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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전쟁과 평화 3, 4 | 톨스토이

2020. 10. 29.
전쟁과 평화 세트 한정판

전쟁과 평화 세트 한정판

톨스토이 저/박형규

삶의 의미와 인간의 도덕적 완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대답으로 인류에 커다란 지혜를 상속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1805년부터 1820년까지 15년에 걸친 러시아 역사의 결정적 시기를 재현한 소설로, 나폴레옹 침공과 조국전쟁 등의 굵직한 사건과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수많은 개별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과 죽음, 새로운 삶의 발견을 그린 일대 서사시적 장편소설이다. 악을 상징하는 나폴레옹에서 선을 상징하는 농민 병사 카라타예프까지 총 559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톨스토이의 사상과 철학이 남김없이 녹아 있는 방대하고 복합적인 이 작품은 『일리아드』에 비견되는 최고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투르게네프와 로맹 롤랑, 버지니아 울프, 헤밍웨이, 토마스 만 등 세계적 작가의 극찬 속에 러시아 유산을 넘어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3

 

제1부

 

6월 12일, 서유럽 군세가 러시아 국경을 넘자 전쟁이 시작되고, 즉 인간의 이성과 모든 본성에 위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백만의 인간이 세계 모든 재판소의 기록이 몇 세기가 걸려도 모을 수 없을 만큼의 무수한 죄악과 기만, 배반, 절도, 위조지폐 발행, 약탈, 방화, 살인을 범했으나, 이 시기에 그것을 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범죄로 보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권력욕이니 알렉산드르의 완고함이니 영국의 교활한 정책이니 올덴부르크 대공이 당한 모욕이니 하는 것 때문에 수백만의 기독교도가 서로 살상하고 괴롭혔다는 것이 우리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원인 탐구에 파고들수록 더 많은 원인이 발견되고, 그 원인들은 하나하나를 뜯어봐도 또 총체로 보더라도 그 자체로는 전부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사건의 거대함에 비하면 너무 사소해 거짓 같기도 하고, 또 사건의 원인이라 보기에는 너무 타당성이 없기 때문에(겹치는 다른 원인 없이는) 전부 거짓 같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영국의 음모가 없고, 올덴부르크 대공이 없고, 알렉산드르가 모욕을 느끼지 않고, 러시아에 전제 권력이 없고, 프랑스혁명과 뒤이은 독재와 제정시대가 없고, 거슬러올라가 프랑스혁명을 유발한 여러 원인이, 기타 등등이 없었다면 역시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인 중 하나만 빠졌어도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원인─수십억 가지 원인─은 사건을 유발하며 우연히 동시에 겹친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특정한 원인이란 없으며,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행할 힘을 지닌 수백만이, 총을 쏘고 양식과 대포를 운반하는 병사들이, 일개인에 지나지 않는 약한 인간들의 의지의 이행에 동의하고, 복잡하고 다양한 무수한 원인에 이끌려 그 일에 유입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운명론은 불합리한 현상(즉 우리가 그 합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상의 이러한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할수록 그것은 더욱 우리에게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것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유를 행사하고,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은 지금 어떤 행위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전 존재로 느끼지만, 그 행위를 실행하자마자 시간의 흐름 속 어느 시점에서 실행된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유를 잃어버리며, 미리 정해진 의미만을 지닌, 역사의 소유가 된다.

 

인간에게는 양면의 생활이 있는데, 하나는 생활의 흥미가 추상적일수록 자유로워지는 개인적 생활이고, 또하나는 자기에게 정해진 법칙을 좋든 싫든 실행해야 하는 자연력이 행사되는 집단적 생활이다.

 

인간은 의식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하지만, 역사적이고 전 인류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무의식적인 도구 역할을 한다. 일단 실행된 행위는 돌이키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이의 무수한 행위와 합쳐지며 역사적 의미를 띠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단계의 높은 곳에 설수록,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수록 다른 사람에 대해 더 큰 권력을 갖게 되고, 또 개개 행동의 숙명과 필연성이 더 명백해진다.

 

‘왕들의 마음은 하느님의 손아귀에 있다.’

왕은 역사의 노예다.

역사, 즉 인류의 무의식적, 전체적, 집단적 생활은 왕의 생활의 매 순간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자신을 위해 이용한다.

 

사과는 익으면 떨어진다─왜 떨어지는 것일까? 지구의 인력 때문일까, 줄기가 마르기 때문일까, 태양에 건조되기 때문일까, 무거워지기 때문일까, 바람이 흔들기 때문일까, 아니면 밑에 서 있는 사내아이가 먹고 싶어하기 때문일까?

어느 것도 원인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이 있는, 유기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의 모든 조건이 일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역사상의 사건에서 이른바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 사건에 명칭을 부여하는 라벨이며, 원래 라벨이라는 것이 그렇듯 사건 그 자체와는 가장 관계가 적다. 자기 자신에게는 자유로운 것이라 생각되던 영웅들의 모든 행위도 역사적 의미에서 보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전체와 관련되어 있고, 개벽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신은 파멸시키려는 사람에게서 먼저 이성을 빼앗는다.

 

나폴레옹이 네만 강 도하를 명령하고 그 전위대가 카자크대를 격퇴해 러시아 국경을 넘은 그날, 알렉산드르는 베니히센의 별장에서 시종무관들이 베푼 무도회에 참석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이 보고를 받은 첫 순간 분노와 모욕감에 휩싸여 후에 유명해진 한 문구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황제 자신도 마음에 들고 또 확실히 그의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 무장한 프랑스인이 한 명이라도 러시아 땅에 남아 있는 한 강화를 맺지 않겠다는 문구.

 

전쟁이 시작될 무렵이면 늘 따르는 명랑함과 적극성.

 

다부는 나폴레옹 황제의 아락체예프 같은 존재였는데, 이 아락체예프는 겁쟁이는 아니지만 역시 지나치게 세심하고 잔인한데다, 잔인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자신의 충성을 나타낼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자연이라는 유기체 속에 늑대가 필요하듯, 국가라는 유기체의 메커니즘 속에도 이런 인간은 필요하며, 이런 인간이 있다는 것과 그가 국가의 우두머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아무리 부조리한 것일지라도, 그들은 항상 존재하고, 표면에 나타나며, 그 지위를 유지한다.

 

다부 원수라는 자는 자신이 우울한 인간일 권리를 갖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가장 우울한 생활 환경에 두려는 유형이었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항상 바삐 움직이고 집요하게 일한다. ‘당신이 보다시피, 지저분한 헛간에서 나무통에 걸터앉아 일하는데 어찌 인생의 행복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소.’ 그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런 인간들의 주된 즐거움과 요구란, 활기 넘치는 생활에 부닥쳤을 때, 그것의 코앞에 자신의 우울하고 집요한 활동을 내던지는 것이다.

 

과오의 가능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폴레옹의 신념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의 생각에 따르면 자신이 하는 행위는 전부 다 선한 것인데, 그것은 그 행위가 선악의 관념에 합치해서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는 일종의 식후 기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합리적인 이유보다 더 큰 자족감을 주고, 모든 사람을 자기 친구처럼 느끼게 한다.

 

“뭔가가, 누군가가, 그런 하찮은 인간조차도 남의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니!” (안드레이)

[…]

“하지만 불행을 만드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요. 인간은 그분의 도구예요.” […] “만약 누군가 오빠에게 죄를 지은 것 같다 생각되더라도, 잊고 용서해야 해요. 우리에게는 벌을 줄 권리가 없어요. 그러면 오빠도 용서하는 행복을 알게 될 거예요.”

“내가 여자라면 나도 그렇게 했을 거야, 마리. 그건 여자의 미덕이야. 하지만 남자는 잊어서도 용서해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어.”

 

‘저애는, 가엾고 순진한 저 존재는 노망한 노인의 희생물로 남아 있다. 노인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아들은 자라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지만,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생 속에서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할 것이다.’ (안드레이)

 

언제나 그렇듯 한쪽에 극단이 있으면, 반대의 극단에도 대표자들이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있는 여덟번째 파는 수적으로 다른 파들에 비해 99 대 1의 비율로 많았는데, 그들은 평화도, 전쟁도, 공격 작전도, 드리사든 어디든 방어 진지도, 바르클라이도, 황제도, 풀도, 베니히센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오직 중요한 한 가지, 즉 자신을 위한 최대의 이익과 만족만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자는 그저 자신의 유리한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오늘은 풀에 찬성하고 내일은 반대파에 찬성하다가도 모레는 그저 책임을 피하기 위해, 그것이 황제의 마음에만 들었다는 이유로, 아무 의견도 없다고 했다.

 

황제의 본분은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지 군의 지휘가 아니다, 즉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황제가 조신들과 더불어 군을 떠나는 것이다, 황제가 머물기 때문에 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5만의 군대가 마비 상태에 있다,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독립된 총사령관이 황제의 존재와 권력에 속박된 유능한 총사령관보다 훨씬 낫다.

 

풀은 부정적이고, 확고부동하고, 순교적이리만큼 자신만만한 독일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왜냐하면 추상적인 관념─과학, 즉 자기가 완전한 진리를 안다는 환상 위에 서서 자신감을 갖는 건 독일인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이 자신감을 갖는 건 자기가 지력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또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에 대해서도 자기가 절대적 매력을 지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국인이 자신감을 갖는 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 정비된 나라의 국민이므로 영국인으로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또 자기가 하는 일은 전부 의심의 여지 없이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인의 자신감은 이 민족이 쉽게 흥분하고, 자기도 남도 잘 잊어버린다는 데서 온다.

러시아인의 자신감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완전히 알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데서 온다.

독일인의 자신감은 그중 가장 나쁘고, 가장 완고하고 또 가장 역겨운데, 독일인은 자기야말로 진리, 즉 과학을 알고 있다고 망상하고, 자기가 생각한 과학을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풀도 확실히 그런 인물이었다.

 

전쟁학이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리도 없으며, 따라서 이른바 전쟁의 천재라는 것도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이제 그에게 완벽한 근거를 갖는 진리로 뚜렷해졌다. ‘조건과 상황이 분명하지도 일정하지도 않고, 전쟁 당사자들의 힘도 더욱 분명하지 않은 전투에 무슨 이론과 과학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왜 사람들은 전쟁의 천재라는 말을 쓸까? 시간 맞춰 건빵을 수송하도록 명령할 수 있고, 오른쪽 왼쪽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할 수 있다고 과연 천재일까? 천재라는 말은 광휘와 권력에 둘러싸여 있는 군인에게 우매한 대중이 그 권력에 천재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성질을 덧붙이고 아첨하며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장군들은 모두 바보 같거나 얼빠진 자들이다.

