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밑줄긋기/소설/희곡

대지의 슬픔 | 에리크 뷔야르

2020. 10. 21.
대지의 슬픔

대지의 슬픔

에리크 뷔야르 저/이재룡

1890년대 미국을 무대로 한 『대지의 슬픔』은 12개의 짤막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유명한 총잡이이자 쇼맨이었던 버펄로 빌(Buffalo Bill, 본명은 윌리엄 프레더릭 코디William Frederick Cody, 1846~1917)이다. 버펄로 빌이 흥행사 존 버크와 함께 만들었던 공연 [와일드 웨스트 쇼Wild West Show]는 진짜 인디언을 출연시켜 당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하루에 수만 명의 관객을 모으고, 미국을 넘어 유럽까지 진출했던 와일드 웨스트 쇼를 통해 뷔야르는 서부 개척 시대 인디언들의 수난사와 초창기 쇼 비즈니스의 모습을 날카롭게 포착해 낸다. 특히 각 장의 맨 앞에는 사진이 한 장씩 나오는데,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서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류 박물관

 

스펙터클은 세계의 기원이다. 묘하게 시대에 맞지 않는 비극이 꼼짝도 않고 저기 버티고 있다. 콜럼버스 항해 4백 주년을 기념하고자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장의 중앙 통로, 골동품 좌대에 인디언 신생아의 말린 시체가 전시된 것이다.

 

한편에서 만국 박람회가 산업 혁명을 기념하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버펄로 빌이 정복의 역사를 찬양하고 있었다.

 

라일리는 살인자이자 도둑이었다. 그는 죽은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옷을 벗겼다. 그는 인디언을 살해한 후 그들의 모카신, 무기, 장옷, 머리카락 등 모든 것을 훔쳤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시카고 박람회에서 브리스틀이 전시한 유물의 일부는 거기에서 온 것들이었다. 훗날 네브래스카의 역사 박물관은 찰스 브리스틀의 수집품을 사들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아마 박물관 수장고 어디에선가 만국 박람회에서 전시되었던 인디언 아기의 말린 시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스펙터클과 인류학은 같은 진열장에 전시된 시체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전 세계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약탈품과 전리품일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서 구경하는 흑인, 인디언, 혹은 아시아인들의 물건은 시체에서 훔쳐 온 것이다.

 

스펙터클의 본질은 무엇인가?

 

와일드 웨스트 쇼.

 

쇼의 목표는 마음속을 떠나지 않을 고통과 죽음의 직관으로 관중들을 경악시키는 것이었다. […] 그렇다. 사람들은 전율해야 한다. 스펙터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뒤흔들고, 우리를 앞으로 떠밀고, 우리의 확신을 박탈하고, 우리를 불태워야만 한다. 그렇다. 스펙터클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뭐라 하건 우리를 불태운다. 그것은 우리를 농락하고, 기만하고, 도취시키며, 우리에게 온갖 형태의 세계를 제공한다. 그리고 때로는 무대가 이 세계보다 더욱 존재감이 크고, 우리의 삶보다 더욱 현존하며, 현실보다 더욱 감동적이며 개연성이 있고, 악몽보다 더욱 무섭기도 하다.

 

군중이 보러 온 것은 카우보이나 총잡이가 아니란 것을 말이다. 스펙터클의 힘(그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그도 딱히 모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스펙터클의 진정한 본질을 이끌어 낸 아이디어, 스펙터클을 매력적이게 만든 것은 바로 인디언의 존재, 진짜 인디언의 출현에 있었다.

 

배우

 

문명은 항상 굶주린 거대한 짐승이다. 그놈은 닥치는 대로 먹는다. 문명에게는 후추, 홍차, 석탄, 주석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먹여도 문명이란 짐승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또한 문명은 물질적이지 않은 먹이도 요구하지만 그런 것에는 금세 싫증을 낸다. 끊임없이 신참,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다.

 

늙은 인디언 추장이자 리틀 빅혼 전투의 승리자였던 시팅 불.

 

인디언 추장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백인 남자들은 항상 여러 가지 얼굴을 보이지만, 그 어느 얼굴에도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항상 잇속에 얽혀 있었다. […] 지난해 그는 뉴욕의 어느 박물관에서 밀랍 인형들 사이에 끼어 구경거리로 전시된 적이 있었다

 

스펙터클의 핵심은 스펙터클 자체가 아니라 리얼리티이기 때문이다. […] 리얼리티, 그것은 괴상한 것이다. 그것은 도처에 있지만 동시에 아무 데에도 없다.

