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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자살클럽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2020. 12. 23.
자살 클럽

자살 클럽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저/임종기

인간 내면의 근원과 선악의 갈등을 탐구한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다양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소설선집. 종교적 인습과 종교에 대한 회의감을 동시에 지닌 스티븐슨의 모호한 도덕관은 그의 작품에서 선악의 대립, 이중성을 띤 모호하고도 불완전한 인간상으로 등장한다. 죄의식, 두려움, 탐욕, 불안 등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다루는 한편 타고난 낭만적 성향이 더해져 그의 작품에서는 음산하면서도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기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공포가 만연한 이 시대에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은근한 공포를 자아내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들은 되레 신선하다.

 

자살클럽

 

- 크림 타르트 청년 이야기

 

오늘은 제게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누가 봐도 아주 바보 같아 보이는 행동으로 바보짓을 끝내고자 하는 날이죠.

 

결국 전 바보입니다. 하지만 바보의 우둔한 짓에도 나름의 일관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 두 분도 마지막으로 남은 방종을 택하려는 겁니까? 두 분이 벌인 바보 같은 짓의 결과를 아주 확실하고 손쉬운 한 가지 길로 피하려는 겁니까? 양심의 가책을 피해, 단 하나의 열린 문으로 도망치려는 겁니까?

 

이제 우리는 인생이란 광대 노릇을 펼치는 하나의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물론 광대 노릇이 재미있는 동안만이겠죠.

 

저는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합니다. 뭔가 저보다 강한 것이 그런 행동을 저지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비록 사는 게 지겨워도, 죽음에 몸을 맡겨 생을 끝장낼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사후 껄끄러운 소문에 휘말리는 일 없이 삶의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자살 클럽이 만들어진 겁니다.

 

경험이 많지 않았다면, 난 당신을 쫓아냈을 거요. 하지만 나도 세상을 알 만큼 안다오. 흔히 자살자에게는 가장 하찮아 보이는 이유가 실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쯤은 알지.

 

자살 클럽의 회원들에게선 품위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도피처로 찾는 결과를 빚어낸 수치스러운 짓을 자랑삼아 떠벌리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전혀 거부감 없이 듣고 있었다. 이곳에는 도덕적인 판단에 반하는 암묵적인 양해가 있어 누구든 클럽 문 안으로 들어오면 벌써부터 무덤의 면책 특권을 누렸다.

 

「사람들은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난 이젠 사랑이 강렬한 정열이란 걸 부정합니다. 실은 공포가 강렬한 정열입니다. 만일 가장 강렬한 삶의 기쁨을 맛보길 원한다면 공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합니다. 선생, 나를 시기해요…… 나를 시기해요.」 그가 낄낄거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겁쟁이라오!」

 

- 의사와 사라토가 트렁크 이야기

 

선과 악은 상상 속의 괴물인 키메라와 같은 거야. 사람 살아가는 데 있어 모든 게 운명이지.

 

원수의 생김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좋은 눈과 논리적인 말은 어디다 써먹으려 하는가?

 

무서울 것 없네. 이건 고장 난 시계와도 같은 거야. 수리 도구로 어디가 어떻게 고장 났는지 알아내야 하는, 하나의 정교한 기계 장치에 불과한 것이지. 일단 피가 식어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의 피가 아니네. 살이 죽으면, 더 이상 우리가 욕망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살이 아니야. 너무나도 깨끗하고 부드러워 감탄을 자아내던 친구의 살이 아니라고. 생명력 있는 영혼과 함께 우아함, 매력, 공포 따위는 모두 사라지는 거야. 태연히 쳐다보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게.

 

그럼 두 가지 선택안을 주지. 살해당할 자와 살해하는 자, 둘 중 어느 편에 설 텐가.

 

「자, 당장 트렁크를 열어 봐요. 안에 뭐가 들었는지 봅시다.」

사일러스의 얼굴색이 돌변했다.

