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렇지만 경솔한 배은망덕은 젊은이들의 갑옷이다. 그것 없이 그들이 어떻게 삶을 헤쳐 나가겠는가? 늙은 자들은 젊은이들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잘못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늙은 자들은 젊은이들을 먹어 치우고, 그들의 활력을 빨아들이고, 불멸의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쌀쌀함과 경솔함이라는 보호막이 없다면 모든 아이들은 과거에 짓눌려 버릴 것이다. 그들 어깨에 지워진 다른 이들의 과거. 이기심이야 말로 그들을 구원해 주는 미덕이다.

 

“좋은 판단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경험은 나쁜 판단에서 비롯된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우리 뒤에 남겨 두는 것. 그것이 끔찍한 것이라 할지라도. 지워 버릴 수 없는 메시지. 그러나 그런 메시지는 위험할 수 있다. 소원을 말하기 전 두 번 생각해 보라, 특히 운명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소원이라면.

(“두 번 생각해 봐.” 리니는 말했다. 로라는 물었다. “왜 두 번만요?”)

 

새끼 고양이

 

“나는 자유연애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어. 결혼은 케케묵은 관습이라고 말했을 뿐이야. 결혼이 사랑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어. 그것뿐이야. 사랑은 주는 것이고, 결혼은 사고파는 거야. 사랑을 계약에 집어넣을 수는 없어. 그러고 나서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다고 말했지.” 로라는 말했다.

 

“로라, 그만 놀려!”

“놀리는 거 아니야.” 로라는 브러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생각하는 중이야. 그 차이는 알 수 없는 법이야.

 

“최고의 의사를 고용할 거야. 얼마가 들든 간에 말이야.”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모든 것을 상업적인 것으로 환산하는 것은 우리 둘 다에게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다. 돈이 개입되어 있으면, 내 입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주 비싼 상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솔직하고 간단했다.

 

로라는 엉겅퀴의 관모(冠毛) 둥지에 놓인 부싯돌이었다.

나는 ‘돌’이 아닌 ‘부싯돌’이라고 했다. 부싯돌은 불로 된 심장을 품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

 

“그래, 어린 아가씨. 무슨 변명을 하시겠어? 로라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언제 철이 들래?”

그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 답은 질문과 너무 얽혀 있다. 너무나 매듭이 많고 여러 갈래로 찢어져 있어서 진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을 “해야 했다.”라는 표현은 헛된 것이다.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평행 우주에 속한 것, 우주의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다.

 

달은 밝게 빛났다

 

어젯밤 나는 젊은 여자가 분신자살하는 것을 보았다. […] “오, 제발 그러지 마. 네 삶을 태워 없애 버리지 마. 뭘 위한 것이든, 그럴 만한 가치는 없어.” […]

자기희생이라는 재능을 지닌 이 젊은 여자들은 무엇에 사로잡힌 것인가?

 

스스로를 일종의 이론적 제단에 바침으로써 그런 것들을 당장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그들은 무모, 혹은 오만한 것인가? 아니면 일종의 선언인가? 집착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 훌륭하게 여길 만하다. 용감한 행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완전히 무용한 것이다.

 

우리가 그녀에게 가했다고 생각되는 상처에 몰두하는 대신 다음 끼니를 궁리하는 입장이었더라면. 스스로 벌지 않고 손에 들어온 수입은 이미 자기 연민 경향이 강한 사람의 그런 성향을 더 부추기는 법이다.

 

그것은 힘겹고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입장을 굳히고, 포고를 하는 것. 저항하는 것.

 

한때 나는 맨손을 드러내고 눈보라 속으로 걸으면서도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걸을 수도 있었다. 사랑, 혹은 증오, 혹은 공포, 혹은 단순하고 명백한 분노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나도 선물을 하고 싶다. 나 역시 권리를 갖고 있다!” 나는 외친다.

[…] “도대체 당신이 무슨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거야?”

“나는 진실을 주겠다. 나는 그것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다. 그것은 아침이 오더라도 그것은 이곳에 유일하게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말한다.