 

미국 국기가 펄럭거리는 와중에 거대한 오락 기계 속으로 들어서는 이 순간만큼 시팅 불이 혼자인 적이 없었다. 캐나다에서 한줌의 추방자 틈에 끼어 망명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이토록 혼자이지 않았다. 진정한 어둠은 뚫고 지나갈 수 없는 법이다.

 

그가 사랑했던 위대한 것들은 까마득히 먼 옛일이 되었다. […] 모두가 이것을 보러 온 것이다. 순전히 이걸 보기 위해서. 바로 그의 고독을.

 

오래된 동화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연속극 제1부 첫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베일이 찢어지고 드레스가 불탄다. 그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우리는 이 세계의 주역이 될 것이다.

 

알자스로렌에 온 버펄로 빌

 

그런데 와일드 웨스트 쇼의 제작자이자 스타 사회자인 버펄로 빌은 도대체 누구인가?

 

당시 버펄로 빌의 육신 자체가 이미 순수한 <마케팅>의 산물이자 일종의 시뮬라크르였다. 이 광고 문구로 범벅이 된 남자의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과잉은 결핍의 또 다른 증거이다.

 

버펄로 빌은 무의미한 장면을 똑같은 순서와 똑같은 열정으로 되풀이해서 연기했다. 성공은 하나의 도취이다. 반복은 묘한 안도감을 주는 덕목, 묘한 마취력, 진실의 힘을 지녔다

 

네드 번틀라인은 그것을 가지고 싸구려 소설을 썼다. […] 번틀라인이 앞머리를 장식하고 꼬리를 붙여 탄생한 버펄로 빌이란 인물은 꽤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버펄로 빌은 제이슨 워드라는 배우가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버펄로 빌이란 인물이 유명해졌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강력한 위조의 매력에 빠져들어 자신을 복제하고 수정했다. 결국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라고 부추겼던 셈이다. […] 그는 서서히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로 변해 갔다. 그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가공한 일종의 다른 삶, 자기 삶의 패러디였다

 

그러나 진짜 삶은 언제나 엄존한다. 우리는 변덕스럽고 알 수 없는 세상에 내리는 빗방울 하나하나에서 진짜 삶을 되찾곤 한다.

 

모든 공동묘지에는 십자가, 비석, 그 어느 것도 없이 무거운 뚜껑이 덮여 있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작은 정방형 자리가 있는데 그것은 빈곤층을 위한 구역이다. 가끔 조약돌이나 마른 꽃이 놓여 있기도 하고 바닥에 백묵으로 쓴 이름이나 날짜가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이런 무덤보다 더 감동적인 것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무덤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아주 깊이 사랑해야 한다.

 

운디드니 학살

 

1890 12 15일 새벽.

 

그날 아침에는 새들도 울지 않았고, 이웃 오두막에서 어린 소녀가 세수하며 흥얼거리는 노래도 들리지 않았고, 반쯤 깬 귀에 들리는 것은 마흔세 마리 말이 내달리는 발굽 소리뿐이었다. 이익과 권력 존중이 신의 목소리에 응답한 것이다. 역사는 죽었다. 빈대들만 남았다. 불의가 꿈틀거릴 때는 그 소리로 구별이 된다.

 

과거는 우리에게 색깔 없이 다가온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선 더 이상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다. 비극은 목격자마저도 앗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격렬한 폭풍이 불었다. 신의 명령인 양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가볍고, 차분한 눈송이들이 시체 주위에서 맴돌았다. 눈송이는 그들의 머리카락,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눈꺼풀에 내린 서리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눈송이 하나는 얼마나 연약한가! 지친 작은 비밀, 위로할 수 없는 쓸쓸한 사랑.

 

커다란 수레가 파괴된 인디언 거류지에 들어왔다. 그것은 처참한 추수였다.

 

아기를 하나 구입하다

 

버크는 아기를 돈 주고 샀다. 그렇다. 그는 아마도 와일드 웨스트 쇼를 위해 아기를 샀을 것이다. […] <운디드니의 어린 생존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이 좋은 돈벌이가 되리라는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 사업과 눈물은 양립 불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세상에서 버림받은 깡패들은 폭력적이면서 동시에 감상적이다.