「그걸 보려니 무섭습니다.」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미 보지 않았소? 보지 않으려는 건 감상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소. 아직 도울 수 있는 환자를 보는 것이 도울 수도, 해칠 수도, 사랑할 수도, 증오할 수도 없는 죽은 사람을 보기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법이오. 스쿠더모어 씨, 용기를 내시오.」

 

권력? 나만큼 무력한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 이륜마차의 모험

 

도시의 자극적인 분위기, 4백만 명의 삶 각각의 미스터리에 둘러싸여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거리의 집들을 흘끗 쳐다보며 따뜻하게 불이 켜진 창문 안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호기심을 품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나쁜 짓인지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어도 사람들은 저마다 뭔가 관심 있는 일을 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실은 여기가 바로 인류의 거대한 전쟁터이다.〉

 

「이런 내 감정이 부끄럽소.」 플로리젤 왕자가 말했다. 「이런 감정은 내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결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옥의 사냥개 놈이 계속 살아 있는 게 질병처럼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참이었어요. 놈이 죽으니,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날 때보다도 더 상쾌하군요. 이걸 보게, 제럴딘.」 왕자가 바닥에 검을 내던지며 말을 이었다. 「이 검에는 자네 동생을 죽인 놈의 피가 묻어 있네. 기쁜 광경이지. 그렇지만 말이야.」 그가 덧붙였다. 「한번 보게나, 우리 인간이 얼마나 이상하게 만들어졌는가를! 복수를 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난 벌써 불확실한 우리네 인생의 무대에서 복수란 것이 이루어질 수나 있는 것인지 자문하기 시작했네. 놈이 저지른 죄악을 누가 되돌릴 수 있겠는가? […] 내가 진저리나도록 놈을 칼로 찔러 댄대도 자네 동생의 죽음은 변치 않아. 또한 죄 없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치욕스럽고 타락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해! 인간이란 목숨을 빼앗기엔 너무나 하찮은 존재이고 내 사람으로 쓰기엔 너무나 엄청난 존재이지!」

 

 

시체 도둑

 

해부용 시체를 구하는 일은 그의 스승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계속 골칫거리였다. 수강생이 많은 열띤 강의에서 해부용 시체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시체 거래는 그 자체로 기분 나쁜 일이었을 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거래를 할 때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K의 원칙이었다. 「그쪽은 시체를 가져오고, 우리는 돈을 지불한다.」 K는 라틴어로 〈쿠이드 프로 쿠오quid pro quo(응분의 대가)〉라는 말을 강조하곤 했다. 또한 조교들에게 반복해서 좀 상스러운 말을 하기도 했다. 「양심에 꺼리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묻지 마.」 누구도 해부용 시체들이 살인이라는 범죄를 통해 공급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요컨대, 페테스는 자신의 의무를 세 가지로 이해했다. 즉 가져온 것을 받고, 돈을 지불하고, 어떤 것이든 범죄의 증거는 외면하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받아 온 해부용 시체들은 모두 살해된 거였어.」

「너, 전혀 의심하지 못했던 거야?」

「의심하는 것과......」

「증거는 다르다는 거지. 그래, 나도 알아.」

 

「젊은이들이 칼 쓰는 걸 본 적 있나? 저 친구는 내 온몸을 난도질하고 싶을걸.」 낯선 사람이 말했다.

「우리 의학도들에겐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어요.」 페테스가 말했다. 「우린 싫어하는 친구의 시체는 해부해 버리거든요.」

 

여러 가지 두려움을 저울질했는데, 결국 가장 당장 두려운 것이 승리했다. 지금 당장 벌어질 수도 있는 맥팔레인과의 싸움을 피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닥칠 어떤 어려움도 참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은 운이 좋아 주머니에 여윳돈이 좀 생기면, 말하기 부끄럽지만, 꼭 지켜야 할 행동 수칙이란 게 있어. 한턱을 내지 않기, 비싼 수업 교재를 사지 않기, 오래된 빚을 갚지 않기, 빌리고 빌려 주지 않기. 바로 이런 거야.

