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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디디의 우산 | 황정은

2020. 10. 27.
디디의 우산

디디의 우산

황정은

장편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百의 그림자』, 소설집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등으로 넓고 탄탄한 독자층을 형성한 동시에 평단의 확고한 지지를 받으며 명실공히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황정은 작가의 신간 『디디의 우산』.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d」(발표 당시 제목 ‘웃는 남자’)와 『문학3』 웹 연재시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인물과 서사는 다르지만 시대상과 주제의식을 공유하며 서로 공명하는 연작 성격의 중편 2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2014년 세월호참사와 2016~17년 촛불혁명이라는 사회적 격변을 배경에 두고 개인의 일상 속에서 ‘혁명’의 새로운 의미를 탐구한 작품들이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인간을 사유하는 깊은 성찰이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 아름다운 문장들과 어우러진 가운데 끝내 압도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반가운 신작이다.

 

 

디디의 우산

 

달력을 올려두고 식탁을 짚어보니 그것 역시 미지근했다.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가구와 식기, 유리, 각종 손잡이들. d는 그날부터 서서히 그것을 눈치챘다. 공기보다는 싸늘해야 마땅한 사물들이 미묘한 생물처럼 미열을 품고 있었다. 그 미적지근한 온기를 참을 수 없어 d는 사물과의 접촉을 줄였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될 수는 없으니 변한 것은 내 쪽이라고 d는 생각했다. 내가 차가워졌다,라고.

 

이승근은 솜씨가 별로 없는 목수였다. 고객들이 목공소로 찾아와 항의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고객이 많았으므로 고객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는 친절과 불안과 비굴함이 섞여 있었다.

 

D가 특별히 끔찍하게 여겼던 것은 톱날의 회전으로 목재를 자르는 절삭기들이 내는 소리였다. […] 나는 저 회전의 대가로 먹고산다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목공의 대가로 은반처럼 돌아가는 톱날에 자신의 조그만 손가락을 올리는 광경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d는 기다렸다. 톱날이 아버지의 피로 흥건해진 채 멈추는 순간을.

 

그런 순간에 관한 상상들은 d를 부끄럽게 만들곤 했고 죄책감을 느끼게 했으며 갑작스럽게 치솟는 분노로 아버지를 노려보거나 비슷한 정도의 환멸로 그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고요한 장소에 있을 때 d는 자신이 듣고 있는 것이 정적이나 고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소리의 흔적, 잡음들. 그것이 세계를 상시적으로 메우고 있었다. d는 별로 말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고 말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d에게는 세계가 이미 너무 시끄러웠다.

 

매일 그 우산을 보았다. , 이상하다고 d는 생각했다. 그걸 볼 때마다 그 사물도 d를 골똘하게 보는 것 같았다. 우산이라는 사물이 아니고 작은 dd인 것처럼, dd의 일부를 빌려다 거기 둔 것 같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방으로 돌아오다가 dd는 죽었다.

 

내동댕이쳐졌다.

D는 그것을 반복해 생각했다. 많은 것을 생각했는데 마지막엔 늘 그것을 생각했다. 내동댕이쳐졌지. 그 많은 사람이 타고 있던 버스에서. 정교하고도 무자비한 핀셋이 집어 내던진 것처럼 오로지 dd, dd만 바깥으로. 충돌의 결과, 우리가 매일 오가던 딱딱한 도로 위로.