 

베티네 간이식장

 

나는 감금된 상태에서 분투하며 스스로 만들어 낸 고통스러운 환상에 갇힌 그녀의 모습, 혹은 다른 종류의, 역시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환상에 사로잡힌 그녀의 모습을 그려 보며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환상은 언제 자리바꿈을 하게 되는가?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우리는 제각각 이 출입구를 매일 아무런 생각 없이 오간다. 제정신이라는 특권의 값을 공통의 동전으로, 즉 우리가 동의하는 의미로 지불하며 문법이라는 암호를 쓴다 — “내가 말한다. 네가 말한다. 그와 그녀가 말한다. 반면 그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게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장갑을 끼고 있을 때 장갑의 내부를 알 수 없듯이. 그녀는 나와 항상 함께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존재 형태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나 자신의 상상으로 채워진 공허한 형태.

 

무능한 척하는 것은 이제 내 제2의 본성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생각조차 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혹시 알고 있지 않는가?

나는 몰랐다.

그녀로부터 소식을 듣지는 않았는가?

듣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알려 주겠는가?

주저하지 않고 하겠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목적어가 없는 문장이었으며,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거짓말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거라면 너는 거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야. 로라가 그렇게 말했어.”

“로라가 그랬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안도감을 느꼈다. 리처드와 위니프리드가 악마 역을 맡고 나는 면제를 받은 것인데, 분명 도덕적 무력함이라는 근거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얘기하지 않더군. 하느님이 이제는 그 애 곁에 있어 주면 좋으련만.”

 

“집 같은 곳은 없다네.(There’s no place like home.)” 로라가 열한 살 혹은 열두 살이던 해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리니가 이런 노래를 불러. 바보 같은 노래야.”

“무슨 뜻이니?” 나는 물었다.

“봐.” 그녀는 등식을 써서 보여 주었다. 없는 곳 = 집.(No place = home.) 그러므로 집 = 없는 곳.(home = no place.) 그러니까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집이란 마음이 머무는 곳이라고, 이제 나는 베티네 간이식당에서 떠날 채비를 하며 생각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마음이 없었다. 무너져 버린 것이다. 아니,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완숙 달걀의 노른자처럼 내게서 깨끗이 제거되었고, 내 나머지 부분은 피도 없이 응결되고 공허하게 되어 버렸다.

나는 생각했다. 마음이 없는 무정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집이 없다.

 

메시지

 

이제 비밀을 폭로하는 것은 유행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비밀과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폭로하고, 자신들이 가진 비밀뿐만 아니라 가지지 않은 것조차 폭로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죄책감과 괴로움, 그리고 스스로의 쾌락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것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이 지저분한 작은 죄들, 한심한 가족들 간의 얽힘, 가슴에 품은 상처들을 음미한다.

 

12

 

눈먼 암살자

나방

 

무거운 세상, 순전한 무게.

 

당신이 죽임을 당할까 봐 너무 걱정되었어요.

거의 죽을 뻔했어. 그는 말한다. 우스운 건 그곳은 지옥 같은 곳이었지만 나는 거기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여기에 적응할 수가 없다는 점이야.

 

다음 전쟁을 축하하는 거야, 하고 그가 말한다. 이제 다가오고 있어. 저 구름 위의 꿈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걸 부정하고 있지. 하지만 아래쪽 지상에서는 그것이 다가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스페인을 연습 과녁 삼아서 황폐하게 만든 후 이제 곧 심각한 사업을 시작하게 될 거야. 그건 공중의 천둥 같아. 그리고 그들은 그걸 두고 흥분하고 있어. 그래서 저들은 병을 박살내고 있는 거야. 먼저 시작하고 싶은 거지.

 

눈먼 암살자

노란 커튼

 

전쟁이 어떻게 슬그머니 다가왔던가? 어떻게 저 혼자 힘을 끌어모은 것인가?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 어떤 비밀, 거짓말, 배반으로부터? 어떤 사랑과 미움으로부터? 어떤 돈 무더기, 어떤 금속에서?

