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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보이체크, 당통의 죽음 | 게오르크 뷔히너

2020. 12. 23.
보이체크·당통의 죽음

보이체크·당통의 죽음

게오르크 뷔히너 저 / 홍성광

19세기 독일 천재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가 24세의 나이로 요절하며 남긴 작품 중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 오는 것은 단 네 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전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수작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보이체크」와 「당통의 죽음」은 뷔히너 문학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뷔히너는 두 작품에서 사실적인 묘사와 파격적 형식 그리고 강렬한 대사를 통해 모순된 현실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인간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현대극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보이체크」는 독일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희곡 중 하나로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당통의 죽음」은 실존 혁명가 당통을 탁월하게 재해석해 냈다는 평을 받으며 역사극의 고전이 되었다.

 

 

보이체크

 

3장

 

노인 : 

사람이란 이성적인 바보가 분명해.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우스꽝스러운 세상! 멋진 세상!

 

호객꾼 :

이들에겐 동물적 이성이 있고, 이성적 동물성도 있어요. 이들은 인간처럼 우둔하지 않습니다.

 

대학생 :

나는 교조적인 무신론자입니다.

 

4장

 

떠버리 장사치 :

(말을 보여 주며) 자, 너의 재주를 보여 주렴! 동물로서 너의 이성적 태도를 말이야! 인간 사회를 창피하게 해 봐! […] 이중 이성을 보셨나요? 이 말은 짐승의 모습을 한 사람입니다. 정말이지, 짐승처럼 우둔한 녀석은 아닙니다. 이 녀석은 인간이고 사람이며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짐승은 짐승이군요. […] ‘인간이여,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지, 모래, 똥으로 만들어졌는데, 먼지, 모래, 똥 이상이기를 바라는가?

 

 

6장

 

대위 :

영원이란 걸 생각해 보면, 세상이 무척 걱정스러워져. 일에 매달려야 해, 보이체크, 일에 매달려야 해! 영원, 그게 영원한 거지. 영원한 거야. 자네도 알겠지. 하지만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건 순간이야, 그래, 순간이야. 보이체크,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돈다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 말짱 시간 낭비야!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보이체크, 난 물레방아 도는 걸 더는 못 보겠어. 그러다간 우울해질 거야.

 

대위 :

보이체크, 자넨 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위엄 있게) 자네에겐 도덕이 없어. 도덕이란, 도덕을 지킬 때 쓰는 말이지.

 

보이체크 :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말입니다, 대위님! 돈, 돈이 중요합니다! 돈 없는 자에겐 그런 도덕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런 자에게도 피와 살은 있습니다. 우리 같은 것은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불행하기는 마찬가지죠. 하늘에 간다 해도 천둥 치는 일이나 돕겠죠.

 

보이체크 :

네, 대위님, 덕 말입니다! 저에겐 아직 그게 부족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같이 천한 사람들에겐 덕이란 게 없어요. 그러니 그저 본능대로 행동할 뿐이죠. 하지만 제가 신사라면, 모자며 시계며 예복이 있고, 고상하게 말한다면, 그땐 저도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죠. 덕이란 참 멋지지요. 하지만 전 가난한 놈인걸요.

 

8장

 

보이체크 :

마리.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죽을 죄를 진 것처럼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마리?

 

9장

 

의사 :

내가 봤단 말이야, 보이체크! 길거리에서 오줌을 쌌잖아!

보이체크 :

선생님, 그건 생리적인 본능입니다!

의사 :

생리적인 본능! 생리적인 본능이라! 본능!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의지로 방광 괄약근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이체크 :

두 번째 변종, 전반적으로 이성적인 상태에서 나타나는 고정 관념이라!

 

12장

 

견습공 1 :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그런데 정말이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농부와 칠장이, 구두장이와 의사는 무엇으로 먹고 살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심어 주지 않았다면 재단사가 무엇으로 먹고 살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서로 때려죽이고 싶은 욕구를 주지 않았다면 군인은 무엇으로 먹고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17장

 

보이체크 :

이 칼은 얼마요?

유대인 :

날이 아주 잘 들지요. 이걸로 댁의 목을 자를 건가요? 자, 어쩌겠소? 다른 것처럼 헐값에 드리지요. 헐값에 죽을 수 있게요. 그래도 거저는 안 되지요. 어쩌겠소? 경제적으로 죽어야지요.

