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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꿈 | 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 1483~1520)

2012. 9. 12.

 

 

 

기사의 꿈, Vision of a Knight


 

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 1483~1520

 

 

  

 

관련 링크

네이캐스트 http://bit.ly/OfCUNA

위키백과    http://bit.ly/OfD33l

wikipedia   http://bit.ly/OfCLtm

 

 

전쟁터로 떠나는 기사여!

광야의 연약한 나무 그늘, 아직은 잠들 수 있는 당신의 첫 쉼터이자 마지막 휴식입니다. 가족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나오며, 당신의 출정이 미래의 풍요와 평화를 위한 명예로운 현재라고 생각했겠지요.
전쟁이 시작된 이상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번 시작된 전쟁은 스스로 굴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전쟁에서의 살육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처 입은 이들은 보복을 원하고 보복의 대가로 살육과 약탈이 반복되며 약탈로 부를 쌓은 이들은 전쟁의 대가를 잊지 않습니다. 전쟁의 대가를 누려본 이들은 또 다른 전쟁을 발화합니다.
전쟁터 한가운데 죽어나가는 이들은 당신 같은 꿈을 꾸는 젊은이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자는 후방에서 커다란 지도를 펼쳐놓고, 정복한 영토 위에 깃발을 꽂는 몸과 정신이 노쇠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평화라는 꿈을 심어주고 이윤이라는 꿈을 꾸는 자들입니다. 승전국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전사자를 내는 전쟁에서 승패에 상관없이 살아남을 자입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모호해집니다. 당신의 눈앞에는 살기 위해 죽이고 죽기 싫어 잔인해지는 인간들만 가득할 것입니다. 가족의 안녕과 조국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당신의 신념은 전쟁의 참혹함 앞에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게 됩니다.
당신과 똑같은 신념을 지니고 반대편에 서 있는 적도 죽여야 할 테고,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도 죽여야 할 순간을 만날 테고, 적인지 아군인지 모호한 사람들도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여야 할 순간을 만날 것입니다. 처음엔 갈등하고, 조금 지나면 명령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하고, 결국엔 기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는다면, 사람이 아니었던 그 기억을 상처로 안고 살아가거나, 극한에서도 살아남은 자신을 대견해하며 허울뿐인 명예를 훈장으로 안고 살아가겠지요. 어느 쪽이든 비극입니다. 당신 삶에서 어느 한 부분이 부당하게 잘려나간 것입니다.
기사여, 당신의 평화는 칼을 들지 않고 명분에 흔들리지 않고 방패를 베개 삼아 꿈을 꿀 수 있는 지금입니다. 당신은 아직 살육도 약탈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면 멈출 수 있습니다. 당신 손에 쥐어진 칼을 놓고, 전쟁 후에 얻어질 불확실한 명예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기다리는 가족에게 돌아가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을 가꾸어 이루어 낸 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당신은 미래의 평화가 아니라 현재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풍성한 나무 그늘서 당신은 꿈꿀 수 있습니다. 당신이 가꾼 나무는 열매를 맺을 것이고 열매는 풍성할 것입니다. 평화라는 명분으로 먼 미래를 기약하지 말고 현재의 땅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이는 말하기 쉬운 이상(理想)일뿐일지라도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내재한 탐욕과 증오는 태생적으로 전쟁을 품고 있습니다. 사랑을 표방하는 종교조차 전쟁의 빌미가 되는 세상이니까요. 타협이 없는 인간의 전쟁은 답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탐욕과 증오는 타협이 없습니다. 전쟁은 일부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가지려고 시작하는 것이라 타협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한쪽은 패배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정쩡한 타협은 전쟁 상태의 지속을 의미합니다. 언젠가는 터질 뇌관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 지구 어느 한 곳은 여전히 전쟁터입니다. 한순간도 전쟁을 멈추지 못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인간은 진실로 평화를 원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평화를 원한다지만 한 번도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린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평화는 약한 자의 헛소리이거나 몽상가의 망상이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의 핑계일지도 모릅니다.
기사여, 이제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전쟁터로 가던 길을 가든지,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든지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전쟁터로 갈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만 발길을 돌린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국가나 군대에 소속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맞는 말도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당신 하나가 만들 수 있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이 자신을 믿었다면 세상은 훨씬 꿈꾸기 좋은 세상이 되었을 겁니다. 인간은 인간을 믿지 않습니다. 그나마 믿을만한 인간으로 국가, 민족, 가족, 친구 등등으로 조각조각 내어 나와 너를 구분해놓았습니다. 신이 만든 인간이란 종족은 거대한 하나였다는 태초의 기억을 잊어버렸습니다.
당신은 전쟁터로 떠납니다. 눈을 비비며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합니다. 멈출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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