희망은 연막을 친다. 연기가 눈에 들어가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갑자기 나타난다. 걷잡을 수 없는 모닥불처럼, 살인처럼, 증식할 뿐이다. 이제 전쟁은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전쟁은 흑백으로 벌어진다. 옆에서 방관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실제로 참전하는 이들은 수많은 색깔을 볼 수 있다. 극단적인 색채, 너무나 강렬하고, 붉은색과 주황색이 너무나 두드러지고, 너무나 투명하고 눈부신 색깔들. 그러나 외부인들에게 전쟁은 뉴스 영화와 같은 것이다. 입자가 굵고, 선명하지 않고, 갑자기 터지는 스타카토 소음과 많은 회색 피부의 사람들이 무겁게 걷거나 넘어지는 것.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

 

눈먼 암살자

전보

 

짙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방법으로 전보를 배달해 준다.

[…]

“알리다, 상실, 유감.” 조심스럽고 중립적인 단어들, 뒤에 이런 질문을 감춘 단어들, “뭘 기대했던 거야?”

 

눈먼 암살자

사키얼-논의 몰락

 

돌아오겠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뭐가 잘못된 거죠?

모르고 있어?

 

13

 

장갑

 

내가 아직도 여기 남아서 너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 놀랍다. 이것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너는 아무 말도 듣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이 검은 줄뿐이다. 텅 빈 페이지, 텅 빈 공중에 던져진 실.

 

올해는 이제까지 강에서 시체 한 구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토론토에서 온, 마약에 취한 젊은 여자였다. […] 그녀는 이곳에 친척이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 […] 분명 그들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있고, 누구든 살아 있는 사람이 비난을 받게 마련이다. 이런 일에서는 그것이 규율이다. 정당하지 않지만, 원래 그렇다.

 

나는 수술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으로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지 물었다. 필요한 것은 너무 많았고, 이룰 수 있는 결과는 너무 적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어느 젊은이에게서 잡아 뜯어낸 심장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어디서 구해 오는지 누가 알겠는가? 중남미 부랑아들의 것이리라고 추측된다. 아니, 편집증적 소문에 의하면 그렇다. 훔친 심장, 암시장 심장, 부러진 갈비뼈 사이에서 끄집어낸 따뜻하고 피가 흐르는 심장. 가짜 신에게 바쳐진 그것. 가짜 신이란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와 우리의 돈.

 

어쩌면 고양이나 작은 개를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따스하고 비판적이지 않고 털이 북슬북슬한 것

 

가정의 불

 

내 나이 정도가 되면 이런 종말론적 예견을 즐기는 법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종말에 대해 뭐하러 상관하겠는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이다. 시간의 수면은 높아지고 또 높아진다. 그것이 우리 눈높이에 이르면 우리는 익사하게 된다.

 

하룻밤 사이에 현실이라고 생각되던 것들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렇게 되는 법이다.

 

모든 전쟁이 그것을 겪은 사람에게는 ‘바로 그 전쟁’이다.

 

리처드는 정부(情婦)가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생겼다. […] 그는 그들이 우선순위를 똑바로 알고 있기를 바랐다. 내가 공식 부인이었고 그는 나와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이혼한 남자들은 자기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은 내게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은 내가 행사하지 않을 때만 발휘되는 권력이었다. 실제로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때만 권력이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 드리운 위협은 내가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것, 이미 다 아는 비밀인 사실을 내가 폭로해서 온갖 종류의 폐해를 불러 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의 표면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기품 있는 태도라는 살얼음 위에서. 그것은 아래에 어두운 호수를 숨기고 있었다. 얼음이 녹게 되면 우리는 침몰한다.

반쪽 인생이라도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

 

그가 돈이 너무 많다는 사실, 세상에서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 실제로 있는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기대하기 십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서 평균적인 것이 발견되면 결핍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전쟁은 치열한 발동기처럼 계속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끊임없고 황량한 긴장. 마치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루고 누워 있을 때 새벽이 오기 전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이를 가는 소리를 듣는 것과 흡사했다.

