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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2021. 1. 24.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저/최세희

2011 맨부커상 수상. 1960년대, 고등학교에서 만난 네 소년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토니 웹스터와 그의 패거리 친구 앨릭스, 콜린, 그리고 총명하며 지적인 전학생 에이드리언 핀. 세 소년은 그를 선망하고, 학교의 모든 교사들은 낭중지추와도 같은 에이드리언의 탁월한 지적 능력과 독특한 시각을 눈여겨보고 그를 아끼는데..

각종 매체는 이 책에 대해 기억과 윤리의 ‘심리 스릴러’라는 말을 썼다. 원서로 150페이지 남짓한 이 길지 않은 소설이 독자를 몰아치는 힘과 서스펜스, 섬세하고 정교한 구성력 때문이다. 책은 한평생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없을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 비굴하게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1부

 

잠긴 문 뒤의, 오래전에 차갑게 식은 목욕물.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든 역사적 사건 -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 - 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시 한 편을 나눠주고 십 분 동안 읽고 생각해보게 한 후, 우리의 감상을 물었다.

에이드리언,

“에로스와 타나토스요.”

“섹스와 죽음 […] 사랑과 죽음이라고 할까요. 경우를 막론하고,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이죠.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로 뒤이어 나타나는 것들까지도요.”

웹스터,

“전 그냥 외양간올빼미에 대한 시라고 생각했는데요.”

이것이 우리 셋과 새로 사귄 벗 사이의 차이 중 하나였다.

 

학교는 런던 중심부에 있었고, 우리는 매일 각자의 집이 있는 자치구에서 학교까지, 하나의 통제시스템에서 다른 시스템으로 이동했다. 그 시절엔 모든 게 지금보다 명백했다. 돈은 모자랐고, 전자기기도 없었고, 패션의 전제정치는 미약했고, 여자친구는 전무했다. 인간 된, 또는 자식 된 도리, 즉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구직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후, 이 모든 것을 합쳐 우리 부모의 인생, 즉 우리의 것과 몰래 비교해볼 때 소싯적에 더 단순하고, 그래서 더 우월한 인생을 살았던 양반들의 인생에 견주어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한 선에서 약간 더 충족된 정도로 삶의 방편을 이루고 용인 받는 것으로부터 한눈을 팔게 할 만한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단 한 번도 공공연히 거론된 적이 없음은 당연하다. 영국 중산층 특유의 고상하신 사회진화론은 언제나 암묵적으로만 존재한다.

 

“부모? 개잡것들.”

[…]

에이드리언만은 예외였는데, 그는 우리가 부모를 탄핵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긴 해도 합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결손가정 출신이었다. […]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했다. 우리 셋은 에이드리언 몰래 그의 상황을 이리저리 따져본 후, 하나의 이론을 정립했다. 행복한 가족생활을 영위하려면 애초에 가족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 아니면 최소한 함께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런 분석을 하고 나니, 우리는 에이드리언이 더 부러워졌다.

 

더 정확히 말해 철학자를 고를 수 있는 가짓수가 하나 더 늘었다. 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나 도식화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

 

우리 부모는 우리가 서로서로 나쁜 것만 배우다가 급기야 자위 중독자라든가, 예쁘장한 동성애자라든가, 손대는 여자마다 임신을 시키는 호색한이라든가, 아무튼 당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온갖 것이 돼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실하지만 상상력은 눈곱만치도 없고, 예술에 대해서 심각하리만큼 문외한이었고, 누구 하나 기분 나쁘게 하는 일 없이 느릿느릿 돌아다니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가 이른 죽음으로 유명해지자 우리는 불쾌해졌다. 꽃같은 나이라. 과연 우리가 알던 롭슨은 식물성 인간이었다.