 

상자를 채우고 물건을 버리고 상자를 채웠다. 사물들은 내내 기묘하고도 기괴한 생물들처럼 온기를 띠고 있었고 그것을 만질 때마다 d는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내버려 둘 수 없는 이유는, 거짓말을 하니까.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dd는 잠시 외출한 것 같았다. […] 사물들은 그런 착각을, 나중에 몇배나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인간은 사물과는 달라서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다고…… […] 누군가가 없어져도 그를 기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여기 없어도 여기 있고…… […] 사기를 치지 마시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

 

우리 박을 따지 말라고 야 이 도둑년, 박 도둑년, 아주 그러며 내 손에 든 박을 싹 빼앗아 갔지. 나하고 똑, 같은 나이를 먹은 것 같은 그년이 아주 말쑥한 얼굴과 머리를 하고 박 도둑년…… 그때에…… 대낮에 내가 너무 야속하고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때 내가 매우 놀라며 깨달았지. 내가 우는구나 부끄러운 것을 다 느끼는구나 살아서 이렇게 있구나.

 

산 사람의 살림이 오만잡종인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인간의 마음은 턱에 있다고 d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턱이 아팠으니까.

 

물방울처럼 생긴 다갈색 점. 그렇게 작은 상처도 흔적을 남기는데 dd의 죽음은……하고 d는 생각했다. 그 죽음은 내게 조그만 점도 남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삶이 내게, 알량한 점 하나 남겨주지 않았어.

 

환멸과 혐오. 그것이 d에게 가능했다. 왜 안 되겠는가. D는 그 뒤로 가끔 걸어서 강을 건넜다. 가능한 감정을 품고 살았다.

 

근무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분류 작업부터 상차를 마칠 때까지, 매일 열시간 이상 일하는 중노동이었다. 퇴근할 무렵엔 배가 고파 종로에서 국수를 사먹었고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에 15번 방으로 돌아왔다. 방을 나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이었다.

 

오디오 팔던 사람들, 부품상들, 도란스 기술자, 스피커 제조업자, 진짜와 똑같이 로고 라벨을 만드는 기술이 있던 노인들, 다른 기술자들. 그와 같은 공간에서 한 시절을 겪은 사람들. 그들이 다 어디 갔느냐고? 여소녀는 그 질문을 돌이킬 때마다 그들의 부재와 자신의 잔여와 이제 닥쳐올 자신의 부재를 한꺼번에 생각했다. 그렇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여소녀는 머쓱하게 외로워졌다. 내내 고장 난 기계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그의 수리실은 세상 적막한 곳에 당도해 있었다. 인기척 없는 황무지 기슭에.

 

경동택배 구역을 지나 종묘 쪽으로 걸으면서 괴이하다고 생각했다. 이 많은 화물이 이 사람 적은 상가에 이렇게 쌓일 수가 있나. 오가는 사람도 없는데 이걸 다 누가 샀나. 귀신들이 샀나. 상가는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고 그 변화의 방향은 쇠락이었다.

 

온라인에는 있었다. 조명기구, 전선, 전기난로, 전기장판, 선풍기, 빗자루, 콘센트 같은 생활용품을 사는 사람들. 그들이 매일 밤 집하장에 엄청난 규모로 쌓이는 화물들의 구매자였고 여소녀에게는 이들이 귀신들이었다. 발소리도 없고, 얼굴도 없는.

상가는 창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너를 아느냐고?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 알지?

d는 그의 말에서 그 말을 간신히 알아들었다. 활자 같은 말이었다. 들었다기보다는 본 것 같은 말.

 

비대한 자아와 형편없는 자존감이 뒤죽박죽 섞인 인격.

 

엘리스 프레슬리 러브 미 텐더”.

d가 기억하기로 아마도 지지난 해…… 성탄절에 그 노래가 나왔고 와인을 두병쯤 마시고 늘어져 있던 dd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 dd는 쿠션을 끌어안고 웃으면서, 그러므로 나는 이 사람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고, 굳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노래를 이미 많이 들었고, 들을 때마다 이게 뭐야……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 방법으로 노래를 부를 수가 있느냐는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는데도, 매번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이 노래를 듣게 되면 웃긴데, 서글플 정도로 웃긴데, 이상하게 행복해진다……

 

전축과 앰프와 스피커를 가져본 적이 없는 d는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공간을 공간이 되게 하는 소리.