 

그가 평생 일삼은 미친 짓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미친 짓은 아마도 아기를 구입하여 입양한 것, 즉 눈물과 이익을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혼동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마치 유아 세례를 받는 것처럼 옷을 입힌 아기를 품에 안고 찍은 그의 끔찍한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레너드 콜비는 타인의 삶을 자기 삶에 매몰시켜 자신의 끔찍함을 희석시키는 짓을 통해 광기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 퍼시픽 박람회에서 인디언 복장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묘한 점은 원래 인디언인 그녀가 <변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초라한 상업 사진 속에서 진트칼라 누니가 변장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그 서커스 의상과 연출 너머로 그녀의 지치고 슬픈 눈빛이 <우리는 모두 우리가 쓴 가면 때문에 불타서 죽는다>라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 그녀에게 술 장식이 달린 윗도리를 입히고 싸구려 가죽신을 신겼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끔찍한 이유가 있다. 운디드니의 아기인 진트칼라 누니가 우리 눈에 변장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더 이상 인디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운디드니 <전투>

 

그는 시팅 불의 살해 현장으로 순례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늙은 추장의 측근들을 만나 그들에게 시팅 불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털어놓았다. […] 그는 오두막을 해체하여 기차에 싣고 배까지 운반했다. 그리고 시팅 불이 탔던 마지막 말의 값도 흥정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운디드니를 다시 돌아보며 학살 현장 주변에서 겁에 질려 떠돌고 있던 라코타족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불러 모아 고용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진행자는 특별 공연을 예고한다. <시팅 불의 죽음, 그리고 버펄로 빌이 직접 챙겨 온 그의 진짜 말과 진짜 움막.> 그렇다! 그 무엇도 연출의 악마를 말릴 수 없다. […]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무엇인가 크고, 아름답고, 어쩌면 아주 끔찍하고 천박한 것이 있다.

 

관객은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외쳤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 장면, 그렇다, 그 비극적 장면, 오로지 인디언 추장의 그 죽음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동은 주문하면 우리에게 오도록 되어 있는 것, 그것이 감동이다.

 

세상에, 공연이 어찌나 긴지! 그런데 일단 무대에 서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이 시계를 멈추게 한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다. 그것은 영원과도 같다.

 

이 모든 것은 가장 미국적 전범(典範)이자 <문명>의 역사에 가공할 만한 기여를 한 전범적 작품을 위한 것이었다.

 

스펙터클의 힘과 권위는 비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스펙터클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눈에 보이는 상처도 없이 우리를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빠트린다. 하지만 이 소란스러운 공허 한가운데에, 우리가 커다란 동정심, 혹은 경멸에 빠지는 와중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마치 이 순간적인 거대한 오락, 이 강요된 자아 망각, <보다 잘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이 방식은 존재의 가장 비극적 순간 중 하나이다. 아무런 기호도 없고, 현시도 없다.

 

여기에서 그건 대수롭지 않고 예술은 장삿속이다. 순진무구한 것은 흉하고, 중요치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순간, 인디언들은 그들의 마지막 역할을 수행한다. […] 관객은 인디언을 미워하려고 거기 있는 것이며 그들을 바라보고 증오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셔먼 장군의 그 끔찍한 초상을 보면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측면이 무엇인지를 눈치채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증오심이었다.

 

스펙터클의 진짜이자 가짜인 생각들과 더불어 그 안이한 수사학.

 

입에 손바닥을 부딪치며 우, , , 하는 소리를 낸다. 그것은 비명 소리를 야만적이며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전쟁의 비명, 이런 소리는 그레이트플레인스, 캐나다, 아니 그 어떤 곳에서도 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버펄로 빌의 순수한 발명품이다. 그리고 인디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연극적 비명, 광대의 기막힌 발명품을 그들 자신의 불행을 연기해야만 하는 모든 무대에서 끊임없이 외쳐야만 한다는 것을. 그렇다. 그들은 버펄로 빌이 발명한 이 <수작>의 운명을 아직 몰랐고 훗날 서양의 모든 아이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맴돌며 <인디언의 외침> 소리를 내며 입에 손바닥을 두드리리란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 괴기스러운 것의 미래, 스펙터클을 통해 감각의 소진이 일으키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그들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의 잔혹성만큼은 충분히 속으로 느꼈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실제 사건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고 학살은 위대한 승전으로 마무리되기 위해 스릴 넘치는 일련의 액션으로 변모했다.