 

「난 선배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어요.」

「나를 위해서라고?」 울프가 소리쳤다. 「오, 왜 이래! 내가 보기에 그건 순전히 너 자신을 지키려고 한 일이야. […] 그레이 씨는 갤브레이스 양의 속편이라고. 시작하지 않았으면 멈출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일단 시작을 했으면 그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거야. 그게 진리야. 사악한 자에게 휴식 따윈 없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조교가 된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봉사하려면 지위가 필요한 것이고, 봉사에 지위가 주어지는 것이죠. 조교가 꼭 지금의 내 처지가 되어야 하는 겁니까?

 

이봐, 우리의 인생이 뭔지 아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어. 바로 사자와 양이지. 네가 양이라면 그레이나 제인 갤브레이스처럼 이 테이블 위에 눕게 될 거야. 네가 사자라면 살 수 있을 테고, 나와 K처럼 말을 몰 수 있지. 기지나 용기가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말이야.

 

한 주가 다 가기 전에 맥팔레인의 예언은 적중했다. 페테스는 두려움을 떨쳐 내고 자신의 비열함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난 교수형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실질적인 거죠. 하지만 맥팔레인, 난 선천적으로 모든 위선적인 것들을 경멸해요. 지옥, 신, 악마, 정의, 부정, 죄악, 범죄, 이런 따위의 낡은 골동품들은 어린아이들이나 무서워하죠. 선배나 나같이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은 그것들을 경멸하죠. 자, 그레이를 기리며, 건배!」

 

이제 두 젊은이는 서로는 물론이고 자신들이 가져온 짐도 볼 수 있었다. […] 두 사람은 유령 같으면서도 인간적인 무엇,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소름 끼치는 그 동료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병 속의 악마

 

하지만 그 유리는 지옥의 불꽃에 담금질한 것이라네. 악마가 이 안에 살고 있지. […] 악마는 사랑이든, 명성이든, 돈이든, 이런 집이든, 아니면 이런 도시든, 주인이 뭐든 원하는 걸 말만 하면 들어준다네.

 

「나는 원하는 걸 모두 가졌고 이젠 점점 늙어 가고 있어.」 남자가 대답했다. 「악마가 해줄 수 없는 게 딱 한 가지 있는데, 그건 수명을 늘리는 일이라네.」

 

내가 단 한 번만이라도 악마를 볼 수 있다면 모든 걸 확신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부디 악마를 보여 줘.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도 그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날아가는 총알도 모두 과녁에 적중할 수 있는 법이다.

 

「아, 여보! 자신을 구하려고 다른 사람을 영원한 파멸의 길로 안내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 아닌가요? 나라면 웃지 못 할 것 같아요. 오히려 슬퍼하겠어요. 병을 가진 그 불쌍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말트루아 경의 대문

 

이 살벌한 전쟁 시대의 젊은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갔다. 정정당당한 전투에 뛰어들고 여러 차례 습격에 나서서 명예로운 방법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보고 전략과 인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깨달은 젊은이라면 으스대며 활보하는 것까지도 관대하게 용인되는 시대였다.

 

첨탑 꼭대기에서 펄럭이던 잉글랜드 국기는 하늘을 뒤덮은 구름을 배경으로 점점 희미해져서, 결국엔 무질서한 먹구름에 덮여 와 음침한 하늘을 나는 제비 같은 검은 얼룩으로 변해 버렸다.

 

아주 낯선 도시의 칠흑 같은 암흑 속에 빠져들었다 싶자, 섬뜩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침묵마저 섬뜩했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사람은 갑자기 행운이 생기면 어찌해서 이런 행운이 찾아왔는지 이유를 요모조모 따져 볼 생각은 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이상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상황에 내린 결단에 대해서 당장 몸이 편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 여자들이 더 잘 알아요. 남자에겐 사랑만큼 자존감을 높이는 게 없을 테지만, 여자에겐 사랑만큼 소중한 게 없지요.

 

자존심 앞에서 주춤거리는 건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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