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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얼굴 |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

2012. 10. 3.

 

 

 

불쾌한 얼굴, Sulking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1834-1917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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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s of Art       http://bit.ly/Vtr0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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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장님! 당신이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정작 불쾌한 건 접니다. 하지만, 전 그렇게 티를 내진 않아요. 전 예의 바른 사람이거든요. 상급자이고 연장자이라고 나이 어린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하진 않아요. 물론, 제겐 아랫사람이 없고 당신보다 많이 어리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잘못 판단하고 있어요. 당신이 강자라고 생각하죠. 내가 보기엔 스스로 강자임을 알고 그걸 약자에게 행사하려는 당신은 치졸한 사람일 뿐입니다. 진정한 강자는 조그만 위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왔을 테니까요. 닥쳐온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이지요.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찾을 사람들입니다.
위기를 맞고 있는 자신을 좀 보세요. 당신은 위기 앞에서 두 눈을 가리고 있어요. 그냥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지요.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위기가 사라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당신이 한 거라고는 나를 잘라내는 것뿐이죠. 기가 막힐 일이죠.
이 위기가 나 때문이라고요? 당신은 자격이 없습니다. 내 탓을 하기 전에 당신을 보세요. 일개 비서가 당신의 사업 전체를 흔들 수 있다면 그것도 당신 탓입니다. 관리의 책임이란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모든 걸 해야 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관리자가 아랫사람에게 시키기만 하지요. 그리고 모든 게 잘 되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잘못되면 누굴 탓하나 생각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죠. 당신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군요.
당신이 비서에게 무엇을 하게 했는지 잊은 것 같은데, 전 고객이 오면 차를 내왔고, 당신이 작성한 자료를 타이핑 했으며, 보내라는 곳에 선물을 보내고, 회사 일은 부인에게 말하지 말며, 가정사는 애인에게 말하지 않고, 고객에겐 정직한 장부를 보여주고, 당신이 가진 부정한 장부는 비밀로 해주었죠. 비밀장부를 숨긴 비밀금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지만 한 번도 금고를 열지 않았어요. 지금까지는.
설마, 당신 사업이 이것만으로 유지된다고 생각하진 않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왜 당신 비서를 하겠습니까? 이게 전부라면 나도 사업체 하나를 운영하고 있겠지요. 이 일은 원래 내가 하던 일이니 나는 비서조차 쓸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당신이 사업이 흔들린다고 내게 해고통고를 한 것은 정말 잘못한 것입니다. 시답잖은 일을 한다고 나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리고 위기라는 건 사실 있지도 않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나는 꽤 유능한 비서거든요. 당신은 치졸하고 교활한 사람이죠. 남을 속이는 데 탁월해요. 모든 사람을 속이는 생활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지요.
교태 어린 목소리의 어린 애인이 당신 곁에 있겠다고 했겠지요. 당신을 감시하면서 돈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은 그녀에게 너무 짜게 굴었어요. 가끔 보내는 값싼 꽃다발로는 충분하지 않았지요. 세상에! 그렇다고 애인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더 놀라워요. 어쩌면 더 당신답기는 하죠.
부인은 어때요? 사업자금을 대주고 집에서는 아이를 키우며 가정을 돌보고 있죠. 당신은 가정을 깰 생각은 추호도 없죠? 참, 축하해요. 셋째가 생겼다고요? 당신의 사랑은 차고 넘치는군요.
고객은 어떨까요? 이중장부로 계약금액을 높여 정당한 대가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챙기면서 자신의 돈을 횡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 고객들은 워낙 부자들이라 소소한 횡령을 일일이 신경 쓰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알게 된다면, 그땐 이야기가 달라지죠. 부자들이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속였다는 사실에 당장 거래를 끊을 겁니다. 졸부들은 대체로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죠. 당신이 그들을 속였다면 당신이 그들을 바보로 알았다는 거니까요. 어때요? 그땐 정말 위기가 될 것 같지 않나요?
내 말을 듣고 있자니 점점 더 불쾌해지죠? 그건 당신이 진정 강한 것도 아니고 진정 교활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정말 사업이 힘들어서 사람을 자를 때는 비서는 가장 나중에 잘라야 합니다. 함께 망해야 하는 거죠. 비서는 말하지 않을 뿐이지 많을 것을 알고 있거든요. 당신이 정직하지 못하다면 더더욱 그랬어야 했어요. 당신은 자신도 모르고 나도 몰랐던 거지요. 사업가로서는 낙제입니다.
이렇게까지 알아듣게 말했으니 당신은 절대 나를 자를 수 없어요. 하지만, 난 이따위 회사 때려치울 겁니다. 내가 당신을 자르는 거죠. 당신 부인에게는 애인에게 보내는 꽃다발을 보냈고, 애인에게는 부인의 임신소식을 전했지요. 그리고 비밀장부는 익명으로 경찰서로 보냈어요.
어, 전화가 왔네요. 여보세요? 아, 사모님! 네, 사장님 계세요. 바꿔 드리겠습니다. 사장님, 사모님 전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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