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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방랑자들 | 올가 토카르추크

2020. 12. 14.
방랑자들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저/최성은

2018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자로 토카르추크를 선정하면서 “삶의 한 형태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해박한 열정으로 그려낸 서사적 상상력”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일찍이 폴란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토로한 바 있는 토카르추크의 작품 세계는 본질적으로 경계와 단절을 허무는 글쓰기를 통한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민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작이 바로 『방랑자들』이다. 작가는 소설을 가리켜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심오한 소통과 공감의 수단”이라고 말했는데, 작자가 지향하는 이러한 가치가 무엇보다 생생하게 빛나는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 내가 있다.

 

나는 서너 살이다. 창틀에 앉아 있는데, 주위엔 온통 널브러진 장난감들, 거꾸로 처박힌 블록 탑들, 눈이 불거져 나온 인형들. 집 안은 컴컴하고 방마다 공기가 차갑게 식어 흩어지고 있다. 아무도 없다. 다들 떠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가장 끔찍한 것은 정적. 두 눈에 생생히 보이는, 끈적거리는 그것. 차가운 석양, 그리고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나트륨램프의 가녀린 불빛.

 

학교 주방의 불빛이 꺼졌고 모두 떠났다. […] 빠져나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었다. 요동치며 선명한 윤곽을 만들어 내는 건 오로지 나의 현존뿐.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한순간 깨달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나는 그저 여기 있을 뿐이다.

 

머릿속의 세상

 

오랜 세월 아무런 속박도 당하지 않으면서 마음껏 흐르고, 범람의 기운이 충만한, 예측 불가능한 강.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스스로에게만 몰두하는 변덕스러운 강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강물에는 절대 두 번 이상 몸을 담글 수 없었다.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와 타락에 이르고, 결국 한 줌의 재로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부모님은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으므로 진정한 여행자는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의무를 무사히 완수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고 나면 그 해의 나머지는 정착의 시간, 저녁때까지 미처 끝내지 못한 일감을 향해 아침마다 되돌아가곤 하는, 이상하고도 지루한 삶이었다.

 

나이는 심리적인 것이고, 성별은 문법적이다.

 

자신의 가족, 부인이나 남편, 부모로부터 도망쳐 온 탈주자들, 불행한 연인들, 혼돈에 빠진 사람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 항상 춥고 배고픈 사람들. 빚을 갚지 못해 법망을 피해 온 사람들도 있었다. 방랑자들, 유랑자들. 광기가 발동해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가 알 수 없는 규정에 따라 자신의 모국으로 추방당한 미친 사람들.

 

세상 속의 머리

 

도시의 한쪽 구역은 폐허가 된 게토에 다시 지어진 곳인데,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역의 지표면이 도시의 다른 지역보다 1미터가량 높게 솟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1미터는 돌무덤이었다.

 

어쩌면 그때 우리 모두는 망령에 둘러싸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실험이 요구된다. 가설의 정립과 입증이 요구된다. 그러다 마침내 통계학의 신비에 빠져들게 되는데,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그럴듯하게 기술할 수 있다고 믿게 되며, 5퍼센트보다는 90퍼센트가 훨씬 더 의미 있다고 여기게 된다.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는 방패와 갑옷, 무기로 지어진 존재라는 걸. 우리는 일종의 도시라는 걸,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건축물은 성벽과 방어막, 요새로 연결된다는 걸. 우리는 벙커에 세워진 나라와 같다는 걸.

 

소설 쓰기 […] 그것은 통제할 수 있는 정신병이고, 스스로에게 작업의 족쇄를 채우는 강박적인 편집증이며, 그것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만년필이나 버슬, 베네치아의 가면 따위는 모두 버리고, 정육점 도살업자의 앞치마를 입고, 고무 장화를 신고, 손에는 내장을 제거하는 칼을 들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당연함을 모호함으로 만들고, 반박할 수 없는 논거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 두뇌의 비뚤어진 요가, 내면의 움직임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미묘한 희열 같은 것이었다.

 

이게 무슨 방법론인가!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적당히 명석한 질문이 제공되면 알아서 이해할 거라고 조용히 단정 짓는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에게 대답한다. 그러고는 지금껏 아무것도 몰랐던 비밀을 자신에게 털어놓는다.

둘째 가설은 더욱 치명적이다. 우리는 한결같으며 우리의 반응은 전부 예측 가능하다는 가설 말이다.

 

신드롬

 

신드롬은 작고 휴대 가능하며 이론의 압박에 짓눌리지도 않고 간헐적으로 발생한다. 신드롬을 통해 뭔가를 설명할 수도 있고, 그러고 난 뒤에는 미련 없이 휴지통에 버릴 수도 있다. 일종의 1회용 인지(認知) 도구다.

 

재발성 해독 증후군.

 

망가지고 손상되고 상처 나고 부서진 모든 것에 자꾸만 끌리는 것, 이것이 나의 증상이다.

 

호기심의 방

 

의식의 그림자 속에 존재하다가, 우리가 들여다보면 비로소 가시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들.

 

스피리투스에 잠겨 있는 1848년산 사과들은 모양이 하나같이 비정상적이고 괴상하다. 마치 누군가가 이처럼 색다른 존재들, 자연의 변종들에게만 불멸을 허락하기라도 한 듯이.

 

보는 만큼 안다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

 

7년간의 여행

 

사진 감상 […] ‘거기 있었다’라는 증거를 확보해 둔 탐정의 캐비닛처럼.

 

‘거기에 있었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인지 의문을 품은 적은 없을까?

 

“제가 본 것들, 그건 모두 제 것입니다.”

 

시오랑의 예언

 

“행인들의 얼굴에 주목하는 대신 나는 그들의 발을 보는데, 바쁜 사람들은 항상 발걸음도 서두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결국 별로 심각하지도 않은 어떤 비밀을 찾아다니며 먼지를 일으키는 것임이 분명했다.”

 

쿠니츠키 : 물 Ⅰ

 

그들을 유심히 지켜봤어야 했다는 걸 그땐 몰랐다.

[…] 걸어가면서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들어야 한다는 걸 그땐 몰랐다. […] 15분,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그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는다. 시계를 보지 않았으므로. 시간을 확인했어야 한다는 걸 그땐 몰랐다.

 

“무슨 생각 해?”라는 그녀의 질문을 그는 너무도 싫어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한다고 대답하면 그녀는 믿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건 불가능하다면서 그녀는 화를 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쿠니츠키는 일종의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할 수 있다.

 

쿠니츠키 : 물 Ⅱ

 

오늘은 화창하고 무덥고, 빛에 과다 노출된 필름 같은 날이 될 모양이다. 정오가 되면 모든 이미지가 그 필름에서 사라질 것이다.

