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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

유토피아 Utopia

2023. 3. 2.

 

유토피아 Utopia

 

모든 것이 명백하게 설명되어 있는 섬.

 

이곳에서는 탄탄한 증거의 토대를 딛고 서 있을 수 있다.

 

모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다.

 

덤불은 정답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곳에는 엉키지 않고 곧게 나뭇가지를 뻗은

'논리적인 가설의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우물가에는 눈부시게 곧은 '이해의 나무'

"옳아! 이제 알겠어!"를 연방 외치는 중.

 

숲속으로 멀리 들어갈수록 '명백한 타당성의 계곡이

더욱 넓게 펼쳐져 있다.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싹트기 시작하면 바람이 불어와 사방으로 흩어놓는다.

 

메아리는 부르는 사람 없어도 저절로 응답하면서

세상의 비밀에 대해 기꺼이 속삭인다.

 

오른쪽에는 '의미'가 보관된 동굴.

 

왼쪽에는 '깊은 신념'의 호수.

바닥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진실'이 수면 위로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계곡 너머로 우뚝 솟았다.

그 꼭대기에서 '사물의 본질'이 한눈에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매력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다만 해변에서 희미한 발자국이 발견될 뿐.

그것들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해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는 일뿐이라는 듯.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삶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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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타당성의 계곡'의미'가 보관된 동굴, '깊은 신념'의 호수로 이루어진 유토피아.

하지만, 유토피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삶 속으로 몸을 던진다.

모호한 불합리성의 계곡에서 끝없이 의미를 찾아대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신념으로 인한 카오스의 세상으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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