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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2021. 1. 11.
시대의 소음

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저/송은주

2011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 문학의 제왕 줄리언 반스가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 한 남자가 여행 가방을 종아리에 기대어둔 채 초조하게 승강기 옆에 서 있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는 바로 한때 천재 작곡가로 추앙받다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쇼스타코비치다. 그는 스탈린 정권의 눈밖에 나 음악을 금지당하는 것은 물론, 가족 앞에서 끌려가는 것만은 막으려고 집을 나와 매일 밤을 층계참에서 지새운다. 대숙청이라는 이름 아래 블랙리스트에 오른 친구와 동료들이 은밀히 사라져가는 하루하루, 그는 그 암흑의 시대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예술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예술의 것이라면,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연주자가 떠난 무대의 정적처럼,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오직 인생의 것일 뿐인 인생을 이해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도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여운처럼 펼쳐진다.

- 김연수(소설가)

 

듣는 자

기억하는 자

그리고 술 마시는 자

- 옛 이야기 중에서

 

 

시대의 소음

 

그의 아버지는 이전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젊은이들은 여전히 총에 맞아 갈가리 찢어졌다가 외과의들의 손에 거칠게 난도질을 당했다. […] 이전 시대에도 그랬듯 다 대의명분이 있었다. 그는 그따위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남들이 그런 것을 놓고 떠들든 말든,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루하루를 마치는 것이었다. 그는 생존의 기술자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이들이 그렇게 되었다. 생존을 위한 기술자들.

 

어느 거지가 보드카를 마다하겠는가? 이내 두 승객은 승강장에서 그와 합세했다.

그렇게 그들은 전통적으로 보드카를 마시는 패거리의 숫자인 셋이 되었다.

 

 

1 : 층계참에서

 

그가 아는 것은 그때가 최악의 시기였다는 것뿐이다.

 

그는 세 시간 동안 승강기 옆에 내내 서 있었다. 줄담배를 다섯 대 피웠고, 마음은 어지러웠다.

 

얼굴들, 이름들, 기억들. 그의 손을 짓누르는 토탄 조각. 머리 위를 스쳐가는 스웨덴 물새들. 해바라기 밭. 카네이션 기름 냄새. 테니스 코트에서 풍겨오는 니타의 따듯하고 달콤한 냄새. 이마의 V형 머리 선에서 스며 나오는 땀. 얼굴들, 이름들.

 

죽은 자들의 얼굴과 이름도.

 

그의 상황은 갑작스럽게 닥친 것이었지만, 완벽하게 논리적이었다. 남은 삶처럼. 예를 들자면 성욕처럼. 그것은 갑작스럽게 닥쳐왔지만 완벽하게 논리적이었다.

 

시인이 단언했듯이, 자신의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피할 길도 없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게 1936 1 28일 아침 아르한겔스크 기차역, 바로 그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이 대답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어떤 날짜에 어떤 장소에서 시작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러 장소에서, 여러 시간에,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다른 나라들에서,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간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서 똑같은 식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는 자크렙스키와 빅 하우스, 거기에서 자크렙스키를 대신할 수도 있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 일을 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자크렙스키 같은 자가 부족할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으므로 그럴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었고, 정말로 그랬다.

 

운명. 그것은 전혀 손쓸 수 없는 어떤 일에 대해 쓰는 거창한 단어일 뿐이었다. 삶이 당신에게그래서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운명이라 불렀다.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그는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나 페트로그라드에서 자라 레닌드라드에서 성년이 되었다. 그가 때로는 상트레닌스부르크라고 부르곤 하는 곳.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여자들과 있을 때면 평소의 수줍음을 잃고 터무니없는 열정과 비틀거리는 절망 사이를 오갔다. 마치 언제나 메트로놈을 잘못 맞춰놓은 것 같았다.

 

, 미끄러지는 손, 꽉 잡는 손. 어릴 때는 죽은 자들이 무서웠다— […] 이러한 공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손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페트로그라드의 창녀들은 그의 젊음과 순진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힘든 시기일수록 움켜쥐는 손들은 더 그악스러워진다. 당신의 불알, 당신의 빵, 당신의 친구들, 당신의 가족, 당신의 생계, 당신의 존재. 창녀들뿐 아니라 수위들도 두려웠다. 물론 경찰도. 그들이 스스로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건 상관없이.

 

그들은 언제나 오밤중에 데리러 왔다. 그래서 잠옷 바람으로 아파트에서 끌려 나가거나 거만하게 무표정한 얼굴을 한 NKVD 요원 앞에서 옷을 입게 되느니, 그는 옷을 다 차려입고 담요에 누워 벌써 다 꾸린 작은 여행 가방을 옆쪽 바닥에 두고서 잠을 청했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들을 상상했다. 그의 불안은 니타도 잠들지 못하게 했다. 각자 자리에 누운 채 상대의 공포를 듣지도, 냄새 맡지도 못하는 척했다.

 

파국은 다른 장소에서, 다른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진짜 시발점은 그의 명성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의 오페라. 아니면 절대 무오류의 존재이므로 모든 것에 다 책임이 있는 사람, 스탈린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오케스트라의 배치처럼 단순한 것에서 촉발되었을 수도 있다. 정말이지 결국 이게 그 일을 가장 정확히 바라본 것일 수도 있다. 오케스트라의 배치 하나 때문에 처음에는 비난과 모욕을 받고, 나중에는 체포되어 총살된 작곡가.

 

그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40대 후반이었다. 가족에게, 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아마도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 본인에게는 재앙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았더라면 혁명이 시큼해지면서 피해망상증에 찌들고 육식성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을 것이다.