 

수많은 것, 수많은 술집과 상점, 배가 ‘포세이돈’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아니면 ‘넵투누스’이거나. 바다는 이 두 이름을 마치 조개껍데기처럼 무수히 내뱉는다. 과연 저들은 이 바다의 신과 어떻게 저작권을 해결했을까? 어떤 수단으로 저작권료를 지불했을까?

 

쿠니츠키는 섬의 이쪽 부분도 ‘포세이돈’으로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이곳에 자신의 대성당을 지어 놓았다. 신자석과 지하실, 기둥과 합창석까지. 검은 화성암이 마치 짙은 금속이라도 씌운 듯 물에 닿아 번쩍거린다. 지금 땅거미 속에서 이 모든 구조물은 너무도 슬퍼 보였다. 본질적인 유기. 이곳에서는 이제 아무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

 

익숙한 세상의 안온한 풍경.

 

세상은 뒤집힐 준비가 되어 있다. 마루는 발밑에, 천장은 머리 위에 있다는 건 그저 관습일 뿐 육체는 더 이상 자신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슬의 한 조각, 살아 있는 원의 일부인 것이다.

 

그것들이 보인다는 것, 그 자체가 신비로운 일이다. 아니, 그가 지금 바라보고 있다는 것, 나아가 그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놀라운 신비다.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여행할 때 나는 종종 지도에서 사라지곤 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딘가로부터 출발해서 어딘가에 도착하기까지의 어느 지점. ‘틈새’에 해당하는 그런 지점이 과연 존재할까?

 

유동성과 기동성, 환상성은 문명화된 사람들의 특성이다. 야만인들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거나 침략할 뿐이다.

 

그녀에 따르면 농업에 종사하는 정착민들은 순환적 시간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길 원하는데, 그러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항상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며, 배아 상태로 쪼그라들어서 성장과 노화와 죽음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시로 여행길에 나서야만 하는 유목민이나 무역상들은 자신들을 위해 여행에 적합한 다른 시간을 고안해 내야만 했다. 그것은 직선적인 시간이며 목적을 향해 가는 척도가 될 수 있고 퍼센트에 따른 증가를 측정할 수 있는 실용적인 시간이었다. 그들에게는 매 순간이 서로 다른 것이며, 절대 반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순간을 즐기며 충만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것은 쓰라린 깨달음이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되돌릴 수 없다는 건, 결국 죽음이나 상실, 추모가 일상화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헛되다’ 혹은 ‘무상하다’와 같은 말은 그들의 입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모든 여행자의 시간은 수없이 많은 시간이 하나로 모인 결합체다.

 

나는 세상이 뇌 속에, 그 주름 속에, 솔방울샘 안에 있고, 목구멍 안에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이름의 구체(球體). 그래서 그것은 기침으로 쏟아 내거나 침으로 뱉어 낼 수 있다.

 

공항들

 

여기 거대한 공항들이 있다

[…]

얼마 안 있으면, 일터나 숙소의 명목으로 도시가 공항에 병합되었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진정한 삶은 움직임 속에서 구현되니까.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만 거주자들은 끊임없이 유동적이다.

 

공항은 자신의 고유한 음악을 갖고 있다. 비행기 엔진의 교향곡, 리듬을 거세한 채 공간을 가득 메우는 몇 개의 단순한 음들, 두 개의 엔진이 만들어 내는 전형적인 화음, 암적색과 암흑색의 음울한 단조. 듣기만 해도 지겨운, 하나의 화음으로 울려퍼지는 라르고. 비행기가 이륙할 때 강렬한 입당송으로 시작되다가 착륙하며 ‘아멘’으로 마무리되는 레퀴엠.

 

자신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여행자의 세 가지 질문’을 서로 던진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어느 곳에서 오는 길인가? 어디로 갈 예정인가? 첫째 질문은 수직축을, 나머지 두 개의 질문은 수평축을 결정짓는다. 이러한 배열 덕분에 배낭족들은 머릿속에 좌표계와 유사한 뭔가를 그릴 수 있게 되며, 그 지도 위의 한 지점에다 서로를 배치한 뒤, 비로소 안심하고 잠자리에 든다.

 

라 마노 디 조반니 바티스타

 

우리 주변에는 세상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세상을 확장하거나 늘리기보다는 줄일 필요가 있다. 조그만 상자, 이를테면 휴대용 파놉티콘에 세상을 쑤셔 넣고 모든 일과를 마친 토요일 오후에만 들여다볼 수 있게 했으면 싶기도 하다.

 

원본과 복사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앞에 […] 이따금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어디선가 찰칵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마치 디지털 언어로 내뱉는 새로운 ‘아멘’처럼.

 

겁쟁이들의 기차

 

1밀리미터도 빠짐없이 바퀴로 밟아 가면서 순간과 접선하는 동안, 반복되지 않는 배열이 끝없이 펼쳐진다. 바퀴와 철로, 시간과 공간, 온 우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배열이 계속해서 전개된다.

 

내 생각으론 그들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공간, 밤이 실어 나르는 공간, 눈에 띄지 않는 어둠 속을 오가는 공간을 찾아냈으므로. 여기서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슬쩍 빠져나왔다가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으리라.

 

버려진 아파트

 

단지 익숙한 형상의 모방.

 

악행을 기록한 책

 

탑승객이 초과 예약된 모양이었다. […] 컴퓨터의 실수, 이게 바로 오늘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내가 시간에 쫓기기보다는 시간이 나를 쫓아오게 해 보자!

 

줄에서 옆으로 비켜 서는 즉시, 일당을 받으며 호텔에 묵을 수 있고, 커피와 함께 뷔페식으로 제공되는 아침 식사도 즐기고, 다양한 요거트를 맛볼 수 있다. 그러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표면적인 다양성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그건 그저 피상적인 것이니까요. 사실 어디나 다 똑같아요.”

 

“진정한 신은 동물이에요. 신은 동물 속에 있죠.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에요. 동물은 매일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죽음을 반복하고, 자신의 몸을 바쳐 우리를 먹이고, 자신의 가죽으로 우리에게 옷을 지어 입히고, 의약품 테스트를 허용해 줘요. 우리가 더 오래, 더 잘 살 수 있게 하려고요. 그렇게 우리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우정과 사랑을 전하죠.”

 

여행 안내서

 

뭔가를 글로 묘사한다는 건, 그것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해서 결국엔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여행 안내서. […] 다양한 언어로 수백만 부를 찍으면서 해당 장소를 속박하고 약화시키고 그 윤곽을 지워 버렸다.

 

뭔가를 글로 쓴다는 건, 그것을 파괴한다는 의미였다.

 

위키피디아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만든 가장 정직한 인지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위키피디아를 통해 실어 나른다.