 

19장

 

보이체크 :

고통은 모두 나로 인한 거고,

고통은 나의 기도로다.

 

21장

 

마리 :

달이 붉게 떠오르네!

보이체크 :

피 묻은 낫 같군.

 

 

당통의 죽음

 

1막

 

1장

 

쥘리 :

당신은 날 믿어?

당통 :

내가 뭘 알겠어? 우린 서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 우리는 둔해. 서로에게 손을 뻗어 보지만, 부질없는 일이야. 그저 거친 가죽만 비벼 댈 뿐이지. 우린 무척 외로워.

 

당통 :

무덤 속에 안식이 있고, 무덤과 안식은 같다고 하지. 그렇다면 내가 당신 품에 누워 있는 건 땅속에 묻혀 있는 거와 같아. 그대, 달콤한 무덤이여. 당신 입술은 죽음을 알리는 종이고, 당신 목소리는 장례 종소리고, 당신 가슴은 내 무덤의 봉분이며, 당신 심장은 내 관(棺)이야.

 

필리포 :

우리는 갓 태어난 아이들처럼 얼마나 오랫동안 피에 더럽혀진 채 있어야 하나? 언제까지나 관을 요람으로 삼고, 머리 자르는 놀이를 계속해야 하나?

 

에로 :

헌법 조문에 의무 대신 권리가, 덕목 대신 복지가, 처벌 대신 정당방위가 들어가야 해. 누구나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아야 하고, 자신의 본성을 관철할 수 있어야 해. 개인에게 분별력이 있든 없든, 교양이 있든 없든, 개인이 선하든 악하든, 국가와는 아무 관계없어. 우리는 모두 바보야. 아무도 자신의 독특한 어리석음을 남에게 강요할 수 없어.

누구나 나름대로 인생을 즐길 수 있어야 해. 하지만 누구도 남의 즐거움을 희생시키며 즐겨서는 안 되고, 남의 고유한 즐거움을 방해해서는 안 돼.

 

카미유 :

국가 체제는 국민 몸에 딱 들어맞는 투명 옷 같아야 해. 맥박이나 근육과 힘줄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야 해. 겉모습이 아름답거나 추한 건 문제 되지 않아. 생긴 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거야. 우리 마음대로 남의 치마를 재단할 권리는 없어.

 

당통 :

오, 모든 게 다 당연하지. 그런데 이 모든 멋진 일을 누가 실천한다지?

필리포 :

우리와 그 명망 있는 사람들이 해야지.

당통 :

‘와’는 긴 단어야. 이 단어는 그들과 우리 사이를 꽤 멀리 갈라놓지.

 

2장

 

시민 1 :

그래, 칼을 줘. 하지만 불쌍한 창녀를 찔러서는 안 돼! 그녀가 뭘 잘못했다고?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 그저 배가 고파 몸을 팔고 구걸한 거야. 우리 마누라와 딸의 몸을 사는 놈들에게 칼을 써야 해. 민중의 딸들을 범하는 놈들은 다 뒈져야 해! 여러분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그놈들은 배가 불러 답답해해요. 여러분 웃옷은 구멍투성이지만, 그놈들은 따뜻한 윗옷을 입었어요. 여러분 손에는 굳은살이 박였지만, 그놈들 손은 비단결 같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일하지만, 그놈들은 놀고먹어요. 여러분이 힘들게 벌어 놓으면, 그놈들은 도둑질해 갑니다. 그런데 도둑맞은 재산을 몇 푼이라도 다시 건지려면, 여러분은 몸을 팔고 구걸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놈들은 도둑놈입니다. 그러니 그놈들을 때려죽여야 해요.

 

젊은이 :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시민 3 :

목에 밧줄만 걸면 돼! 잠깐이면 끝나. 우린 너희들보다는 더 자비롭지. 우린 평생 동안 죽도록 일만 해. 육십 년 동안 밧줄에 매달려 버둥거린단 말이야. 하지만 우린 우리가 매달린 줄을 잘라 버릴 거야.

 

3장

 

콜로 데르부아 :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외침에는 메아리가 따르며, 근거가 있으면 귀결이 있는 법입니다.