 

강자들은 맞서지만 그만큼 강하지 못한 자들은 회피하는 수밖에 없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어려움을 피했고, 자신의 삶과 아내 둘 다의 앞에서 유머와 에둘러 피하는 법을 연마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은 자신이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보다는 결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의 권위에 맞서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자기 일기를 읽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일기장 몇 주 앞의 날짜에자살이라고 썼다. 가끔은결혼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들은 예술에서 부르주아의 방해를 분쇄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작곡자가 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하며, 모든 음악은 대중이 바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차이콥스키는 데카당이었고, 실험적인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다가는형식주의로 비난을 받았다.

 

1932년 당이 독립 조직들을 해산하고 모든 문화적 문제를 맡게 되면서, 그 결과로 오만과 편협, 무지가 완화되기보다는 체계적으로 집중되었다

 

작곡가는 탄광 광부처럼 생산량을 늘려야만 했고, 그의 음악은 광부의 석탄이 몸을 덥혀주듯이 마음을 덥혀주어야 했다. 관료들은 다른 범주의 생산량을 평가하듯 음악 생산량을 평가했다. 정해진 규범들이 있고, 그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 있었다.

 

그의 죄는 또한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누군가가 내놓은 익명의 분석은 소부르주아, 형식주의자, 메이어홀드주의자, 좌파 등의 익숙하고 시큼한 꼬리표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작곡가는 음악을 고의로 뒤집어서 오페라가 아니라 반()오페라를 쓴 것이다.

 

그들이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한 주 중 그날의 컨디션이나 소화 상태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 있는, 한 비평가가 서명한 악평이 아니었다. 그것은 <프라우다>의 사설이었다. 반박할 수 있는 순간적 판단이 아니라, 최고위층으로부터 내려온 정책 강령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서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행동 방침은 공개 사죄를 하고, 과오를 취소하고,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어리석은 젊음을 주체 못 한 나머지 잘못된 길로 들어섰노라고 해명하는 것이었다.

 

아나파에서 그들이 보낸 시간은 한 편의 목가와 같았다. 그러나 목가는 정의상 일단 끝이 나야 목가가 된다.

 

그는 타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가장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정직의 문제를 되새기고 있었다. 개인적인 정직성, 예술적인 정직성. 정말로 그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미덕을 얼마나 지녔는가, 얼마 동안이나 지니고 있을 수 있는가.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부인한다면 그들은 그가 정직성을 잃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방식이다두려움 없이, 장벽 없이, 내일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그리고 나중에도 후회 없이.

 

무엇이 최선일지 누가 알겠는가?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담배를 한 대 더 붙여 물었다. 예술과 사랑 사이, 압제자와 압제당하는 자 사이에는 늘 담배가 있었다.

 

1920~1930년대 초기의 위대한 소비에트의 업적은 죄수들의 노동으로 건설되었다. 특이하게도 그 사실이 많은 선전에 이용되었다. 운하를 건설하면서 죄수들이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스스로를 개조하고 있다고 했다. 노동자 10만 명이 있었으니, 그들 중 도덕적으로 향상된 이들도 있을 법했다. 그러나 그들 중 4분의 1은 죽었다고 한다. 분명 그들은 개조되지 않았다. 그저 나무를 쪼갤 때 튀는 부스러기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삶에서 겪는 수많은 실망 가운데 하나는, 저자가 모파상이건 누구건 삶은 소설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점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의 음악을 리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2년간 변함없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칭찬하던 비평가들이 갑자기 그 작품에는 단 한 가지도 장점이 없음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어째서 권력층이 이제 음악에, 그리고 그에게 주의를 돌리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권력층은 항상 음보다는 말에 더 관심이 있었다. […] 작가들은 <프라우다> 1면에서 단죄를 당했고, 작곡가들은 3면에서 비난을 받았다. 두 면은 따로따로였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죽음과 삶을 가를 수도 있었다.

 

인간 영혼의 기술자들: 냉랭하고 기계적인 표현이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이 아니라면, 예술가가 무엇으로 일을 하겠는가? 예술가가 단순히 장식이나 부자와 권력자들의 애완견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 자신부터가 감정, 정치, 예술의 원칙에서 항상 반()귀족적이었다. 그런 낙관적인 시대에정말로 불과 몇 년 전이었다인류까지는 아니라도 온 나라의 미래가 다시 만들어지고 있던 시절에는, 모든 예술이 마침내 하나의 영광스러운 공동 프로젝트로 합쳐질 것처럼 보였다. 음악과 문학과 연극과 영화와 건축과 발레와 사진은 사회를 반영하거나 비판하거나 풍자할 뿐 아니라 사회를 만드는, 역동적인 동반자 관계를 이룰 것이다. 예술가들은 어떤 정치적 지시도 없이 오직 그들의 자유의지로 동료 인간들의 정신이 개발되고 꽃피우도록 도울 것이다.

왜 안 되겠는가? 그것은 예술가의 가장 오랜 꿈이었다. 혹은, 지금 생각해보니 예술가의 가장 오랜 환상이었다.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희극으로, 두 번째는 비극으로.

 

권력층은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그에게 말을 걸고, 사적으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요즘 들어서는 그에게 굴욕을 주고, 생계 수단을 빼앗고, 회개할 것을 명령했다. 권력층은 그에게 그가 어떻게 일하기를 원하는지,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말해주었다. 생각해보면 그가 더 이상 살아 있기를 원치 않는다는 암시일지도 몰랐다.

 

대원수 주위의 모든 이가 곧 지상에서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도. 자신이 결백하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의 대답이 진짜인지도 상관없었다. 결정된 일은 결정된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건 상관이 없었다. 미래가 무엇을 결정할지는 미래가 결정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음악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

 

미래가 무엇을 믿을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미래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미래가 현재와 다투기를 바라면서.

