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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을 가진 어린이 |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

2012. 10. 8.

 

 

 

인형을 가진 어린이


To Celebrate the Baby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  

 


 

 

 

 

관련 링크

네이버 캐스트    http://bit.ly/SOukac

Works of Art      http://www.henrirousseau.org

Wikipedia          http://bit.ly/SOubDB

 

 

누군가 생일선물로 마리오네트 줄인형을 선물했다.
신기한 물건이었다. 내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걸음을 떼야 그도 한 걸음을 옮긴다. 손에 매달린 줄을 당겨주어야 그는 손을 들어 올린다. 내가 줄을 놓으면 그는 축 늘어져 꼼짝도 못하는 여느 인형과 다름없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그는 줄인형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으며, 그의 존재증명이 가능하다.
줄인형은 누군가를 조정할 때 느낄 수 있는 쾌감을 가르쳐 준다. 때때로 나조차 내 맘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대리만족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인형을 좋아하는 것은 내 맘대로 해도 절대 불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줄인형을 선물한 이는, 인간의 잠재력을 깨우는 창의성과 놀이가 지닌 즉흥성과 자율성 등을 학습할 수 있는 인형놀이를 통해, 아직은 어린 내가 조화로운 인격을 지니고 함께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줄인형을 통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조화보다는 지배의 쾌감이었다.
어른들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싫어하면서도 아이들이 어른이 되길 원한다. 성장이 조금만 늦어도 안달을 하며, 또래보다 더딘 성장을 하면 묘한 시선으로 아이를 관찰한다. 덜된 아이가 아닐까 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 부모가 나를 바라볼 때 그들의 표정은 어쩐지 불안해 보인다. 내가 입을 뗄 때가 되었음에도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의 관찰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이의 심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어른들은 자신은 아이였을 때조차 이미 어른이었다고 착각하고, 아이에게도 이미 어른이길 바란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 아이이기 때문에 여전히 아이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단지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모는 관찰을 통해 알 수가 없다.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의 모양새는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른을 비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모순된 이중 잣대는 들이민다. 한편으론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한편으론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징그러워한다. 그들은 그들의 기준을 말해주지 않고서도 아이가 모두 이해하고 있기를 원한다. 무엇이 그들이 원한 아이다운 행동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아이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은 모두 아이다운 행동일 뿐인데 말이다.
줄인형을 선물 받았을 때 나는 말문을 열었다.
그것도 어린아이가 입을 뗄 때 뱉는 '엄마', '아빠' 하는 한두 음절의 단발성 말이 아니라, 인형극을 공연할 정도의 길고 긴 이야기로 포문을 열었다. 이건 부모로서는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아이의 이야기가 부모의 저속하고 치열했던 부부싸움의 적나라한 재현이었기 때문에 부모는 말문을 잃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불안에서 두려움으로 변했고, 곧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줄인형을 뺏으려 했다.
그들은 인형놀이가 아이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교육적인 효과들은 안중에 없었다. 다만,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난 것에 대한 경계심만 가득했다. 내가 줄인형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고 온종일 그치지 않자 그들은 결국 타협을 했다. 줄인형에서 줄을 끊어버렸다. 내겐 줄 없는 줄인형은 의미가 없다. 안고 있으면서 위안을 얻기엔 줄인형은 너무 딱딱하다.
그들은 줄인형에서 끊어낸 줄을 내 팔다리에 묶어 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줄 없는 줄인형에서 복종을 배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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