 

로베스피에르 :

공화국의 무기는 공포고, 공화국의 힘은 미덕입니다. 미덕이 없으면 공포는 부패하기 쉽고, 공포가 없으면 미덕은 무기력해집니다. 공포는 미덕의 발로며, 신속하고 엄격한 불굴의 정의와 다름없습니다.

 

4장

 

라크루아 :

자넨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어. 자신의 원래 모습을 죽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살해하는 그림자란 말이야.

 

라크루아 :

바보와 어린애들…… 그리고 또 누군 줄 아나? 술 취한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법이야.

 

라크루아 :

메데이아가 자기 동생을 토막 내듯이, 애통하게도 자연은 아름다움을 토막 내어 인간의 육체에 나누어 놓았어.

 

5장

 

마리옹 :

난 시간을 구분하지도 못하고, 바뀌지도 않아. 내 생활은 언제나 한결같아. 끝없는 그리움과 자제, 이글거리는 불길과 격정뿐이었어.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어. 사람들은 내게 손가락질해 댔지. 말도 안 되는 짓이야. 누구든 즐기기 위해 사는 건 다 마찬가지니까. 육체를 즐기든, 성화(聖畵)를 보고 즐거움을 느끼든, 꽃이나 아이들 장난감으로 즐기든 마찬가지야. 가장 많이 즐기는 사람이 가장 많이 기도하는 법이지.

당통 :

나는 왜 네 아름다움을 내 마음속에 온전히 받아들여 완전히 감싸 안지 못하는 걸까?

마리옹 :

당통, 당신 입술엔 눈이 달렸어.

 

라크루아 :

게다가 콜로는 가면을 벗겨야 한다며 정신 나간 듯 떠들어 댔어.

당통 :

그러면 얼굴들도 함께 벗겨질 거야.

 

라크루아 :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거물급의 머리가 필요한 거지.

당통 :

난 잘 알아. 혁명은 사투르누스와 같아서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지.

 

당통 :

내 명성이 있고, 민중이 있어!

라크루아 :

자네의 명성이라니! 자네는 온건주의자야. 나도 그렇고, 카미유, 필리포, 에로도 마찬가지야. 민중이 볼 때 나약함과 온건함은 똑같아. 민중은 낙오자는 때려죽이지.

당통 :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그건 그렇고, 민중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안에 든 게 무엇인지 보려고 뭐든지 다 때려 부숴야 직성이 풀리지.

 

당통 :

거세된 남자가 온전한 남자를 싫어하듯, 민중은 향락을 즐기는 자들을 증오하는 거야.

 

6장

 

로베스피에르 :

자네한테 말해 두겠는데, 내가 칼을 빼 들 때 내 팔을 막는 자는 다 내 적이야

당통 :

정당방위가 끝나는 지점에서 살인이 시작되는 거야. 나는 우리가 왜 사람들을 더 죽여야 하는지 모르겠어.

 

로베스피에르 :

사회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혁명 과업을 절반밖에 완수하지 못한 자는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게 돼. 상류 사회는 아직 죽지 않았어. […] 악덕은 처벌받아야 하고, 미덕은 공포로 다스려야 해.

 

당통 :

로베스피에르, 자네는 겁날 정도로 반듯한 사람이야. 나 같으면 삼십 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도덕적인 얼굴로 하늘과 땅 사이를 돌아다니는 게 부끄러울 것 같아. 그건 나보다 남이 더 나쁘다고 생각하려는 고약한 심보에 불과해.

 

로베스피에르 :

내 양심은 깨끗해.

당통 :

양심이란 원숭이가 자기 앞에 놓고 보면서 고민하는 거울 같은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을 치장하지. 그러면서 나름대로 즐거움을 누리는 거지. […] 자네가 언제나 깨끗하게 솔질한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해서, 단두대를 다른 사람들의 불결한 세탁물을 헹굴 빨래 통으로 만들고, 그들의 잘린 머리로 더러운 옷의 얼룩을 뺄 비누를 만들 권리가 자네에게 있다고 생각하나? […] 자네의 자애로운 하느님처럼 가만히 지켜볼 수만 없다면 손수건으로 두 눈을 가리든가 하게.

