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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에이미와 이저벨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2020. 12. 14.
에이미와 이저벨

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저/정연희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어려움에 관해 빛나는 고결함과 유머로 써내려간 소설.” _앨리스 먼로(소설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문체, 삶의 내밀한 곳까지 가닿는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에이미와 이저벨』은 스트라우트의 장편 데뷔작으로, 그의 문학적 역량을 단번에 확인시켜준 작품이다(1998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작품은 이듬해 국내에서 『타인의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엄마와 딸 사이의 복잡 미묘한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면서, 그들이 맞이하는 위태로운 한 계절을 그리고 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뜨겁고 느른한 여름 공기 속에서 가차 없이 그려진다. 

 

1

 

물론 진짜 문제는 엄마와 온종일 붙어 지내는 것이었다. 에이미는 자신이 엄마와 검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선은 고작 연필로 그은 정도의 굵기였지만 늘 거기 존재했다. 이를테면 둘 중 하나가 사무실을 나서서 화장실이나 현관 식수대에 가더라도 검은 선은 끄떡없었다. 그 선은 벽을 뚫고 그들을 연결했다.

 

사실 이저벨은 이 기도라는 것에 점점 좌절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녀의 나이였을 때 올리브 숲을 거닐며 용기를 그러모은 뒤 담대하게 십자가로 걸어가, 입술에 신 포도주를 적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견딘 사실은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여기 셜리폴스에 사는 그녀는(젖가슴에 베이비파우더를 바르면서 자신도 유다 같은 딸에게 배반을 당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나갈 올리브 숲이 없었고 용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쩌면 신앙심도 없었다. 요즘 그녀는 하느님이 자신의 곤경을 알아주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누가 뭐라든 하느님은 능히 빠져나갈 수 있는 존재였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들은 서로 눈을 피했다. 에이미는 꼭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이 낯선 존재, 나의 딸.

 

희뿌연 햇살이 레인지와 바닥에 길게 떨어지는 이른 저녁에 딸(이 낯선 존재)의 맞은편에 앉아 햄버거와 토스트를 먹고 있자니, 이저벨은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자잘한 일들을 걱정하던 그 특권에 대한 그리움이.

 

“제발 좀 냅킨을 써.” 이저벨은 참을 수가 없었다. 에이미가 손가락에 묻은 케첩을 빨아먹는 것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분노는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고개를 쳐들었고 이저벨의 목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매정했다. 솔직히 매정함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솔직해진다면, 목소리에 증오의 날이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 이저벨은 자기 자신이 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뱉은 말을 주워담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2

 

그가 꽤 괜찮은 값에 집을 팔겠다고 여러 번 제안했지만 이저벨은 어머니가 남겨준 밑천이 조금 있었음에도 늘 거절했다. 그곳은 그저 임시 거주지였으니까.

하지만 가만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들은 벌써 십사 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이저벨은 연못에 고인 물을 들이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삶이란 것이 그렇듯 그녀의 삶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울타리에 앉은 새처럼 정처가 없었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언젠가 크레인 씨가 죽으면 울타리조차 없을지 몰랐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임대계약이 어떻게 될지 공손하게 물어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을 살 엄두는 나지 않았고, 자신의 진짜 삶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생각도 포기할 수 없었다.

 

오늘밤 에이미는 티셔츠와 팬티만 입고 침대 모서리에 맨다리를 걸친 채 누워, 엄마가 방귀 뀌는 소리를 들었다. 예의를 지키려고 애쓴 짧고 메마른 소리.

 

작은 일기장을 꺼냈다. 엄마가 지난 크리스마스 때 선물로 준 것이었다. […] 물론 엄마는 일기장을 훔쳐볼 것이다. 줄곧 그래왔으니까. 크리스마스 때 선물 포장을 벗기는 순간 에이미는 알았다. “너도 이런 걸 좋아할 나이가 됐다고 생각했어.” 엄마가 말했고, 서로의 눈길을 피하는 그 짧은 순간에 에이미는 진실을 알았다. “마음에 들어요.” 에이미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갈 곳이 없었다. 그저 잠드는 것뿐.

 

그(로버트슨 선생)는 분홍색 셔츠에 적갈색 타이를 맸고, 갈색 코듀로이 바지에 같은 색 스포츠 재킷을 입고 있었다. 여지없는 어른이었고 권위라는 옷을 입고 있었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며 힘주어 말했다.

[…]

“너희는 이제 젊은 어른이다.” […]

“너희는 인생의 어떤 시점에 이르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야 하는 시점에.”

에이미는 이 남자가 공산주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너. 넌 뭐가 되고 싶니?”

에이미는 정신이 아뜩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

“진심으로?” 이윽고 그가 물었다.

 

“에이미, 정말로 교사가 되고 싶은 거니?” 그가 그 순간을 그렇게 망쳐버리지만 않았어도,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아니면 교사가 되는 것이 엄마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이니?” 하고 묻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시인이 더 되고 싶다고 고백할 뻔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속이 상했다.

[…]

에이미는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슨 선생이 물었다. “에이미. 왜 머리카락 뒤에 숨어 있지?”

[…]

“딱딱한 등딱지 대신 머리카락이라는 갑각이 있을 뿐이지.”

 

유클리드만이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았네.

 

“하느님만이 너의 금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할 수 있겠지.”

