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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이면(裏面)

2021. 3. 31.

 

 

기록은 사실을 전한다.

하지만 언제나 이면(裏面)이 존재한다.

검열을 거치는 문서 중에 군대와 감옥을 오가는 편지가 있다.

 

체코의 언론인이며 작가, 문예평론가인 율리우스 푸치크가 게슈타포에 체포된 후 처형되기 전까지, 프라하의 감옥에서 담배종이 등에 틈틈이 적어둔 글과 편지들을 모은 책이 <교수대의 비망록>이다.

푸치크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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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누이에게

 

내가 편지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찾고 또 찾아내는지 너희들로서는 상상이 안 될 것이다. 너희가 편지 속에 써 보내지 않은 것까지 찾아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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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을 오가는 글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푸치크는 사형일을 기다리며 가족의 편지 속에서 지워진 혹은 쓰지 못한 사랑과 슬픔의 마음을 찾아낸다.

 

<바둑 두는 여자>는 1930년대 일제 침략기의 만주, 혼돈의 도시를 부유하는 한 중국 소녀와 일본군 장교가 스쳐가는 바람처럼 만나 바둑을 둔다. 그들의 비극적 사랑의 결말은 맘이 먹먹하게 만든다. 

 

여기서는 일본 군인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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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물이 도중에 검열받을 수도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 군인들은 군사기밀을 누설하게 될까봐 두려워 가족에게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만 늘어놓는다. 가족의 답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전사한 후에 우리의 서신에 불평이나 불안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용감무쌍한 영웅의 이미지를 남겨줄까?

 

어머니는 내 심기를 어지럽힐까 두려워 단 한 번도 보고 싶다는 말을 쓰지 않으셨다. 나 역시 그녀를 울리지 않기 위해 고국이 그립다는 말은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 용인되는 유일한 단어는 죽음이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천황을 위해서라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목숨을 버리거라. 그것이 네 운명을 따르는 길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장한다. ‘조국의 영광을 위해 제 한 목숨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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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되긴 했지만 일본이 카미카제 유서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전사한 후에 그들의 서신에 불평이나 불안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용감무쌍한 영웅의 이미지를 남겨줄까?

아니다.

우리는 이면을 읽는다.

푸치크처럼 그들이 쓰지 못한 것까지 읽는다.

우리는 조국의 영광을 위해 제 한 목숨 기꺼이 바쳐야 하는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조국의 영광이 되는 세상을 원한다.

소녀와 청년이 공원에서 바둑을 두며 소소한 사랑이 꽃필 수 있는 세상.

이면을 읽어내는 노력이 필요 없는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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