 

로베스피에르 :

자네는 미덕을 부정하는 건가?

당통 :

악덕도 부정하지. 거칠든 세련되든 어차피 세상엔 향락주의자들만 있어. 그리스도는 가장 세련된 향락주의자였어. 나에겐 거친 향락주의자냐, 세련된 향락주의자냐 여부가 인간들 사이에서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차이라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본성에 따라 행동하지. 다시 말해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한단 말이야.

 

당통 :

자네는 악덕에게서 너무 많은 덕을 보고 있어. 말하자면 악덕과 대조되면서 말이야.

 

로베스피에르 :

(혼자서) 갈 테면 가라지! 저 친구는 혁명의 말〔馬〕을 사창가에 매어 두려는 거야. 마치 마부가 잘 길든 노새를 매어 두듯 말이야. 하지만 혁명의 말들에겐 저자를 혁명광장으로 끌고 갈 힘이 충분해.

[…]

왜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걸까? 이 생각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계속 저기, 저기 하고 가리켜! 헝겊으로 손가락을 아무리 단단히 동여매도 피가 계속 멈추지 않는구나.

(잠시 후) 왜 내 마음속 한쪽이 다른 쪽을 속이는지 알 수 없어.

[…]

우리는 깨어 있지만, 보다 선명한 꿈을 꾸는 게 아닐까? […] 죄는 생각 속에 있는 거야.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든, 신체가 생각을 흉내 내어 움직이든, 우연 때문에 생기는 일이지. 

 

생쥐스트 :

우린 저 위대한 시체를 품위 있게 매장해야 해. 살인자가 아니라 성직자처럼 말이야. 시체를 토막 내서는 안 되고 사지를 모두 같이 묻어야 해.

 

로베스피에르 :

(혼자서) 그렇고말고, 난 피의 메시아야. 피의 메시아는 희생당하지 않고 남을 희생시키지.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인간을 구원했지만, 나는 그들 자신의 피로 그들을 구원하겠어. 그리스도는 인간이 죄를 범하게 했지만, 나는 스스로 죄를 짊어질 거야. 그리스도는 고통의 희열을 맛보았지만, 나는 사형 집행인의 고통을 맛볼 거야. 그렇다면 자신을 더 많이 부정한 자는 누구인가, 나인가 그리스도인가?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어쩐지 어리석게 느껴지는구나.

 

2막

 

1장

 

카미유 :

서둘러야 해, 당통. 우리에겐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당통 :

(옷을 입으며) 하지만 시간이 우릴 꾸물거리게 하는걸. […]

게다가 우리 몸은 반으로 나누어져 양쪽이 매번 똑같은 일을 하느라, 모든 게 곱절로 일어난단 말이야. 참으로 서글픈 일이야.

 

당통 :

참 가여운 일이야. 줄 하나로 늘 같은 소리만 내는 초라한 악기가 된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야. 난 그냥 편히 살고 싶었어. 이제 그렇게 되었어. 혁명으로 나는 안식을 얻었지.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안식이 아니었어.

[…]

우리가 혁명을 만든 게 아니라, 혁명이 우리를 만들었어.

그리고 일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난 남을 단두대로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겠어. 이제 신물이 나. 왜 우리 인간들이 서로 싸워야 하지? 이젠 서로 나란히 앉아 쉬는 게 좋지 않겠나.

 

당통 :

결국 정말로 칼에 찔려 죽는다 하더라도, 우린 항상 무대 위에 서 있는 거야. 우리 수명이 약간 단축되는 건 그런대로 좋은 일이지. 옷이 너무 커서 우리 몸에 딱 맞지는 않았어. 인생이란 짧은 경구(警句)야, 뭐 그런 거지. 노래 오륙십 곡으로 된 서사시를 엮어 갈 만한 호흡과 정신을 갖춘 자가 어디 있겠어?

