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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너무 시끄러운 고독

2021. 3. 6.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영국 왕을 모셨지>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그의 작품이다.

그는 슈크보레츠키, 밀란 쿤데라와 더불어 체코 문학의 세 거두로 추앙받고 있다. 앞의 두 작가와 달리, 끝까지 체코에 남아 체코어로 글을 쓴 작가다.

그로테스크하고 우스꽝스러운 것들은 즐겨 묘사하는, 유머 감각이 넘치는 작가이다.

감시와 검열 속에서 글쓰기를 놓지 못한 작가의 유머에는 마냥 웃을 수 없는 우수가 깃들여 있다.

 

첫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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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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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더미와의 사랑. 그 사랑이 온전할까?

폐지 더미 속은 사랑의 공간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이는 “인간적”인가?

 

이야기는 끊임없이 “인간적”이라는 말을 되풀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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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하늘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인간적이었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에 나는 마당에서 연을 태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고, 이런 일들은 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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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사고하는 인간도, 폐지를 압축하는 자신도 인간적이지 않다고 끊임없이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것은 정말 “인간적”인 것일까?

주변에 만연한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 더 “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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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리본이 빙글빙글 돌면서 사정거리 안에서 춤추는 사람들 모두를 치며 똥물을 튀겼던 것이다……

 

만차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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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물을 튀기며,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디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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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우유를 병째 들이마시며 일했다. 부브니 사람들처럼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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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환경에서 우아하게 우유를 마시며 일하고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부브니 사람들은 비인간적이고.

그들은 사고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폐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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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을 잉크와 얼룩 속에서 일해온 내가,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내가, 이제 비인간적인 백색 꾸러미들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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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비인간적인 삶을 거부한다.

끊임없이 무엇이 “인간적”인 것인지 질문하는 것.

비인간적인 삶을 거부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비인간적인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그가 마지막에 찾게 되는 집시 여인의 이름이 그가 찾는 궁극의 진리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일론카.

 

작가는 1997년 프라하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가 5층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역자는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았던 작가라기보다 살아 있기에 글을 썼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죽음과 역자의 평가를 보면서 한탸의 폐지 압축과 죽음이 겹쳐 보인다.

그는 찾았을까? 그만의 일론카를.

나는 찾고 있는가? 나만의 일론카를.

책읽기가 그 과정이길 바란다.

 

https://meetjul.tistory.com/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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