 

이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위키피디아에 존재하는 정보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언어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만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것, 지식과 반대되는 것을 축적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이 요구된다. […] 그 영역은 어찌나 방대한지 단어에서 단어로 횡단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 […] 개념들 사이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심연 속으로. 하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우리는 미끄러지고 넘어진다.

 

세계 시민들이여, 펜을 들어라!

 

그녀는 자신의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책을 쓰라고 권유하고 싶다고 했다. […] 이것이야말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단, 모두가 서로의 책을 읽기만 한다면 말이다!

 

여행심리학 - 짧은 강연 Ⅰ

 

인간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향하는 움직임 속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여행 심리학의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욕망입니다. 바로 이 욕망이 인간에게 이동성과 방향성을 부여하고 어딘가로 향하려는 성향을 일깨웁니다. 욕망 그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그저 방향만을 가리킬 뿐, 목적지를 드러내진 않으니까요. 목적지는 신기루 같은 것이고 불확실한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애매해지고 수수께끼 같아집니다.”

 

적절한 시간과 장소

 

많은 이들은 세상의 좌표 어딘가에 시간과 공간이 서로 딱 들어맞는 완벽한 지점이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다들 여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적절한 순간, 적절한 장소에 도착한다면, 그래서 주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면 자물쇠의 암호는 해제되고 비밀번호가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게 되리라.

 

재의 수요일 축일

 

부표의 목적은 하나였다. 끝없이 광활하게 이어지는 물의 독과점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뭔가 측정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 비록 허상이긴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는 것.

 

지도 지우기

 

지도들은 너그럽게 모든 걸 받아들이면서도 실은 자신들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 새하얀 얼룩들을 그리워한다.

 

밤을 좇아서

 

창밖으로 보이는 저 노란빛을 띤 홍조는 여명의 시작일까, 아니면 어둠이 응축되어 가는 석양일까.

 

밤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의 어느 구역에선가 어김없이 자신의 세력을 뻗치고 있다. TV 리모컨을 통해 좇아가 볼 수도 있고 라디오의 심야 방송만 골라서 들어 볼 수도 있다. 아니면 모니터 속에서 움푹 꺼진, 시커먼 손의 형상으로 지구를 지탱하고 있는 명암 경계선의 암흑 면을 따라가 볼 수도 있다.

 

화산의 폭발, 하늘을 수정시키려는 뜨거운 사정(射精),

 

시끌벅적하고 공격적인 뉴스 채널, 모험 채널, 영화 채널 들을 밤이 진정시킨다. 한낮의 찬란한 빛의 소음을 옆으로 밀어 놓고 대신 그 자리에 섹스와 종교, 속(俗)과 성(聖), 생리학과 신학이 교차하는 단순한 좌표를 배치하면서.

 

생리대

 

종이라는 것은 사상을 전달하고 나르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되었는데. 포장지는 결국 헛된 낭비에 불과하니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굳이 뭔가를 포장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면 소설책이나 시집을 포장해야 하리라. 뭔가를 담는 것과 뭔가가 담겨 있는 것이 서로 긴밀히 연결될 수 있도록.

 

벨리 댄스

 

불이 켜졌을 때 우리는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사실을 깨닫고는 손수건으로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광란에 휩싸인 남자들이 우리를 놀려 댔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남자들의 흥분보다는 여자들의 감동이 그 춤을 이해하는 빠른 길이라는 걸.

 

자오선

 

잉기비오르그라는 이름의 여인은 본초 자오선을 따라 여행을 했다.

[…]

그녀의 아이디어는 여전히 날 불안하게 한다. 자오선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렘

멘추가 들려준 이야기

 

저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네’ 또는 ‘아니요’라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과연 그가 이 방의 중앙에 놓인 자리, 온갖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입에서 뭔가 소리를 낼 여력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세상을 향해 ‘신성한 전쟁’을 선포하고 우리를 정복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두는 것은 예루살렘이었다. 거기에 자신들의 예언자가 남긴 유물이 있으니까. 그들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그들은 만족할 줄 몰랐고, 무슨 짓이든 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집을 약탈하고 여인들을 강간하고 주거지를 불태우고 모스크를 파괴할 것이다. 모든 규칙과 조약을 위반할 것이다. 그들은 욕심 많고 변덕스럽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덤이 아니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무덤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그들이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의 관심사가 공동묘지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았다. 하지만 분명히 그건 그저 핑계일 뿐 그들은 이미 죽어 버린 대상이 아닌 지금 살아 있는 대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칼리 유가 * 말세

 

추가적인 감각들이 생겨날 것이다. 결핍을 인지하는 감각, 부재의 맛을 식별하는 감각, 그리고 특별한 예지력. 어떤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 능력.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탁월한 후각.

 

밀랍 인형 컬렉션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

 

마치 먼 길을 떠나기 전에 꼼꼼히 싸 놓은 짐처럼 장기들은 신체 깊숙한 곳에 잘 포장되어 있다. 여기에 질도 있다. 세로로 잘린 그녀의 질은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 보인다. 막다른 골목에서 끝나 버리는 짧은 터널, 신체의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가 아니기에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그저 막다른 방일 뿐.

 

블라우 박사의 여행

 

튼실한 허벅지는 늘 그를 매료시키곤 했다.

 

그 허벅지 사이로 들어가는 것은 산산이 부서질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폭탄을 무장 해제하는 것과 같다.

 

자연이 꽃잎들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여자들의 몸에도 꽃잎 모양의 징표를 만들어 놓은 듯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연이 미처 통제하지 못하는 ‘정신’이 주어졌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만들어진 이 꽃잎들을 스스로 감추어 버렸다. 속옷 속에, 넌지시 빗대는 암시 속에, 침묵 속에.

 

신체의 모든 부위는 기억할 가치가 있다. 모든 인간의 몸은 보존해야 마땅하다. […] 만약 블라우 박사에게 세상을 창조하도록 했다면 우리에게 별 필요도 없는 영혼은 필멸로 만들고, 아마도 육체에 불멸을 허용했을 것이다.

 

그는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세상의 아름답고도 평온한 질서를. 그 질서는 말끔히 살균된 상태로 조개껍데기와 동굴, 모래 알갱이, 그리고 모든 비행기의 예정된 여정 속에 담겨 있다. 대칭을 유지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오른쪽은 왼쪽에 맞추고 왼쪽은 오른쪽에 맞춰 가면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에게

요제피네 졸리만이 보낸 첫번째 서신

 

우리 자신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각자 고유하고 특별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 시간 속을 이동하면서 자신만의 흔적을 남긴다는 점일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일수록 하루빨리 기억에서 지워 버리면 그 기억은 힘을 잃게 되고,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며, 때문에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신념 말입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무섭고 끔찍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그들의 결백이 유지될 거라는 신념을 당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의 몸에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신념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블라우 박사의 여행 Ⅱ

 

전광판에 익숙한 광고, 샴푸와 신용 카드 광고가 등장한다. 눈에 익은 로고 덕분에 이 낯선 세계가 안전하게 느껴졌다.