 

훌륭한 사령관에게는 특별한 자질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니 시정詩情이니 부드러움이니 철학적 탐구에 의한 회의懷疑 같은 가장 고매한 인간의 자질은 없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령관은 시야가 좁고, 자신이 하는 일이 몹시 중요하다고 확신해야 하며(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용감한 사령관이 될 수 있다. 보통 사람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동정하거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들이 권력자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그들을 위해 천재론이 위조된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전투의 승리에 기여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대오 속에서 틀렸다! 혹은 우라! 하고 외치는 자들이고, 이러한 대오 속에서야말로 나는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근무할 수 있는 것이다!

 

전에는 전투에 나갈 때마다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 공포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가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은 포화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위험에 익숙해질 수는 없다) 위험에 직면했을 때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전투에 나갈 때, 다른 어떤 것보다 흥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 즉 눈앞에 닥친 위험을 제외한 다른 온갖 것을 생각하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오스테르만의 찬사와 포상 약속은 로스토프에게 한층 기쁜 놀라움을 주어야 마땅했지만, 그는 그 막연하고 불쾌한 감정에 정신적인 구역질을 느끼고 있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대체 뭘까?’ […] 후회와도 같은 다른 뭔가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 턱에 보조개 같은 것이 파인 그 프랑스 장교다. 나는 사브르를 치켜든 내 팔이 잠시 멈췄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영웅적 행동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의 것이었단 말인가? 내 행동은 조국을 위한 것이었을까? 턱에 보조개 같은 것이 파인 파란 눈의 그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그 놀라는 모습이란! 내가 죽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왜 그를 죽여야 할까? 내 손은 떨렸다. 그런데도 나는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탔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인간은 저마다 다른 특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언제나 자기만의 특이하고 새롭고 복잡한 의사가 알 수 없는 병을 가질 수 있으며, 이것은 의학서에 쓰인 폐병이나 간장병, 피부병, 심장병, 신경병 같은 것이 아니라 이들 기관의 질환이 무수히 합쳐진 병일 수 있다는 간단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들이 병자와 병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요구를 만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경감을 기대하고 동정과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인간의 영원불변한 요구를 만족시켰다. 상처를 쓰다듬어주길 바라는 것, 어린아이에게서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그 요구를 만족시켰던 것이다.

 

만약 정해진 시간에 환약과 따뜻한 마실 것과 치킨커틀릿 같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일이고 위안이 되는 의사가 처방한 나날의 세세한 주의사항이 없었다면 소냐와 백작과 백작부인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주의사항들이 더 엄격하고 복잡할수록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욱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쇼스 부인이 수집할 정도로 상당한 양의 병과 상자의 약을 복용했음에도, 또 익숙한 시골생활에서 떨어져 있었음에도 젊음은 마침내 제 것을 차지했다. 슬픔은 지속되는 삶의 인상이라는 껍질에 덮이고, 이제는 전과 같은 고통으로 가슴을 짓누르지 않으면서 서서히 과거가 되기 시작했으며, 나타샤는 육체적으로 회복되어갔다.

 

자신은 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한 인간이 아니며, 오히려 이 세상 누구보다도 훨씬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이해할 수 없을 때는 모든 것을 이해하길 바라는 건 오만이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저 믿고 지금 자신의 영혼을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신에게 몸을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한층 감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나타샤)는 성호를 긋고, 무릎을 꿇고,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자신의 추악함을 두려워하며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용서해달라고 자비를 내려달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그런데도 내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이 이토록 의미도 없이,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채 흘러가다니.’ (나타샤)

 

제2부

 

이 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도 모두 각자의 본성, 습관, 조건, 목적 등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허영에 차고, 기뻐하고, 분개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또 그것이 자신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 모두가 의지를 갖지 않는 역사의 도구였으며,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이해가 될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활동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불변의 운명이고, 인간 사회에서 계급이 높을수록 자유는 줄어든다.

 

섭리는 이 모든 사람이 각자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누구 한 사람도(나폴레옹도, 알렉산드르도, 전쟁에 참가했던 다른 사람들도 물론) 기대하지 못했던 하나의 커다란 성과의 실현에 협력하도록 했다.

 

프랑스건 러시아건 간에, 일어난 사건을 예견한 것 같은 암시가 나오는 것은 어쩌다가 사건과 그 암시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시 횡행했던 수천수만의 반대되는 암시와 예상이 나중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틀렸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잊혀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잊혀버렸을 것이다. 진행중인 어떤 사건의 결과에 관해서는 늘 수많은 예상이 나오고, 그것이 어떤 결과로 끝나든 ‘나는 그때 이미 그렇게 될 거라고 말했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는 법인데, 그들은 무수한 예상 중에 정반대되는 일도 행해졌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황제가 군에 있었던 것은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였으나, 그의 존재, 무엇을 결정해야 할지 모르는 무지함, 무수한 조언자의 계획들이 제1군의 행동력을 말살하고, 후퇴하게 만들었다.

 

전쟁에 관해서는 공작영애 마리야도 세상 여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장에 있을 오빠를 걱정했고, 전쟁을 이해하지 못했고, 서로를 죽이는 인간의 잔혹함을 두려워했을 뿐 과거의 모든 전쟁과 다름없어 보이는 이 전쟁의 의미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젊은 주인을 알아챈 나이 많은 쪽 소녀는 깜짝 놀라 어린 친구의 손을 잡고 떨어져 흩어진 녹색 자두를 주울 겨를도 없이 자작나무 뒤로 숨었다.

안드레이 공작은 자기가 보았다는 것을 모르게 하려고 놀란 듯 급히 시선을 돌렸다. 겁먹은 귀여운 소녀들이 가여웠다. 그는 소녀들을 보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는 소녀들을 보면서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마땅하고 인간적인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러자 새롭고, 기쁘고,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소녀들에게는 분명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녹색 자두를 가져가서 먹고 싶은 한 가지 갈망밖에 없을 것이고, 안드레이 공작도 그들과 함께 그 일이 성공하길 바랐다.

 

“쿠투조프는 황태자가 군대에 계시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을 요청했던 모양입니다, […]”

“만약 황태자가 실수를 하시더라도 벌할 수 없고, 공을 세우시더라도 포상을 할 수 없습니다.”

 

경기에 진 훌륭한 체스 기사는 자신의 패인을 하나의 실수 때문이었다고 진심으로 믿고 승부 초반에서 그것을 찾아보려 하지만, 그는 모든 수에서 같은 실수를 했고, 완전한 수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실수는 오직 그에게만 눈에 잘 띄는데, 그건 상대방이 그 실수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전쟁이라는 승부는, 시대라는 일정한 조건 아래서 하나의 인간의 의지가 생명이 없는 기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다양한 자의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이므로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차마 입에 올리기도 두려운 일이지만, 때때로 회복의 징후가 아니라 임종이 다가온 징후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지켜보곤 했다. (마리야)

 

야코프 알파티치는 더이상 압박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농민들을 다스려왔고, 그들을 복종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복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재가 필요한 곳은 여기가 아니지. 조언자야 언제나 많지만 인재는 없거든. 만약 조언자가 모두 자네처럼 연대에서 근무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야.” (쿠투조프)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건 공격이나 습격이 아니라 인내와 시간이야.”

 

위험이 닥쳐오면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으레 두 개의 목소리가 똑같이 강하게 말하기 시작하는데, 하나의 목소리는 위험의 성질을 잘 파악해 벗어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무척 이성적으로 말하고, 또하나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예견하고 사건의 전반적인 움직임에서 달아나는 것은 인간의 힘에 부치고 위험을 생각하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우니 그것이 눈앞에 닥칠 때까지는 외면하고 즐거운 일만 생각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더욱 이성적으로 말한다. 혼자일 때 인간은 대개 첫번째 목소리에 따르지만, 집단사회는 두번째 목소리에 따른다. 지금 모스크바 시민의 경우가 그랬다. 모스크바가 이해만큼 흥겨웠던 적은 오래도록 없었다.

 

보로디노 전투는 왜 일어났을까?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나 러시아군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 전투의 직접적인 결과이자 당연한 결과는, 러시아군에게는 모스크바의 파멸(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가까워졌고, 프랑스군에게는 전군의 파멸(역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가까워졌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결과가 당시 너무나 명백했는데도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걸어오고 쿠투조프는 응전했던 것이다.

 

보로디노에서 전투를 걸거나 응전한 나폴레옹과 쿠투조프는 실로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행동을 했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들은 세계의 다양한 사건 속 자유의지가 없는 도구 중에서도 가장 노예적이고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인 지휘관들을 두고 선견지명과 천재성을 증명할 증거를 교묘하게 지어내 발생한 사실에 끼워맞추고 있다.

고대인들은 우리에게 영웅서사시의 전형을 남겨주었고, 그중에서 역사적 흥미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이 영웅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역사가 현대와 같은 인간적인 시대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것에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하고 있다.

 

난생처음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상생활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또 그것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아무런 고려도 없이, 다만 자기 자신과 자기 마음에 관한 문제로서 생생하고 거의 확실하게, 단순하고도 무섭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념의 절정에서 내려다보자, 지금까지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지배했던 모든 것은 갑자기 차가운 백색 광선에 비쳐 그림자도 원근도 없고, 윤곽조차 잃고 말았다.

 

그는 환등같이 떠오르는 자기 인생의 주요 장면들을 떠올리고 죽음에 대한 명백한 상념이라는 대낮의 광선 아래서 지금 그것들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말했다.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였던 그것들은 조잡하고 서툰 그림이었을 뿐이다.’ (안드레이)

 

공작영애 마리야는 이것은 높은 곳에서 보내신 시험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험인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위한 시험이란 말인가!

 

“노련한 지휘관은,” 피예르는 말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모든 우연을 예견하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적의 속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건 불가능하네.” 이미 처음부터 뻔한 일이라는 듯 안드레이 공작은 말했다.

 

“전쟁은 장기 같은 거라고 하잖습니까.”

“그렇지,” 안드레이 공작은 말했다. “허나 작은 차이가 있네, 장기에서는 말을 하나 움직이는 데도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니 시간적 문제를 도외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하나는 마는 졸보다 강하고 두 개의 졸은 언제나 한 개의 졸보다 강하지만, 전쟁에서는 때로 일개 대대가 일개 사단보다 강할 수도 있고 일개 중대보다 약할 수도 있다는 거야. 즉 군대의 상대적 힘이라는 건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지. 내 말을 믿게.”

 

“전투란 이기려고 굳게 결심한 자가 이기는 법이야. 왜 우리가 아우스터리츠에서 패했을까? 아군과 프랑스군의 손실이 거의 비슷했는데도 우리는 너무 성급히 우리가 졌다고 말했고, 그래서 진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당시 거기서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전장에서 달아나고 싶어했기 때문이네.”

 

“이 20만의 인간이 싸우고, 더 치열하게 싸워, 목숨을 덜 아끼는 편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날이야.”