 

중점적인, 불변의 사실 하나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롭슨에게 그 정도로 가혹하게 굴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롭슨이 우리 또래였고, 우리의 기준에선 범상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를 사귄 것은 물론이요, 동시에, 논의의 여지없이 그 여자와 섹스까지 했다는 사실이었다. 잡놈의 새끼! 왜 우리가 아니고 그놈인가.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은 덕에 우리는 ‘사랑’엔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사랑이 찾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암시적인, 어쩌면 논리적이기까지 한 징후를 분명히 감지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고통’을 실제로 겪어내려 했을 것이다.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웹스터,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콜린,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죽자고 반복하니까요, 선생님. 우리는 이제껏 역사가 트림하는 것을 보고 또 보았고, 올해에도 또 보고 있습니다. 폭정과 폭동, 전쟁과 평화, 번영과 빈곤 사이를 오가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와 천편일률적인 동요뿐이죠.”

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

“하지만, 선생님, 롭슨의 증언이 없다는 점을 만회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면적으로는 그렇지. 그러나 동시에, 역사가들은 사건에 대한 당사자 본인의 설명에 어느 정도 회의적으로 접근해야 해. 가장 멀리 내다보는 관점이 가장 의문스러워 보일 때가 종종 있지.”

“정신 상태는 행위로부터 추론될 수도 있고. 폭군이 적을 제거하라는 서신을 친필로 보내는 법이 거의 없듯이.”

 

우리는 에이드리언의 관심을 받고 싶었고, 그의 인증을 받고 싶었다.

 

“시인들은 소설가들하고 달라서 소재가 떨어질 일이 없어.” 베로니카가 한 수 가르쳐주었다. “소설가들 같은 방식으로 소재에 의존하진 않으니까.”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게 하려면 언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낮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야 진짜로 이목을 끌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관계가 어딜 향하고 있는 건지 생각을 하긴 해?”

[…]

“꼭 어딜 향해야 되나?”

“관계라는 게 그런 것 아니야?”

“모르겠어. 그럴 만큼 깊이 들어가본 적이 없어서.”

 

“우리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넌 나한테 계속 질문을 하고 있지만, 이미 대답을 다 알고 있는 것 같거든? 아니면 네가 원하는 답이 따로 있던가. 그러니까 그게 뭔지 그냥 얘기해주지그래? 그럼 내가 생각하는 대답이 같은 건지 말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말은 하지 마.”

“우리가 아직도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말.”

“그게 내가 이 대목에서 해줘야 되는 말인가?”

“네가 생각하는 것, 네가 느끼는 것, 아, 이젠 입이 다 아프네, 네 진심만 말하면 돼.”

 

70년대가 될 때까지, 그 ‘60년대’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60년대에 살면서도 대부분은 50년대식 삶에 젖어 있었다는 뜻이다. 혹은, 내 경우는 두 시대를 나란히, 조금씩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상황이 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내 생각에 내겐 생존 본능, 혹은 자기보존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베로니카가 소심함이라고 말한 것이, 그리고 내가 불화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말했던 것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행위를 근거로 정신 상태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헨리 8세를 비롯한 기타 등등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에 개인의 삶에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현재의 정신 상태를 근거로 과거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훗날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마음 한구석으로 관계가 그렇게 쉬울 수 있다는 데, 굳이 더 복잡할 필요가 없다는 데 나의 일부는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았던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되었다. 관계란 무언가의 증거로서 복잡함을 요하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대체 무엇에 대한 증거인가? 깊이? 진지함? 그럼에도, 깊이나 진지함을 바치지 않고도 관계가 정말로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 있다는 건 맹세코 사실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게 마련’이라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면서, 나 자신이 일종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구할 길 없는 특정한 답을 갈구하면서.

 

그 시절 우리는 자살이 모든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임이 철학적으로 자명하다고 여겼다. 불치병에 걸리거나 노망이 났을 때 취할 수 있는 논리적인 행위, 고통에 맞서서, 혹은 다른 이의 죽음을 막기 위해 취하는 영웅적 행위, 실연에 격노해 감행하는 매혹적인 행위(역시나 등장하는 ‘위대한 문학’). 이 범주 중 어떤 것에도 롭슨의 추레한 이류 행위를 대입한 적은 없었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법의 관점에서 정의할 때, 자살한 사람은 실성한 것이다. 최소한 자살을 감행하는 시점에는 그렇다. 법과 사회와 종교 모두 건전하고 건강한 상태에서 사람이 자살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어쩌면 그런 권위의 요체들은 검시관을 부리고 있는 국가의 관할하에 놓인 삶의 본질과 가치가 자살의 논지로 인해 침범당할까 두려워한 건 아니었을까.