 

3장

 

카미유 :

자네들한테 하는 이야기인데, 극장이나 음악회, 미술 전람회에 펼쳐 놓은 모든 것들을 사람들이 목제 사본으로 접하지 못한다면, 예술을 향유하는 눈이나 귀를 갖추지 못할 거야. 어떤 사람이 꼭두각시를 하나 깎아 만들었다고 하자. 인형에 줄을 달고 당길 때, 인형이 걸을 때마다 5운각 약강 운율로 관절이 삐걱거리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개성적이고 효과적이겠나! 어떤 사람이 감정의 편린이나 잠언, 개념을 받아들여, 여기에 윗옷과 바지를 입히고, 손과 다리를 만들어 주고, 얼굴을 그려 준 후, 세 막 동안 내내 부려 먹다가 결국 결혼하게 하거나 권총 자살을 하게 한다면, 이상적이겠지! 불안정하고 가라앉은 인간 정서가 반영된 오페라를, 마치 물이 든 점토 파이프로 나이팅게일 소리를 내는 것처럼 연주한다면, 아, 그게 예술이겠지!

사람들을 극장에서 바깥 거리로 내보낸다면, 이들은 ‘가련한 현실이여!’라고 말하겠지.

그들은 서투른 모방자들 때문에 자신의 창조주를 잊었어. 자신들 주변이나 내부에서 불타오르고 들끓고 빛을 발하며 매 순간 새로이 태어나는 창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거야. 그들은 극장에 가거나 시와 소설을 읽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거기 나오는 얼굴들을 흉내 내지. 그런데 신의 피조물에 대해서는 ‘별거 아니군.’ 하고 말하지!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이 생명을 얻기는 했지만 자식은 낳지 못했다고 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한 말의 뜻을 알았던 거지.

 

당통 :

난 용감하게 죽을 수 있어. 사는 것보다는 그게 더 쉬울 거야.

 

4장

 

당통 :

내겐 무덤이 더 안전해. 무덤은 적어도 잊게 해 주거든. 무덤은 내 기억을 지워 주지. 그런데 여기선 내 기억이 없어지지 않고, 나를 살해해. 나인가, 아니면 기억인가? 대답은 간단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린다)

난 죽음에게 아양을 떨고 있어.

 

5장

 

당통 :

그래, 난 조국을 구했지. 정당방위였어. 우린 어쩔 수 없었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은 편하게 말했지. “화나지 않을 수 없겠지만, 화나게 한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라고 말이야. 어쩔 수 없어. 이번 경우가 바로 당위였지. 당위의 저주를 받은 팔을 누가 저주하려고 하겠어?

 

7장

 

대의원 5 :

당신들 말에서는 시체 냄새가 납니다. 그런 말은 지롱드파 입에서나 나오는 거요. 당신들은 특권을 요구하는 겁니까? 법의 도끼는 만인의 머리 위에 똑같이 걸려 있소.

대의원 6 :

우리 위원회에서는 법의 보호 없이 입법자를 단두대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대의원 7 :

범죄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왕이 저지른 범죄만이 옥좌 위에서 보호권을 얻습니다.

대의원 8 : 그러니 불한당들이나 보호권을 요구하는 거야.

대의원 9 : 살인자들만이 보호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생쥐스트 :

우리가 자연이나 시간보다 더 잔인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확신할 겁니다. 자연은 거역하는 일 없이 조용히 자신의 법칙에 따릅니다. 인간이 자연법칙과 충돌하면 멸망하고 맙니다.

[…]

인류의 발걸음은 느립니다. 우리는 수 세기가 지나서야 걸음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세기 뒤에는 수 세대의 무덤이 생겨납니다. 아무리 간단한 발명이나 기본 원칙이라도 그것들을 얻으려면 수백만에 달하는 생명이 희생됩니다. 역사의 진행이 보다 빨라진 시대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간단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

모세는 자기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거쳐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모세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전에 낡고 부패한 세대들이 도태되었습니다. 대의원 여러분! 우리에겐 홍해도 광야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투쟁과 단두대가 있습니다. 혁명은 펠리아스의 딸들과 같습니다. 혁명은 인류를 다시 젊어지게 하기 위해 갈기갈기 찢어 놓습니다.

 

3막

 

1장

 

페인 :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거나, 창조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기 때문이지. 신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 자체에 세상의 존재 근거가 있는 거야.

 

페인 :

좌우간 신은 틀림없이 창조하겠지만, 불완전한 것밖에 창조할 수 없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는 편이 보다 현명하겠지요. 우리가 신을 단지 창조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게 차라리 인간적이지 않을까요? 우리가 스스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항상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분발하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하잘것없는 필요 때문에 우리가 신을 꾸며 내야 할까요?