 

“포로를 잡지 않는 것” 하고 안드레이 공작은 말을 이었다. “이것만이 전쟁의 성격을 변화시켜 잔혹함을 줄이는 길이야. 사실 우리는 전쟁을 유희처럼 해왔어─매우 나쁜 짓이야. 또 우리는 관대함을 과시하려 하지.”

 

전쟁은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역겨운 것이고, 우리가 이것을 이해해야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우리는 엄격하고 엄숙하게 이 무서운 필연성을 다뤄야 해. 요컨대 허위를 버려야 하는 거야,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지 절대 장난이 아니니까. 그렇지 않으면 전쟁은 한가하고 경솔한 사람들의 오락거리가 되고 말 걸세……

 

전쟁의 목적은─살인이요, 전쟁의 수단은─스파이 행위, 배반과 그 장려, 주민의 황폐, 식량을 얻기 위한 군의 약탈, 강도, 군사상의 계략이라고 불리는 속임수와 거짓말이며, 군인 계급의 기풍이란 자유의 결핍, 즉 규율, 무위, 무지, 잔인, 방탕, 음주지.

 

인간을 더 많이 죽인 자가 더 큰 상을 받고 있어……

 

“저곳에서 신은 그들을 어떻게 보시고 그 기도를 듣고 계실까!” 안드레이 공작은 날카롭고 비명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아, 여보게, 요즘 나는 사는 것이 괴로워졌네.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어. 역시 인간은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했어…… 그래도, 아주 오래가진 않을 거야!”

 

전투의 진행을 지시한 것도 나폴레옹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작전명령은 하나도 실행되지 못했고, 전투중에도 그는 눈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서로를 죽이게 된 것도 나폴레옹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와는 관계없이, 전투 전체에 참가한 수많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 행해졌던 것이다. 다만 나폴레옹에게는 전투 전체가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해진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코감기에 걸렸느냐 걸리지 않았느냐의 문제는 한 말단 수송병의 코감기 이상의 역사적 흥미를 지니지 못한다.

 

두 사람은 수초 동안 겁에 질린 눈으로 낯선 상대방의 얼굴을 노려보았고, 자기들이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얼떨떨한 채 서 있었다. ‘내가 포로가 된 것인가, 이자가 나의 포로가 된 것인가?’ 두 사람 다 이렇게 생각했다.

 

나폴레옹이 파견한 부관과 원수의 전령들만 전황 보고를 위해 전장에서 연달아 그에게 달려왔는데, 보고는 모두 사실과 달랐고, 그것은 격전이 한창일 때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많은 부관이 전투 현장에 가지도 않고 남한테 들은 것을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며, 게다가 부관이 나폴레옹이 있는 곳까지 이삼 베르스타의 거리를 말을 달려 오는 동안 전황이 달라져 가져온 보고가 이미 부정확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이 같은 부득이한 허위 보고를 고려해 명령을 내리고 있었으므로, 그 명령들은 내리기도 전에 이미 실행되었거나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행되지 못했다.

 

그들은 명령 불이행이나 독단에 뒤따를 견책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전투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신의 목숨이고, 그 생존이 때로는 달아나는 데, 때로는 전진하는 데 달렸다고 여겨지므로 전투의 열화 속에 있는 인간들은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진이건 후퇴건 이 모든 움직임은 정세를 호전시키지도 바꾸지도 못했다. 그들의 습격과 돌격은 서로에게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고, 피해와 사상은 인간들이 뛰어다니던 곳곳으로 가리지 않고 날아오던 포탄과 총탄에 의해 발생했다.

 

‘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이 있었던 걸까? 왜 나는 삶과 헤어지는 것이 그렇게도 쓰라렸을까? 이 삶에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그리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연민, 형제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우리를 증오하는 자에 대한 사랑, 적에 대한 사랑─그렇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지상에 설파하신 사랑이고, 공작영애 마리야가 가르쳐주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삶에 미련이 있었던 것이고, 만약 내가 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내게 남은 유일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늦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혼란에 빠진 러시아군의 배후를 본 자는 프랑스군이 조금만 더 분발하면 러시아군은 전멸할 거라고 말했을 것이고, 프랑스군의 배후를 본 자는 러시아군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프랑스군은 멸망할 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러시아군도 그 노력을 하지 않았고, 전투의 불꽃은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3

 

운동의 절대적 연속성이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어떠한 운동이건 인간이 임의대로 선택해 검토할 때, 그 운동의 분할된 단위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연속적 운동을 단편적 단위들로 분할하는 데서 인간의 오류 대부분이 발생한다.

 

역사의 결론이 어떻든 비평가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리는 것도, 그 관찰이 크든 작든 단편적 단위를 추출해서 한 것이기 때문이고, 취급된 역사상의 단위가 언제나 임의적인 것이라면 비판도 언제나 그럴 권리를 갖는다.

관찰을 위해 무한소의 단위─역사의 미분, 즉 인간들의 동질의 욕구를 인정하고, 적분(이 무한소들의 합)의 방법을 터득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역사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침략자가 있었고, 혁명이 있을 때마다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분명 침략자가 나타날 때마다 전쟁이 있었다고 인간의 이성은 대답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침략자가 전쟁의 원인이라거나 한 인물의 개인적 활동 속에서 전쟁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시계를 볼 때마다 바늘이 열시를 가리키고 있고 이웃 교회에서 예배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고 나에게 내 시곗바늘의 위치가 종의 운동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을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관찰 대상을 완전히 바꿔 황제들과 대신들과 장군들은 내버려두고 대중을 이끈 무한히 작은 동질의 요소들을 연구해야 한다.

 

러시아군은 120베르스타 떨어진 모스크바 후방까지 퇴각했고, 프랑스군은 모스크바까지 도달하자 정지했다. 그후 오 주 동안 전투는 한 번도 없었다. 프랑스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치명상을 입은 짐승이 출혈로 쇠약해지고 상처를 핥듯이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 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렀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별안간 퇴각해 칼루가 가도로 돌진했고(게다가 말로야로슬라베츠의 전투에서 승리해 다시 전장을 점령한 뒤였는데도), 전투 한 번 없이 더욱 속도를 올려 스몰렌스크로, 스몰렌스크를 넘어 빌나를 넘어 베레지나로, 그리고 계속 퇴각했다.

 

우리가 서재에서 지도를 보며 나라면 이런저런 전투에서 어떻게 지휘했을까 궁리하는 것처럼 전쟁과 전투 계획이 지휘관에 의해 작성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들, 즉 왜 쿠투조프는 퇴각할 때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필리에 도착하기 전에 진지를 점령하지 않았을까, 왜 모스크바를 포기한 뒤에 곧 칼루가 가도로 퇴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등등의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익숙한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총사령관의 활동의 배후에 있는 불가피한 조건을 잊었거나 혹은 모르는 것이다. 사령관의 행동은 우리가 서재에 편안히 앉아 지도를 보며 일정 수의 적군과 아군을 상정하고 어느 일정 위치에서 일어난 전투를 분석한다며 일정한 시점에서부터 공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총사령관은 우리가 어떤 사건을 고찰할 때 공상하듯 사건의 시작이라는 조건에 놓이는 일은 절대 없다.

 

총사령관 앞에는 언제나, 특히 긴박한 상황일 때는 하나가 아니라 반드시 수십 개의 계획이 동시에 제출된다. 그리고 전략과 전술에 입각한 그 계획들은 서로 모순되기 마련이다. 총사령관의 일은 그 제안들 가운데 하나를 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것조차 할 수 없다. 사건과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건─모스크바 포기와 소각─은 보로디노 전투 후 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모스크바 후방으로 퇴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일이었다.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논리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 선조 속에 깃든 감정으로 그 사태를 예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민중은 태평하게 적을 기다리고, 폭동을 일으키거나 동요하지 않고, 누구를 찢어발기는 일도 없이,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스스로 느끼며 조용히 운명을 기다렸다. 그리고 적이 접근해 오자마자, 부유한 자들은 재산을 버리고 떠나고, 가난한 자들은 머물러서 남아 있는 것들을 태우고 부숴버렸다.

그래야 하고, 언제나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러시아인들의 마음속에 그때도 지금도 존재했다.

 

“위험에서 달아나는 것은 수치이며, 모스크바에서 달아나는 것은 겁쟁이뿐이다.” 그들은 이런 말을 들었다. 라스톱친도 포고 전단에 모스크바에서 달아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겁쟁이라는 오명을 쓰는 것도 달아나는 것도 부끄러웠지만,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여전히 달아났다.

 

달아날 준비를 하고 먼저 달아난 것은 부유하고 교양이 높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빈과 베를린이 무사하다는 것도, 나폴레옹이 그 도시들을 점령했을 때 주민들이 이 매력적인 프랑스인과 잘 지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게다가 당시 러시아 남자들, 그리고 특히 여자들은 프랑스인을 좋아했다.

그들이 달아난 것은 러시아인에게 프랑스인이 지배하는 모스크바가 좋은가 나쁜가가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의 지배를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최악의 사태였다.

 

언제나 교활한 일에서는 어리석은 인간이 영리한 인간을 속여 넘기는 법.

 

지금 그(피예르)가 진정으로 바라는 단 하나는, 오늘 하루를 지내며 받은 무서운 인상을 한시라도 빨리 떨쳐버리고 일상의 환경으로 돌아가 자기 침대에서 조용히 잠드는 것이었다. 그는 일상의 환경으로 돌아가면 자기가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느꼈다. 그러나 일상의 환경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걸어가는 가도에는 포탄과 총탄이 휙휙 지나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광경은 전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괴롭고, 지치고, 때로는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한 표정의 얼굴이 있고, 똑같은 피, 똑같은 군복, 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포성과 찌는 듯한 무더위와 먼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란 인간의 자유가 하느님의 계율에 따르는 가장 어려운 복종이다.’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소박함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소박한 것이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 행동한다. 한 말은 은이고, 하지 않은 말은 금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모를 것이고, 자기 자신을 모를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피예르는 꿈속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기보다 들었다) 모든 것의 의미를 마음속에서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결합한다?’ 피예르는 자문했다. ‘아니다, 결합이 아니다. 사상은 결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모든 사상을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 연결해야 한다,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피예르는 자기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이 말로써 표현되고, 자기를 괴롭히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느끼고 마음속 깊이 감격하며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그렇다, 연결해야 한다, 연결해야 할 때다.”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모든 것이 파괴되고, 옳은 것도 옳지 않은 것도 없고, 앞길에 아무것도 없고,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갈 길도 전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적에게 점령된 도시는 순결을 잃은 처녀 같다.’

 

모스크바는 실제로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이전 인구의 오십분의 일가량은 남아 있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여왕벌이 없는 생명이 다한 벌집처럼 모스크바는 비어 있었다.