 

종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그렇지만 전쟁을 끝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은 거대한 불이다. 재는 멀리 날아가고 천천히 가라앉는다.

 

다이애나 스위츠

 

“미안합니다. 거기 서 계시는 걸 못 봤어요. 깜짝 놀랐어요.” 그녀는 외국인 억양을 지니고 있지만, 이곳에 속한 사람이다. 젊은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야말로 외국인이다.

 

이 목표가 단순한 부나 권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원한 것은 존경이었다. 그가 신흥 부자라고 하더라도 받을 수 있는 존경 말이다. 그는 그것을 간절히 바랐고 목말라했다. 존경을 망치처럼 뿐만 아니라 왕의 홀처럼 휘두르고 싶어 했다. 그런 욕망 자체는 비열한 것이 아니다.

 

벼랑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우리는 한때 믿었다. 신은 언어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알고 있었는가? 얼마나 빈약하고 얼마나 쉽게 없어지는지?

 

‘신.’ ‘신뢰.’ ‘희생.’ ‘정의.’

‘믿음.’ ‘소망.’ ‘사랑.’

‘자매’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 그 단어는 언제나 거기에 포함된다.

 

나는 스타킹을 넣어 두는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 공책이 있었다. […]

나는 거기서 멈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지를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했을 행동을 나 역시 했다. 네가 여기까지 읽고 있다면 이미 한 행동을. 나는 앎을 택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앎을 택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불구로 만든다.

 

그런 증거를 남겨 두는 사람은 나중에 낯선 사람들이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일에 하나하나 간섭을 해 댄다 하더라도 불평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낯선 사람뿐만 아니라, 연인들, 친구들, 친척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 모두는 관음증 환자들이다. 왜 우리는 과거의 어떤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가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이들이 잠가 둔 문을 일단 여는 순간 우리는 모두 무덤 도둑이 된다.

그러나 그저 잠가 두었을 뿐이다. 방과 그 내용물은 온전히 남아 있다. 만일 그것을 남겨 둔 사람들이 완전한 망각을 바랐다면, 언제든 불을 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14

 

금발 타래

 

‘종말’, 따스하고 안전한 안식처. 쉴 수 있는 곳. 그러나 나는 아직 그곳에 도달하지 않았고, 늙고 지쳤으며, 절름거리며 걷고 있다.

 

처음에는 내가 단지 정의를 원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내 마음이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동기가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어스카인 선생도 지적한 바와 같이, 활과 화살을 가진 에로스만이 유일한 눈먼 신은 아니다. 정의의 여신도 그렇다. 날카로운 무기를 가진 서투른 눈먼 신. 눈먼 정의의 여신이 가지고 다니는 칼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우상에는 손을 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칠해 놓은 금색 페인트가 손에 묻어나는 것이다, 이건 어때?”

 

승리가 다가오고 지나가다

 

후회하는 것보다는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낫다고 리니는 말하곤 했다.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격언이다. 많은 경우 신중하게 행동해도 후회하게 된다.

 

“자책하지 마.” 위니프리드는 내가 자책하기를 바라며 말했다. 내가 심하게 자책을 한다면 다른 사람을 책망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은 계속 마음에 품지 않고 털어 버리는 게 좋아.”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마음에 품는다.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다.

 

전쟁이 끝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입자가 굵은 연회색과 중간 색조는 사라졌다. 그 대신 현란하고 원색적이고 그늘 없는 정오의 광휘가 다가왔다. 진한 분홍색, 폭력적인 파란색, 붉고 흰 비치볼, 형광 녹색 플라스틱,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리쬐는 태양.

 

그러나 내일은 있었다. 내일밖에 없었다. 사라진 것은 어제라는 시간이었다.

 

흘리지 못한 눈물을 담고 있으면 상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혀를 깨무는 것 역시. 힘겨운 밤이 시작되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 로라는 그늘 속에 가려졌다. 몇 년이 더 흐르면 마치 그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 나는 침묵을 맹세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무엇을 원했던가?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기념비 같은 것. 그렇지만 결국 생각해 보면 기념비란 견뎌 낸 상처를 기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견뎌 내고 혐오한. 기억이 없다면 복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잊지 않도록.” “나를 기억해 다오.” “쇠약한 손으로 네게 던진다.” 목마른 유령들의 외침.