 

3

 

이저벨은 그 옷을 자주 입지 않으려고 했다. 너무 자주 매력적으로 보이면 사람들이 더 기대할 테고, 그러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더 자주 알아차리게 될 테니까.

 

베브가 담배를 피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먹는 이유와 같았다. 뭔가 기대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단했다. 삶이 시큰둥해지면 뭔가 기대할 것이 필요했다.

 

그녀(베브)는 담배를 비벼 껐다.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릿한 통증은 가슴에 남아 있었다. 환희에 가까운 무엇이 아련하게 윙윙거리면서 그녀의 기억 언저리에 살아 있었다. 그것은 한때 응답을 받았으나 이제는 받을 수 없는 어떤 갈망이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량한 남자와 결혼했지만 많은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원하던 아기들을 낳았고 모두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통증은 무엇인가?

 

이저벨이 나오다가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니 그가 엄마의 이름을 부른 듯했다. 에이미가 다시 고개를 들어 흘끗 보는데 엄마의 하얀 얼굴에 순종과 희망의 표정이 어리다가 사라졌다. 에이미의 가슴속에 구멍이 뚫렸다. 방금 본 장면은 끔찍했다. 엄마의 적나라한 얼굴.

 

에이미는 방긋 웃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순간 뚱뚱이 베브를 좋아한 것처럼 다른 누구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덩치 크고 나이든 뚱뚱이 베브, 대변이 어떻다거나 생리혈이 어떻다는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 세상 어떤 일보다 평범하게 꺼낼 수 있는 사람. 한편 베브는 도티 브라운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아이의 가냘픈 얼굴에 순간적으로 미약하나마 떨리는 갈망이 희뜩 스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여자라면 칭찬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지.”

 

4

 

“유괴됐으니까. 그애는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 행복한 아이였대.”

“지랄.” […] “열두 살은 행복하지 않아.”

[…]

“난 확실히 행복하지 않았는데. 너는?”

[…]

“나도.”

 

“죽은 사람들은 자는 것처럼 보여요?” 에이미가 물었다.

[…] “아니. 죽은 사람은 죽은 것처럼 보여.”

[…]

“죽은 사람은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 가버린 것처럼 보여.”

 

슈퍼마켓에서 그녀(에이미)는 울고 싶어졌다. 여기서는 희망과 절망이 묘하게 부딪쳤다. 벽에 걸린 전화기가 울리고 은식기가 식탁에서 젱그렁거리고 레인지에 올린 냄비들이 김을 내뿜는, 이 세상 모든 불 켜진 부엌들의 희망. 그리고 비트 캔과 옥수수 캔이 몇 겹으로 줄지어 놓여 있는 절망. 고단하고 웃음기 없는 사람들이 카트를 밀고 지나갔다.

 

엄마와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함께 있고 무사하다는 것뿐이었다.

 

“여자라면 칭찬을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지.”

에이미는 창밖으로 박새가 소나무 가지에서 콩콩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여자라면. 그 부분이 가장 좋았다. 로버트슨 선생이 그 단어를 발음한 방식에는 사랑스러운 여자다움이 암시되어 있었다. 여자는 사랑스러운 존재였고, 거기에는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란 사랑스러운 존재다. 로버트슨 선생이 다정하고 다 아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를 가르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5

 

“네가 엄마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면 좋겠어. 쳐다보거나 말할 때는 그 흔한 예의를 조금이라도 갖춰주면 좋겠고.”

침묵이 흘렀다.

“알겠니?”

“네.” 에이미가 조심스럽게, 자칫 엄마에 대한 혐오감을 들키지는 않을 만큼 냉정하게, 하지만 예의 없다는 꾸지람을 계속 들을 만큼 냉정하지는 않게 대답했다.

 

그녀는 화장실 세면대 위에 걸린 거울로 자기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이게 나였나?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모습이 이건가? 머릿결은 아름답지만 얼굴은 무표정했다. 가슴속에서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녀가 화장실 문을 당겨 열고 밖으로 나가자 등뒤에서 문짝이 피곤한 듯 툭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는 로버트슨 선생이 연필을 책상에 내려놓는 소리를 들었다. “숙제를 하렴.”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고 싶으면.”

“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 순간 와락 눈물이 솟구쳤다. 지독한 슬픔! 갑작스러운 무너짐! 오후를 기대감 속에 허우적거리며 보낸 탓에 그녀는 지쳐 있었다.

 

그녀에게 이렇게 진지하게 말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이해한다, 에이미. 괜찮아.”

그는 눈물 때문에 놀라거나 심지어 당황하지도 않아 보여서 정말 뭔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그녀 옆의 책상에 앉아 손수건만 내밀었다.

 

첫 행은, 음, ‘유클리드만이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았네’, 아마 맞을 거예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생강 색깔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름다움을 지절거리는 모든 이에게 평화가 머물기를.”

“선생님도 아시네요.” 그녀가 놀라서 말했다.

 

‘시간이 위로를 데려오지 않는구나. 모두 거짓말을 했구나……’”

“‘시간이 지나면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내게 말해준 이들 모두.’”

에이미가 의자에서 살짝 엉덩이를 들며 시를 끝냈다.