여왕벌이 없는 벌집에는 이미 생활이라는 것이 없지만, 표면적으로는 다른 벌집과 마찬가지로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라스톱친은 성격이 불같고 다혈질인데다, 늘 상류 관료사회에서만 교제했기 때문에 애국심은 있지만 자신이 지배하고자 하는 민중에 대한 이해심은 전혀 없었다.

 

민활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그렇듯 그는 모스크바가 포기된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알아챘지만, 이성으로만 알았을 뿐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의 상상은 새로운 상태로 옮아가지 못했다.

 

행정관이란 무사태평할 때는 통치하는 주민이 모두 자신의 노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고, 자신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의식 속에서 노고와 노력에 대한 최대의 보상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바다가 잠잠할 때는 낡고 작은 배를 타고 국민이라는 큰 배에 삿대를 뻗어 움직이기 때문에 큰 배가 자신의 노력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폭풍이 일어 바다가 미친듯이 날뛰고 큰 배가 제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런 착각은 하려야 할 수 없게 된다. 큰 배가 스스로 거대한 독립된 움직임을 시작하고, 움직이는 큰 배에 삿대가 닿지 않는 것을 깨닫는 순간, 위정자는 힘의 근원인 권력자의 지위에서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그는 군중을 내려다보며 발코니 문가에 서 있었다. ‘저놈들이 러시아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저놈들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라스톱친은 사태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누군가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이렇게 생각했다. 신경질적인 사람에게 흔한 일이지만, 그는 이미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여전히 분노의 대상을 찾고 있었다. ‘저것이 천민이다, 민중의 찌꺼기.’ 그는 군중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들의 무지에 의해 선동된 천민이다. 저들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손을 내젓고 있는 키가 큰 젊은이를 보면서 그는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그 자신에게도 그런 희생양, 즉 분노의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베레샤긴은 놀라움의 비명을 내지른 뒤, 고통으로 애끓는 비명을 질렀고, 이 비명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때까지 군중을 억누르고 있었던 극도로 긴장된 인간적인 감정의 둑은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일단 손을 댄 범죄는 마저 해치워야 했다. 슬픈 탄식은 군중의 미쳐 날뛰는 듯한 포효에 파묻혔다. 배를 부숴버릴 마지막 일곱번째 물결이, 억누를 수 없는 그 마지막 물결이 뒷줄에서 용솟음치며 앞줄로 밀려와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한 번 내려친 용기병이 다시 내려치려 했다. 베레샤긴은 공포의 비명을 내지르고 두 손으로 막으며 군중 쪽으로 뛰어들었다. 키가 큰 젊은이는 베레샤긴과 부딪치자 그의 가는 목을 부여잡고 거친 목소리를 지르며, 포효하며 달려드는 사람들 발밑에 그와 얽혀 쓰러졌다.

 

“오오, 하느님, 인간도 짐승과 다를 게 없구나, 살아 있는 인간들은 어디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우매한 민중은 두렵다, 그들은 혐오스럽다.’ 그는 프랑스어로 생각했다. ‘그들은 고기를 던져주지 않으면 누그러지지 않는 늑대와 같다.’ ‘백작! 우리 위에는 오직 하느님이 계십니다……’ 베레샤긴이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르며 등줄기에 불쾌한 오한이 스쳤다.

 

마차의 부드러운 스프링에 가볍게 흔들리고 군중의 무서운 외침도 더는 들리지 않자 라스톱친은 신체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고, 흔히 그렇듯 신체적인 안정을 찾자 이성은 그를 위해 정신적인 안정의 이유도 만들어주었다. 라스톱친을 안심시킨 사상은 별로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개벽 이래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게 된 후로, 이 사상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않고 동포에 대한 죄를 범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 사상이란 바로 공공의 복지, 즉 가상적인 타인의 복지였다.

격정에 사로잡혀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 복지라는 것을 모르지만, 죄를 범한 사람은 이 복지가 무엇인지 언제나 안다. 라스톱친도 지금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 판단으로는 자기의 행위를 비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호기를 교묘하게 이용해 죄인을 벌하는 동시에 군중을 달랠 수 있었다는 데서 자기만족의 이유를 찾았다.

‘베레샤긴은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라스톱친은 생각했다(그러나 실은 원로원에서 징역형을 언도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이놈을 베어라! 모두 죽음으로써 내게 보답하라!”라고 했던 자기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첫 일격을 가한 용기병의 놀란 듯하다가 이어 갑자기 잔인해지던 표정과 여우가죽 외투를 입은 청년이 자기에게 보낸 겁에 질리고 비난하는 듯한 무언의 시선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우매한 민중, 배반자…… 공공의 복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소, 나는 싸우지도 않고 모스크바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옷은 해지고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데다 병력은 삼분의 일로 줄었지만,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프랑스군은 아직 정연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피로하고 지쳤지만 여전히 위협적이고 두려운 군대였다. 그러나 그것이 군대였던 것은 병사들이 숙사인 민가로 분산되기 전까지였다. 각 연대의 병사들이 호화로운 빈집들로 흩어지자 군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주민도 병사도 아닌 약탈자라는 중간적인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오 주 후, 모스크바에서 나갈 때 그들은 이미 편성된 군대가 아니었다. 각자 귀중한 물건이나 필요한 물품들을 멋대로 산더미처럼 들고 와 어깨에 메거나 말에 실은 약탈자 무리에 불과했다. 모스크바에서 나갈 때 이들의 목적은 전처럼 정복이 아니라 약탈한 것들을 어떻게든 지키는 것이었다. 주둥이가 좁은 단지에 손을 넣어 호두를 움켜쥔 원숭이가 모처럼 쥔 것을 지키려고 주먹을 펴지 않으려다 자멸하듯, 프랑스군도 모스크바를 나갈 때 전리품을 떠메고 가다 원숭이가 호두를 쥔 주먹을 펼 수 없는 것처럼 그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멸했다.

 

물자는 산더미처럼 널려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점령되지 않은 지역에 더 큰 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모스크바는 더욱더 먼 곳으로까지 그들을 빨아들였다. 마른 땅에 물을 부으면 물도 마른 땅도 사라지는 것처럼, 굶주렸던 군대가 부유하고 거의 텅 빈 도시에 들어가자 군대도 부유한 도시도 사라져버리고, 이내 진창이 생기듯 화재와 약탈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프랑스인은 모스크바 화재를 라스톱친의 야만적인 애국심 탓으로 돌리고, 러시아인은 프랑스군의 난폭함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사실 이 화재를 한 개인 혹은 몇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만한 의미가 있는 원인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모스크바가 타버린 것은 시내에 소방 호스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목조 도시가 모두 탈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탔던 것이다. 모스크바가 탄 것은 주민들이 떠나버렸기 때문이고, 그것은 마치 대팻밥 더미에 며칠 동안 계속해서 불똥이 떨어지면 결국 불이 붙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스크바가 주민에 의해 불탄 것은 사실이지만, 남아 있던 주민이 아니라 떠나버린 주민에 의한 것이고, 적군에 점령된 모스크바가 베를린이나 빈, 그 밖의 도시들처럼 무사히 보존되지 못한 것은 주민들이 프랑스군에게 빵과 소금과 열쇠를 맡기지 않고 떠나버렸기 때문일 뿐이다.

 

똑같이 강한 두 가지 감정이 불가항력적으로 피예르를 그 계획으로 이끌고 있었다. 하나는 사회 전체의 불행을 의식한 데서 온 희생과 고통을 구하는 감정으로, 그것은 25일에 모자이스크로 가서 전투가 한창인 전장으로 뛰어들고, 지금처럼 집을 나와 익숙했던 사치와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옷도 벗지 않은 채 딱딱한 소파에 누워 자고 게라심과 같은 음식을 먹을 때의 감정이었고, 또하나는 모든 조건적인 것, 인위적인 것, 인간적인 것,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모든 것에 대한 막연한, 러시아인들이 지닌 독특한 경멸감이었다. 그는 이 기묘하고 매혹적인 감정을 슬로보드스키 궁전에서 처음 경험했는데, 부든 권력이든 생명이든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노력해서 이루고 소중하게 지키려는 그 모든 것에 만약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그런 것을 모두 내버릴 때 느낄 수 있는 기쁨뿐이라는 것을 그때 홀연히 느꼈던 것이다.

 

피예르는 나폴레옹을 습격하는 과정이나 그가 죽는 것은 생생하게 상상할 수 없었으나, 자신의 죽음과 영웅적 용기만은 이상하리만큼 뚜렷하게, 슬픔이 깃든 기쁨을 느끼며 상상할 수 있었다.

 

“온 세계에 다만 파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의식과 싸웠지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복수니 살인이니 자기희생이니 하는 지금까지의 어두운 일련의 상념이 처음 맞닥뜨린 인간과 접촉한 동시에 먼지처럼 날아가버린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프랑스인이 그토록 좋아하는 사랑은 피예르가 전에 아내에게 경험했던 저속하고 단순한 사랑이 아니었고, 나타샤에게 품었던 자기 혼자 열을 올리는 로맨틱한 사랑도 분명 아니었다(랑발은 이 두 경우를 모두 멸시하면서 전자를 마부의 사랑, 후자를 바보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인이 예찬하는 사랑은 주로 여성과의 부자연스러운 관계, 또는 사랑의 감정에 큰 매력을 덧붙여주는 온갖 추악한 것의 조합이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에 나타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사랑으로 할 수 있지만, 적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그런 기쁨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됐을까? 살아 있을까?…… 인간의 사랑은 미움으로 옮아갈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어떠한 것도, 죽음도 그것을 파괴할 수 없다. 그것은 영혼의 본질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미워했던가. 그리고 모든 사람 중에서 그녀만큼 내가 사랑하고 또 미워하던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나타샤를 생생하게 떠올렸는데, 이전처럼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는 매력을 지닌 존재로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그녀의 영혼 그 자체로 그려보았다. 그는 그녀의 감정, 고통, 수치, 후회를 이해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그녀에 대한 거절의 잔인함을, 절연의 냉혹함을 깨달았다. ‘한 번만 더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한 번만 더, 그 눈을 들여다보고, 말할 수……’

 

“나를 용서해주세요!” (나타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안드레이)

 

하지만 피예르는 그것을 모른 채 눈앞에 닥친 일에만 온 정신을 빼앗겨, 불가능한 일을 계획한 사람이 그렇듯 일의 곤란함보다 그 일이 그의 본성과 맞지 않는 것에 괴로워하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약해져 결국 자긍심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4

 

제1부

 

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는 루먄체프파와 프랑스인들파, 마리야 페오도로브나파, 황태자파, 그 밖의 파로 나뉘어 그들 사이의 복잡한 갈등이 여느 때처럼 궁중 수벌들의 잡음에 묻히면서도 여느 때보다 더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환영과 반영에만 노심하는 평온하고 화려한 페테르부르크의 생활은 종전과 다름없이 흘러갔으므로, 이러한 생활의 흐름 속에서 러시아 국민이 놓인 난국과 위기를 의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외출도, 무도회도, 프랑스 극장도, 궁중의 이해관계도, 직무상의 이해와 음모도, 모든 것이 전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당시의 이야기와 기록은 예외 없이 러시아 국민의 자기희생과 조국애, 절망과 슬픔과 영웅적 행위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의 대세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눈앞의 개인적인 관심에만 지배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당시 가장 유익한 인물들이었다.