죽은 자를 이해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모른 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돌무더기

 

로라라면 영적 의미라고 불렀을 다른 의미로 보자면 그녀는 내 공저자였다. 실제 저자는 우리 둘 다 아니었다. 주먹은 손가락을 다 모은 것 이상의 것이다.

로라가 열 살, 혹은 열한 살이었을 때 아빌리온의 도서실에 있는 할아버지의 책상에 앉아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종이 한 장을 앞에 두고 천국에서의 자리를 배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오른손 쪽에 앉지. 그럼 하느님의 왼손 쪽에는 누가 앉지?” 그녀는 말했다.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지도 모르지. 왼손은 나쁜 거라고 하잖아. 그러니까 왼손이 없을 수도 있지. 아니면 전쟁에서 왼손을 잃었을 수도 있고.” 나는 그녀를 놀리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어. 그리고 우리는 왼손을 갖고 있어. 그러니까 하느님도 왼손이 있어야 해.” 로라는 말했다. 그녀는 연필 끝을 씹으며 도표를 들여다보았다. “알았다! 탁자가 둥근 거야!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오른손 쪽에 앉는 거야. 빙 둘러서 말이지.”

“그리고 그 반대로 말이지.” 나는 말했다.

로라는 내 왼손이었고, 나는 그녀의 왼손이었다. 우리는 그 책을 함께 썼다. 그것은 왼손잡이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보든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너는 위니프리드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리처드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네게 그리픈 가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네 진짜 증조할아버지는 알렉스 토머스고, 네 아버지는, 글쎄, […] 네 마음대로 고르렴. 그로부터 네가 물려받은 유산은 무한한 추론의 영역이다. 너는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단다.

 

15

 

눈먼 암살자

에필로그 - 다른 한 손

 

그 사진은 잘린 것이다. 3분의 1가량이 잘렸다. 왼쪽 하단에는 손목 부분이 잘린 손이 풀밭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은 다른 한 사람의 손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간에 항상 사진 속에 있는 그 사람. 모든 것을 기록할 그 손.

나는 어쩌면 그렇게 무지했던가? 그녀는 생각한다. 그토록 어리석고 그토록 눈멀고 그토록 경솔했다니. 그렇지만 그런 무지함과 경솔함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면, 그다음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하는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우리는 파멸하게 될 것이다. 신처럼 영락하게 될 것이다. 돌이 되어 버릴 것이다. 결코 먹거나 마시거나 웃거나 하지 않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감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사진뿐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

사진은 행복에 관한 것이고,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행복이란 유리벽으로 보호된 정원이다. 그곳으로는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다. 낙원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곳에는 여로가 없기 때문이다. 상실과 후회와 비참함과 열망이 굴곡진 길을 따라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문턱

 

야생 풀협죽도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 물기 머금은 흙냄새와 신선한 초목 냄새가 밀려온다. 물기 많고 미끌미끌한 냄새. 그것에는 나무껍질처럼 신맛이 섞여 있다. 그것은 젊음의 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비탄의 냄새를 풍긴다.

 

이곳에서 나는 세계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 하늘이 얼마나 파란지, 바다가 얼마나 푸른지, 최후가 얼마나 임박했는지.

 

나는 눈물도 몇 방울 흘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몇 방울만. 늙은이의 눈은 건조한 법이다.

 

내가 네게서 무엇을 원하게 될까?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건 너무 과분하다. 용서도 아닐 것이다, 그건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저 내게 귀기울여 주는 사람을 원할 것이다, 그냥 나를 바라봐 줄 누군가. 그렇지만 무엇을 하든 나를 미화하지는 마라, 나는 장식된 해골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네 손에 나 자신을 남겨 둔다. 내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네가 이 마지막 장(張)을 읽을 때 내가 존재할 유일한 곳은 — 만일 내가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 바로 거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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