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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계단 | 번 존스(Sir. Edward Burne-Jones, 1833-1898)

2012. 9. 24.

 

 

 

 

황금계단

The Golden Stairs

 

번 존스

Sir. Edward Burne-Jones

1833-1898

 

 

관련 링크

      Birmingham   http://bit.ly/OVxoQz

      네이버백과   http://bit.ly/OVxasr

      Wikipedia      http://bit.ly/OVx5oH

 

 

힘없는 자는 의료계와 법조계와는 담을 쌓고 사는 게 상책이다. 죄짓지 말고 아프지 말고 살아야 맘 편하게 살 수 있다.
지금 교도소 면회실에서 영신이를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 힘없는 자라고 떠벌리고 다니기를 서슴지 않는 내가, 며칠 후면 가석방될 영신이를 만나러 말이다.
나 박신희와 박영신은 대학 시절 친구다. 우리는 가나다순이라는 단순한 원칙으로 매겨지는 학번에 의해서 가까워진 친구사이이다. 학번은 생각하기 귀찮아하는 조교들에 의해 강의실 자리를 정하는 기준이 되었고, 스터디그룹을 구분할 때도 사용되는 기준이었다. 그러니 절로 만남의 기회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신입생환영회에서 영신이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오로지 대학을 목표로 공부 이외의 관심은 철저히 차단된 고교 시절을 보내고 들어온 대학은 신세계였다. 그러나 세상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기에, 우리는 대학이라는 신세계보다는 사회라는 구세계에 대한 항거를 심어주려는 선배들과 함께였다. 학회라는 이름으로 몇몇 무리로 나누어 사회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나라의 녹봉으로 딸을 대학에 보낸 아버지는 공부만 열심히 해라, 데모하지 마라, 못된 데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 아버지의 고리타분함과 비겁함에 분개하면서도 난 그 말을 명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자리가 내게 편하지 않았다. 아버지 말을 빌리자면, 이곳은 못된 곳이었다.
영신이는 달랐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영신이 부모님은 어려운 살림을 쪼개서 그녀를 대학에 보냈다. 영신이가 떠나올 때 들은 당부의 말은 밥 잘 먹으라는 얘기가 다란다.
당시 우리는 엘리트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학 물을 먹었다면 적어도 사회에서는 엘리트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엘리트란 무엇인가?
"현실이라는 것 말입니다. 선배님은 거창하게 말하는데요. 우리 학교에서는 저보다 공부 잘하는 애가 대학을 못 갔어요. 다음 주에 공장에 취직하러 서울에 온대요. 대학 물 좀 먹었다고 제가 그 애보다 잘난 건가요. 이런 토론 자체가 먹물 먹은 엘리트의 탁상공론 아닌가요?"
영신이는 내가 생각도 못한 논리를 선배들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했고, 또 그 얘기 끝에 눈물을 글썽였다. 당당함과 눈물, 이 두 가지 이미지로 영신이는 내게 다가왔다.
학기가 시작되었다.
난 평범하고 소심하고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지만, 영신이는 이미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라는 데 발을 들여놓은 듯했다. 영신이는 수업을 빠지는 날이 많았고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명동으로 종로로 격동의 현장 한복판에서 살아간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가끔 나타나는 영신이는 내게서 강의노트를 빌리곤 했다. 노트야 빌려주면 그만이지만, 영신이라는 존재는 부담스러워졌다. 나와 같지 않음이, 그리고 그녀와 같아질 수 없음이.
3학년 기말시험 때였다. 이때 영신이와 함께 했던 그 특별한 경험은 쉽게 잊히질 않았다. 그렇게 잊으려고 애썼건만. 다음날이 시험인 일요일 아침, 자취방으로 전화가 왔다. 영신이었다. 수업을 자주 빠졌으니 학교도서관에서 공부하면 노트를 좀 빌리자는 것이었다. 난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현실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영신이에게 노트를 빌려주는 것이, 내게는 최대의 현실참여였고 내 비겁함을 감추기 위한 얄팍한 포장지였다.
그날은 명동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내정되어 있던 날이었다. 영신이도 참석할 모양인지 공부보다는 노트 복사에 더 급급해했다. 그 조급함이 조금 불안하게 느껴진 것은 그날 일의 전조였는지도 모르겠다.
복사가 끝나자 좀 미안하다는 듯이 점심이나 먹고 가자고 했다. 부담스런 존재와의 헤어짐을 전제로 한 점심을 내가 거부할 까닭이 있겠는가. 우리는 시장판의 분식점에 들어가 점심을 해결했다. 그때 뭘 먹었는지 무슨 얘길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시장 골목길을 빠져나오는데 전경 하나가 우리를 붙잡았다. 우리 또래 같은 전경은 소위 닭장차라고 불리던 전경차에 타라 했다. 시험공부를 하고 가는 길이라 얘길 했지만 소용없었다. 시위의 원천봉쇄 차원에서 시위참여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격리하는 것이었다. 그 전경은 그리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그 전경 또한 그날 할당을 받은 듯했고, 그는 할 수 없이 우리를 붙잡았고 우리는 재수 없이 걸려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두려움 때문에 재수 없음에 대한 분개는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학이라는 곳을 다니던 때는 책상을 탁 치면 억하고 죽어나가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그날 시위의 주요한 이슈였다.
닭장차에는 너저분한 시위진압장비가 널려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근데, 영신이가 조용히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는 몇몇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힌 장을 찢어 입에 넣고 삼켰다. 나는 그 모습을 두려움에 질릴 채 쳐다보고 있었다. 내 겁먹은 표정에 영신이는 웃으면서 별거 아닌데 혹시나 해서라고 했다. 그 순간 영신이는 운동권의 대단한 거물처럼 보였다.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고, 영신이가 내 두려움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이 불편했다.
회색분자의 소망은 절대평화다. 평화로울 때는 회색분자인지 들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만, 혼란기의 회색분자는 회색이 아니라 검정이 되어버린다. 난 벌써 머릿속으로 고문을 받고 있었고 단순한 위협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불고는(사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건만, 하여튼 머릿속에서는 말이다) 영신이를 경찰에 넘겨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건 참 더러운 기분이었다.
닭장차는 마포경찰서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큰 강당 같은 곳에 우리를 몰아놓았다. 이미 많은 학생이 거기 있었다. 여학생은 우리 둘뿐이었다.
난 영신이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전날 본 영화 얘기, 학교 아이들 얘기, 고향 얘기, 혹 들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하에 공직에 있는 아버지 얘기 등등을.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아니 잊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영신이에게 겁먹고 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태연한 척 이런저런 얘기를 해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경찰이 우리 둘만 불러냈다. 경찰은 우리에게 공부는 안 하고 왜 거리에서 헤매느냐고 뭐 그 비슷한 얘길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시험공부를 하고 나오던 길이라고 항변했다. 경찰은 훈계조로 뭐라 뭐라 하고는 우리를 풀어줬다.
그때 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감사합니다."
이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난 울고 싶었다. 영신이를 배반하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났다는 안도감 탓에 내 비겁함은 영신이 앞에서 무방비상태로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도대체 내가 뭘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
다음 날 난 시험을 봤다. 내 노트를 복사한 영신이는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방학이 되었다. 영신이 이외에는 아무도 모를 그 경험을 나름의 논리로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유일한 걸림돌인 영신이를 마주치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영신이가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라는 것만 몇 다리 건너서 들을 수 있었고, 마찬가지 방법으로 영신이가 수배 중이라는 소식을,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붙잡혔다는 소식과 함께 들었다.