국가의 대세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자기희생과 영웅적 행위로 거기에 참여하려 한 사람들은 오히려 사회의 가장 무익한 구성원이었는데, 그들은 만사를 거꾸로 보고 있었고, 그들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한 일은, 이를테면 러시아 마을들을 약탈하고 다닌 피예르나 마모노프의 민병대처럼, 귀부인들이 만들었으나 부상자들 손에는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는 린트 붕대 등처럼 실제로는 무익하고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똑똑한 체하고, 감정을 드러내길 좋아하고, 러시아의 현상에 대해 논하던 사람들까지도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자기 말 속에, 겉치레나 거짓말, 또는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는 일로 책망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무익한 비난과 증오를 드러내고 있었다. 역사적 사건에서 무엇보다 뚜렷한 교훈은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활동만이 열매를 맺을 뿐, 역사적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은 결코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의미를 이해하려 하면 그는 그 무익함에 놀랄 것이다.

 

니콜라이 로스토프도 자기희생이라는 목적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다만 복무중에 우연히 전쟁이 났기 때문에 오랫동안 직접 조국 방위에 참가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절망도 우울한 추측도 하지 않으며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러시아의 현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는 분명 그런 건 자기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쿠투조프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듣자니 각 연대가 보충이 되고 있다고 하니까 전쟁은 더 오래갈 것 같다, 지금 같으면 자기도 이삼 년쯤 후에는 연대를 맡게 될 거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소냐와의 미래 그림은 벌써 한참 전에 그려보았고, 모두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데다 소냐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하고 뚜렷했지만, 공작영애 마리야와의 미래는 그가 그녀를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릴 수가 없었다.

 

길러준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 타인의 행복을 위한 희생은 소냐에게 습관 같은 일이었다. 집안에서 그녀의 입장은 그저 희생으로밖에는 자신의 가치를 보여줄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희생에 익숙했고 또 그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에는 희생을 할 때마다 그 희생으로 자타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고,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니콜라에게 더욱 어울리는 여자가 된다는 기쁨을 의식했지만, 이번 희생은 희생의 모든 보상, 삶의 모든 의미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결행한 무서운 살인.

 

고생은 한때, 사는 건 평생이니까!

 

“재판이 있는 데는 어디든 거짓이 있는 법이죠.”

 

벌레는 양배추를 갉아먹지만 양배추보다 먼저 죽는다

 

“동냥자루와 감옥은 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잖습니까.”

 

“사랑하는 친구여. 운명은 머리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건 안 된다 저건 나쁘다 하며 불평만 하지요. 우리의 행복이란, 친구여, 그물 속 물 같은 거라서 잡아당길 때는 가득차 있지만, 올려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겁니다.”

 

훗날 그들에 대한 기억은 모두 안개에 싸인 것처럼 흐릿했지만, 플라톤 카라타예프만은 가장 강렬하고 귀중한 추억으로, 또 모든 러시아적인 선량함과 둥글둥글함의 화신으로 피예르의 마음에 영원히 남았다.

 

그의 말투의 주된 특징은 솔직함과 과단성이었다. 그는 분명 자기가 한 말이나 할 말을 한 번도 미리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어조의 속도와 정확성에는 독특하고 반박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었다.

 

매일 아침과 밤마다 누울 때는 “하느님, 돌처럼 자고 빵처럼 일어나게 해주소서”라고 말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기지개를 펴며 “잘 때는 웅크리고, 일어나면 쭉 펴고”라고 말했다.

 

방에 달려들어왔을 때 나타샤의 흥분한 얼굴에는 오직 하나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것은 그에 대한, 공작영애 마리야에 대한, 그 밖의 사랑하는 주변의 모든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었으며, 타인에 대한 연민, 동정,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려는 열망의 표정이었다. 분명 이 순간 나타샤의 마음속에는 그와 자신의 관계나 그녀 자신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가 힘든 것 같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가 그런 것은 이해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다른 어떤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그는 속으로 말하고, 이 말을 누이에게도 하려 했다. ‘아니, 하지 말자,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해석할 것이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모든 감정이 그저 우리 인간의 것에 불과하고, 우리가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 또한 모두 쓸데없는 것임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입을 다물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는 생각했다. ‘사랑은 죽음을 방해한다. 사랑은 생명이다.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사랑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은 신이고, 따라서 죽음은 사랑의 일부인 내가 보편적이고 영원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생각이 그에게는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뭔가 일방적이고 개인적이고 이성적이며, 불분명한 것이 있었다. 불안과 모호함이 있었다. 그는 잠이 들었다.

 

사람들은 어느새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고, 모든 화제는 닫힌 문이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바뀐다. 그는 빗장을 걸어 닫기 위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간다. 문을 제때 닫느냐 못 닫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그는 빨리 가려 서두르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고, 제때 문을 닫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힘겹게 있는 힘을 다한다. 괴로운 공포가 그를 사로잡는다. 이 공포는 죽음의 공포이고, 문밖에는 그것이 서 있다. 그러나 그가 힘없고 불편한 모습으로 문가로 기어갈 때, 무서운 무언가가 이미 반대쪽에서 문을 밀며 들이닥치려 한다. 인간적이지 않은 그 무언가—죽음—가 강제로 밀고 들어오려 하고, 그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는 문에 달라붙어 이미 닫지는 못해도 적어도 막아보려고 마지막 힘을 다하지만, 그의 힘은 약하고 서툴러서 무서운 그것에 밀린 문이 잠시 열렸다가 닫힌다.

다시 그것이 바깥쪽에서 밀어댄다. 마지막 초인적인 노력도 무의미하게 문은 소리도 없이 양쪽이 열렸다. 그것이 들어왔고, 그것은 죽음이었다.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은 죽었다.

 

‘그렇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나는 죽었다가 눈을 뜬 것이다. 그렇다, 죽음은—각성이다!’ 갑자기 마음속이 밝아지고, 지금까지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을 가리고 있었던 장막이 마음의 눈 앞에서 걷어올려졌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 안에 묶여 있던 힘이 해방되는 느낌을, 또 그후로 그를 떠나지 않았던 이상한 가벼움을 느꼈다.

 

그날부터 안드레이 공작은 잠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삶에서도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온 시간에 비해 삶에 대한 각성의 시간이, 꿈꾼 시간에 비해 잠으로부터의 각성의 시간보다 느리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울지도 떨지도 않았고, 임종이 다가오자 그것을 직감하며 이제 더는 그가 아니라(그는 이미 없었고, 그들을 떠나버렸다) 그에게 가장 가까운 추억인 그 육체를 돌보았다.

 

제2부

 

온갖 현상의 원인을 종합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는 원인을 탐구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는 각각이 개별적으로 원인이 될 수 있는 현상들의 수많은 조건과 복잡성은 깊이 탐구하지 않고, 가장 처음의, 가장 알기 쉬운 근접한 것을 포착해 그것을 원인이라 말한다. 역사적 사건에서(인간 활동을 관찰의 대상으로 하는) 태초에 있고 근접하다고 생각되는 원인은 하느님의 의지이고, 그다음은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 즉 역사상 영웅들의 의지다. 그러나 각 역사적 사건의 본질, 즉 사건에 참가한 인간 전체의 활동을 통찰해본다면, 역사상 영웅의 의지가 인간 전체의 활동을 지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들에게 인도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언뜻 역사적 사건의 의의는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결국 마찬가지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셋째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역사 연구가들이 측면 행진은 어느 한 사람의 공로가 될 수 없고 아무도 결과를 예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인데, 이 군사행동은 필리에서의 퇴각과 마찬가지로 당시 누구도 전면적으로 예상하지 못했고, 한 걸음에서 한 걸음으로, 사건에서 사건으로,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며 수없이 다양한 조건에서 흘러나온 것이었고, 그것이 실현되고 과거의 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전모가 드러났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좋은 것이라 좋은 게 아니라 자기 머리에 떠오른 것이 좋은 거라는 예의 신념을 품고 나폴레옹.

 

모두가 모여 성취해야 할 일을 어서 수행해야겠다는 초조감.

 

그리고(특히 무엇보다) 막연하지만 모든 장병의 마음에 싹튼 의식, 즉 이제 힘의 관계가 변해 아군이 우세해졌다는 의식.

 

그 자신은 찬성하지 않는 전투를 지휘해야 한다는 불쾌한 의식.(쿠투조프)

 

한편 베니히센의 통솔 아래 톨리가 지휘하던, 공격에 늦어버린 보병 종대는 ‘제1종대는 진출한다’ 등등의 그 작전명령에 따라 지정된 시각에 출발해 어딘가에 도착했는데,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곳은 지정된 장소가 아니었고, 그러자 여느 때처럼 유쾌하게 출발했던 그들은 지체되고, 불만의 소리가 들리고, 혼란이 의식되고, 어딘가 후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전투—타루티노의, 보로디노의, 아우스터리츠의—는 지휘관의 예상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이것이 본질적인 조건이다.

자유로운 힘들이(생사가 걸린 전투 때만큼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때는 결코 없으므로) 전쟁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그 방향은 절대 미리 알 수 없으며, 또 어떤 하나의 힘과 방향이 절대 합치하지도 않는다.

온갖 방향을 가진 힘이 동시에 어떤 물체에 작용한다면 이 물체의 운동 방향은 이 힘들 중 어떤 것에도 합치하지 않고 항상 중간의 가장 짧은 방향, 즉 역학에서 힘의 평행사변형의 대각선으로 표시된다.

 

싸우지도 않고 몇 개 군단을 포로로 하고, 포위도 하지 않았는데 여러 요새가 항복했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 독일에서 행해진 전쟁에 관한 유일한 설명으로 독일인들에게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인정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히도 우리 자신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사실을 정직하고 똑바로 볼 권리를 얻기 위해 대가를 치렀으므로 이 권리를 양보할 수 없다.

 

전군의 상태는 마치 파멸을 예감하면서도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처 입은 짐승과 비슷했다.

 

“약속은 일의 형제죠. 금요일까지라고 했으니 금요일까지 했습니다.”