 

해묵은 음반들, 너덜너덜하거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뻣뻣해진 마분지 껍데기들, 엘라 피츠제럴드, 조르주 무스따끼, 닐 영, 냇 킹 콜, 패티 페이지, 시나위, 뉴키즈온더블록, 신해철, 보니 엠, 엘리자베타 길렐스, 비발디, 마클 잭슨, 고르지 않은 취향, 그보다는 취향이 되기 전에 중단된 취향.

 

곽정은은 dd와 별로 닮지 않았지만 그가 잠을 잘 때, 눈을 감고 잘 때는 닮아 보일 거라고 d는 생각했다. d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런 식으로 닮았고 d의 부모가 그런 식으로 서로를 닮았고 아마도 d 역시 부모와 그런 식으로 닮았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산 사람들은, 가장 방심한 얼굴이 닮았다.

 

걔가 열살 때, 지저분하게 튀김을 쌓아둔 분식집 앞에서 튀김을 고르고 있더라. 한손엔 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엔 집게를 쥐고 엄청 고심하면서 오백원어치를, 그 돈에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바구니를 채우려고 거의 엄숙해보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어. 내 동생, 지금 자꾸 그 생각이 난다.

[…]

그게 자꾸 생각이 나서 저 안에 있을 수가 없다. 영정을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오백원어치, 걔가 들고 있었던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튀김이 그게 전부였다는 걸 생각하면 아주 미칠 것 같다. 돌아버릴 것 같아. 자 이제 니가 말을 해봐라. 걔가 그래도 마지막엔 좀 넉넉하게 살았다고…… 부족한 거 별로 없이 그래도 마지막엔 좀, ?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번에는 벽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 나는 그 사물들의 임시적 소유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것보다 혐오스러운 것, 좀더 견딜 수 없는 것, 말하자면 자신의 이웃을 향해, 그토록 열심으로 벽을 두들길 기회를 주고 있다. 재미있느냐고? 재미있다. 재미가 있다. D는 책장을 한장 더 넘기며 생각했다. 매트리스를 짓누를 때 말고는 존재감도 무게도 없어 무해한 그들, 내 이웃, 유령적이고도 관념적인 그 존재들은 드디어 물리적 존재가 되었다. 사악한 이웃의 벽을 두들기는 인간으로.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여소녀가 생각하기로는 세운世運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곳엔 세계의 기운이 이미 모여 있었다. 미래와 빤하게 연결된 현재,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실재, 비대하고 멋대가기 없는 외형, 시대의 돌봄을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알아서 먹고 살며 시대를 이루었고 이제 시대의 뒤꽁무니에 남은 사람들, 아 사기꾼들, 여소녀 자신을 비롯한 거짓말쟁이들, 그것도 조그맣고 하찮은 스케일의 사기밖에 칠 줄 몰라 여전히 보통 사람으로 여기 남은 , 내 이웃들…… 여소녀가 이해하기로는 그것이 세계의 기운이었다.

 

죽음을 생각할 때 나는 그런 광경이 떠올라요. 분명히 있었거나 너무 있었던 것 같은 순간들이요. 그것은 모두 과거이고 정지되어 있죠.

[…]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거나 움직일 때,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죽음을 느껴요. 매우 정지된 지금을요. 너무 정지되어서, 지금 바로 뒤를 나는 상상할 수 없고요 궁금하지도 않아요. 지금이라는 것은 이미 여기 와 있잖아요. 그냥 슥……

 

내가 현재나 과거를 생각할 때, 그것은 매번 죽음이고, 죽음을 경계로 이 세계와 저 세계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죽음엔 죽음뿐이며, 모든 죽음은 오로지 두개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격되거나 목격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나요?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이웅평)가 너무 부럽다. […]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혁명가들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고 그 믿음에 따라 바꾸려고 했거나 정말 바꿔버렸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런 건 읽지 않는다. 남의 나라 혁명사를 무용담처럼 읽어봤자…….