 

“그 자살이란 게 그 자체로 완결된 건지, - 자기본위적인 행동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냥 에이드리언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말이야 -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우리에 대한 함축적 비판이 담긴 건지 모르겠다는 거야.”

 

그는 논리적으로 사고했고, 논리적 사고로 도출한 결론에 따라 행동했다. 반면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세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서둘러 과거를 일화로 바꾸고 있었다.

 

그의 죽음에 의문을 품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었기에 그의 자살 사건이 더 수월하게 정리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평생토록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 케임브리지 신문이 기계적으로 주장했듯이 - ‘비극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빠르다 싶을 만큼 우리에게서 멀어져 시간과 역사의 틈새 속으로 사라져갔다.

 

함께 휴가를 보내자는 말이 한두 번 오갔지만, 아무래도 둘 다 상대 쪽에서 계획을 짜고 티켓과 호텔을 예매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얼마간은 성취를, 얼마간은 실망을 맛보는 것.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2부

 

생이 저물어가는 무렵이 되면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안 그런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랬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덕을 쌓은 만큼 상을 주는 게 인생의 소관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다.

 

시간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감정을 익히는 것. 예를 들면, 우리의 삶을 지켜봐온 사람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인간됨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명해줄 것도 줄어들고, 결국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듦을 깨닫게 되는 것. 부단히 기록 - 말로, 소리로, 사진으로 - 을 남겨두었다 해도, 어쩌면 그 기록의 방식은 엉뚱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다들 그랬듯이 공포와 우려와 신중한 낙관이 교차했지만,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그리스와 로마, 혹은 대영제국, 혹은 러시아 혁명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것을 신뢰한 적도 없었다. 어쩌면 나는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과 똑같은 역설이거나.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청년을 매료시키는 천재에 무슨 잘못이 있을까. 그보다는, 천재에 매료되지 않는 청년 쪽이 문제다.

 

그 친구에게 아들 밴드의 음악을 하나라도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친구가 ‘모든 날이 일요일’이라는 제목의 노래 하나를 들어봤다고 대답했다. 청년기의 그 해묵은 권태는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계속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또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냉소적인 위트를 빌려 그 권태를 모면한다는 사실에도. ‘모든 날이 일요일’이라.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과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마거릿은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살아갈 날이 줄어들수록 헛되이 살고 싶지 않게 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아는가? 병원 신세를 지는 노인네가 되었는데 생면부지의 간호사들이 날 앤서니라고 부르거나, 더 고약하게는 토니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거릿은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는 걸 안다. 실제로도 그녀는 변했다. 그러나 나는 그 변화의 폭을 다른 사람만큼 느끼지 못한다. […] 마거릿은 사라져버린 것만 보고, 나는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만 본다고.

 

여자는 전혀 미스터리한 구석이 없는데 남자들이 이해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본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과오를 밝혀낸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그러나 향수라는 것이 뜨거웠던 감정들을 강하게 회고하는 것, 이제는 우리의 삶에 존재하지 않는 감정들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을 의미한다면, 나 자신도 예외일 수 없음을 인정한다.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학문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전적으로 실패한 관계는 상실/뺄셈, 축소/나눗셈이라는 용어 양쪽에서 설명될 수 있고, 총계값은 0이다. 반면에 전적으로 성공적인 관계는 덧셈과 곱셈으로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어떤가? 논리적으로 생성불가능하고 수학적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주석으로 표현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지 않은가?

 

b=s-va1  

혹은 a2+v+a1×s = b?

 

한 구절로 표현하자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

 

스스로를 허락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서 허락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면 등등.

 

나는 멀찍이서 그녀를 알아보았다. 키와 자세만 보고 금세 알아보았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에 자세의 이미지가 늘 따라붙는다는 건 묘한 일 아닌가.