 

그전부터 부질없이 갈망하던 평안과 자신에 대한 만족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기간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오랫동안 온갖 방면에서 이 평안과 자기조화, 즉 보로디노 전투 때 병사들 속에서 발견하고 그토록 감동했던 그것을 자선 속에서, 프리메이슨 속에서, 사교생활의 오락과 술과 영웅적인 자기희생과 나타샤에 대한 낭만적인 사랑 속에서, 또한 사색을 통해서 찾아보았지만 온갖 탐색과 시도는 전부 그를 기만했다. 그런데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다만 죽음의 공포를 통해, 궁핍을 통해, 카라타예프에게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을 통해 평안과 자기조화를 얻었다.

 

욕구의 총족, 즉 좋은 음식, 청결, 자유 등은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박탈당한 지금의 그에게는 완전한 행복으로 여겨졌고, 직업의 선택, 즉 생활은, 역시 그 선택이 극도로 제한된 지금의 그에게는 너무나 가벼운 일로 느껴졌기 때문에 생활의 편의와 과잉이 욕구 충족의 행복감을 소멸시키고, 직업을 선택하는 자유보다 더 커다란 자유, 즉 그의 삶에서 교육과 부와 사회적 지위가 부여해준 자유가 오히려 직업 선택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만들고 직업을 가질 필요성과 가능성마저도 소멸시켰다는 것을 잊게 할 정도였다.

 

“하사관님, 병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피예르는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이 하사관이 자기가 알던 사람인지, 아니면 모르는 다른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

‘바로 그것이다!…… 또 그것이다!’ 하고 피예르는 생각했고,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등골에 오한이 스쳤다. 싹 바뀐 하사관의 얼굴에서도, 그의 목소리에서도, 귀청을 찢을 듯이 요란하게 울리는 북소리에서도 피예르는 신비하면서 냉담한 힘, 사람들에게 자기 의지를 거슬러 자기와 같은 인간을 죽이게 하고, 사형이 집행될 때 그가 직접 그 작용을 목격했던 힘을 보았다. 그 힘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몸부림치면서도 그 힘의 도구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부탁이나 설득을 한다는 건 헛된 일이었다. 이제 피예르는 그것을 알았다

 

장교는 낙오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피예르는 사형 집행 때 자신을 압박했던 힘이, 포로생활 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숙명적인 힘이 지금 또다시 자기 존재를 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무서웠지만, 숙명적인 힘이 짓누르려 할수록 그것에 지배되지 않는 생명력이 마음속에서 자라고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병사는 나를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붙잡아 가두고 나를 포로로 잡고 있다. 대체 내가 누구인데? 나를? 나를?—내 불멸의 영혼을! 하, 하, 하!…… 하, 하, 하!……” 그는 눈물이 나올 만큼 웃었다.

 

‘이것은 모두 내 것이고,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고, 이 모든 것이 나다!’ 피예르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붙잡아 판자를 둘러싼 바라크 속에 가둔 것이다!’

 

도흐투로프에 관한 이와 같은 침묵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그의 진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도흐투로프와 마찬가지로 삐걱거리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기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는 톱니바퀴 중 하나였다.

 

‘공격을 하면 질 뿐이라는 것을 그들도 분명 깨달아야 한다. 인내와 시간, 이것들이 나의 용사들이다!’ 쿠투조프는 생각했다.

 

‘모두들 짐승을 어떻게 죽였는지 보러 달려가고 싶어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연신 행동이니 공격이니 하고 있다!’ 그는 생각했다. ‘뭐 때문인가? 모두 공을 세우고 싶어서다! 분명 싸움에는 무언가 즐거운 것이 있다. 그들은 잘 싸우는 걸 보이고 싶을 뿐이고 실정을 물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다.

 

브루시에 사단에 관한 돌로호프의 보고, 나폴레옹군의 재난에 관한 파르티잔의 보고, 모스크바를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 등은 모두 프랑스군이 타격을 받고 퇴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예상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예상에 지나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중요하게 생각되었지만 쿠투조프에게는 그렇지가 않았고, 그는 육십 년의 경험으로 세상의 소문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두면 되는지 알았고, 사람들이 뭔가를 바랄 때 자기 희망을 확증하고자 온갖 정보를 배합하고, 희망에 모순되고 반하는 정보는 흔히 간과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쿠투조프는 뭔가를 원할수록 오히려 믿지 않으려 했다.

            

이 소식을 받은 후부터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쿠투조프의 모든 활동은 자신이 가진 권력, 술책, 요청 등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부질없는 공격과 이동, 파멸해가는 적과의 충돌이 없도록 자기 군대를 억제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전에는 군대를 이루었던 이 사람들(나폴레옹과 모든 군인)은 막연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던 막다른 상황에서 자신만이라도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가길 바라며 지휘관과 함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달아났다.

 

인간은 행동을 할 때 언제나 그 행동의 목적을 생각해내려고 한다. 천 베르스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천 베르스타 앞에 뭔가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움직이는 힘을 얻기 위해서는 약속의 땅이라는 관념이 필요하다.

프랑스군에게 약속의 땅은 진격할 때는 모스크바였고 퇴각할 때는 조국이었다.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열망은 언제나 군중 속에서 증폭된다.

 

그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전투를 하고, 도로를 차단하고, 부하들을 잃고, 불행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일 이유가 대체 어디 있는가? 모스크바에서 뱌지마까지 가는 도중 이 군대의 삼분의 일이 싸우지도 않고 소멸해버렸는데 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

 

제3부

 

군대가 승리하자마자 승리한 국민의 권리는 증대하고, 패배한 국민의 권리는 상실된다. 군대가 패하면 그 정도에 따라 국민도 곧바로 권리를 상실하고, 군대가 완패하면 국민도 완전히 정복된다.

 

그런데 갑자기 1812년에 프랑스군은 모스크바 부근에서 승리를 거뒀고, 모스크바가 점령되고 뒤이어 새로운 전투가 전혀 없었는데도 그 존재가 사라진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60만 프랑스 군대이며 나폴레옹의 프랑스였다

 

국민 전쟁이라는 몽둥이는 무서운 힘으로 번쩍 쳐들려 누구의 취향에도 규칙에도 아랑곳없이 우둔하리만큼 단순하지만 목적에 알맞게 무턱대고 올려지고 내려지며 마침내 침입군이 전멸할 때까지 마구 두들겨졌던 것이다.

 

싸우려는 열망이 클수록 언제나 가장 유리한 조건에 있는 것이다.

군의 사기는 승수이고, 이것을 질량에 곱해 비로소 힘이라는 값을 얻을 수 있다. 군의 사기라는 이 미지의 승수의 뜻을 규정하고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군사학의 과제다.

 

이 세 집단 중 가장 인원이 많이 줄어든 것은 포로 집단이었다. 모스크바를 떠난 330명 중 남은 사람은 채 100명이 되지 않았다. 포로들은 호송병들에게 기병 물자 수송대의 안장이나 쥐노의 수송차보다 더 거추장스러웠다. 안장이나 쥐노의 수저라면 어디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았지만,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병사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춥고 굶주린, 도중에 죽거나 낙오하고, 낙오하면 명령대로 총살되는 그들을 대체 뭐 때문에 감시하고 호위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송병들은 자신들이 비참한 상태에 놓인 만큼, 포로들에 대한 동정심에 이끌려 자기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게 될까 두려운 나머지 그들을 더욱 음울하고 가혹하게 다뤘다.

 

그는 이 세상에 인간이 행복하고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부자유스러운 상태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처음에 그를 힘들게 한 것은—발이었다. 행군 이틀째 피예르는 모닥불가에서 발의 부스럼을 살펴보고 이 상태로는 도저히 걸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모두가 일어나자 그도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 열이 나면서 고통 없이 걷게 되었으나 그날 저녁 발을 살펴보니 훨씬 악화돼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보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했다.

 

낙오된 포로가 이미 백 명 이상 총살되었지만, 피예르는 그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했다. 그는 나날이 쇠약해져 머지않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 분명한 카라타예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처지가 힘들수록, 또 미래가 무서울수록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금의 처지와는 점점 더 무관한, 즐겁고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상념과 추억과 상상이 떠올랐다.

 

“몸은 어떤가?” 그는 물었다.

“몸이 어떠냐고요? 병에 걸렸다고 울고불고하면 하느님이 제대로 죽게 해주시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고 카라타예프는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삶은 모든 것이다. 삶은 신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이며, 이 움직임은 신이다. 삶이 있는 한, 신을 자각하는 기쁨이 있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의 고통 속에서, 죄 없이 받는 고통 속에서 이 삶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가장 커다란 기쁨이다.’

 

모스크바에서 네만 강까지의 퇴각에서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이 했던 행동은 두 사람이 눈을 가리고 한쪽이 이따금 방울 소리를 울려 술래에게 자기 위치를 알리는 소경놀이와 흡사했다. 처음에는 잡히는 쪽이 술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방울 소리를 울리다 상황이 악화되면 소리내지 않고 걸으려 애쓰며 달아나다가 오히려 적의 수중에 곧장 뛰어들곤 했다.

 

역사적 판단이라는 매우 탄력 있는 실을 더이상 늘일 수 없을 때, 그리고 어떤 행동이 전 인류의 선이나 정의라고 불리는 것과 명확히 상반될 때, 역사가들에게 구원이 되는 위대함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위대함은 선악의 척도를 벗어난 것 같다. 위대한 인간에게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공포는 없다.

 

“숭고(나폴레옹은 자기 안에서 숭고한 무언가를 보았다)와 우스꽝스러움은 겨우 한 발짝 차이다” 하고 나폴레옹은 말했다.

 

그리고 선악의 척도로 잴 수 없는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무가치함과 한없는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준 선악의 척도로 우리가 잴 수 없는 것은 없다. 또한 단순함, 선함, 정의가 없는 곳에는 위대함도 있을 수 없다.

 

국민적인 자부심을 떠나 이 결론은 그 안에 모순을 담고 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군의 승리의 연속은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킨 반면 러시아군의 패배의 연속은 적을 섬멸하고 조국에서 적을 일소시켰기 때문이다.

 

제4부

 

사람은 죽어가는 동물을 볼 때 그 자신인 것, 즉 그의 본질이 눈앞에서 분명히 소멸하고 존재하기를 멈추기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죽어가는 그것이 인간이면, 더욱이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이면, 생명의 소멸에 대한 공포 외에도 단절감과 정신적인 아픔을 느끼며, 그것은 육체적인 상처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생명과 결부되기도 하고 때로는 치유되기도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그 상처는 아프고, 외부의 자극적인 접촉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삶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므로 살아가야 했다.

 

이 고독은 그녀를 지치고 괴롭게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그가 가버린 삶의 저쪽을 보고 있었다. 전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아주 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던 삶의 저쪽이 지금은 모든 것이 공허와 파탄의 고통과 모욕뿐인 삶의 이쪽보다 더 가깝고 친숙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한 가지 두려운 건,” 그는 말했다. “고통받는 사람과 자신을 영원히 결부시키는 거예요. 그것은 영원한 고통입니다.”