 

조짐은 늘 있다고 박조배가 말했다.

조짐?

[…]

유사시라는 말은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라는 뜻인데 비상한 일은 늘 일상에서 조짐을 보이게 마련이라고 박조배는 말했다. 갑자기……라는 것은 실은 그다지 갑자기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불시에……라는 것은 내 생각에…… 우리가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 일상을 말이다.

 

조배야 이것이 혁명이로구나. d는 생각했다. 우리는 우회한 것이 아니고 저 차벽이 만들어낸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 찌꺼기처럼 여기 도착했구나. 혁명은 이미 도래했고 이것이 그것 아니냐고 d는 생각했다.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 격벽을 발명해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혁명…… 밤공기가 싸늘했다.

 

망한다고?

왜 망해.

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 그냥 다만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

 

d는 아버지의 바지에 밴 지린내를 맡았다. 실내 구석구석에 부부의 배설물 냄새가 배어 있었다. d는 전에도 이 공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뒤섞였으면서도 각자 구별되는 냄새를 맡았고 그들이 그 냄새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으며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두 사람이 상대의 냄새를 견디며 같은 공간을 나눠 쓰는 것에 관해 생각하느라고 어머니나 아버지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는 했던 것을 떠올렸다.

 

조금씩 부서지고 잇는 이승근과 고경자의 삶을 d는 생각했고 dd가 살았다면, 그래서 그들 공동의 삶이 계속되었더라면, 자신과 dd도 마침내 이런 광경에 도달하게 되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보잘것없고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얼마나 아름다울까.

 

dd에게는 내내 도래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올 것이다. d는 현관에 서서 이승근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것을 깨달았다. 권태, 환멸, 한조각의 정나미도 남지 않은 삶. 이와 같은 얼굴이 나에게 올 것이고, 나는 혼자 그것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승근은 d에게 너의 애인은 왜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게요. d는 생각했다.

[…]

모르겠다고 d는 대답할 수도 있었다. 모르겠는데 실은 모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왜 함께 오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너무 하찮기 때문이라고, 나도 dd도 그리고 당신도, 우리가 너무 하찮아서, 충돌 한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너의 오디오가 이제 좀 특별해졌느냐고 여소녀는 물었다. 같은 모델이라도, 그 기기를 다룬 사람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고 여소녀는 말했다. 세상에 그거 한대뿐이니까, 빈티지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고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린다고 말하지.

 

d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 투명한 구를 잡아보았다. 섬뜩한 열을 느끼고 손을 뗐다.

쓰라렸다.

d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하라고.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매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단 한가지 이야기.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를.

 

나는 책의 형태로 종이를 수집한다.

[…]

내가 좋아하는 것은 결국, 종이에 인쇄된 검은 잉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각각의 책은 냄새도 다르다. 내가 가진 페이지들은 빛바랜 단면 색종이 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다른 것들은 다를 것이다. 각각의 책은 그것이 속한 공간의 냄새를 풍길 테니까.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내 친구 Y <더 레프트>와 맑스와 지젝의 열렬한 독자였지만 삼심대 중반에 노동자의 세상에서 불로소득으로 꿈/이상을 전향하고 갭투자 방식으로 허름한 다가구 빌라를 사들였다. […] 꼭대기 층에서 반지하까지 내벽을 따라 물이 새는 바람에 반지하에 세 들어 살던 화가의 그림 세점 값을 물어낸 적도 있었는데 […] Y가 가장 억울해한 부분은 어차피 팔리지도 않을 그림을, 이라는 점이었다.