[…]

신으로부터 불완전성을 제거할 수 있을 때에만 여러분은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그런 시도를 했습니다. 악은 부정할 수 있어도 고통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성만이 신을 증명할 수 있을 뿐, 감정은 신에게 반항합니다. 내 말을 명심하게, 아낙사고라스. 왜 내가 고통에 시달리나? 이것이 무신론의 바위라네.

 

페인 :

나는 천성대로 살아갑니다. 천성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내게는 선이므로, 나는 그렇게 행동합니다. 천성에 어긋나는 것은 내게는 악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 악이 나를 방해한다면 난 저항합니다. 흔히 말하듯 덕이 있는 생활을 하면서 소위 악덕에 저항할 수 있어요.

 

에로 :

신이 모든 것이기 위해서는 신은 자기 자신의 반대이기도 해야 한다고. 이를테면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 선과 악, 행복과 고통을 포괄해야 하지. 그 결과는 물론 바로 영(零)이 될지도 몰라. 그것들이 상쇄되어 우리는 무에 이르지.

 

3장

 

메르시에 :

평등이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서 낫을 휘두르고 있어. 혁명의 용암이 흘러내리고. 공화 정치를 만드는 건 단두대지! 위층 싼 관람석에서는 박수를 치고, 로마인들은 손을 비벼 대지.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희생자들의 숨넘어가는 소리라는 걸 듣지 못하지.

 

당통 :

자네 말이 맞아. 사람들은 오늘날 모든 걸 사람의 살로 만들어. 우리 시대에 내린 저주지. 내 육체도 이제 다 소모되겠지.

 

4장

 

에르망 :

(당통에게) 피고, 이름은?

당통 :

혁명이 내 이름을 불러 줄 겁니다. 내 집은 곧 무(無) 속에 자리하고, 내 이름은 역사의 팡테옹에 남을 것입니다.

 

당통 :

그건 그렇고, 내가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판결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에게 이미 말했듯 무가 곧 내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내게는 삶이 짐이니, 내게서 짐을 덜어 내 주시오. 나는 삶의 짐에서 벗어나길 갈망합니다.

 

라플로트 :

(방백) 물론 하기야, 약간은 비열한 냄새가 나긴 하지. 무슨 상관이람? 그런 일도 한번 해 보고 싶어. 난 지금까지 너무 외곬으로 살아왔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하지만, 기분 전환인 셈이지. 자기 자신의 악취를 맡아 보는 것도 그리 기분 나쁜 일은 아니야.

단두대에서 처형당할 거라 생각하면 이젠 지긋지긋해.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다니! 마음속으로 이미 스무 번이나 처형당해 봤어. 이젠 더 이상 짜릿한 맛도 전혀 없고, 아주 무덤덤해졌어.

 

라플로트 :

(방백) 그런데 두려운 건 죽음이 아니라 고통이야. 아마 아플 텐데, 누가 대신해 주겠어? 사실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고통은 보다 세밀하게 시간을 재거든. 고통은 일 초도 육십 분의 일 초로 나눈다지. 그래! 고통이야말로 유일한 죄악이야. 그리고 고뇌는 유일한 악덕이지. 난 덕을 갖추고 살 거야.

 

라플로토 :

나를 믿으세요, 장군님. 우린 구덩이에서 빠져나갈 겁니다. (나가면서 혼잣말로) 하지만 서로 다른 구덩이로 들어가는 거지. 나는 넓디넓은 구덩이인 세상으로, 저자는 좁디좁은 구덩이인 무덤으로 들어가는 거야.

 

6장

 

빌로 :

민중이란 본능적으로 짓밟히려고 하지. 발이 아닌 눈길로만 말이야. 그들은 그런 오만불손한 인상을 좋아하지. 그런 이마는 귀족의 문장(紋章)보다도 더 사악해. 거기에는 사람을 경멸하는 고상한 귀족주의가 담겨 있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길이 불쾌하단 말이야. 누구나 그런 자들을 쳐부수는 데에 일조해야 해.