[…]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을 거예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당신은 건강해질 거예요—완전히.”

[…]

그가 그 말을 했을 때의 슬프고도 엄격했던 긴 응시가 떠올랐고, 그 길었던 응시에 담긴 비난과 절망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의 친구, 엄마.” 그녀는 어머니를 짓누른 슬픔의 과잉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옮겨보려는 듯 사랑의 온 힘을 기울이며 되풀이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시 현실과 무력한 싸움을 하며, 꽃다운 나이의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도 자신은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현실에서 벗어나 광기의 세계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집요하고 인내심 있는 나타샤의 사랑은 설득과 위로가 아니라 삶으로 돌아오라는 요구로서 줄곧 백작부인을 사방에서 에워싸는 것 같았다.

 

페탸의 죽음은 그녀의 생명 절반을 앗아갔다. […] 그러나 백작부인을 반쯤 죽인 것과 다름없는 이 새로운 상처가 나타샤를 삶으로 돌아오게 했다.

정신의 몸이 찢겨 생긴 마음의 상처도 육체의 상처와 똑같아서, 그것이 아무리 이상해 보이더라도, 역시 깊은 상처는 아물고 양끝이 붙어 육체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에 의해 비로소 낫는 법이다.

 

그녀는 그것을 몰랐고 또 믿지도 않았겠지만 그녀의 영혼을 뒤덮은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진흙층 밑에서 어느새 가늘고 부드럽고 바늘 같은 어린싹이 돋아나고 있었고, 이 어린싹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그녀를 짓눌렀던 슬픔을 보이지 않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덮어줄 것이었다. 상처는 안에서 아물고 있었다.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러시아군의 기민한 행동은 프랑스군에게 패주가 그랬듯 러시아군에게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군은 프랑스군 위에 걸려 있던 멸망의 위협 없이 임의로 움직였다는 것이고, 낙오된 프랑스군 부상자들은 적의 수중에 남겨졌지만 러시아군 낙오자들은 자기 집에 남겨졌다는 것 정도였다. 나폴레옹군 병력 감소의 주원인은 행동의 신속함이었고, 그 확실한 증거는 러시아군도 이에 대응해 감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을 세우고, 누군가를 놀라게 하고, 무슨 목적으로든 어느 공작과 왕을 포로로 사로잡길 바라던 장군들, 특히 러시아인이 아닌 장군들에게는 모든 전투가 혐오스럽고 무의미한 지금이야말로 전투를 해서 누군가를 정복할 호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욕망에만 사로잡힌 이들은 필연이라는 가장 슬픈 법칙의 맹목적인 실행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영웅이라 생각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가장 가치 있고 훌륭한 일이라 생각했다.

 

소박하고 겸손하고, 그렇기에 참으로 위대했던 이 인물(쿠투조프)은 역사가 만들어낸 유럽적 영웅, 즉 자신이 사람들을 지도한다고 착각하는 가짜 영웅의 형식에 넣을 수 없다.

종복에게 위대한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종복은 위대함에 대해 자신만의 개념을 가지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이 처한 불행한 상황이 프랑스군을 파멸시켰던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될 병사들이 굶주리는데 그들에게서 빵과 옷을 빼앗아 비록 아무런 해도 주지 않고 밉지도 않고 죄도 없고 다만 불필요할 뿐인 프랑스병에게 줄 수는 없었다.

 

피예르는 포로생활 동안 경험했던 육체적 고통과 긴장을, 흔히 그렇듯 그 육체적 고통과 긴장이 끝났을 때 비로소 느꼈다.

 

나(피예르)는 이제부터 무엇을 하게 될까? 그러고는 자신에게 대답했다. 별것 없다. 살아가면 된다. 아아, 정말 훌륭하다!

예전에 괴로워하며 끊임없이 찾았던 인생의 목적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했던 인생의 목적은 현재 일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느껴졌다. 목적이 없다는 것은 자유에 대한 완전하고 기쁜 의식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 그의 행복이었다.

 

그는 어떤 규칙이나 말이나 사상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느낄 수 있는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목적을 가질 수 없었다. 전에는 스스로 정한 목적들 속에서 신을 찾고 있었다. 이 목적의 탐구는 신의 탐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포로생활중 문득, 아주 오래전 유모가 곧잘 들려주었던 말을 그저 말과 판단이 아니라 직감으로 깨달았다. 하느님은 여기 계신다, 여기, 모든 곳에. 포로생활중 그는 카라타예프 안에 있는 신이 프리메이슨들이 인정하는 우주의 건축가보다 더 위대하고 무한하고 심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집중해 먼 곳을 바라보며 찾고 있었던 것을 문득 발밑에서 발견한 사람의 심정을 경험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주위 사람들 머리 너머로 어느 먼 곳만을 바라보았지만, 그렇게 시선을 집중하지 않아도 다만 자기 앞을 보면 되었던 것이다.

 

피예르의 태도에는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새로운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볼 수 있다는 인식, 말로 사람의 신념을 바꿀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피예르가 나타샤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지만, 그가 못 본 후로 그녀가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야위고 창백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이 아니라, 그가 들어선 순간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전에는 늘 삶의 기쁨을 감춘 미소로 눈을 반짝이던 얼굴에 미소의 그림자조차 없고, 다만 주의깊고 선량하고 묻는 듯한 슬픈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 인간만이 그런 상실을 견뎌낼 수 있으니까요.” (피예르)

 

공작영애 마리야도 나타샤도 피예르도 모두가 진지하고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에 흔히 느끼는 어색함을 느꼈다. 이전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고,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멋쩍고, 그렇다고 침묵하자니 말하고 싶으면서 아닌 척하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당신이 모스크바에서 200만 루블을 손해보셨다고요. 사실인가요?”

“하지만 나는 세 배나 더 부유해졌습니다.”

[…]

“내가 확실히 번 것은,” 그는 말했다. “자유입니다……”

 

두 사람이 싸울 때는 언제나 양쪽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쪽이 사라지면 자기 잘못이 갑자기 두려울 만큼 힘겹게 느껴지죠.

 

“내가 살아 있고 살고 싶다고 바라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타샤는 갑자기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불탄 집들 사이 거리를 마차로 달리며 그는 폐허의 아름다움에 놀랐다. (피예르)

 

‘그때의 나는 어느 때보다 총명하고, 통찰력이 넘치고, 인생에서 이해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은…… 내가 행복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제1부

 

1812년에서 칠 년이 흘렀다. 유럽의 들끓던 역사의 바다도 그 해안에서 가라앉았다. 바다는 잠잠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인류를 움직이는 신비한 힘은(신비하다는 것은 그들의 운동을 결정하는 법칙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역사의 바다 표면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인 다양한 집단은 합쳐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고, 국가들의 형성과 붕괴, 민족들의 이동 등의 원인이 준비되고 있었다.

역사의 바다는 이전처럼 이쪽 해안에서 저쪽 해안으로 돌풍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고 깊은 밑바닥에서 들끓고 있었다. 역사상의 인물들도 이전처럼 이 해안에서 저 해안으로 파도에 실려가지 않고 한곳에서 맴도는 것처럼 보였다. 전에는 군의 수뇌로서 전쟁, 행군, 전투를 명령함으로써 집단의 운동을 반영하던 역사상의 인물들이 이제는 정치 외교상의 고려, 법률, 조약 등으로 들끓는 그 운동을 반영하고 있었다……

역사상 인물들의 이 같은 활동을 역사가들은 반동反動이라 부른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이 이른바 반동이라고 부르는 것의 원인이 이러한 역사상 인물들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면서 역사상 인물들의 활동을 기술하며 그들을 통렬히 비난한다.

 

역사 속에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에 대해 정반대의 견해를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폴란드에 부여한 헌법과 신성동맹을 알렉산드르의 공적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다.

 

만약 그 활동이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활동과 선에 대한 그 사람의 한정된 이해가 일치하지 않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연이 상황을 만들고, 천재는 그것을 이용했다’고 역사는 말한다.

 

가깝고 알기 쉬운 목적만 알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궁극의 목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역사적 인물의 삶에서 일관성과 합목적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취했던 보편적 인간의 속성과는 동떨어진 행동의 원인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우연이니 천재니 하는 말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양이나 공기에 포함된 질소와 산소도 아니고, 특수한 쟁기와 비료도 아니며, 질소와 산소와 쟁기와 비료를 움직이는 주요한 도구인 노동자—농민이었다. 농촌 경영에 착수해 다양한 부분을 탐구하게 되면서 특히 그의 주의를 끈 것은 농민이었고, 그에게 농민은 도구일 뿐만 아니라 목적이고 재판관이었다. 처음에 그는 농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농민이 무엇을 좋고 나쁘게 여기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들을 관찰했고, 지시하고 명령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농민들에게서 행동거지와 말과 무엇이 좋고 나쁜지 판단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농민의 취향과 욕망을 이해하고, 그들의 말로 이야기하고, 그 말의 숨은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이 이미 그들과 동지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비로소 그는 대담하게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말하자면 농민들이 그에게 실행을 요구한 의무, 즉 농민들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실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니콜라이의 경영은 아주 훌륭한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못생기고…… 언제나…… 게다가 지금은…… 이런 몸이니……”

“아, 당신은 정말 이상해! 아름다워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니까 아름다운 거야. 아름다워서 사랑받는 건 말비나 같은 여자들뿐이지만, 그런 여자가 내 아내가 되면 나는 그녀를 사랑할까? 그렇지 않아, 하지만 모르겠어, 당신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나는 당신이 없거나, 우리 사이에 어떤 고양이 새끼가 지나간다면, 나는 나락에 떨어진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럼 나는 내 손가락을 사랑할까? 그렇지 않아, 그러나 시험 삼아 잘라보면……”

 

식사의 목적이 육체의 영양이라면, 한 번에 이 인분을 먹은 사람은 더 큰 만족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위는 이 인분을 소화하지 못하므로 식사의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

결혼의 목적이 가정이라면, 아내나 남편이 많은 사람은 더 큰 만족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가정을 가질 수는 없다.

식사의 목적이 영양이고 결혼의 목적이 가정이라면, 위의 소화력 이상을 먹지 않는 것, 가정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부 또는 일처 이상의 아내와 남편을 갖지 않는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옆방에서 아이들 웃는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에게 분명 즐거운 소동이 일어난 듯했다.

[…]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음악이지!” 그는 말했다.