 

우리 자매는 우리의 부모를 따라 종종 무기력했고 습관적으로 절망했으며 우리에게 어쨌거나 미래가 닥칠 거라는 것을, 우리가 그것을 맞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나는 군중 속에서 서수경이 달리는 모습엔 무언가가 있다고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모습엔 무언가가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달릴 때 서수경은 그저 달렸다. 욕심이나 걱정 없이, 바로 옆 트랙에서 출발한 경쟁자나 골라인이나 기록에 대한 관심 없이, 불필요한 움직임이나 괜한 버릇도 없이 꼭 필요한 동작만으로 서수경을 달렸고 그 모습엔 훗날 내가 생떽쥐뻬리의 책에서 읽은 문장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기둥이나 배의 밑바닥, 비행기 동체의 곡선을 묘사하며 그가 말한 바와 같이, “덧불일 것 없는 것이 아니고 빼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그 상황이 종결된 데 은밀히 안도하며.

 

모종의 부채감.

 

1996년의 연세대 사태는 폭력적시위대를 향한 대중의 혐오라는 것을 국가세력과 시위대가 동시에 목격한 사건이기도 했는데, 전자에게는 그 양상이 꽤 흥미롭게 여겨졌을 것이라고 서수경은 말했다. 1996 8 15일에 연세대학교의 그 육중한 철문이 포클레인으로 뜯겼을 때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을 뜯어낸 쪽이 정부였는데도 시위대의 폭력성을 개탄했지. 유레카. 고위 관리 중에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리적으로 고립시키고, 폭력이라는 틀을 씌운다. 수단으로써 그것은 철저하고도 완전한 발견이었을 거야. 물리적 봉쇄와 이념적 봉쇄, 운동과 일상의 격리. 말하자면 일상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의…… 박리. 뭐가 됐든 차벽이 그것을 완성시킬 것이다.

 

시위대가 그것에 손을 대고 흔들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더는 벽이 아니고 재산이 되잖아. 국가의 재산, 시위대의 움직임은 가로막힌 길을 뚫는 돌파 행위가 아니고 재산 손괘 행위가 된다. […] 재산 손괴 장면은 종종 인명 손실 장면보다 효과가 강하지. 왜냐하면 그 장면에 대한 이입이 훨씬 더 쉬우니까.

 

1997년 여름에 나는 포도밭에서 빠져나오면서 그곳(대학)을 떠났다.

 

그것을 첫 문장 삼아 불모의 세계를 탈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그 뒤를 이어 쓸 수 없었다. 무엇을 상상하고 어떻게 써도 거짓말, 기만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고, 내가 상상하는 것을 스스로 믿을 수 없었다. 탈출의 경험이 내게 없기 때문일까? 내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서수경은 1997년에 네가 김포 포도밭에서 나오지 않았느냐고, 그것이 탈출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것이 탈출일까? 나는 오랫동안 도망이라고 생각했다.

[…]

그 둘은 구별이 되는 것일까.

 

어쨌거나 어머니가 모성을 말하고 아버지가 금기를 말하는 이야기는 싫다.

 

1946년에 태어났고 52남의 장남인 그는 […] 남을 속이거나 해코지 못하는 착한 동생, 비정하고 몰인정한 사업의 세계에서 약삭빠르지 못해 손해만 보고 미끄러지는 불쌍한 오빠, 착하고 불쌍한 아들로 살아온 그는 스스로를 선하고 불쌍하게 보는데 익숙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자신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데 능숙하다.

 

한나 아렌트는 […] “아이히만에게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가지의 무능성을 언급한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

 

아버지의 말에서 나는 아렌트가 묘사한 아이히만 식의 상투성을 본다. 즉 말하기, 생각하기, 공감하기의 무능성을.

 

아파도 스스로를 돌보지 않아서 어머니를 안달복달한 상태로 밀어 넣고, 자신을 내버려둔다고 딸들을 원망하며 누군가를, 무언가를 혐오하는 데 전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네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면 아버지가 군인에게 잡혀간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겁에 질려 있었다.