 

“그 할머니의 집을 청소하기 싫은 건 왜였지?” 질문한 방식에서 그녀는 그가 정말 알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 집이 외로워서요.”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맑은 물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시, 아마도요.” 잠시 뒤 그녀가 말했다. “어쨌거나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시요. 이해할 수 없는 시도 많은데 그런 때는 제가 바보 같아요.”

“너는 바보 같지 않아.”

 

“에이미?” 그녀가 잠긴 문을 열면서 불렀다. “에이미? 어디 있니?” 열쇠를 식탁에 툭 내려놓자 그 소리가 잠시 어마어마하게 크게 울렸다.

그녀가 전등을 켰다. “에이미?”

거실로 간다. 전등을 켠다. “에이미?”

이 방 저 방 다니다가 계단을 올라가 여기저기 전등을 다 켠다. “에이미.”

 

내 딸은 내가 아는데, 뭔가 잘못됐어. 의자에 앉아 다시 흐느껴 울었다. 거대하고 끔찍한 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져나왔다. 에이미, 에이미, 그녀가 외쳤다.

그러자 거기 에이미가 나타났다. […] “엄마, 괜찮아요?”

 

이저벨은 여전히 눈물로 뺨이 젖은 채, 방금 자신이 바보가 된 듯한 생뚱한 기분에 휩싸였다.

 

6

 

자갈 깔린 진입로로 엄마의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릴 때처럼 이런 것들은 에이미를 안심시켰다. 그러면 괜찮았다. 엄마가 집에 있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엄마가 실제로 집에 있으면 실망스러웠다.

 

“엄마, 예이츠예요. 이이츠가 아니라.”

이저벨이 돌아보았다. “뭐?” 당혹감이 벌써 목으로, 가슴으로 퍼지고 있었다.

 

수치심은 몸을 꽉 죄며 달라붙는 스웨터 같았다. 얼굴과 겨드랑이 밑이 땀으로 축축했다. 이 두려움에는 새로운 것이 있었다. 그녀의 무식함을 딸이 동정하다니.

[…]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에이미를 숱하게 상상했지만 방금 당한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 그녀의 눈에 이저벨은 그저 작은 타운의 공장에서 일하는 멍청이일 테니까. 이날 저녁 그랬던 것처럼 이저벨은 늘 조심히 대해야 할 사람일 테니까.

 

『햄릿』. […] 계산대 앞에 서서 그녀는 지금 자기가 떠안으려고 하는 것의 어마어마함에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턱에 듬성듬성 금발 수염이 난 젊은 점원이 계산대에서 삑삑 소리를 내며 심드렁하게 책값을 입력하자 그녀는 기뻤다. 겉보기에는 그녀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명백한 근거가 없다는 의미였다. 알맞은 배역을 맡은 것처럼 보일 거야.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여자들을, 지겨운 일과와 화장실 농담과 여전히 해묵은 원한이 부글거리는 단조로운 날들을 측은히 여길 수 있어야 했다. 참으로 애틋했다.

 

요즘 그녀는 그런 야릇하고 불안하고 은밀한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학교 끝나고 보자.” 그 말이 안겨준 기쁨.

 

“눈처럼 녹아 이슬로 맺히겠지.”

지금까지는 괜찮았다고, 이저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면서 녹아버리고 싶은 욕망, 사라지고 싶은 욕망은 그녀도 당연히 경험했다. 이슬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지만, 생각하면 그건 아름다운 표현이었고, 따지고 보면 그녀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이유도 결국 그거였다. 그는 천재였고, 평범한 우리는 절대 생각하지 못할 방식으로 사물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나약함이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 […] 솔직히 슬슬 짜증이 났다. 남자들은 깨우쳐야 할 것이 많았다. 여자들은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먼 옛날부터 세상을 흘러가게 한 것은 여자였다.

 

몹시 고단했다. 그리고 정말 나약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진실이 알고 싶다면, 그것이 진실이었다

 

7

 

이 모든 일에서 그녀는 노력하지 않았고, 노력하더라도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랫동안 간직해온 그녀의 비밀이었다. 그녀가 다른 엄마를 원한다는 것. 예쁜 엄마, 사람들을 따뜻이 반겨주는 엄마를 원했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것 같은 엄마, 널찍하고 반짝거리는 부엌 바닥을 대걸레로 닦는 엄마,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키스하는 엄마, 근처에 다른 집들이 있고 이웃들이 들락날락하는 집에 사는 엄마를 원했다.

 

8

 

누가 미친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 “세상이 무서운 게 바로 그 때문이지.”

 

하지만 이저벨은 그런 사건들이 느닷없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

“그편이 신부님에게 말하기는 편했겠지만, 엄마가 소리를 질렀기 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그것 말고 뭐가 더 있겠죠. 제 생각에, 아이들은 보고 배우는 게 있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길을 택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만한 뭔가를 배웠을 거예요. 마약을 파는 것 말이에요.”

 

9

 

“왜 떠난 거래요?”

“그건 몰라. 자의식이 되살아나서가 아닐까.”

[…]

“자의식이 되살아났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그것 때문에 그렇게 된 건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요즘 온갖 부류의 여자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단체를 만드는 건 너도 알잖아.”

“어떤 단체요?” 에이미는 식탁에 앉아 생물 책을 폈다. 아직 숙제가 남아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여자들이 둘러앉아 남편 욕을 하면서 서로 이혼하라고 부추긴대.”