 

자기가 무엇에 대해 묻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 안 가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지금 제겐 누가 있거든요.” 그가 거짓말을 했다.

어떤 면에서 그건 사실이었다. 사실이란 늘 어떤 단면 안에 깃드는 법이니까.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에게

요제피네 졸리만이 보낸 두 번째 서신

 

이성의 세기, 이 특별한 시대에 우리가 태어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정신이야말로 신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시대, 이성의 힘으로 세상의 온갖 무지와 불의를 타파하고, 결국엔 우리 모두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만드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니까요.

 

보리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전통적인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데 막상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그의 부모는 뜻밖에도 기독교, 그것도 동아시아의 현실에 맞게 토착화된 개신교를 선택했다. 기독교의 신은 자기를 믿는 신자들에게 더 우호적이며 나아가 유용할 것이라고 부모는 생각했던 것이다.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를 전율하게 만든 것들, 그러니까 질병과 노쇠와 죽음을 실은 그가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깨달음을 얻었건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작은 변화의 조짐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는 이미 그러한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희고 폭신한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그는 자신이 정말 깨침을 갈망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한순간에 모든 진실을 보기를 원했던 것일까. 엑스레이를 들여다보듯 세상을 투시해서 그 공허한 뼈대를 확인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여행 심리학

짧은 강연 Ⅱ

 

우리는 주로 무의식 중에 시간과 공간을 체험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흔히 객관적 또는 표면적이라 명명하는 분류 체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공간 감각은 움직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시간 감각은 우리가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상태의 다양한 변화에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다름 아닌 ‘변화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간의 양상 중 하나로서 장소는 시간 속에서 일종의 정지 상태와 같습니다. 그것은 대상을 배열하는 우리의 인지 작용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간과 달리 고정된 개념입니다.

 

우리는 종종 시간의 개별적인 단계를 가리켜 ‘에피소드’라고 부릅니다. 그것들은 서로 별다른 인과 관계도 없으며 시간의 일부분이 아닌 상태에서 시간의 경과를 방해합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독립적으로 생겨나며, 시작은 전부 무(無)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시작과 모든 끝은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개별적인 에피소드는 결코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법이 없다고.

 

여행 심리학

결론

 

과거에 신들은 손 닿을 수 없는 곳, 저 먼 바깥세상에 있었습니다. 악마나 천사와 같은 그들의 사절과 마찬가지로 신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가 폭발하면서 신들을 내면으로 집어삼켰고 해마구와 뇌간 사이, 송과선과 운동성 언어 중추 사이 어딘가에 신들의 자리를 지정해 버렸습니다. 신들은 결국 어둡고 고요한 인체의 한구석에서, 뇌의 갈라진 틈바구니에서, 신경 접합부 사이의 빈 공간에서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강한 근육은 혓바닥이다

 

모든 국민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국가들이 있다.

[…]

모든 설명서와 시시한 유행가 가사, 레스토랑의 메뉴, 사소한 전단지나 팸플릿, 엘리베이터의 버튼까지 전부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로 적힌 이 세상에서 과연 그들이 길을 잃고 당황하는 순간이 있을까?

 

말하라! 말하라!

 

“나는 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는가? 누군가가 말한다. 고로 누군가가 존재한다?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항상 덫에 걸리는 법이라고.

 

개구리와 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개구리의 관점, 그리고 공중을 나는 새의 관점. 이 두 관점의 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은 혼란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그렇다. 컴퓨터 칩, 극도로 작고 얇은 컴퓨터 칩들이다.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구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 친애하는 여행자들이여, 이 장소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저 개별적인 신경의 박동에 불과하다고. 조금씩 더하거나 빼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순간의 분해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을 유지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고.

 

선, 면, 구체

 

나는 종종 남이 나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뭔가를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꿈꾸었다. 은밀히 훔쳐보는 것. 이상적인 관찰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런 유의 훈련을 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네덜란드였다.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완벽한 결백을 확신했기에 커튼을 치지 않았다. 그래서 해가 지고 나면 집집마다 창문들이 작은 무대로 변했다. 저마다 자신의 저녁 풍경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그 창문에 모습을 나타낸다. 노르스름한 빛깔의 따뜻한 불빛에 흠뻑 젖은 다양한 이미지들의 시퀀스, 그것은 ‘인생’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구성하는 각각의 장면들이었다. 네덜란드풍의 유화. 정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대상들.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아킬레스건

 

내부를 다룬 것이든 외부를 다룬 것이든 세계의 지도들은 이미 그려져 있었다. 한번 목격한 질서는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기 마련이고, 그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중요하고 근본적인 선과 면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본다는 건 결국 안다는 의미였으므로.

 

뭔가를 발견하면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정복을 하면 문명화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속에 온 세상이, 그리고 신화의 세계가 깃든 건 아닐까. 어쩌면 인체에는 위대한 것과 보잘것없는 것이 모두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인간의 몸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모든 것과 결합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와 주인공, 신과 동물, 식물의 질서와 광물의 조화를. 그러므로 인체의 부위를 이런 식으로 명명하는 게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아르테미스의 근육, 아테나의 대동맥, 헤파이스토스의 망치뼈와 모루뼈, 메르쿠리우스의 나선기.

 

제자이면서 벗이었던

빌럼 판 호르선이 쓴 필립 페르헤이언의 이야기

 

신의 손길이 우리 삶의 이면에 아로새겨 놓은 운명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그것들은 딱 한 번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취하며 흑백의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신은 왼손으로, 그리고 거울 문자로 글귀를 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을 그리워해야만 할까?” […]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작게 축소된 죽음의 연약한 흔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간절히 원하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창조의 중심에 놓여 있으므로.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신의 것도 다른 그 어떤 피조물의 것도 아닌 인간의 것이므로.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은 단 하나, 영생. 맙소사, 그렇기에 감히 불멸의 존재를 꿈꾸게 된 것은 아닐까?

 

이따금 오늘처럼 뭔가가, 그러니까 내가 혼잣말로 ‘인체의 진실’이라 명명하는 그 무언가가 이렇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죽음의 명확한 증거와 영혼의 확실한 부재에도 불구하고 몸 자체가 일종의 완결된 전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기묘한 확신 말이다.

 

궁극적으로 가장 완벽한 존재인 신, 우리에게 인지 능력을 제공해 주신 그분은 절대 사기꾼이 될 수 없다. 주어진 능력을 올바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절단된 다리에게 보내는 편지

 

육체와 영혼은 본질적으로 하나이기에,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의 무한한 두 가지 속성이기에, 그 두 속성 사이에는 창조주가 설계한 적절한 비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자연.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었다.