 

그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입밖에 내자마자 뭐든지 다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 앞에서 이름을 불고, 모두를 다 끌어들였을 것이다. 아니오, 그는 짧게 말했다가 이내 예, , 예로 바꾸었을 것이다.

 

스탈린의 러시아에는 이 사이에 펜을 물고 작곡을 하는 작곡가 따위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종류의 작곡가만 있게 될 것이다. 겁에 질린 채 살아 있는 작곡가들과, 죽은 작곡가들.

 

최근 들어 그가 자기 안에서 젊음의 파괴할 수 없는 불멸성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그뿐만 아니라젊음의 타락하지 않는 결백성도. 그리고 그 너머에서, 그 밑에서, 그가 지닌 어떤 재능이든, 그가 만든 어떤 음악이든 그것들의 올바름과 진실함에 대한 확신도. 그 모든 것이 약해지는 게 아니었다. 이제 그냥 전혀 무관해졌다.

 

대원수는 체포된 지 3주 뒤 붉은 군대의 엘리트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 어쩌면 음악학자들의 음모가 곧 발각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다음에는 작곡가들의 음모, 트롬본 주자들의 음모가 줄줄이 뒤따를 것이다. 안 될 이유가 뭐겠는가? “세상에 온통 광기뿐.”

 

실용적인 조치였다. 가방 덕분에 그는 상황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주도자로 보였다. 전통적으로 손에 가방을 들고 떠난 사람들은 되돌아왔다. 잠옷 바람으로 잠자리에서 끌려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

 

그의 공식적인 작품 1번이 나오기 전 최초의 작품들은 <혁명의 희생자들을 위한 장례 행진곡> <자유를 위한 찬가>였다.

그러나 그 이상 나아가보면 사실들은 더는 사실이 아니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진술에 불과했다.

 

이론들은 깔끔하고 설득력 있으며 이해하기 쉬웠다. 삶은 혼돈이고 허튼소리로 가득했다.

 

사랑의 이론이 삶의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느리고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우리는 꿈꿀 때만 쉴 수 있다.” 시인 블로크가 한 말이다.

 

한 기자어리석었나? 희망적이었나? 동정심이 많았나?—는 교향곡 5번이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고 했다. 그는 그 표현을 절대 부인하지 않았다. […] 이 말은 결국 그가 쓴 것혹은 그보다는 쓴 적 없는 것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되었다. 그 말들이 그의 음악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놔두었다. 권력층이 말을 갖게 하라. 말이 음악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 음악은 말로부터 도망간다. 그것이 음악의 목적이며, 음악의 장엄함이다.

그 표현은 또한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이들이 그의 교향곡에서 자기네가 듣고 싶은 것을 듣게 해주었다.

 

그들은 그의 교향곡 5번을낙관적인 비극이라 불렀다.

 

2 : 비행기에서

 

하나의 못이 다른 것을 몰아내듯이, 하나의 두려움이 다른 두려움을 몰아낸다. 그래서 고도를 올리는 비행기가 단단한 공기층을 들이받는 것처럼 보이듯이, 그는 눈앞의 부분적인 공포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희생 제물이 되고, 산산조각이 나고, 즉시 잊혀지는 데 대한 공포. 공포는 보통 다른 감정들까지도 모두 몰아낸다. 하지만 수치심만은 아니다. 공포와 수치는 그의 배 속에서 행복하게 같이 뒤섞여 빙빙 돌아갔다.

 

공포 : 공포를 가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그들은 공포가 먹힌다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어떻게 먹히는지도 알았지만 공포가 어떤 느낌인지는 몰랐다. 흔히들 하는 말로, “늑대는 양의 공포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절대로 한꺼번에 잡아가는 법은 없었다. 희생자는 딱 한 명이었고, 이튿날 밤 또 한 명을 데려갔다남은 자들, 한시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공포심을 가중시키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무엇을 기대했을까?

[…]

그가 첫 번째로 놀란 것은 미국 기자들의 행동이었다. 귀국길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기자들 선발대가 잠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질문을 퍼부으며 카메라를 그의 얼굴에 들이댔다. 그들에게는 활기찬 무례함, 우월한 가치들이 자기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잘못이지 당신 이름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름을 줄였다. “이봐요, 쇼스티, 이쪽 좀 봐요! 모자 좀 흔들어주세요!”

 

고향에서는 벨로모리를 피우는 남자들에게 감시를 받았다면, 여기 미국에서는 언론의 감시를 받았다.

 

독재가 온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놓았다는 것은 진부한 말이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1936년부터 1948년까지 12년간, 그는위대한 조국 해방 전쟁때 말고는 안전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흔히들 하는 말로 그 전쟁은 구원으로 가는 재앙이었다. 수백만 명에 더해 수백만 명이 죽었지만, 적어도 그때는 다들 너 나 없이 고통을 겪었고, 그 점이 일시적이나마 그에게는 구원이었다. 독재는 편집증적이었을지 몰라도 꼭 멍청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재가 어리석기까지 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원칙이 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독재는 대다수 사람들의 어떤 부분들약한 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여러 해에 걸쳐 신부들을 죽이고 교회 문을 닫았지만, 군인들이 신부들의 축복을 받고서 더 굳세게 싸운다면 잠시 써먹기 위해서라도 신부들을 도로 데려올 것이다. 그리고 전시에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음악이 필요하다면, 작곡자들 또한 작업에 투입할 것이다.