[…]

“가엾은 사람이지. 아내가 달아나다니.” (그녀는 훗날 이 순간을 떠올린다. 부엌에 서서 가엾은 사람이지, 하고 말했던 것을.)

 

이 모든 시련을 겪은 것이 자기가 아니라 에마여서 다행이었다. 그 사실이 정말 기뻤다. […] 그녀의 마음은 한 세기 전 프랑스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하고 얄궂은 일에 아직 젖어 있는데, 몸은 20세기 셜리폴스의 구두공장 주차장에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마음 놓이면서도 약간 따분했다.

 

솔직히 이저벨은 자신이 샤를 같은 남편과 살면 매우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그래서 에마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기가 당연히 어려웠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였다. 이저벨은 마음 깊숙이 에마가 품은 지독한 열망을 이해하고 있었다. 셜리폴스에서는 누구도 이저벨의 이런 마음을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한 남자와 파괴적인 육체적 사랑에 빠진 기억이 있었고, 이 기억은 이따금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녀의 마음속에서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지독히 잘못된—일이었고 그녀의 심장은 지금 세차게 뛰었다. 이 차 안에서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한동안은 책을 읽지 않을 거라고, 굳이 다른 사람의 슬픔을 머릿속에 밀어넣지 않아도 삶은 충분히 힘들다고 생각했다.

 

10

 

이 계통의 일에서 찾아오는 좌절의 시기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고 믿었지만 최근에는 부쩍 무력감에 시달렸다. 호전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그들은 호전되지 않았다. 외롭기 때문에 찾아왔고, 고통 때문에 진정 혼란스러워 찾아왔다. […] 자신은 기껏해야 환자에게 평가를 내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주거나 마음을 다스리고 안식하는 순간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인정의 미소를 바라는 허기.

 

로버트슨 선생이 자기에게 프렌치키스를 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했다. 사랑한다는 뜻인가? 사랑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녀와는 거의 무관하게 일어난 일 같았다. 하지만 그런 키스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만 가능하니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고요한 거실에 앉아 있으려니 불안하고 어쩐지 슬펐다.

 

11

 

도티 브라운과 뚱뚱이 베브가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기분좋게 껄껄거린 것을 포함하여, 타운 전체에 크고 작은 온갖 기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웃음(이번에는 도티 브라운의 시어머니에 대한 것이었다)은 서로 오래 알고 지낸 두 여자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것이었다. 서로의 소소하고 익숙한 표현에서 기쁨과 위로를 찾고, 웃음이 서서히 잦아들면—이따금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리고 화장지로 눈물을 찍어내면서—인간적인 유대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결국 인간이 그렇게 혼자는 아니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두 여자 사이에서 오가는 그런 웃음.

 

12

 

그녀도 결혼이란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았다. 삶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13

 

이저벨은 커다란 금속 캐비닛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딸에게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갔는데, 때마침 에이미와 뚱뚱이 베브가 미소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그렇게 잽싸지는 않았다. 에이미도 웃다가 저만치 이저벨을 보고 말았고, 그 순간 눈동자가 멎어버렸다.

 

돌이켜보면 이저벨이 눈치를 챘어야 할 단서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 당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을 일들의 장면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휙휙 스치자, 그 행복한 봄의 기억은 송두리째 악의적이고 교활한 것이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 기억들을 피할 안식처마저 없어 보였다.

 

아무렴 그런 일이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날 리 없지. 엄마가 관심만 있었다면……

지금 이저벨은 휴게실로 돌아가서 소리치고 싶었다. 정말 알 수 없단 말이야!

 

물론 그녀는 매일매일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음식을 먹었고, 이따금 신기할 만큼 잠도 잘 잤고, 아침이 되면 일어나 공장으로 출근했기 때문에, 몸은 어리석게도 생명을 유지해나갔다. 그녀의 ‘삶’은 계속 흘러갔다. 하지만 메슥거리는 고통과 슬픔을 제외하면 거의 어떤 것과도 유대감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그녀는 이 ‘사건’ 아래 숨겨진 진실은 오랜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자신의 가장 깊은 핵심에 자리한 허위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갔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맞닥뜨린 것은 정신적 본성의 위기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그 위기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다.

 

“자기가 미쳤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에이미가 책상 위로 몸을 숙이며 불쑥 물었다.

“넌 미치지 않았어.” 베브가 조용히, 마치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가 미친 게 아닌가 고민하는 한.”

 

“어쩌면 우리 모두 미쳤을 거야.”

[…]

“그 사람들은 미친 것처럼 행동하잖아.” 또 고개를 끄떡했다. “자기가 미쳤다고 느끼는 건 괜찮아. 미친 것처럼 행동하지만 않으면.” […] “사람들 많은 곳에서 혼잣말은 하지 말고. 이따금 목욕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고. 그러면 되는 거야. 힘든 일이 주어져도 잘 이겨내면 돼, 그러면 괜찮아. 원래 그런 거라 생각하고 힘든 일을 잘 이겨내면 아무도 억지로 끌고 가지는 않을 테니까.”

 

14

 

그렇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서로 자신의 고통이 상대방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느꼈다.

 

에이미는 생각했다. 그래도 데비의 엄마는 딸을 사랑했잖아.

[…]

이저벨은 […] 그 아이는 다정하기라도 했지.