 

필립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사실상 신에 관한 지식이라고 믿었다. 우리 안의 지옥인 슬픔과 절망, 질투와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나를 아프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결핍과 부재를 느끼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총체로서의 숙명을 선고받은 것인가? […] 거대한 유리구슬 같은 세상이 수백만 개의 파편으로 산산조각 나더라도, 그 속에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무한한 무언가가 하나의 전체로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고통은 바로 신, 그 자체인가?

 

여행에 대한 이야기

 

이야기에는 완벽한 통제가 도저히 불가능한, 고유의 타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자신감이 없고 우유부단하며 쉽게 현혹당하는 사람들.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

 

3만 길더

 

수집품들을 팔아 치우고 난 후에 텅 빈 방을 바라보는 건 서글픈 일이었다. 라위스 교수는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무 선반에 남겨진 검은 얼룩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3차원 유리 용기의 평면이 남긴 자국이고,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먼지의 흔적이었으며, 그 안에 담겼던 내용물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그저 너비와 길이의 형태로만 남은 뒷모습이었다.

 

이르쿠츠크-모스크바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 아침 8시에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하면 정확히 같은 시간, 그러니까 같은 날 오전 8시에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의 전 생애에 대해 고해 성사를 해야 할 시간이다. 기내에서는 쉼 없이 흐르고 있지만, 그 바깥으로는 절대 흘러가지 않는 시간.

 

암흑 물질

 

“저기 바깥에도 있어요. 사방에 존재하죠. 고약한 건, 그게 대체 뭔지, 그리고 왜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동성은 현실이 된다.

 

(이동성은 현실이 된다.)

 

방랑자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공간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모든 곳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더욱 거대하게 만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세부 항목들은 사라지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모양을 잃어버리며 쪼그라들어서 불분명해진다. 낮에는 ‘아름답다’ 혹은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들이 밤에는 마치 형태를 잃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가상으로 존재한다. 낮 시간에 드러난 형태의 다양성, 색의 현존, 음영 따위는 전부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밤의 두뇌는 낮에 열심히 직조한 카펫에서 다시 실을 풀어내는 페넬로페와 같다. 때로는 그 실이 한 가닥일 때도 있고, 더 많을 때도 있다. 복잡한 문양이 가장 기본적인 요소, 즉 씨실과 날실로 쪼개진다. 씨실이 떨어져 나와 평행선들로 탈바꿈한다. 그것은 세상의 바코드이다.

 

낮은 빛이요 찬란함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예외이고 부주의이며 질서의 붕괴에 불과하다. 세상은 사실 어둠 그 자체이며 거의 검은색에 가깝다. 움직이지 않으며 차갑다.

 

TV를 켜고 창문에 노란 커튼을 쳤다. 한낮의 햇볕이 쇠약해지고 조밀해지고 과열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까다롭게 굴 때가 아니었다. 실컷 울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조용한 곳, 하지만 텅 비어 있지는 않은 곳, 자기보다 더 큰 존재, 삶에 지쳐 떨고 있는 자신을 향해 두 팔을 옆으로 길게 벌려 주는 존재가 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어야 했다. 아누슈카는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원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울음을 목격해 주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이야기가 헛된 혼잣말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목판에 새겨진 눈이어도 상관없었다. 언제나 활짝 뜬 눈, 그 무엇도 지겨워하지 않으며 영원히 평화를 간직한 눈, 그런 눈이 깜빡거리지 않고 지그시 자신을 지켜봐 주기를 갈망했다.

 

신에게는 몸통이 필요치 않았기에 얼굴만 존재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얼굴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보아라, 여기 내가 있노라. 하지만 그녀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누슈카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신이 약하며 패배자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신이 유배당했다는 것을, 세상의 쓰레기 더미에, 악취가 진동하는 심연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다. 눈물은 흘려서 뭐 하겠는가, 이곳은 울 만한 장소가 아닌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아누슈카가 갑자기 말을 꺼내면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이런 말을 한 것에 대해 스스로도 놀란 눈치였다. 막상 말로 내뱉고 나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노파가 대답 대신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입안에 든 샌드위치를 꿀꺽 삼키고는 아누슈카에게 물었다.

“주소는 알아?”

“네.” 아누슈카가 대답하고는 자신의 주소를 읊는다.

“쿠즈니에츠카 46번길 78호…….”

“그럼 잊어버려.” 노파가 입안에 음식물을 가득 넣은 채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겨울의 눈부신 순백을 기억한다. 유배지의 새하얀 빛깔, 그리고 빛의 날카로운 가장자리. 세상에는 어둠이 훨씬 많기에 그런 식의 백색은 어둠에 테를 두르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아누슈카는 지금껏 수없이 많은 흥정을 시도했다. 신과 성모 마리아, 성녀 파라스케바와 성장(聖障)에 등장하는 모든 이콘의 주인공들, 심지어 모호한 세상과 운명을 대상으로도 그녀는 거래를 하고자 했다.

 

그녀는 왜 하필 이 두 사내를 기억하는 걸까? 그들은 대체로 나이 든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보통 사람과 달리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나머지 다른 사람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강이고 조류이고 물이었다. 그들은 소용돌이와 파도를 만들어 낸다. 각각의 특별한 형태는 모두 순간적인 것으로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강은 그 형태를 기억하지 않는다. 반면에 이 두 사내는 조류에 역행해서 움직였고, 그래서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강물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 아누슈카가 끌렸을 것이다.

 

아누슈카의 눈에 그득 고인 눈물이 신문지 위로 떨어졌다. 질이 별로 좋지 못한 신문지가 순식간에 눈물을 빨아들였다. 마치 얇은 성경책 종이처럼.

 

날뛰는 여인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뭘 살지, 뭘 팔지, 어디가 값이 싼지, 어디가 비싼지, 이런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네 생각을 지배하게 될 거야. 그때부터 너는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 대해 전전긍긍하게 될 거야.

 

너는 매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마치 인생이 형벌인 것처럼. 하지만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건지, 언제, 어떤 잘못을 했다는 건지, 너는 결코 알지 못할 거야.

 

달아나라, 집에서 나와라, 걸어가라, 뛰어가라. 그래야만 반기독교주의자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와 대놓고 결투를 벌이면 무조건 패배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떠나라. 땅을 버리고 여행길에 오르라.