 

갈색 역병에는 바그너도 포함되어 있었다항상 권력층의 지시에 따라 일을 했던 작곡가였다. 그 당시의 정치 체제에 따라, 그 세기 내내 유행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면서. […] 바그너는 다시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고, 아이젠스타인은 <발키리>를 볼쇼이 극장에서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년이 지나지 않아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했고, 바그너는 다시 용서할 수 없는 파시스트, 갈색 쓰레기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어두운 코미디였다.

 

그는 러시아인은 아무리 박박 문질러 닦아도 언제나 러시아인이라고 적었다

 

러시아인이 된다는 것은 비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고, 소비에트인이 된다는 것은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말은 용어상 모순이었다. 권력층은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인구 중에서 필요한 만큼을 죽여 없애고 나머지에게는 선전과 공포를 먹이면 그 결과로 낙관주의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 어디에 논리가 있는가?

 

낙관주의와 비관주의가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장소들 중 하나정말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둘 다 있어야 하는 곳는 바로 가정이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는 니타를 사랑했지만(낙관주의) 자신이 좋은 남편인지는 알 수 없었다(비관주의).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박수까지 보냈다. 사실상 그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부인했다. 그는 예전에 동료 작곡가에게 예술적 정직성과 개인적 정직성에 대해, 우리 각자에게 얼마만큼의 몫이 할당되어 있는지를 두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가 생각할 때 무례함과 독재는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는 레닌이 자신의 정치적 유서를 구술시키고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을 고를 때, 스탈린의 큰 결점을무례함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권력층: “, 우리는 혁명을 이루어냈소!”

시민 오보에 제2주자: “, 물론 굉장한 혁명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것에서 대단한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정말로 엄청난 성취입니다. 하지만 가끔씩, 궁금한 게…… 물론 완전히 잘못된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꼭 기술자, 장군, 과학자, 음악학자들을 죄다 쏴 죽여야만 했을까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수용소로 보내 노예처럼 죽도록 일하게 하고, 모두 공포에 질리게 만들어서 혁명의 이름으로 가짜 자백을 짜내야 했을까요? 중요하지 않은 이들조차 수백 명이 매일 밤 잠자리에서 끌려 나와 빅 하우스나 루비안카로 잡혀가 고문을 받고 순전히 꾸며낸 문서에 서명을 한 다음, 뒤통수에 총알이 박히도록 기다리는 체제를 세워야만 했을까요? 그냥 좀 궁금해서요.”

권력층: “그렇지, 그래, 무슨 말인지 다 알아. 자네 말이 옳아. 하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두자고. 다음번에는 좀 바꿔보지.”

 

‘러시아는 코끼리들의 고향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러시아는 모든 것을 발명해냈다. 왜냐하면…… , 우선 러시아니까. 러시아에서는 환각이 일상이었다. 두 번째로, 이제는 역사상 사회적으로 가장 진보한 나라인 소비에트 러시아니까. 거기에서는 뭐든 제일 처음 발견되는 것이 당연했다.

 

트랙터 공장도 같은 식이었다. 미국 전문가들이 조립하고 미국에서 수입해 온 미국 생산 라인이 갑자기 소비에트 트랙터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혹은 라이카 카메라를 복제한 것이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이름을 따 FED로 새롭게 태어나 더욱더 소비에트적인 제품이 된다. 기적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누가 그러던가? 그러니까 말만 바꿔 붙이면 만사형통이었고, 말이 지닌 변형의 힘이야말로 진정 혁명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 빵이 그랬다. 다들 프랑스 빵으로 알고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왔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 빵이 가게에서 사라졌다. 그 대신도시 빵이 나왔다물론 정확히 똑같은 것이었지만 이제는 소비에트 도시의 애국적인 생산품이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때에는그 자리에서 죽게 될 테니위장을 해야 했다. 유대 민속음악에서는 절망을 춤으로 위장한다. 그래서 진실의 위장은 아이러니였다. 독재자의 귀는 아이러니를 알아듣도록 맞춰져 있지 않으므로.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젊은이는 아이러니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 인간 삶의 자연스러운 진행 방향은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 가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감각은 비관주의를 누그러뜨려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아이러니는 파괴자와 사보타주 주동자들의 언어로 통했기에, 그것을 쓰면 위험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는어쩌면 가끔씩은,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시대의 소음이 유리창을 박살낼 정도로 커질 때조차자신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 음악, 그의 가족, 사랑. 사랑, 그의 가족, 음악. 중요도는 바뀔 수 있었다. 아이러니가 그의 음악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잘못된 귀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중한 것을 숨겨서 통과시킬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음악이 남아 있는 한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암호로만 존재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항상 충분히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사람들을 충분히 공포에 몰아넣는다면 그들은 뭔가 다른 것, 축소되고 줄어든 것이 되었다. , 단지 생존을 위한 기술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경험한 것은 불안만이 아니라 짐승 같은 공포인 경우가 많았다. 사랑의 최후의 날이 닥쳤다는 공포.

 

독재자들이 시보다도 훨씬 더 증오하고 두려워한 것이 극장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자연에 거울을 비추었다. 누가 자기 자신의 반사된 상을 참고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햄릿>은 오랫동안 금지되었다. 스탈린은 <맥베스>만큼이나 그 연극을 혐오했다.

 

셰익스피어는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이 핏속에 무릎까지 빠진 독재자들을 탁월하게 묘사해냈지만, 그래도 조금은 순진한 데가 있었다. 그의 괴물들에게는 의심, 나쁜 꿈, 양심의 가책, 죄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실제 공포 아래서는,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이 뭐란 말인가? 나쁜 꿈 따위가 뭣인가? 다 감상주의, 헛된 낙관주의, 세상이 예전 모습 그대로이기보다는 우리가 바랐던 대로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불과했다.