[…] 아버지가 말하는 권위는 곧 힘이고 힘이란 곧 누군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누가 들을까 두려워 급하게 자식의 입을 틀어막게 만든 힘, 그는 그런 힘을 경험했고 그것이 힘이라는 것을 알며 힘이란 곧 그게 되었다. 그게 없음을 그는 혐오한다.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누구도 권위 없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권위 없음상태를 두려워한다. 그가 누군가의 권위 없음을 비난할 때 그에게는 그것을 하는 권위가 있으므로 그는 힘없음을 힘껏 혐오한다……

 

그 여유 있는 표정! 사돈의 미소를 그는 이렇게 일컬었다.

승자의 미소.

그 말을 듣고 김소리가 운전석에서, 내가 조수석에서 어떻게 얼어붙었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의 불쌍에 우리의 존재가 있었다니. 아니야 정확히 말해야지 우리의 보지가.

 

어른은 부끄러움 뒤에 온다.

 

자기 분야에서 무시할 수 없는 어른.

 

어른 입장.

그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사람이 그냥 자라면 어느 순간 어른인가?

내가 어른이야?

누가 내게 그 기회를 줬어?

 

그는 김소리에게 어른을 요구했지만 그 자신도 김소리에게는 어른이었으면서, 그는 김소리의 아무것에도, 김소리의 어른 됨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비난만 하고 갔어. 그의 어른 됨은 김소리를 관찰하고 김소리를 판단하고 사후에 다가와 비난 할 때에만 유용하게 작동했는데, 어른 됨이 그런 것이라면 너무 편리하고 야비하지 않나.

 

수치심. 모멸감. 자신을 향한 남의 경멸감. 어른의 재료가…… 그런 것일 수 있지. […] 어른이 되는 계기라는 것을 그런 감정과 우연한 경험의 조합으로 받곤 하는 삶에 나타나는 어른이란 어떤 인간일까……

 

어린이집 […] P선생은 파랑과 분홍으로 남녀를 구별하지는 않지만 정진원이 변기에 앉아 소변을 눈다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했을 때 그 소식을 김소리에게 전달하며 […] 진원이가 상처를 받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하는 걸 가르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라고 물어 김소리와 서수경과 나를 근심에 빠뜨렸다. 자신의 노동으로 우리 삶을 돕고 있는 그를 우리는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따금 우리는 그를 향한 신뢰가 우리 입장에서의 편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지만 그와 같은 일상이 문득 중단되는 순간을 우리는 상상한다.

[…]

서수경이 죽어도 내게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생각에서 자유로워본 적이 없다.

20년을 함께 살아왔지만 유사시, 우리에게는 서로의 유사가 전달되지 않는다.

 

일상에서 내 기도의 내용은 서수경의 귀가이다. 서수경이 매일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저 바깥에서, 매일의 죽음에서 돌아온다.

 

둘이 무슨 관계/사이예요?

우리가 무슨 관계인가.

[…]

친구친척이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이 가장 간단하고 간편하기 때문은 아니고 그것이 우리 이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잇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가 특히 성性적으로 상상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며 살아왔다. 그밖에도 우리의 관계를 안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존재를 혐오한 나머지 행할 수도 있는 언言과 행行의 가능성도.

 

너희가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서수경과 나는 우리의 대답으로(우리가 대답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가 또는 우리 각자가 대면할 수 있는 위험을 생각하고, 질문자와의 관계 변화를 생각하고,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대답 이후까지를 찰나에 상상하는데 우리에게 질문한 이웃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까?

 

사람들은 그런 걸 상상할 정도로 남을 열심히 생각하지는 않아.

그것을 알/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뭘까? 그것은 생각일까? 사람들이 자기 상식을 말할 때 많은 경우 그것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으니 그것은 생각일까. 아니야 common sense니까 세계에 대한 감이잖아. 그것이 그러할 것이라는 감.

 

그건 상식이지,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배제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그렇지. 적나라. 그 광경은 마치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는 남의 집 베란다처럼…… 우리는 왜 때때로 베란다를 청소하듯 그것을 점검해보지 않는 것일까.