 

생쥐스트 :

그자들의 시체에 걸려 혁명이 비트적거리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당통이 살아 있으면 혁명의 옷자락을 붙잡을 거야. 그리고 그자에게는 자유마저 능욕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

 

바레르 :

말 잘했어! 하지만 콜로, 단두대가 웃기 시작하면 곤란해. 그러면 사람들이 더 이상 단두대를 겁내지 않을 테니까. 단두대에 친숙해져서는 안 된단 말이야.

 

바레르 :

그래, 가라고, 생쥐스트. 글 좀 잘 써 봐. 쉼표 하나하나가 내려치는 군도가 되고, 마침표 하나하나가 잘라 낸 머리가 되도록.

 

바레르 :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도덕 강의실로 만들려 하고, 단두대를 연단으로 쓰려 해.

빌로 :

또는 기도용 탁자로 쓰려 하지.

콜로 :

하지만 그 경우 그는 그 위에 서지 못하고 누워야 할 거야.

 

7장

 

당통 :

안식이야.

필리포 :

그건 하느님 품 안에 있어.

당통 :

무(無) 안에 있지. 어디 한번 무의 세계보다 더 마음의 안식을 주는 곳에 빠져 보게나. 최고의 안식을 주는 것이 신이라면 무가 곧 신 아닌가? 하지만 난 무신론자야. ‘그 무언가는 무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은 지긋지긋해. 그런데 나는 그 무엇이야. 비통한 노릇이지!

창조가 자리를 다 차지하는 바람에, 무의 자리는 텅 비어 있어. 어딜 가나 창조가 득시글거려. 무는 자살했고, 창조는 무의 상처야. 우리는 무의 핏방울이고, 세계는 무가 썩어 가는 무덤이야.

 

당통 :

죽음에는 희망이라는 게 없어. 삶이 좀 더 복잡하고 조직화된 부패라면 죽음은 보다 단순한 부패일 뿐이지. 차이라면 그게 다야!

 

9장

 

당통 :

자유의 발자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무덤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빵을 원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여러분에게 사람 머리를 던져 줍니다. 여러분은 목이 마른데, 저들은 단두대 계단에 흐르는 피를 핥게 합니다.

 

4막

 

1장

 

시민 :

그런 식으로 심문을 끝내고, 어떻게 그 많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지? 뒤마 :

사실 이례적인 일이지. 하지만 혁명가들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감각이 있어. 그 감각은 결코 틀리는 법이 없어.

 

3장

 

당통 :

죽음은 출생을 흉내 내는 거야. 죽는 순간이 되면 우리는 갓 태어난 아이들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벌거벗은 몸이 되지. 물론 우리는 기저귀 대신 수의를 입겠지. 그게 무슨 소용 있겠어? 우리는 요람 안에서처럼 무덤 속에서 흐느껴 울 거야.

 

당통 :

미리 죽을 작정인가? 난 『처녀』나 읽겠어. 기도용 탁자가 아니라 창녀의 침대를 떠나듯 삶을 하직하겠어. 삶이란 창녀와 같아. 온 세상과 정을 통하니 말이야.

 

5장

 

라크루아 :

우린 자유를 창녀로 만들었을지도 몰라!

당통:

그럴지도 모르지! 자유와 창녀는 지상에서 가장 세계주의적인 존재들이야. 자유는 이제 저 아라스 변호사의 침실에서 정숙하게 몸을 팔 거야. 하지만 자유는 클리템네스트라처럼 로베스피에르에게 반기를 들고 말 거야. 나는 그자에게 육 개월 시한을 주겠어. 난 그자도 함께 끌고 갈 거야.

 

카미유 :

(혼자서) 하늘이 그녀를 도와 편안한 고정 관념을 품게 했군. 흔히 건전한 이성이라 부르는 일반적인 고정 관념은 참을 수 없이 지루해.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던 자였어.

당통 :

무슨 상관인가? 혁명의 대홍수는 자기 마음대로 아무 데서나 시체를 치운다네. 사람들은 화석이 된 우리 뼈로 언제까지나 왕들의 머리통을 부술 수 있을 거야.

 

당통 :

이 세상은 혼돈이야. 무(無)야말로 새로 태어날 세계의 신인 셈이지.

 

7장

 

라크루아 :

(군중에게) 여러분은 이성을 잃어버린 날에 우리를 죽이지만, 이성을 되찾는 날엔 저들을 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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