 

소련 사람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의 순수성이 나치의 아리안족 순수성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들은낙관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요구했다. 온 세상에 피와 가축 오물이 목까지 차올라 있다 해도 얼굴에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관적이고 신경질적인 것이 예술가의 천성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미 예술가 아닌 예술가들이 너무나 많다! 체호프의 말처럼커피를 내왔는데 맥주를 찾으면 안 된다.”

 

관리의 영혼을 가진 작곡가, 니콜라예비치 흐레니코프.

 

“자, 예술은 누구의 것이지?”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 예술은 귀족과 후원자의 것이 아니듯, 이제는 인민과 당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시대의 소음 위로 들려오는 역사의 속삭임이다.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인민이고, 누가 그들을 정의하는가?

 

그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작곡을 했고, 누구를 위해서도 작곡하지 않았다. […] 들을 수 있는 귀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참된 정의는 편재하는 것이며, 예술의 거짓된 정의는 어느 한 특정 기능에 부여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베토벤을 매우 좋아했다. […] 스탈린은 베토벤이야말로 진정한 혁명가였기에, 산처럼 숭고했기 때문에 좋아했다.

 

수년 동안 그가 몇 번이나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던가? 셀 수도 없다. 그리고 몇 번이나 실제로 시도했던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자살하겠다고 어머니를, 타냐를, 그다음에는 니타를 협박했다. 모두 완벽하게 어린애 같은 짓이었지만 한편으로 모두 완벽하게 진심이었다.

 

그는 어리석게도 남들 앞에서 자신의 연설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 도덕적 중립성의 표시가 될 줄 알았다.

 

여기에서는 진실을 말하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들은 당신의 피를 원했다. 체제의 사악함을 증명해줄 순교자를 원했다. 그러나 순교자가 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당신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있어야 그 체제가 진짜로, 끔찍하게, 잔혹하게 사악하다는 것이 입증된단 말인가? , 늘 더 많이 필요했다. 그들은 예술가가 야수와 공개적으로 싸우며 모래를 피로 적시는 검투사가 되기를 원했다.

 

이 친구를 자칭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권력층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아무리 많이 주어도 더 원했다.

모두들 항상 그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서 원했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오직 음악뿐이었다.

만사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하다면야.

 

하지만 당신은 아직도 음악을 작곡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는 여전히 연주되지 않고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은 만들어진 시기에 들려주어야 한다. 음악은 피란 같은 것이 아니다. 땅속에 몇 년이고 묻어둔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그들의 이상주의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 음악은 불멸일지 모르지만 슬프게도 작곡가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쉽게 침묵당하며, 죽이기는 훨씬 더 쉽다.

 

볼샤야 푸시카르스카야 가의 5층 승강기 문 옆에 서서 기다리던 시절, 공포 속에 한편으로는 제거되어버리고 싶은 가슴 두근거리는 욕망이 뒤섞였다. 더하여 덧없는 용기의 허영도 느꼈다.

 

이러한 영웅들, 이러한 순교자들은 홀로 죽지 않았다. 그들 주위의 많은 이들이 그들이 만든 영웅주의의 결과로 파괴되었다. 그래서 분명할 때조차도 간단치가 않았다.

 

“삶은 들판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햄릿에 관한 파스테르나크의 시 마지막 줄이기도 했다. 그 앞줄은 이러했다. “나 혼자뿐이다. 내 주위 사람들 모두 어리석음 속에 익사했다.”

 

3 : 차 안에서

 

그가 아는 것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쁜 최악의 시기라는 것뿐이었다.

최악의 시기가 가장 위험한 때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가장 위험한 때가 가장 큰 위험 속에 있는 때는 아니기에.

그가 전에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레닌은 음악이 기분을 처지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스탈린은 자기가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안다고 여겼다.

흐루쇼프는 음악을 경멸했다.

이중 어느 것이 작곡가에게 최악일까?

 

어떤 질문에는 답이 없다. 아니면 적어도 죽어서야 질문이 멈춘다. […] 그리고 어쩌면 죽음이 질문하는 자만이 아니라 질문까지도 고쳐줄지 모른다. 그리고 지나고 나서 보면 비극은 소극(笑劇)처럼 보인다.

 

어쩌면 용기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여인도 나이를 먹는다. 그녀에게는 사라져버린 것만 보인다. 다른 이들 눈에는 남은 것만 보인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 잘 버텨냈다고, 굴복하지 않았다고, 신경질적인 겉모습 아래 굳은 심지가 있었다고 축하했다. 그에게는 사라진 것만 보였다.

스탈린도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는 티냐코프의 이야기를 즐겨 했다. 미남에 훌륭한 시인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사랑과 꽃과 그 밖의 고귀한 주제들에 대해 썼다. 혁명이 일어나자 그 시인은 곧 레닌그라드의 시인 티냐코프가 되어 사랑과 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굶주렸는가에 대해서 썼다. 그리고 얼마 뒤 상황이 너무나 나빠져서 그는 목에 시인이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두르고 길모퉁이에 서 있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시인을 높이 쳐주었기 때문에 행인들이 그에게 돈을 주곤 했다. 티냐코프는 시를 써서 번 돈보다 구걸해서 번 돈이 훨씬 더 많았고, 덕분에 근사한 식당에서 매일 저녁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즐겨 얘기했다.

구구절절 다 사실이었을까? 그는 궁금했다. 그러나 시인들은 과장해도 된다. 그로 말하자면, 플래카드가 필요 없었다레닌 훈장 세 개와 스탈린상 여섯 개를 목에 걸고 작곡가 조합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트로신 동무는 작곡가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

“여기에서 작업을 하시는군요.”