 

그러니 아이들을 잘 키워라, 예기치 않게 그들을 낳았으니. 그리고 길을 떠나라. 부모를 잘 묻어라, 예기치 않게 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었으니. 그리고 떠나라. 그의 숨결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가라, 그의 케이블과 전선, 전파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그의 민감한 도구의 측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그들이 원하는 건 바코드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속박하고, 모든 것에 상표를 붙이는 거야, 이 제품이 무엇인지, 가격이 얼마인지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지. 이 낯선 언어는 인간의 힘으로는 해독할 수 없으니 기계나 로봇이 대신 읽어 줄 거야, 그런 식으로 밤마다 그들은 거대한 지하상가에서 바코드로 쓰인 자신의 시를 낭독할 거야.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에게

요제피네 졸리만이 보낸 세 번째 서신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재림하신 이래, 인간의 육신은 영원한 신성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인류는 개별적인 인간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제 아버지의 시신이 이토록 잔혹한 취급을 받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 이유가 단순히 아버지의 피부색 때문일까요? 어둡고 검은빛이라서? 그렇다면 낯선 땅에서 발견된 백인의 시신을 가죽을 벗겨 박제한 뒤,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전시품으로 만드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외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으로부터 평범한 권리와 관습을 앗아 가는 게 합당한 일일까요? 그러한 권리라는 것이 과연 똑같은 외양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도록 만들어진 것일까요? […] 그렇다면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라 마노 디 콘스탄니토

 

너무 많은 세계가 존재할 때는 전체보다 세부적인 항목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고래들 또는 허공에서 허우적대기

 

동물들 또한 자유 의지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규모 운동가 집단도 등장했다. 어째서 자살이란 행위가 인류에게만 주어진 미심쩍은 특권이어야 하는가?

 

범고래 빌리는 그렇게 대기 속에서 익사했다.

 

신의 구역

 

지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루에 가만히 멈춰 서 있다. 그녀의 가족들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항상 일 분 정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폴란드 시골 마을의 오랜 관습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아파트의 현관에는 의자도 없고, 앉을 만한 공간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마루에 우두커니 서서 내면의 시계를 맞추고, 타이머를 설정하고, 자신의 호흡과는 다르게 박동하는, 피와 살을 가진 크로노미터를 장착한다. 그러고는 갑자기 자세를 가다듬은 뒤, 뭔가에 마음을 뺏긴 아이처럼 짐 가방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와락 문을 연다. 떠날 시간이다. 출발. 그녀가 움직인다.

 

“인생이란 우리가 오래전에 이미 통제 능력을 상실한 혐오스러운 습관 같은 거야. 담배 끊어 본 적 있어?”라는 문장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 그녀는 담배를 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녹록지 않은 경험이었다.

 

틀림없이 인터넷에서 읽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모든 게 다 있으니까. 만약 당신의 흔적이 인터넷에 없다면 당신이라는 존재가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등학교 졸업자 명단과 같은 사소한 기록일지라도 당신의 자취는 반드시 거기에 남아 있다.

 

어머니는 가구를 팔았다. 절망이나 슬픔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없애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것은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 1960년대 후반, 부조리로 가득 찬 비우호적인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부패한 생활, 밀실 공포증을 자아내는 그 생활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좋았다.

 

아버지는 이 나라가 인간에게 적합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그는 향수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비행기는 박테리아를 절멸시키는 깨끗하고 서늘한 대기에 매달려 있다. 모든 비행은 우리를 소독한다. 모든 밤은 우리를 정화한다.

 

다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힘을 이해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잘못된 해석이었다. 자연의 선택도 없고, 투쟁도, 승리도, 적자생존의 법칙도 없다. 경쟁이라고? 개나 줘 버리라지. 경험이 풍부한 생물학자일수록 생물계의 복잡한 구조와 연결 고리를 더욱 오래, 그리고 더욱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그 과정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장하며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서로를 원조하고 돕는다는 직감 또한 점점 강렬해진다. 살아 있는 유기체들은 서로 헌신하면서, 자신이 상대에게 효율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경쟁 체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엽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균형이 깨졌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나뭇가지들이 빛을 향해 서로 밀치며 자라나고, 뿌리들이 샘에 닿기 위해 경쟁을 벌이며, 동물끼리 서로를 잡아먹긴 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인간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두려울 정도의 조화와 일치가 깔려 있다. 우리 모두는 거대한 하나의 몸체로 이루어진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치르는 전쟁은 내전에 불과하다. 살아 있다(이것 말고 대체 어떤 어휘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는 것은 100만 가지의 특성과 자질을 아우르고 있다는 뜻이며, 삶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음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류나 잘못 또한 없다. 죄를 저지른 자도, 무고한 자도 없고, 공이나 과도 없으며, 선과 악도 없다. 이러한 개념을 만든 당사자는 인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열차의 움직임, 점점 멀어지는 바르샤바의 겨울 풍경, 그리고 ‘결코 다시는’으로 시작하는 문장들. 그뿐이었다. 지금은 상당히 감상적으로 들리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그 말을 떠올리면서도 별다른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그들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그가 찾아오겠다는 계획.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는 그녀에게 오지 못했다. 하긴 그런 약속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새로운 곳에 오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이상한 향수의 파도에 휩싸였다. 이상하다고 표현한 건, 그리움의 대상이 정말 사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커다란 웅덩이에 고인 물, 그리고 그 물에 떨어진 휘발유가 만들어 내는 네온 빛깔. 무겁고 삐걱거리는 아파트 현관문.

 

기억이란 결국 서류와 종잇조각으로 가득 찬 서랍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 자신의 손에 똑같이 상처를 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서로의 핏자국을 만지며, 거기에 또다른 상처를 냈다. 이 무모한 젊음의 낭만을 그들은 ‘피의 동맹’이라 불렀다.

[…]

그녀는 자신의 손을 교대로 꼼꼼히 살펴본다. 왼손이었는지 오른손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시간은 그런 상처들도 아물게 한다.

 

우리 동포들(근데 아직 ‘너의’ 동포가 맞는 거지?)은 어떤 일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을 싫어하거든. 우리는 그 이유를 고통스러운 역사에서 찾고 있지. 역사는 우리에게 늘 불친절했으니까. 극적인 승리 뒤에는 항상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 일종의 경계심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강력한 규제에 내재된 구원의 가능성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고안해 낸 규칙을 깨뜨리고 싶은 성향도 함께 갖게 된 거지.

 

사람들의 신발에, 그들의 등산화 밑창에 박테리아나 곤충, 해조류와 같은 원치 않는 이민자들이 묻어 들어오지 않도록.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고된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치러야만 하는 전투 같은 것이었다. 결국 개별적인 생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온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시궁창 속에 빠져 함께 철벅거리고 있으니.

 

아무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고, 시선을 던지지 않는 걸 보면. 투명 인간이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이 이루어진 듯했다.

[…]

최근 몇 년 동안 그녀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중년 여인이 되면 타인의 눈에 절대 띄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두려워하지 말라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개처럼 죽음도 자신의 자리를 표시한다고 그는 말했다.