 

소년기에 꿈꾼 것 중 단 하나라도 실행에 옮길 날은 오지 않을 거였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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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보낸 편지

 

그 여자는 너의 내적 자아를 조종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아는 감출 위인이지.

 

시간이 말해줄 거야. 시간은 늘 그렇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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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자아가 노년의 자아를 찾아와 그 시절에, 그 이후에, 혹은 그 시절에 가끔씩 내 깜냥이 발휘됐던 것이 어떤 양상이었는지를 알리며 충격에 빠뜨린 것이다. 그런데다 우리의 삶을 지켜봐주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그와 함께 우리의 존재를 밝혀주는 증거까지도 하나둘씩 사라진다는 걸 내가 지껄이기 시작한 것도 정말 최근에 와서였다. 이제 나는 그 시절, 혹은 그보다 더 전 시절의 내 됨됨이에 대한 모종의 전혀 달갑지 않은 확증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베로니카가 불에 태워버린 단 하나의 문서라면 말이다.

 

나 자신의 사람됨을 목격한 증인이 바로 나일 터였다.

 

사람은 가장 젊고 민감한 시절에 상처도 가장 많이 받는다.

 

내가 지금 느끼는 건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아니었다. 천만에, 내 인생에선 상대적으로 드문데다 더욱 강렬한 종류였다. 회한의 감정.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붙어버린 원시적인 감정이다. 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평균치.

 

“날 떠난 게 내가 싫어서였어?”

“아니.” 그녀가 말했다. “우리 둘 다 문제여서 떠났던 거야.”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 우리의 비극까지도.

 

인생은 단순히 더하고 빼는 문제가 아니다. 상실의, 혹은 실패의 축적과 곱셈이다.

 

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개념부터 챙겨라.

 

에이드리언이 죽은 건 부럽지 않지만, 그 삶의 명징성은 부럽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경멸의 문제와, 경멸을 당한 후의 우리의 반응이라는 문제.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젊었을 땐 - 내 얘기이다 - 자신의 감정이 책에서 읽고 접한 감정과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란다. 감정이 삶을 전복하고, 창조하고, 새로운 현실을 규정해주길 바란다. 세월이 흐르면, 그 감정이 좀 더 무뎌지고, 좀 더 실리적이 되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런 감정이 지금 그대로의 삶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응원해주길 바란다. 자신이 그럭저럭 괜찮게 살고 있다고 말해주길 바란다. 이런 심정에 일말이라도 그릇된 것이 있을까?

 

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나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버전이자 여전히 효력이 있는 이야기만 골라서.

 

‘그이/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이/그녀가 내 운명임을 직감했다’ 등등. 나는 늘 감동을 받으며 응원을 해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경계심이 일면서 황망한 심정이 된다. 왜 그 지난한 과정을 반복하는 거지? 한 번 상처를 받으면, 두 번째에도 상처받는다. 그 수순을 몰라서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편지가 전달될 때까지의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장담하는데, 삼 주 동안 우체배달부를 기다리는 건 사흘 동안 이메일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살다보면 처량하리만큼 인생의 변수가 줄어드는 때를 맞게 된다.

 

내 딴엔 그녀의 경멸을 극복하고, 회한을 죄책감으로 전환해서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토니, 당신은 이제 혼자야’라는 마거릿의 목소리. 그리고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렇지? 넌 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라는 베로니카의 목소리. […] 살면 살수록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사라져만 간다고.

 

그의 얼굴에서 나는 보았다. 얼굴이 늘 진실을 말하진 않는다, 안 그런가? 적어도 나에겐 아니다.

 

회한remorse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

 

게으른 클리셰가 이전에 일어난 불변의 진실과 맞닥뜨린 것이다. 시간의 보복이 무고한 태아에 가해지다니.

 

그는 타고난 존재적 재능을 장쾌하게 거부한 게 아니었다. 그는 유모차를 끄는 지옥 같은 삶이 두려웠던 것이다.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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