[…]

“하지만 저명한 소비에트 작곡가의 서재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군요.”

[…]

“벽에 스탈린 동무의 초상화가 없습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두 개의 구절이 있었다질문 하나와 답변 하나땀을 쏟게 만들고 강한 남자도 바지에 똥을 지리게 할 만한 것이었다. 질문은 이러했다. “스탈린이 알고 있는가?” 답변은 훨씬 더 놀랄 만한 것이었는데, “스탈린은 알고 있다였다.

 

파스테르나크의 경우.

“스탈린이 그는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했다.”

[…]

그토록 많은 주변 사람들이 체포당하고, 추방되고, 살해당하거나 수십 년 뒤에나 밝혀질 운명 속으로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는 다 피해갔는가? 이 모든 질문에 들어맞을 대답은 딱 하나였다. “스탈린이 그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실패했을 때, 세상에 허튼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일 때에도 그는 이것만큼은 고수했다. 좋은 음악은 언제나 좋은 음악이고, 위대한 음악은 아무도 망가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로딘 집안사람들이 그 사중주를 두 가지 다른 식으로 연주하는 법, 즉 제대로 연주하는 법과 전략적으로 연주하는 법을 익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작곡가의 의도대로였으나, 두 번째는 관료 집단에게 통과되도록 연주자들이 작품의낙관적인면과 사회주의 예술 규범과의 일치를 강조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권력층에 대한 방어로 아이러니를 이용한 완벽한 사례가 되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 이야기는 하도 많이 반복되다보니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난센스였다. 사실이 아니었다사실일 수가 없었다음악으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보로딘 집안사람들은 사중주를 작곡가가 의도한 대로 연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음악좋은 음악, 위대한 음악에는 견고하고 환원할 수 없는 순수성이 있었다. 비통하고 절망적이고 비관적일 수는 있어도, 결코 냉소적이 될 수는 없다. 음악이 비극적이면 막귀를 가진 사람들은 냉소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작곡가가 비통해하거나 절망에 빠져 있거나 비관적일 때는 여전히 그가 뭔가를 믿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가 무엇으로 시대의 소음과 맞설 수 있었을까? 우리 안에 있는 그 음악우리 존재의 음악누군가에 의해 진짜 음악으로 바뀌는 음악. 시대의 소음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진실하고 순수하다면, 수십 년에 걸쳐 역사의 속삭임으로 바뀌는 그런 음악.

그가 고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는 아침 8시에 뇌졸중을 일으켰고 9시에 죽었다. 스탈린은 50분 뒤에 죽었다. 위대한 독재자가 끝장이 났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죽다니! […] 그래서 그의 죽음은 어리석은 동시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자부심이 있었다그러나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재능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범속한 취향과 의미 없는 비판적 슬로건을 따르는 척하기를 원치 않는다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로 그것들을 믿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공모하기를, 순응하기를, 타락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제는 살해당할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공포는 오래전 옛날 일이 되었다. 그러나 결코 살해당하는 것이 최악의 일은 아니었다. 1948 1, 모스크바 유대인 극장의 감독이었던 그의 옛 친구 솔로몬 미호엘스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살해당했다.

 

그런 다음 겁에 질려 침묵에 잠긴 문상객들을 등지고 책장에 얼굴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마주 서서 그들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가 부럽소.” 그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끝없는 공포보다는 죽음이 낫다.

그러나 끝없는 공포는 5년 더 계속되었다. 스탈린이 죽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나타날 때까지.

 

상황은 점점 더 나아졌고 더러운 비밀들이 드러났다. 그러나 갑자기 진실에 이상주의적인 지지를 보낸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고, 단지 이제는 진실을 정치적으로 이롭게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권력층 자체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저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가 실수를 저질렀다. 예전에는 죽음이 있었다. 지금은 삶이 있었다. 예전에는 명령이 있었고 지금은 암시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했지만, 권력층과의 대화는 영혼에 더 위험한 것이 되었다. 예전에 그들은 그의 용기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했고, 이제는 그의 비겁함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지런히 노하우를 바탕으로, 열성적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사심 없는 전문성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 일하는 신부들처럼 일했다.

 

그는 피카소를 쓰레기에 겁쟁이로 알고 있었다. 공산주의 밑에서 살지 않으면서 공산주의자가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피카소는 거지같은 그림을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에 환호하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신은 소비에트 권력 밑에서 고통받는 불쌍한 화가는 그 누구도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하셨다. 피카소는 자유로이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그러니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해주면 안 되는가?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파리와 남프랑스에 부유한 사람처럼 앉아서 역겨운 평화의 비둘기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그 피투성이 비둘기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육체적 노예제를 혐오하는 것 못지않게 생각의 노예제도 혐오했다.

 

그러나 권력층이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때 소비에트 관료에게 망신을 주는 것과, 권력층이 육식성일 때 맞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스트라빈스키는 미국이라는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 홀로 고고히 앉아서 예술가와 작가와 그들의 가족이 고국에서 쫓기고, 투옥되고, 추방당하고, 살해당하고 있을 때에도 무심하고 초연하게 자기만 챙기며 수십 년을 보냈다. 자유의 공기를 숨 쉬면서 그가 단 한 번이라도 공개적으로 항의의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경멸할 만한 침묵이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를 작곡가로 존경하는 만큼 사상가로서의 스트라빈스키는 경멸했다. 어쩌면 그것이 개인적 정직성과 예술적 정직성에 대한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몰랐다. 개인적으로 부정직하다 해서 예술가로서도 정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푸치니를 어떻게 보십니까?”

푸치니는 질색이오.” 스트라빈스키의 대답이었다.