 

루스

 

아내가 죽고 난 뒤 남자는 그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장소들을 모아 리스트를 만들었다. 아내의 이름은 루스였다.

제법 많은 장소를 찾아냈는데 마을 이름뿐 아니라 시냇물, 작은 주거 단지, 언덕 또는 섬도 있었다. 아내를 기리기 위해 리스트를 만든다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루스’라는 이름의 언덕 기슭에 서 있으면, 그녀가 죽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거기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든다고 했다.

그의 이 여행 비용은 아내의 생명 보험으로 충당되었다.

 

고급 호텔들의 화려한 로비

 

호텔은 내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리듬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 소용돌이이며 그 중심에는 회전문이 있다. 어디론가 흘러가던 사람들의 물줄기가 잠시 멈춘 채, 여기서 하룻밤 또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빙글빙글 돈다. 그러다 또다시 어딘가로 흘러간다.

 

태생적으로 늘 지각하는 사람들, 서두르다가 가끔은 회전문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회전문은 마치 한순간에 그들을 가루로 빻아 버릴 수도 있는 풍차 같다.

 

지점

 

결국 언젠가는 이중 한 곳에 오래 머물러야만 한다는 사실을 도시들을 지나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다 어쩌면 거기에 정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이것은 다시 말해 어떤 고정된 지점이 존재하고, 내가 그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체 어느 지점으로부터 멀고, 또 어느 지점으로부터 가깝다는 말인가?

 

쇼팽의 심장

 

쇼팽이 10월 17일 새벽 2시(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시각을 ‘in the small hours’라고 명시하고 있다.)에 사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워비츠키 신부 - 회고록

그는 쇼팽이 운명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이미 모든 행복의 근원에 도달했다.” 실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이지만,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루드비카의 도움을 받아 ‘데스마스크’를 만들었다. 그들은 죽음의 개입으로 인해 쇼팽의 얼굴선이 무너져 버리기 전에 이 작업을 완수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죽음은 모든 얼굴을 다 비슷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건조된 표본들

 

순례의 목적은 다른 순례자다.

 

네트워크 공화국

 

나의 휴대전화 또한 예의가 무척 바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네트워크 공화국의 어느 지방에 내가 와 있는지 알려 준다.

 

언젠가 아주 먼 곳까지 여행을 갔다가 네트워크가 없는 지역에서 고생했던 일을 복잡한 감정으로 회상해 본다. […] ‘네트워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계속 반복되었다. 그러다 결국 자포자기한 전화기는 사각형의 동공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저 쓸모없는 기기, 플라스틱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세상의 끝에 도달한 여행자의 모습을 새긴, 오래된 판화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흥분이 고조된 여행자는 짐꾸러미를 내던진 채 네트워크 너머의 세상을 둘러본다. 어쩌면 판화 속의 여행자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별과 행성이 창공으로 고르게 퍼져 나가는 광경을 바라본다. 또한 그의 귀에는 구체(球體)들의 음악이 들려온다.

하지만 여행의 끝에 다다른 우리에게는 그런 선물이 허락되지 않았다. 네트워크 너머의 세상, 거기에는 그저 침묵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차를 몰면서, 나는 흑백 광고판을 지나친다, 거기에는 영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예수님은 심지어 당신도 사랑하십니다.(Jesus loves even you.)” 나는 예기치 못한 격려에 고무되었다. 다만 ‘심지어(even)’이라는 글귀가 살짝 마음에 걸렸다.

 

쿠니츠키

대지

 

드문 일이긴 하지만 어쩌다 머릿속에서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 한두 개의 단어가 울려 퍼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불면의 밤과 광란의 낮으로부터 동시에 추출된 단어들. 신경 세포에서 뭔가가 번쩍거리고, 알 수 없는 충동이 이쪽저쪽으로 튀어올랐다. 생각이란 본래 이렇게 발생하는 게 아니던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의 다리는 불안했다. 시트의 주름 속에서 비현실적인 산책을 하면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걸 놓쳐 버렸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제 그것들이 없는 공간은 없었다. 상점 간판, 광고, 우체국 표시, 약국, 은행, 아이들을 인도하여 도로를 건너는 유치원 선생님의 손에 들린 막대 사탕, 표시는 또 다른 표시를 몰고 오고, 표시를 가로질러 또 다른 표시가 왔다. 표시 너머에 다른 표시를 가리키는 표시가 있고, 다른 표시에서 야기된 표시들이 있었다. 표시의 음모, 표시의 네트워크, 그의 등 뒤에서 표시들끼리 서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무관한 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다 중요했다. 전부 끊임없이 이어지는 커다란 퍼즐이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항상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뭘 알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가 서랍 속 카탈로그철을 뒤졌다. 어떻게 찾아야 하고 뭘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들이 갓난아기였을 때, 쿠니츠키는 아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부자 사이가 가까웠다. 인간은 언제나 서로 거리를 두고 있으려 하니까.

[…]

아이는 인간이 아니다. 품에서 떨어져 나가며 ‘아니야’라고 말하기 시작할 무렵, 그제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

 

쿠니츠키가 잠들지 못하는 건 틀림없이 이 말썽 많은 다리 때문이리라. 허리 윗부분은 멀쩡하다. 근육이 이완되고 나른하게 졸린 상태다. 하지만 허리 아랫부분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마치 다른 두 인물이 공존하는 것 같다. 위쪽은 평화와 정의를 갈망하고, 아래쪽은 범법적인 성향에 규칙을 깡그리 무시한다. 위쪽 인물은 이름과 주소, 신분증 번호를 가졌지만, 아래쪽 인물은 자신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하나도 없으며, 스스로에 대해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모를 뿐.

 

“당신, 괜찮은 거야?”

쿠니츠키가 대답했다. 괜찮다고. 하지만 그는 알았다. 그들이 지금 마지막 대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부엌은 결투장이 될 테고, 거기서 그들은 각자 공격 태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식탁 근처에 자리를 잡을 테고, 그녀는 창문을 등지고 설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리고 그는 알았다. 이 중요한 순간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왜냐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정말 마지막이자 유일한 순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진실은 무엇일까. 하지만 그는 또한 알았다. 자신이 지금 지뢰밭을 밟고 있음을. 모든 질문은 폭탄이 될 것이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다. 진실을 규명하려는 시도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자 그는 자신이 마치 옷 속에 폭탄을 감춘 테러리스트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폭탄은 그들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터질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리라.

 

섬들의 대칭

 

여행 심리학에서는, 두 장소의 유사성에 대한 인지도는 두 장소의 거리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서로 가까울수록 비슷하다고 느끼지 않고, 낯설게 여긴다는 것이다. 여행 심리학에 따르면, 눈에 띄는 유사점의 대부분은 세계의 반대편에서 발견된다.