 

그 기습에서 밀러는 최대한 많은 인디언을 죽이고 단돈 몇 푼에 그들의 장옷과 머리 가죽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조그만 유물 전시대를 차린 찰스 브리스틀에게 팔아넘겼다. 이것이 바로 가장 순수한 미국 정신에 입각하여 버펄로 빌과 존 버크가 대학살을 재해석하고 수정한 버전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교과서 버전이다. 아이들을 위한 버전. 이 짧은 연극 공연에는 인디언 보호 구역을 도망치며 탈진한 수 Sioux족의 기나긴 행진, 죽어 가는 무리를 꼬드겨서 고분고분하게 운디드니에 몰고 간 레인저들의 작전은 없었다. 호치키스 대포와 그 기적적 기술도 없었다. 거센 눈보라, 공동 시체 구덩이도 없고 여자와 어린 아기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코디의 도시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다. 이번에는 틀림없다. 예언자나 수녀들의 쓸모없는 상상이 아니라 보편적 인상, 사업의 필연성, 즉 욕망의 결과이다.

 

미국 군대가 <진보>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는 와중에 여러 세력들이 고개를 들었다. 광기 어린 투기 세력. 추악한 파산. 전설적 담합.

 

장사는 미친 짓이다. 입을 크게 벌린 구렁텅이이다. 거기 빠지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장사 외의 삶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난데없이 솟구치는 강풍에는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다. 온 세상이 증권과 금전 등록기에서 끝난다.

 

코디라는 도시는 무대 장치이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며 진실을 말한다. 멀리에서 보면 알맹이가 없고 흐리멍덩하다. 고뇌와 비현실성이 후광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다. 왜냐하면 그 도시는 죽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망. […] 거친 통나무 난간, 흉한 벽돌로 만든 벽, 슬롯머신, 로데오 걸. 코디에는 아무것도 없다. 거대한 슬픔뿐.

 

진정성과 과장, 잘 어울리는 이 두 가지 양념.

 

이 세상에 잊는다는 건 없다. 용서에는 뒤끝도 따르게 마련이다.

 

오래 살다 보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일도 있는 법이다. 긴 인생에는 나름의 간계와 굴절이 있는 법이다. 누구도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예전 같지 않은 현실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우정이 소중해진다. 자주 보지 못하지만 만나면 행복하다.

 

이제 하늘은 지상보다 덜 환하다. 그리고 지구는 플루타르크가 말한 것처럼, 우울하고 고독한 표정의 커다란 얼굴을 지녔으며 우리를 꿈꾸게 만드는 저 오래된 행성인 달로 변한다.

 

그러나 루나 파크의 달은 그 모든 것이 오로지 뾰족탑과 성채, 행복 그 자체이다. […] 인디언, 들소, 서부의 낡은 이야기는 뒷전이다. 이제 대중은 다른 것을 원한다. 대중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명해야 한다. 그들은 한 번도 없었던 것, 환상적 스펙터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원한다. 그들은 삶 그 자체, 삶 전체를 원한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햇살이 빛나면 싸구려 취향이 확연히 드러났고, 천박함이 도드라졌다.

 

슬프게 죽는 오락의 왕자들

 

노스탤지어가 단지 고삐 풀린 새것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이제 그 자체가 우리 지식의 형식이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명은 이렇게 변했다. 즉 새것과 아쉬움의 불가능한 동맹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이유 탓에, 한때 대중오락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창시했던 버펄로 빌 코디, 그 역시도 위대한 망각 속으로 잊혀 갔다.

 

우리 역시 위엄 있는 구닥다리, 수년간의 떠돌이 인생으로 대기실에 유폐된 늙은 배우의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비를 제작했던 그가 이제 돌연 사라져 가는 세계 속으로 들어갔고 문득 커다란 향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코디는 죽었지만 시팅 불처럼 죽은 것은 아니다. 그의 진수는 미국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 살아 있는 전설은 죽은 존재였다

 

문득 자신이 저지른 실수, 또한 그가 그 실수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인간은 원래부터 그런 걸 모를 수밖에 없도록 생겨 먹었다. 열 살이 되건 서른 살이 되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항상 홀로이며,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낮은 목소리로 고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말 못 하는 아기였던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장님과 귀머거리였을 따름이다.

 

죽음은 끈기가 있다. 죽음은 무대 앞의 관객처럼 침대 앞에 버티고 있다. 누구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은 입장료를 치렀고 우리가 파괴되는 꼴을 지켜볼 것이다.