학창시절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대학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거라고 믿었던 시기, 대학을 졸업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시기, 정해진 단계를 밟아나가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시기였다.
평범한 학생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면서, 황금계단에서 내려오면 도약이 아니라 그냥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현실과 만나게 된다. 떨어질까 봐 두려워 발치만 내려다보고 걸었기 때문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추락이 두려워 하늘을 볼 여유가 없었다.
세상을 바꾸길 원했던 영신은 현재 가석방을 며칠 앞둔 채 수감생활 중이다. 그녀는 지금 하늘을 보고 있을까?
"좀 놀라운데, 네가 여기까지 올 줄 몰랐거든. 도피 중에 한번 인가 전화했었어. 집에 내려갔는지 연결은 되지 않았지만."
비난 조의 말도 아닌데 난 제풀에 할 말을 잃었다. 겨우 이런저런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영신이의 마지막 말이 귀가에 조금 오래 머물렀을 뿐이다.
"혁명가는 세상을 바꾸질 못한다. 일반대중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혁명가는 대중을 움직일 뿐이지."
영신이는 내가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 세상을 바꾼 대중의 하나이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혁명가일지 모르지만, 난 혁명가에게 고무되어 변화된 대중은 되지 못했다.
그녀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나야. 좀 만날 수 있을까 해서 ……. 또 전화할게."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난데 …… 집에 없구나. 혹 돌아왔나 해서 전화해봤어."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그래, 방학이지. 집에 간 모양이구나. 그럼, 잘 지내."
난 그 해 집에 내려가지 않았고, 응답기를 켜놓은 채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는 구속되었다.
황금계단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난 이미 추락을 경험했다.
죄책감, 이것이 내가 여기 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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