 

“넌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몰라.”

[…]

“그렇지 않아요!”

에이미가 불쑥, 젖은 얼굴로 엄마를 쳐다보며 소리질렀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엄마죠! 엄마는 어디에 가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말도 하지 않잖아요! 책도 읽지 않고……” 여기서 에이미는 잠시 물러서는 듯했지만, 스스로 격려하듯 손을 옆으로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바보 같은 <리더스 다이제스트>만 빼면요.”

그들은 서로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이윽고 에이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영화를 보러 가지도 않잖아요.” 아이의 얼굴에 분노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엄마가 어떻게 알아요?”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 진실은 에이미가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는 사실, 에이미가 의도했거나 짐작했던 것보다 더 강한 주먹을 날렸다는 사실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딸과 여태 살아왔다는 거북한 깨달음이 점점 커져갔다

 

이저벨의 가슴속에는—딸의 해쓱한 얼굴과 외면하는 시선을 애써 쳐다보면서—이 아이가 분리된 채로 살고 있었다는 느낌, 딸이 그녀가 생각해온 것과 완전히 다른 아이였다는 느낌, 이 아이는 심지어 엄마를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느낌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타운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가요?” 그녀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

그녀는 그의 말에서, 그가 그녀의 딸을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가 딸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엄청 화가 났겠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그가 똑똑해서 싫었다. 그는 그녀보다 더 똑똑했고, 그것이 싫었다.

 

<예이츠 시 선집>

그들은 이저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그들이 그 혐오스러운 만남을 이어가는 동안 자기에 대해 이따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음을 깨달았다.

[…]

그녀가 집 앞 진입로로 들어서면서 느낀 것은 깊은 분노와 고통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런 감정을 느끼고도 생명을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절대 믿을 수 없었던, 그런 분노와 고통. […] 어쩌면 죽는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강력한 파도에 휩쓸리는 마지막 순간 같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끝에 다다르면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고 신경쓸 이유도 없는 그런 것일지 모른다. 마지막이 오면, 끝은 거기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어가고 있지 않았다. […] 그녀는 이것을 견뎌야 했다.

 

15

 

“하느님, 제발.” 이저벨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 “하느님, 제발, 제발.” 제발 무엇을? 그녀는 하느님이 미웠다. 정말 미웠다. 어둠 속에서 그녀는 실제로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고, 오, 신이라는 존재가 아주 신물이 났다. 오랫동안 그녀는 신과 함께 일종의 수수께끼 게임을 했다. 이게 옳아요, 하느님? 제가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나요? 결정은 죄다 신을 기쁘게 하는 쪽으로 내렸다. 그런데 그 결과가 그녀를 어디로 데려왔는가. 아무 곳에도 데려오지 못했다. 그것보다 더 나빴다. “나는 당신이 미워요, 하느님.” 그녀가 이를 악물며 말했고, 그 목소리는 어두운 방안으로 퍼져나갔다.

 

그녀와 엄마는 바보 같은 자신들의 삶이 고단하고 구역질났지만 서로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16

 

사무실을 가로질러 달려가 딸의 목을 끌어안고 그 창백한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에이미,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에이미,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 그러나 소녀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도, 앞으로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텅 빈 눈동자에는 가위질과 더불어 잘려나간 회복될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일 것이다. 머리는 다시 자라겠지만 이 무언가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 상실에 대해 에이미는 절대적으로 단호했다. 됐어요, 에이미의 텅 빈 눈동자는 엄마를 쳐다보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됐어요, 엄마는 없어요.

 

“예쁜아, 예쁜아, 넌 기적이란다.” 아버지는 그녀가 소파에 앉아 있으면 팔을 벌리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이저벨의 어머니는 의사들에게 십중팔구 아기를 낳을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고(이저벨은 끝까지 알지 못한 이유로), 그래서 이저벨을 낳은 것은 기적을 낳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기적이 되는 일에는 책임이 뒤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이저벨의 뱃속에는 작은 돌멩이—무르고 까맣고 크기에 비해 무거운—가 들어앉아버렸다. 그녀가 돌멩이에 공포라는 이름을 붙인 적은 없지만, 그것은 공포였다. 부모의 기쁨이 오로지 그녀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녀에게 꼼짝도 못했고,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채 그들이 준 것과 똑같은 맹목적인 사랑을 요구했다.

 

17

 

그녀는 휴게실을 나서면서 넘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여자들과 의자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공간을 무사히 헤집고 나온 마지막 순간 뚱뚱이 베브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 순간 혼란 속에서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이저벨은 오랫동안 알아온 이 여자의 얼굴에 이해한다는 표정이 분명하게 어린 것을 보았다. 숱한 세월 이후 처음으로 이저벨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도 친구가 생겼어.

 

18

 

어쨌거나 그들은 사무실 가득 심통이 난 자식들과 대면해야 하는 부모였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저 너머 화강암 돌덩이들이 또 한 줄 나타났는데, 한때 사유지를 가르는 경계선이었겠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에이미나 스테이시가 아니라) 거기 살았다는 희미한 시간의 흔적에 불과했다. 아마도 너무나 고달파서, 혹독한 계절을 견디는 것과 태어나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 자체가 승리였던 시간들의 흔적.