그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본심대로 말했을까? 아닐 것이다. 한쪽이 본능적으로 우세하면, 다른 쪽은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그것이역사적인 만남의 문제점이었다.

 

침묵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았다. 침묵이야말로 말이 힘을 다하고 음악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또한 음악이 힘을 다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자기비하와 알코올의 관계가 그렇듯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선동한다. 그는 그 관계를, 그 선동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흐마토바의 레피노 방문에 관해서는 다른 이야기도 떠돌았다. 그 이야기에서 그녀가 전한 바는 이러했다. “우리는 20분간 대화를 나누었어요. 근사했지요.” 만약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면, 공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역사적 만남의 문제점이었다. 후세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가끔씩 그는 모든 것에는 다른 판본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제는 살해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그게 더 나빴다. 산 자들을 더 나쁜 상태로 끌고 갈 가능성은 늘 있는 법이기에. 죽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제 그에 대한 공격이 얼마나 교활하게 달라졌는가. 그들은 미소 띤 얼굴로 보드카 잔을 들고 다가와 제1서기장이 복통을 일으킨 데 대해 동정 어린 농담과 아첨, 감언이설과 침묵과 기대를…… 가끔 그는 술을 마셨고, 가끔은 집에 돌아가서, 혹은 친구의 아파트에 가서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닫고는 자기혐오로 눈물을 흘리다가 어느새 흐느끼고 오열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가 거의 매일같이 그라는 인간이 된 것을 멸시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는 오래전에 죽었어야 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어 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죽음에 친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말로써든, 그의 경우에는 음악으로든. 우리 삶에서 죽음에 대해 더 일찍 생각할수록 실수도 더 적게 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타고난 천성이 허락하는 만큼은 용감했지만, 양심은 항상 더 많은 용기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존심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표현에 불과했으나 정확한 표현이었다. 권력층의 압력을 받다보면 자아는 금이 가고 쪼개진다.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는 영웅으로 살아간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더 흔한 경우는 남들 앞에서 겁쟁이는 마음속으로도 겁쟁이로 산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일단 신경이 망가지면 바이올린 줄을 갈듯 바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영혼 속 깊숙이 뭔가가 사라져버렸고, 남은 것은뭘까?—어떤 전략적인 교활함, 세상물정 모르는 예술가인 척할 수 있는 능력,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자신의 음악과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결심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겁쟁이였다. 그래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래서 그는 남은 용기를 모두 자기 음악에, 비겁함은 자신의 삶에 쏟았다. 아니, 그건 너무……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다. , 미안합니다만 아시다시피 저는 겁쟁이입니다.

 

삶은 언제나 단순함을 거부했다.

 

그러나 겁쟁이가 되기도 쉽지 않았다. 겁쟁이가 되기보다는 영웅이 되기가 훨씬 더 쉬웠다. 영웅이 되려면 잠시 용감해지기만 하면 되었다총을 꺼내고, 폭탄을 던지고, 기폭 장치를 누르고, 독재자를 없애고, 더불어 자기 자신도 없애는 그 순간 동안만. 그러나 겁쟁이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이어지게 될 길에 발을 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우리를 위해 삶이 구상하는 비극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늙어서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재능을 가진 자는 그 누구보다도 영혼이 순수해야 한다.”

「초상화」에는 명확한 두 갈래의 선택이 있었다. 고결함이냐 타락이냐. 고결함은 처녀성과 같아서, 한번 잃으면 절대 되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 세계, 특히 그가 살아온 극단적인 세계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세 번째 선택이 있었으니 고결함, 그리고 타락이었다.

 

지나고서 보면 비극은 소극처럼 보인다. 그는 늘 그렇게 말했고, 항상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그의 삶이 다른 많은 이들의 삶처럼, 자기 나라의 삶처럼 비극이라고 느꼈다. 주인공의 참을 수 없는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자살뿐인 그런 비극.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렇다. 아니, 그는 셰익스피어와는 달랐다. 그리고 그는 너무 오래 산 나머지, 자신의 삶이 소극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가 더 젊었던 시절, 마법과 종교가 지배하던 때에는 괴물들에게도 양심이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제는 아니었다. 세계는 계속 변해서 점점 더 과학적이 되고 현실적이 되었고, 낡은 미신의 지배를 덜 받게 되었다. 그리고 폭군들도 변했다. 어쩌면 양심은 더는 진화의 기능이 없고, 그래서 이종번식을 하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를 내버려두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결코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권력은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더는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이면서 비열하게도 일상적인 것이었다

 

솔제니친을 비판하는 더러운 공식 서한에 서명을 했다. 몇 년 뒤, 사하로프를 비난하는 더러운 서한에도 서명했다. […] 그는 한편으로는 그가 그 서한의 내용에 동의했다고 아무도 믿지 않기를아무도 믿을 수 없기를바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었다.

 

남들이 마지못해 상대를 해주거나 등 뒤에서 행운을 빌어주는 상황에서도 편지에 서명을 하면서 그들이 당신의 뜻은 그게 아닐 거라 헤아려주리라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너무 오래 살았다.

 

영혼은 셋 중 한 가지 방식으로 파괴될 수 있다. 남들이 당신에게 한 짓으로, 남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게 만든 짓으로, 당신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한 짓으로. 셋 중 어느 것이든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세 가지가 다 있다면 그 결과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되겠지만.

 

삶은 앵무새 꼬리를 잡아 계단을 질질 끌고 내려가는 고양이였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그의 머리가 부딪쳐 쿵쿵 튀어 올랐다.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시절이 끝날 때끝난다면사람들은 일어났던 일들을 단순화한 판본을 원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권리였다.