[…]

“내가 왜 저 음악을 특히 좋아하는지 아나? 내게 만사가 괜찮다고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게 저것이기 때문이야. 오늘 집에 돌아올 때 나는 집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걱정이 됐어. 그런데 현관방에 들어서자마자 안드류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렸어. 그래, 만사가 다 괜찮구나, 이런 뜻이지……”

 

“이제 정말 사태는 내버려두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저항하는 것이 정직한 사람들 모두의 의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어.”

 

“그래, 모든 것이 파멸하고 있어. 재판소에는 횡령, 군대에는 행진교련이다 둔전병이다 하며 몽둥이가 있을 뿐이고, 국민을 괴롭히고, 계몽을 압살하고 있어. 젊은 사람은, 성실한 사람은 결국 파멸이야! 이 상태로 계속 갈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어. 모든 게 지나치게 긴장되어 분명 끊어져버릴 거야.”

 

“나는 그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거라고 말했네. 멍하니 서서 팽팽히 당겨진 활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동안,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격변이 닥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되도록 많은 사람이 단단히 손을 맞잡고 사회 전체의 파국을 막아야 한다고 말일세.”

 

꿈속에서는 꿈을 인도하는 감정 외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무의미하고 모순투성이인 것처럼, 모든 이성의 법칙에 위배되는 이 의사소통에서도 시종일관하고 분명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말을 인도하는 감정이었다.

 

“당신은 그에게 사상은 도락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군요……”

“응, 내게는 그 이외의 것이 모두 도락이야.

 

“나는 다만 위대한 결과를 낳는 사상은 모두 항상 단순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 내 사상의 요점은, 악한 인간들이 하나로 결합한다면 정직한 인간도 그와 똑같이 해야 한다는 거야. 참으로 단순하지.”

 

제2부

 

역사학의 대상은 여러 민족과 인류의 생활이다. 하지만 인류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말로 포괄하는 것, 즉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 민족을 통치하는 특정 인간의 활동을 묘사했고, 이 활동은 그들에게는 민족 전체의 활동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특정 인간들이 자기 의지대로 민족을 움직였는가, 또 이 인간들의 의지는 무엇에 의해 지배되었는가 하는 물음에 고대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물음에는—선택된 단 한 사람의 의지에 민족을 따르게 하려는 신의 뜻을 인정하는 것으로써, 둘째 물음에는—선택된 한 사람의 의지를 예정된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바로 그 신을 인정함으로써.

고대인들에게 이러한 물음은 인류의 일에 신이 직접 관여한다는 신앙으로 해결되어왔다.

 

새로운 역사학은 신이 권력을 부여하고 신의 의지에 직접 인도되는 사람들 대신 비범한 초인간적 능력을 가진 영웅, 혹은 위로는 군주에서부터 아래로는 저널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대중을 인도하는 온갖 성질의 인간을 선택했다. 이전에는 신의 뜻에 맞는 목적이라고 여겨졌던 민족들, 즉 인류 운동의 목적으로 여겨졌던 유대 민족, 그리스 민족, 로마 민족 대신에 새로운 역사학이 설정한 목적은, 프랑스와 독일과 영국 민족의 복지였으며, 가장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전 인류 문명의 복지였지만, 이 인류란 대개 대륙 북서부의 작은 한구석을 차지한 민족들을 의미했다.

 

권력이란 대중에 의해 선출된 통치자들에게 명시적 혹은 암묵적 동의에 의해 표명된 대중 의지의 총화다.

 

작가들과 개혁가들의 역사는 더욱 조금밖에 우리에게 민중의 생활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문화사는 작가나 개혁가의 충동과 생활 조건, 사상 등을 설명해준다. 우리는 루터가 흥분하기 쉬운 성격을 지녔고 이러저러한 연설을 했다는 것을 알고, 루소는 의심이 많고 이러저러한 책을 썼다는 것을 알지만, 종교개혁 후에 왜 여러 민족이 서로를 죽였는지, 왜 프랑스혁명 때 서로를 처형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모든 실행된 명령은 언제나 실행되지 못한 무수한 명령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불가능한 명령은 전부가 사건에 결부되지 않기 때문에 실행되지 않은 것이다. 가능한 명령만이 일련의 사건에 부합하는, 일관성 있는 일련의 명령들에 결부되고 실행될 뿐이다.

 

남보다 손을 더 많이 움직인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나 전체의 행동에서 생기는 일에 대해 생각하거나 명령하는 일을 그만큼 할 수 없었다. 반대로 남보다 명령을 많이 한 사람은 말로써 활동하느라 당연히 손을 움직이는 일은 그만큼 적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베어 죽이는 일을 그만두자, 권력 통일과 유럽에 대한 저항 등을 위해서라는 정당화가 따랐다. 사람들이 같은 인류를 죽이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아갔을 때는 프랑스의 영광이니 영국의 비열이니 하는 정당화가 따랐다. 역사가 말해주듯, 사건에 대한 이런 정당화들은 보편적인 의미를 전혀 갖지 못하며, 인간의 권리를 인정한 결과 살인을 했다거나, 영국을 모욕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수백만을 죽였다는 등 자기모순에 차 있다. 그러나 이런 정당화는 동시대적 의미로는 필연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이런 정당화는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의 도덕적 책임을 제거해준다. 이런 한시적인 목적은 기차 앞에 달려 철로를 청소하는 솔과 같은 것으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라는 길을 청소해준다. 어떤 사건을 검토할 때 반드시 봉착하는 의문, 대체 어째서 수백만의 인간이 총합적 범죄, 전쟁, 살인을 범했을까? 라는 지극히 단순한 의문은 이런 정당화 없이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1) 권력이란 무엇인가?

2) 어떤 힘이 여러 민족의 운동을 일으키는가?

1) 권력이란, 어느 인물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이며, 이 인물은 현재 행해지는 총합적 행동에 대한 의견, 예상, 정당화를 더 많이 표명할수록 행동에 덜 참여한다.

2) 여러 민족의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역사가들이 생각하듯 권력도, 지적 활동도, 양자의 결합도 아닌 사건에 직접 참가하는 모든 사람의 활동이며, 그들은 사건에 직접적으로 가장 많이 참가할수록 가장 적은 책임을 지고, 또 그 역도 성립하는 형태로 사건에 참가하며 결부되는 것이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사건의 원인은 권력이고, 육체적인 면에서는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육체적 활동을 수반하지 않는 정신적 활동은 생각할 수 없으므로, 사건의 원인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자의 결합에 존재한다.

 

이해하고, 관찰하고, 추론하기 위해 인간은 우선 자신을 살아 있는 것으로 의식해야 한다. 살아 있는 존재로 의식한다는 것은 곧 욕망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아는 것이며, 즉 자신의 의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인간은 삶의 본질을 이루는 자신의 의지를 자유로운 것으로 의식하고 또한 다르게는 의식할 수 없다.

 

인간의 의지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자유로운 것으로만 의식하기 때문에 제한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일련의 경험과 추론이 인간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인간이 자기 안에 의식하는 완전한 자유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의 조직과 성격과 그에게 작용하는 동기 등에 좌우되는 것이지만, 인간은 이 같은 경험과 추론의 결론에 절대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과 같은 성격, 전과 같은 조건에 놓일 때 인간은 전과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경험과 추론이 인간에게 몇 번을 보여준다 해도, 인간은 같은 성격, 같은 조건으로 항상 같은 결과로 끝나는 일에 착수할 때, 설령 그것이 천번째라 할지라도 역시 그 일을 경험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확신한다.

 

아무리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은 자유의 개념 없이는 생활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모든 열망과 삶에 대한 모든 동기가 자유를 증대하려는 열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부—빈곤, 명성—무명, 권력—복종, 힘—무력, 건강—질병, 교양—무지, 노동—무위, 포식—기아, 미덕—결점은 자유의 대소 차이일 뿐이다.

자유가 없는 인간은 생명을 빼앗긴 인간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현상을 고찰하는 시점의 차이에 따라 자유에 대한 표상은 종종 달라지지만, 그럼에도—항상 같은 것은—인간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우리에게는 자유와 필연의 일정한 결합으로 여겨진다. 어떤 행위를 검토하더라도 반드시 그 속에서 일정량의 자유와 필연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항상 어떤 행동이든 자유가 많을수록 필연의 양은 적어지고, 필연이 많을수록 자유의 양은 줄어든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선행한 것에 대해서는 결과로서, 후행하는 것에는 원인으로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성은 이렇게 말한다. 1) 공간은 외관—물질—이 주는 모든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무한하며,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2) 시간은 한순간도 쉼이 없는 무한의 운동이며,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3)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시작도 없고 끝도 가질 수 없다.

의식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하나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뿐이고, 따라서 나는 공간을 포함하고, 2) 나는 흐르는 시간을 현재라는 정지된 순간에 재고, 그 현재의 순간에만 살아 있다고 자신을 의식하므로, 나는 시간 밖에 있고, 3) 나는 나를 내 생활의 온갖 현상의 원인이라고 느끼므로, 나는 원인 밖에 있다.

 

이성은 필연의 법칙을 표현한다. 의식은 자유의 본질을 표현한다. 아무것에도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인간의 의식 안에 있는 생의 본질이다. 내용을 갖지 않는 필연은 세 개의 형식을 갖춘 인간의 이성이다.

자유는 검토되는 것이다. 필연은 검토하는 것이다. 자유는 내용이다. 필연은 형식이다.

형식과 내용으로서 서로 관계를 갖는 인식의 두 근원을 분리했을 때 비로소 서로 배타적이고 불가해한 자유와 필연이라는 개념들이 개별적으로 생겨난다.

이것들을 결합했을 때 인간 생활에 대한 명확한 표상이 생긴다.

 

자유의 힘의 본질이 역사학의 내용을 형성한다. […] 공간과 시간과 원인의 의존 속에 있는 인간들의 자유의 힘의 발현은 역사학의 대상이 되지만 자유 그 자체는 형이상학의 대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학에서도 우리는 알려진 것을 필연의 법칙이라 부르고, 알려지지 않은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역사학에서 자유는 우리가 인간 생활의 법칙에 관해 알고 있는 것 이외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남은 부분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몇 마디

- 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란 무엇인가? 이것은 장편소설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고, 역사적 연대기는 더더욱 아니다. 『전쟁과 평화』는 저자가 표현하기 원했고, 표현할 수 있었던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묘사에서 역사가들과 나의 의견이 다른 것. 이는 우연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적 시대를 그릴 때 역사가와 예술가는 서로 완전히 다른 대상을 취한다. 역사가가 역사적 인물을 그릴 때 그의 생활의 모든 측면에 관련된 세부 사항까지 모두 표현하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예술가가 역사적 인물을 역사적 의의라는 관점에서만 그리려 한다면 그는 자기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

 

역사가에게는 어떤 인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얼마나 기여했는가라는 의미에서 영웅이 존재하지만, 예술가에게는 그 인물이 생활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영웅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해서도 안 되며 오직 인간만이 존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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