 

19

 

미운 이유는, 에이미는 남자와 성적 쾌락을 즐기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으로 안락의자에서 일어서며 퍼뜩 깨달았다. 그뒤로는 내면에서 부풀어오르며 분출하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밀어넣고 억누르는 기분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그 미칠 듯 절절한 감각들을 다시 느끼기 위해 남자를 갈망하고 갈망하고 또 갈망해왔다는 것을.

그런데 그 감각들을 에이미가 대신 누렸다.

 

“넌 모르겠지만 난 이런저런 걸 알지.” 에이미가 어릴 때 이따금 엄마는 이렇게만 말한 뒤 입을 다물곤 했다. 이저벨은 마땅히 지녀야 할 우월한 지식과 경험을 겸비한 사람이며, 에이미는 설명해줄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듯.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해.”

 

딸의 다리는 보기 좋게 균형 잡혀 있었지만, 이저벨은 멀어지는 딸의 모습에서 오른발이 약간 안으로 휘어지는 익숙한 걸음걸이를 보았다. 마치 소녀가 소리 내지 않고 가냘프게 “무서워”라고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것처럼, 남들은 잘 알아보지 못할 이 불완전한 걸음걸이에서 수줍은 속삭임이—늘 그랬던 것처럼—들렸다. 두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동시에 떠올리자 이저벨은 기분이 야릇해져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꽃바구니를 손에 든 완전한 어른의 뒷모습과 조그만 손가락으로 플라스틱 인형의 머리를 꼭 쥐고 에스터 해치의 집으로 걸어가던 곱슬머리 여자아이.

 

20

 

“괜찮아요, 도티.” 이저벨이 다시 속삭였다. “혼자가 아니에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그녀가 이 말을 한 것은 그것—슬픔에 빠져 혼자 있는 것—이 스스로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이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기억이 송두리째 망가진 걸 알겠어요.” 그러자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쉽게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인생이 어떻게 송두리째 찢기는지를, 도티의 삶이 바로 이 순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찢기고 있는 것을,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까 차 안에서 도티에게 “그 삶이 전부였잖아요” 하고 말했을 때 이저벨이 했던 생각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진도 아니었고 ‘신의 섭리’도 아니었다. 아니, 이런 일로는 신을 탓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을 서로 저지르는 것은 인간,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망가뜨렸다.

 

“모르겠어요.” 이저벨이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겠어.” 도티가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 둘 다 바보야, 베브는 말하고 싶었다. 이런 것에 수수께끼란 없으니까. 어떤 남자들은, 그리고 어떤 여자들은 (키 크고 얼굴이 누르께한 앨시어를 떠올리며) 그저 똥 같은 종자들이니까.

 

21

 

삶은 흐르거나, 흐르지 않았다.

 

그가 키스했을 때 그녀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 그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로버트슨 선생과 키스한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스스로 대견한 기분이 들었는데, 어렸을 때 걸스카우트 배지를 받았을 때와 다르지 않은 감정이었다. 하나를 더 ‘모았을’ 때 드는 불안한 안도감 같은 것.

이렇게 이제 그녀는 남자들이 원하는 숙녀가 되었다. 한 남자만이 아니라 또다른 남자가 원하는.

 

에이미는 참을 수 없었다. 그 바보 같은 독서용 안경, 깐닥거리는 발,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경멸하는 척하는 것.

 

“농담 아니야.” 베브가 말하고, 풍만한 가슴을 들썩이며 마지막으로 껄껄거린 뒤 브라우니 부스러기들을 가슴팍에서 털어냈다.

“삶.” 도티 브라운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농담이 바로 삶 아니겠어.” 그러자 그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까처럼 요란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가족의 행복.

그렇기는 해도. 그녀의 젖가슴이 사라졌다. 그녀는 이 사실을 극복할 수도, 믿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22

 

이 모든 것에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불안해 보이는 학생들이 어수선하게 돌아다니지 않는 학교는 애초의 목적대로 유능한 어른들이 운영하는 자비로운 배움의 전당이라는 가능성을 간직한 듯 보였다.

 

이저벨은 수줍음을 지나치게 많이 타는데 사람들은 친절함에 반응을 보인다고 말해주었다. 솔직히, 이저벨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수줍음은 종종 불친절함으로 오해받았다.

 

이저벨은 오랫동안 이런 감정의 온갖 형태들과 더불어 살아와서, 누가 이런 그녀에 대해 ‘비밀스럽다’고 표현했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스스로는 신중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에이미를 다시 믿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런 일이 생긴다. 신뢰를 빼앗기니까.

 

23장 - 에마, 에이버리 부부 약속

 

이저벨은 가슴이 심하게 벌렁거렸다. 악몽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집에서, 어둠 속에서, 이웃사람이 볼 수 없는 곳에서 공격받게 된 것이다.

 

24

 

이저벨은 이 아이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담요를 끌어당겨 에이미의 팔과 목을 잘 덮어주려고 했을 때 그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 에이미는 이저벨과 분리되어 있다. 모두와 분리되어 있다.

