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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예술이란 무엇인가?

2021. 1. 10.

백석(1912~1996)은 시인이다.

쇼스타코비치(1909~1975)는 작곡가이다.

 

<일곱 해의 마지막> <시대의 소음>은 예술이 예술로 존재하기 힘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갈등하는 시인과 음악가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이다.

 

시작

 

<일곱 해의 마지막>1956년부터 1962년까지 백석의 문학적 생애의 마지막 7년을 다룬다.

<시대의 소음>은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앉아 밤을 지새우는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피의 숙청 시대에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잠옷 차림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붉은

 

기린아,

아프리카의 기린아,

[…]

네 목에 깃발을 달아보자

붉은 깃발을 달아보자,

 

“우리나라에 있는 곰이나 범을 두고, 왜 머나먼 아프리카의 기린을 끌고 와 붉은 깃발을 다느냔 말이오?”

기행은 기린을 생각했다. 붉은 깃발을 목에 매단 기린이 그의 눈에 보였다. 엄종석이 옳았다. 기린에게는 붉은 깃발을 다는 게 아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그러나 베토벤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으로부터 한 가지 논리적인 결과가 나왔다.

바로 붉은 베토벤이었다.

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당은 생각하고 예술가는 행위만 한다. 그러자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생각 없는 창작에 예술가는 만족할 수 있는가? 모든 예술을 붉게 물들여야 하는 상황, 그리고 생각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상황에서.

 

할당량

 

“그렇다면 왜 쓰지 않는 겁니까?”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작곡가는 탄광 광부처럼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고, 그의 음악은 광부의 석탄이 몸을 덥혀주듯이 마음을 덥혀주어야 했다. 관료들은 다른 범주의 생산량을 평가하듯 음악 생산량을 평가했다.

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기행은 그 질문을 답을 찾지 못했고, 더는 시를 쓰지 못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상황에 순응하면서 끊임없이 나약함과 비겁함을 자책하며 살아간다.

 

선택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시바이(芝居, 연극, 속임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게 개조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 […] 자기를 속일 수 있다면 글을 쓰면 되는 거지.”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스탈린의 러시아에는 이 사이에 펜을 물고 작곡을 하는 작곡가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종류의 작곡가만 있게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들과 죽은 작곡가들.

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기행은 글을 쓰지 못한다. 자기를 속일 수 없어서.

쇼스타코비치는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가 된다.

어떤 선택을 비난할 수 있을까?

 

예술은 누구의 것이지?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눈보라는 산문이며, 산문은 교시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산문이다.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하지만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의 할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자, 예술은 누구의 것이지?”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작가가 수많은 관련 자료들을 보고 재구성했겠지만, 소설 속의 삶이 실제 그들의 삶인지는 알 수 없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이니까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의 절망과 순응하는 음악을 하는 음악가의 자책에 공감하며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설이다.  

현재 우리는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음악도 듣는다.

시대의 눈보라를 뚫고 시대의 소음 위로 나약한 불꽃도 역사의 속삭임도 살아남았다.

위대한 예술은 살아남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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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한날 구입했는데, 이렇게 소재도 주제도 유사한 책인 줄 몰랐다. 참 이상한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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