 

섬들의 대칭 현상.

고틀란드와 로도스, 아이슬란드와 뉴질랜드.

 

대지의 젖꼭지

 

그들은 이끼 덮인 바위틈에서 침낭에 들어가 그날 밤을 보냈다. […] 대지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기 위해 이끼 아래, 돌 밑에다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미세한 진동과 움직임, 그리고 호흡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대지는 살아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통해 그날 밤 별일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를 깨우쳤다. 그들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있으면, 대지는 기꺼이 자신의 따뜻한 젖꼭지를 내어준다고 아이슬란드인들은 말했다. 그러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젖꼭지를 빨면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모유를 마시면 된다는 것이다. 그 모유는 아마도 수산화마그네슘 같은 맛이리라.

 

카이로스

 

그녀는 자주 그에게 화가 났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모든 걸 전적으로 의지하면서도 그러지 않는 듯이,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인 듯이 행동한다. 남자들, 아니면 적어도 그들 가운데서 똑똑한 부류는 자기 보존 본능이 발동해서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보다 아주 젊은 여자에게 집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매우 필사적인 감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보다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인간이 느끼는 어떤 직감, 애써 감추며 침묵으로 일관해 온 불길한 예감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너무 조용하고 따분한 시간의 흐름 속에 던져지면 남보다 빨리 늙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리는 여자의 이미지가 고급 품종의 유용한 강아지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만족감을 느끼면서 그녀는 강아지의 성향들을 꼽아 보았다. 빨리 배운다. 공격적이지 않다. 아이들을 좋아한다. 우호적이다. 집에서 잘 지낸다. 여자들에게서, 특히 젊은 여자들에게서 미지의 강렬한 본능을 일깨우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본능은 때로는 아이를 갖고 싶은 욕구와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여자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세상을 포용하고 싶은 욕구. 산책로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욕구. 낮과 밤을 정리하려는 욕구. 집 안의 고유한 일상을 확립하려는 욕구. 무력감을 다스리는 가벼운 훈련을 통해 이러한 본능을 일깨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그녀들은 어느 틈에 눈먼 존재가 되고, 기계적인 알고리즘이 작동하게 된다. 결국은 텐트를 버리고 둥지 속에 눌러앉게 될 것이며, 둥지 밖으로 모든 것을 내던지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안에 있는 새끼 새가 실은 괴물이고, 누군가가 버리고 간 존재라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단체 여행객들은 아직 없다. 교수는 그들에 대해 항상 비판적으로 말했고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여행객의 대부분은 뭔가를 바라보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며, 그들의 시선은 대량으로 찍어 낸 여행 가이드북에 소개된 것들만 따라다니며, 심지어 그럴 때도 그저 대상의 표면을 미끄러져 갈 뿐이라고 교수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그리스 문명의 범위가 대체로 감귤 나무의 서식지와 일치한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햇볕을 듬뿍 받은, 생명력 넘치는 공간 너머의 모든 것은 천천히 피할 수 없는 쇠락을 겪는 법이죠.”

 

이성적이면서 담론적인 지성, 깨끗하게 살균된 고독한 지성,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많은 걸 알지 못하는 지성, 하지만 그것들은 재빠르게 움직인다. 신속하고 영리한 전기 자극,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걸 서로 연결해 버리는 지성, 모든 것이 함께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낸다고 설득하는 지성.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모든 것을 마다하라. 보지 말라. 눈꺼풀을 닫고 시선을 바꿔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지만,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다른 것에 눈을 떠야 한다.”

 

“……어쩌면 과거를 보는 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뒤로 돌리는 거죠. 마치 파놉티콘처럼. 아니면 친애하는 여러분, 과거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겁니다. 단지 다른 차원으로 이주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저 우리의 시각과 관점을 바꾸기만 하면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걸 곁눈질로 보는 거죠. 미래나 과거가 무한하고 끝없는 것이라면 실제로 ‘언젠가’라는 시점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시간의 다양한 순간이 마치 홑이불처럼 공간 속에 매달려 있거나, 아니면 여러 개의 화면 속에 특정한 순간이 동시에 투영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움직일 수 없는 순간, 거대한 메타-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저 깡충깡충 뛰어다닐 뿐입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목적지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공간에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무한대에서 똑같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어딘가’라는 표현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도, 어떤 날도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유명한 책들이 다루지 않은 신들, 예를 들어 호메로스나 오비디우스도 무시해 버린 그런 신들에 관해 들려주자는 것이었다.

 

카이로스의 경우를 보자. 그는 늘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즉 순환의 시간 속에서 활동했다. 그것은 장소와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즉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 적절한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아주 짧게 열리는 순간이다. 또한 무(無)에서 무(無)로 달려가는 직선이 원과 맞닥뜨리는 바로 그 지점이기도 하다.

 

당신은 누구인가?

모든 것을 길들이는 카이로스.

왜 항상 발돋움을 하고 있는가?

쉼 없이 세상을 뛰어다니고 있으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의 두 발에는 날개가 달렸는가?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기 때문이지.

당신의 오른손은 무엇 때문에 면도칼을 들었는가?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것보다 더 날카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표시지.

머리카락은 왜 눈을 가렸는가?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사람이 내 앞머리를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지.

세상에, 당신의 뒷머리는 왜 하나도 없는가?

한번 지나치면 날개 달린 발로 빠르게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원해도 그 누구도 날 뒤에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지.

왜 그가 당신의 동상을 만들었는가?

외국인들, 바로 당신들 때문이지. 그리고 교훈으로 입구에 나를 세워두기 위해서지.

 

지금껏 그 누구도 우리에게 늙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다고. 그래서 우리는 노화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 그리고 우리 자신은 영원히 청춘일 거라는 정체 모를 확신을 품는다. 또한 우리는 고령자를 대할 때, 노화가 마치 그들의 잘못인 양 취급한다.

 

여기 내가 있다

 

나는 진보했다. 처음엔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뜨면 ‘나는 지금 집에 있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여행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다음 단계, 그러니까 ‘모르겠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제기랄, 대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최상의 단계다. […]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치 않다.”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다. 여기 내가 있으므로.

 

탑승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발에서 시선을 들어 올리고 서로 바라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기에. 우리는 문자와 이니셜을 서로 교환하고, 종이 위에 서로를 불멸로 남기고, 서로를 플라스티네이션 처리하고, 문장의 포름알데히드 속에 서로를 담글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다 쓴 일지를 다른 노트들과 함께 보관할 것이다.

 

옮긴이의 말

 

작가는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다양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이유로 여행길에 오른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보여 준다.

 

그들은 어딘가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 어딘가를, 무엇을,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 다다르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타인과의 경계, 거리, 혹은 단절에 대한 성찰의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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