 

분리된 사람, 이저벨은 에이미의 뺨에 흩어진 머리카락들을 머뭇거리는 손길로 만지며 또다시 생각했다. 하물며 할머니가 쓰던 벨리크 자기 크리머도 물려받지 못할 아이. 이쯤에서 이저벨은 기대앉았고, 산산조각 난 크리머가 떠오르자 와락 눈물이 솟구쳤다. 그 하얀 도자기는 이저벨에게 섬세하고 비현실적이고 다정한 어머니를 상징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그 최후가 에이버리 클라크가 그녀의 집에 오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린 사건과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엄청난 슬픔을 안겨다주었고, 이저벨은 아직도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저벨은 아프간 담요를 덮고 소파에 누워 있는 도티를 이따금 흘끔거렸지만 그 외에는 계속 딴 곳을 보고 있었는데, 삶이 얼마나 손쉽게 훼손되고 파괴될 수 있는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삶은 옷감처럼 얇아서, 제 이익을 추구하는 무작위적 순간들에 의해 가위질을 당하면 이렇게도 저렇게도 잘릴 수 있었다.

 

“에이미를 임신한 게 열일곱 살 때였어요.” 이윽고 이저벨이 말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어요.”

[…]

“그는 결혼한 남자였어요, 도티. 자식이 셋이나 있는 유부남.”

[…]

“난 결백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저벨이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고. […] 하지만 우리가 뭘 하는지 난 알고 있었어요.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걸요. 도티, 나도 그건 알고 있었어요.”

 

그때 도티가 허리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이저벨, 난 앨시어 타이슨이 미워. 자기는 밉지 않고. 자기가 두려워하는 게 그거라면 말이지.”

어떤 면에서 이저벨이 두려워해온 것은 그 점이었다. 하지만 더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한 것은—줄곧, 도티를 사무실에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부엌에 잠시 앉아 있던 그날부터—그녀, 이저벨 굿로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전에는 그런 생각이 단연코 들지 않았다.

 

그녀는 몰랐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아, 그녀는 알았지만 상관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행복이 너무 컸기에! 그 대가가 얼마나 클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기에.

 

부엌에서 그날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면서 냉장고를 확인하는데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한순간 세상은 일방통행로가 되고 다음 순간 매몰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장례식이 끝나고 어머니에게 며칠간 캐서롤 요리를 만들어다준 사람들도 그 여자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녀에게 친절이란 (이 소리는 뭐지? 뚱뚱이 베브가 코를 고는구나) 신이 만든 가장 좋은 선물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내면에 저마다 친절이라는 능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신의 업적이었다.

 

이 여자들이 그녀와 함께 울어주었다. 헛되이 살아온 그녀의 삶과 그녀의 행동 때문에 상처입은 다른 삶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잘 자라는 키스를 해주었다.

그녀는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 세월 동안 그녀는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자기가 더 우월하다고, 자기가 어울릴 사람은 바버라 롤리나 페그 던랩, 에마 클라크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녀가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스스로 물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아이의 눈동자는, 아이가 두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이저벨이 보았던 수수께끼를 여전히 담고 있었다. 에이미, 이저벨은 묻고 싶었다. 에이미, 넌 누구니? 하지만 그저 나직이 말했다. “더 자.” 그러자 소녀는 잠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네 엄마는 정말 친절했어.” 베브가 바닥에서 베개를 집어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아니요.” 이저벨이 말했다. “실은 두 분이 저한테 정말 잘해주셨죠.”

그랬다. 조난당한 여자들이 있는 이 공간에는 어제도 오늘도 친절함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간직해야 할 비밀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그날 아침 에이미의 옆에 누워 블라인드의 가장자리로 환한 빛이 새어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이저벨은 뭔가 시작되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항복하고 단념하고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뭐였을까? 그녀는 도티에게 일어난 일을 에이미에게 곧이곧대로, 이런 일이 없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방식으로 말해주었고, ‘개인적인 문제’라고 얼버무릴 수도 있었지만 월리 브라운과 앨시어 타이슨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아침에 깨면서 오늘은 침대를 정리하지도, 교회에 가지도 않겠다고 조그맣게 결심하며 신기하고 온화한 자유의 맛을 느꼈다. 내일도 출근하지 않을 것이다. 에이버리 클라크에게 전화를 걸어 에이미가 아파서 일주일 휴가를 내겠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시간은 충분하니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에이버리가 집에 오기로 한 것을 잊었기 때문에 그를 보기가 민망해서 그런다고 추측해 자기 말을 믿지 않으면 어쩌지? 혹은 자신이 화났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그녀의 집이 난장판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 탁자의 마호가니 표면에 물 얼룩이 생기고 있어도 상관없었다. 전혀, 상관없었다.

 

“제발, 하느님. 우리가 서로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도와주세요.”

 

커피 냄새, 살짝 태운 팬케이크 냄새와 함께 아침이 기운을 차리면서 또 하루가 느릿느릿 시작됐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죽음이 존재했다. 소녀의 시체는 차 트렁크 안에 유령으로 존재했고, 도티 브라운에게는 느닷없고 불결한 과부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텅 빈 집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저벨에게는 마음속 깊숙이 은밀하게, 에이버리가 중심에 없는 삶은 어떻게 달라질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소파 한쪽 구석에 앉은 에이미는 베브가 건넨 팬케이크가 먹히지 않았다.

 

아이의 슬픔에는 어떤 면들이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것을 알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실, 영원히 모를 수도 있었다.

한 번에 한 입씩.

그렇다. 물론, 시간이 걸릴 것이다. 모든 일에는

 

25

 

로지 탕궤이에게 비프스튜를 만들 때는 어떻게 간을 맞추었는지 물어보았다.