 

1882년 거의 눈이 먼 상태에서 니체가 구입한 몰링 한센 타자기는 […] 알파벳이 새겨진 압정 모양의 자판이 박힌 반구 형태이며 […]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은 두 손을 오므려 누군가의 머리를 쓰다듬듯 문장을 타이핑했을 것이다.

 

맹인이 사용하는 글자를 점자라고 칭하는 것처럼 비맹인이 사용하는 글자를 일컫는 말이 있으며 그 말이 묵자墨字라는 것을 그때서야 […] 알았다.

 

서수경과 나는 사십여년을 사는 내내 그 말을 몰랐던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를 둘러싼 기록문자들, 우리가 보는 언어들이 전부 묵자인데 그것을 묵자라고 칭한다는 것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

 

우리는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묵자의 상태가 상식이라서 그걸 부를 필요도 없어, 그것이 너무 당연해 우리는 그것을 지칭조차 하지 않는다.

 

보는 이는 보지 못하는 이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이가 왜 거기 있는가? 그는 고려되지 않는다. 용산역 1번 플랫폼의 상식에 그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거기 없다…… 나는 아직 그것을 볼 수 있었으므로 거기 있었지만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상식의 세계라는 묵자의 플랫폼에서, 다시 한번.

 

도구를 쥔 인간은 도구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 니체

 

실명하고도 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점자와 촉각의 세계는 내게 세계를 향한 다른 감각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내가 내 이웃을 믿을 수 있을까.

 

탈출이 불가능한 세계의 파일럿은 파더/티처/기본값을 죽이러 돌아갈 수밖에 없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

 

사건 이후로 남일당에 간 적이 없었다. 가봤자, 무력감만 확인할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철거민이 아니었지. 아니었고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거라고 우리는 믿었지.

 

뭐가 무서워.

나는 무서워.

아니 네가 무서운 것이 뭐냐고. 그걸 말하는 동안 네가 두렵고 상처받을 것이 무서워? 그것이 너는 무서워?

[…]

내가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 너는 그것이 제일 무섭냐고 나는 물었지만 실은 비열해,라고 말하고 싶었고 끝내 그 말은 하지 못했는데 했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매번 집회의 평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나는 불편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평화적 시위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서수경과 내게 거의 강박처럼 보였다. 광장이나 여론이 모이는 곳에서 종종 보이곤 하는,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착한 시민이라는 자부가 우리는 불편했다. 착한 시민의 정상적 시위와 착하지 않은 시민의 비정적 시위가 이렇게 나뉘는 것일까.

 

그는 자기처럼 이 자리에 나온 많은 여성들은 왜 보지 않을까. 惡女라고 빨갛게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여성은 그렇게 선명하게 보면서도. 그 팻말 앞에서 나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하지 말라고……

말했어?

말할까 말하지 말까를 계속 망설였는데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우리니까……

 

서수경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함께 침묵하는 동안 평화적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에서 상처를 보았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깊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

 

다시 시작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추방, 인간 정신의 파괴, 다시 모든 것이, 그들에게 오늘은 틀림없이 오늘, 다른 날일 가능성이 없는 오늘이었을 것이다.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 프리모 레비

 

오시프 만델슈탐은 스딸린의 숙청작업이 이어지던 1938 5월에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금지되어 압수당하고 불태워진 그의 시가 망각 속에서 가라앉지 않은 이유는 그의 아내인 나데즈다 야꼬블레프나 만델슈탐이 그 시들을 끊임없이 암송하고 필사한 덕분이었다. 나데즈다는 말할 필요가 있었고 나 역시 그렇다.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한편을 완성하고 싶다. 언제고 쓴다면, 그것의 제목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로 하면 어떨까. 그것을 쓴다면 그 이야기는 언제고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소용되지 않아. 더는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로.

그것은 가능할까.

오후 1 39.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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