 

이야기들

 

한 종족의 파괴는 항상 야금야금 단계별로 이뤄지며 각 단계는 요령껏 그 이전 단계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다. 인디언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을 착취한 스펙터클은 그들에게 어떤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스펙터클은 최초의 동의를 망각 속으로 폐기해 버렸다. 어디에서나 첫 번째 미혹은 잠시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매번 통제할 수 없는 파괴가 일어난다. 그리고 말[]의 세계는 실제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완전히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탈취되고 날아가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물론 <, 그래,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지, 당연히 짐작할 수 있어>라고 말할 테지만 그것은 막연한 상상, 완전히 추상적 생각, 단지 말뿐이거나 하나의 가정(假定)일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가정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연민, 이것은 이상한 것이다. 우리도 분명히 이 불쌍한 사람들과 조금은 닮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누구도 아닌 그저 불쌍한 사람들에 불과하고, 항상 똑같은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똑같은 연약한 몸, 똑같은 초췌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이란 것을. 저들이 곧 죽을 것이며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으며 우리가 보는 것에서 그 사실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문득 우리가 저들과 아주 가깝고, <저들과 비슷>한데, 바로 우리는 죽지 않을 테고, 거의 죽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슬픔을 사랑하자. 그의 무지에 동참하자. 그의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이기도 하며, 그의 작은 모자는 아마 우리에게도 잘 어울릴 것이다! 그를 바라보자. 밤이 하얗다. 내가 무엇을 써야 할지 귀띔해 달라. 제발 너의 얼굴은 더 이상 드러내지 말고 나를 쳐다보지 마라. 대지는 슬프고 육체는 고독하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불쌍한 왕인 너는 나쁜 패를 골라 쥔 채 거기에 있다.

 

 

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눈송이는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한 결정체이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물질 중 하나이다. 헤라클레스의 투구, 크로노스의 낫, 프로메테우스의 사슬이 모두 다이아몬드를 깎아 만든 것이다. 반면에 눈송이는 아주 연약하다.

눈송이만큼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윌슨, 그는 모든 작은 것에 매료되었다. 마치 그런 세계가 더욱 아름답고 더욱 소박하며, 더욱 섬세할 뿐 아니라 동시에 더욱 풍요롭고, 더욱 기묘하며 더욱 광활하기까지 해서 마치 그 미세한 것에는 어떤 마법이 존재하고 실은 거대하고 웅장한 이 아주 작은 세계의 이면에 또 다른 척도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수백 장의 눈송이 사진을 찍었다. 기적이었다. 서로 닮은 눈송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동등하면서도 다르고 묘하게 개별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눈, 혹은 눈송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자연은 하나의 스펙터클이다. , 물론 자연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눈송이는 연약하며 동시에 차갑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끔찍할 정도로 인간에게 단호하기 때문이다. 눈은 모든 것을 덮고도 남는다. 눈은 눈부시고 침울한 모습으로 세상의 표면을 뒤덮은 채 미동 없이 끈질기게 저기 존재한다.

 

그의 삶의 본질적인 것은 모두 눈[]에 집중되었다. 윌슨은 마치 산다는 것은 보는 것, 주시하는 것이며 가시적인 것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미친 듯 추구하며 온몸이 시선 속에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추구했을까? 아마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죽어 가는 시간, 허물어지는 형태에 대한 느낌.

 

나이가 든 그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했는데, 바람을 사진으로 찍고자 했다. […] 바람의 효과는 촬영할 수 있어도 바람 자체는 그럴 수 없다.

 

옮긴이의 말

 

역사 소설치고 비교적 짧은 분량인 그의 작품은 몇몇 주인공을 중심에 세우고 서사의 폭을 동심원 형태로 확장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무수한 인물이 제각기 자기 색깔과 형태를 감당하는 모자이크 벽화처럼 보인다.

 

뷔야르는 원래부터 인간은 현실보다 현실의 껍질을, 진실보다 진실처럼 보이는 허구에 쉽게 집착하기 때문에 역사는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문명은 항상 굶주린 거대한 짐승>이며 닥치는 대로 먹을 뿐 아니라 물질적이지 않은 먹이도 요구한다는 대목에서 그 비물질적 먹이가 바로 스펙터클이다.

 

현대는 확실히 사실보다 이미지를, 원본보다 복사본을, 현실보다 표상을, 본질보다 가장을 선호한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