 

듣는 자, 기억하는 자, 술 마시는 자속담에서 말하듯이. […] 듣는 것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기억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 그의 뇌는 그의 결점, 굴욕, 자기혐오, 나쁜 결정들에 고집스럽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에게 자기 이름을 본따 이름을 지어주었던 아버지가 자주 그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 남들을 실망시키거나, 삶이 그를 실망시키기 전에 삶을 마감한 사람.

 

그들은 서로의 첫사랑이었고 그는 아나파에서의 그 몇 주를 계속 목가 시로 생각했다. 일단 끝나면 목가 시는 목가 시가 될 뿐이라 해도.

 

마치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면서, 건축가들이 신중하고 꼼꼼하며 선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서부터 실패한 것과도 같았다. 그들은 센티미터를 미터로 착각하고, 때로는 그 반대로 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 결과 공산주의라는 집은 비율이 전혀 맞지 않고 인간의 척도를 결여한 모습으로 지어졌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꿈이 되고, 악몽이 되고, 모든 이들어른 아이 할 것 없이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

그것은 바로 낙관적인 비극이었다.

 

한 사람의 생에서 마지막 질문에는 어떤 답도 없다. 그게 그 질문들의 본질이다.

 

관련된 질문 하나. 훌륭한 작곡가의 나쁜 음악이 어디까지 허용될까?

 

어느 지점에서 비관주의가 적막함이 되었을까?

 

그는 평생을 아이러니에 의지했다. 그는 아이러니가 일상적인 장소에서 태어났다고 상상했다. 우리가 삶이 이러할 것이라고 상상하거나 가정하거나 바라는 것과 실제 삶 사이의 간격에서. 그래서 아이러니는 자아와 영혼을 지켜주는 수단이 되고, 우리가 매일 숨 쉴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어 그는 입당하던 해에 사중주 8번을 작곡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 작품은 그의 마음속에서는작곡가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보나마나 음악 당국은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자기중심적이고 비관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출판된 원고에는 결국 이러한 헌사가 붙었다. “파시즘과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이는 틀림없이 위대한 진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한 일은 결국 하나를 여럿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러니에는 나름의 한계가 있었다. […] 마찬가지로, 이이러니하게 입당할 수는 없다. 진짜로 입당하던가, 냉소적으로 입당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단 두 가지의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외부인에게는 어느 쪽인가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둘 다 경멸스러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주코바의 별장에 있는 책상 유리 밑에는 곰 같은 생김새에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 무소륵스키의 큼직한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그 사진은 그에게 질 낮은 작품은 버리라고 채근했다.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있는 책상 유리 밑에는 금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의 큼직한 사진이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음악을 만들라고 채근했다.

 

“예술의 것은 예술에게 돌리라고?” 그것이 바로 예술을 위한 예술, 형식주의, 자기중심적 비관주의, 수정주의, 그 세월 동안 내내 그를 공격했던 그 모든 다른 주의들의 신조였다. 그리고 권력층의 대답은 늘 한결같을 것이다. “나를 따라해보시오. 예술은 인민의 것이다–V. I. 레닌. 예술은 인민의 것이다–V. I. 레닌.”

 

말년에 그는 현악 사중주에 모렌도를 점점 더 많이 썼다. ‘사라지듯이’, ‘마치 죽어가듯이’. 그가 자기 삶에 붙인 표시도 이것이었다. 포르티시모에 장조로 끝나는 삶은 거의 없었다. 제때 죽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적절한 수명을 넘어서까지, 삶이 더는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실망과 무시무시한 일들만 일어나게 될 때까지 살게 되는 문제.

 

그들은 그를 죽이는 대신 살려놓고, 살려둠으로써 그를 죽였다. 이는 그의 삶에서 최후의, 대답할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그들이 그가 살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를 죽였다는 사실.

 

그들은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약점 하나, 얼룩 한 점까지 다 뒤졌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뭔가를 찾아냈다. 가십과 신화를 퍼뜨리는 이들에게는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가 정의한 대로 자기네 나름의 형식주의가 있다. 처음 들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뭐든지 다 아마도 부도덕하고 혐오스러울 것이다그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아내를 상대로도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그의 음악으로 말하자면, 그는 시간이 지나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가려지리라는 환상으로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후세가 음악이 만들어진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나은 평가 자격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그런 데 환멸을 느꼈다. 후세는 그들이 승인할 것을 승인할 것이다.

 

그는 가족에게 자신의불멸성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일렀다.

 

그가 바랐던 것은 죽음이 그의 음악을 해방시켜주는 것, 그의 삶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때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면여전히 들어줄 귀가 있다면그의 음악은…… 그냥 음악이 될 것이다. 작곡가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떨고 있는 학생에게 음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그 답이 질문자의 머리 뒤 깃발에 대문자로 쓰여 있었어도 여학생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는 것이 정확한 답이다. 음악은 결국 음악의 것이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말,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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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는 듣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듣고 있었다. 그래서 술 양이 각각 다르게 담긴 세 개의 잔이 한데 모여 맞부딪쳤을 때 그가 미소를 짓고 고개를 한쪽으로 숙이자 햇빛이 안경에서 잠깐 반짝였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삼화음이로군요.”

기억하는 사람이 기억한 것은 그것이었다.

 

틀림없이 전쟁은 끝날 것이다절대 끝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공포는 계속될 것이고, 부당한 죽음과 가난, 더러움아마 그것들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그리 깨끗하지 않은 보드카 잔 세 개와 그 속의 내용물이 만나 빚어진 삼화음은 시대의 소음으로부터 맑게 울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모든 이들과 모든 것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결국 중요한 것은 그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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