“소금과 후추.” 로지가 대답했다. “소금과 후추 외엔 안 넣어.”

레노러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궁금해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 질문은 오로지 앙숙 관계를 끝내겠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모두 그렇게 이해했다.

 

베브는 친구를 끊임없이 주시하며 도티의 눈에 눈물이 맺히면 언제라도 다독이는 말을 속삭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버텨, 도티.” 그녀가 바로 말했다. “좋아질 거야. 시간이 약이니까. 시간은 언제나 그렇잖아.”

 

자신이 반대만 하는 엄마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에이미에게 늘 무섭게 대했나? 이런 의문조차 끔찍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겁이 많은 아이로 자랐고, 늘 고개를 숙이나? 이저벨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줄곧 스스로가 신중하고 올바른 엄마라고 믿으면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자식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기분이 끔찍했다. 에이버리 클라크가 그녀의 집에 오기로 한 약속을 잊은 일보다 더 끔찍했다. 자식이 겁에 질린 채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는 딸을 흘끗 돌아보며, 그 말은 맞지 않아, 완전히 반대야, 하고 생각했다. 내가 줄곧 너를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이 세상 어떤 사랑도 끔찍한 진실을 미리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그대로를 물려준다는 진실을.

 

이저벨은 그날 밤 여러 번 편지를 고쳐 썼고 다음날 우편으로 보냈다. 그때부터는 하릴없이 기다리는 일이 전부였다. 하루하루는 희망에 찬 아침과 실망의 안개로 자욱한 저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거부는, 그저 텅 빈 공간은, 끊임없이 배달되는 침묵은, 부질없는 공상이 둘러싼 이 원형의 ‘허무’는 얼마나 기이하게 고요한가.

 

하지만 물론 그녀는 달라졌다. 그래야 했다. 이제 셜리폴스에도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고 열일곱 살에 아버지 친구의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베브와 도티와 에이미—이 생겼으니까. 그 세월 동안 그녀의 거기 가운데를 눌러온 어두운 속옷을 벗은 기분이었다. 훤히 드러났지만 더 깨끗해진 느낌이었다. 에이미는 물론이고 도티와 베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저벨은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알아서 하세요.” 그들에게 비밀의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에이미의 배반을 알고 나서 길고 뜨거운 여름을 휘청거리며 보낸 뒤 이저벨은 이따금 울렁거리는 느낌과 함께 에이미가 아주 중대한 위험을 가까스로 넘겼을 뿐이며 에이미가 이저벨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더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지른 일은 돌이킬 수 없었고, 그녀를 가장 괴롭힌 것도 그 엄연한 사실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어른이 되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바로 지금 깨우친 것처럼, 이저벨은 곱씹었다.

 

아무튼 그녀에게 이 행위는 어수선한 일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의미였다. 오렌지를 그에게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뭔가를 깨끗이 청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소한 모든 것을 부담으로 느끼지 않는 것.

 

도티와 베브를 좋아하는 마음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사무실을 황무지 같은 장소가 아니라 인간적인 사연들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꾸어놓았다.

 

무더운 여름날 퇴근하고 침대에 누워 하느님의 사랑과 인도를 바란 뒤로 기도라는 걸 하지 않았다. […]

그녀가 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아니, 그건 아니다), 혹은 신이 그녀를 포기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아니……), 그녀의 가슴속 깊이 존재하는 거대하고 근원적인 무지를, 당혹스럽지만 그녀가 무엇을 느끼든 그것과 더불어 불편하지 않게 살아왔다는 진실을 의식하고 있다는 편이 더 맞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파티는 주말 동안 부모가 보스턴에 간 어떤 남학생의 집에서 열렸는데, 그곳에서 에이미는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소파와 침대와 바닥에 기분 내키는 대로 드러누워 맥주를 병째 들이켜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굴은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오, 셜리폴스에는…… 머지않아 어둠이 내릴 것이다. 또 한번의 계절이 지나가고 또 한번의 여름이 사라질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대부분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말하면 타당한가? 셜리폴스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듯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이저벨의 은밀하고 깊숙한 기억 속에는 이날이 그녀가 에이미를 ‘가진’ 마지막날처럼 느껴질 테니까.

 

“에이미, 배는 고프지 않니? 뭐든 먹을까?” 그러자 에이미는 순간 엄마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연민이 느껴져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저벨은 앞으로 평생, 에이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가로저은 것을 딸이 자신의 품을 벌써 떠나버린 증거로 기억할 것이다. 엄마로서 해야 하는 기본적인 노력(먹이는 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뭐가 있을까?)을 벌써 귀찮아한다고. 이 아이 스스로 벌써 엄마의 품을 떠난 것으로 느낀다고, 벌써 떠나려 안달이 났다고.

 

여기 93번 도로의 하워드존슨에서 그녀의 가슴속에 또다시 욕망이 일어났다. 욕망, 그녀 자신의 성적 매력, 그리고 로버트슨 선생이 결국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지 모른다는(실제로 대체되었다) 약간의 깨달음.

 

그녀는 에이미와 함께 달리던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에게 그날은 끝없이 이어지던 에이미의 외로운 유년기와 무더운 날이 이어지던 지독한 여름이 비로소 끝난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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