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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역사란 무엇인가?

2021. 1. 26.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소설을 읽은 후,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제목이었다. 주요 화자인 토니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인물이었기에.

원제 <The sense of ending>인데, 번역기식 직역은 결말의 의미”, “결말의 감각이고, 어느 블로그에 '마지막에서야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번역해두었던데, 훨씬 그럴 듯했다

 

이야기는 고등학교 친구 토니, 에이드리언, 콜린, 앨릭스 네 친구로 시작해서, 토니와 에이드리언, 그리고 그들과 베로니카의 관계, 결국 홀로 남은 토니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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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시간에 네 친구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어린 그들은 대답한다.

토니, 승자들의 거짓말.

콜린, 생양파 샌드위치. 죽자고 반복하니까.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와 천편일률적인 동요.

에이드리언,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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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이나 혁명 같은 거창한 역사가 아닌 사소한(?) 개인의 역사에서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토니는 평균치의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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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평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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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와의 이별,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사귐, 에이드리언의 자살.

젊은 시절을 관통한 사건이었지만, 잊혔고 그의 평균치 삶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노년에 접어든 토니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가 유산을 남겼다는 편지를 받는다.

오백 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

베로니카가 태워버렸다는 에이드리언의 일기.

베로니카가 보내준 일기의 페이지.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끝나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사귄다는 소식을 전했을 토니가 둘에게 보낸 편지.

 

이 상황에서 토니는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에이드리언의 관점으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점점 문서와 증언은 보충되고 그에 따른 기억이 명료해지면서, 확신이 빗나가는 과정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에이드리언이 일기에 남긴 수식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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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va1  

혹은 a2+v+a1×s =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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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는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 공동 수신으로 보낸 편지가 그들 삶에 대한 예언이 되어버린 현실과 만난다. 그는 기억조차 못하는 편지가 말이다.  

여기에 다다르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이해가 된다. 대체로 감을 잡지 못하는 토니가 한번 제대로 예감을 셈이니.

 

"소원은 조심해서 빌어야 한다. 이루어질 지도 모르니."

이 말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고,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노년의 토니는 죄책감과 무력감 속에서 그들과 그의 삶을 회고하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또 하나의 답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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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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