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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다시는 |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2012. 10. 8.

 

 

 

두 번 다시는, Nevermore Oh Tahiti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관련 링크

네이버 캐스트     http://bit.ly/UMETM6

MoMA               http://bit.ly/UMF0Y7

Wikipedia           http://bit.ly/UMF0aF

 

 

답답해서 한밤에 집을 뛰쳐나왔다. 술 취한 사람들과 사랑에 취한 젊은 연인들이 밤거리를 헤매고 있지만, 북적이지는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 자정 12시다.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잠들기 전까지 내 머릿속 시계는 아직 내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지긋지긋하고 기나긴 오늘이 계속되고 있다.
길을 걸었다. 목적지는 없다. 아니, 목적지는 있다. 집으로 돌아올 짧은 여정이다. 우선은 벗어나야 했다. 발끝만 보고 앞으로만 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대로변이 아닌 주택가 골목길 어딘가에 서 있다. 낯설고 캄캄했다. 덜컥 겁이 난다. 주택가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인적도 없다. 모두 잠들어 있는 한가운데에서, 잠들지 못하고 홀로 깨어 있는 것이 낯설었고, 한편으론 깨어 있는 사람과 마주칠까 봐 두려웠다. 여긴 벗어나야 했다. 잰걸음으로 골목길을 벗어나자 한적한 2차선 도로가 나온다. 어디까지 온 건지, 집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방향감각을 잃었다. 단 하나의 가게에서만 불빛이 새어나온다. 가로등조차 충분치 않은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밝은 그곳은 안전하고 따뜻해보였다. 
젊은 여자 혼자 지겨운 듯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저, 호원빌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여자는 친절했다. 겨우 여기가 어디쯤인지 짐작이 갔다. 거리는 가까우나 생활은 분리된 두 곳이다. 차를 타고 마트나 백화점을 가는 것이 전부여서 걸어서 이곳까지 와 본 적이 없다. 지금 집으로 가야 한다. 늦은 시간이다. 하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미안한데 몇 시까지 하나요?”
“새벽 1시까지입니다.”
“추워서 그러는데, 여기 1시까지 좀 있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그제야 가게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만화책, 비디오, DVD를 대여하는 곳이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익숙한 듯 나를 개의치 않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무섭지 않아요? 늦은 시간에 혼자 …….”
“습관이 되니까 괜찮아요. 오히려 손님이 없으면 무섭죠.”
여자는 농담이라고 한 말 같은데 웃을 수 없었다.
“늦은 시간인데 일이 늦게 끝나셨어요?”
“그냥 답답해서 집에서 나왔어요. 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기에 조금 놀랐어요. 이렇게까지 멀리 올 생각은 아니었거든요.”
“그러시네요. 낮이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밤길에 초행이라면 무서웠을 것 같네요. 골목이 좀 어두운 편이라.”
“우리 딸은 유학도 다녀오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예쁘고 똑똑한 아이예요. 부족한 게 없죠. 우리 부부는 애가 원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어요. 하나밖에 없는 딸이죠. 지금까지 우리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에요. 예쁘고 예쁜 딸인데, 남편이 딸애 뺨을 때렸어요. 너무 화가 나서. 남편이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 딸인데 ……. 딸은 붙잡을 새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죠. 나도 답답해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와 버렸죠.”
여자는 가끔 추임새를 넣기는 하지만, 이야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익숙한 것 같았다. 오늘 처음 보는 여자에게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애가 8살이나 많은 이혼남과 결혼하겠다는 거예요. 이해가 돼요? 우리 애가 뭐가 부족해서. 우리는 반대했어요. 남편은 차라리 혼자 살라고 했죠. 애를 붙잡고 애원했어요. 우리 애는 그놈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우리를 거역한 적이 없어요. 애가 변했어요. 우리 예쁜 딸이 아니에요. 남편이 그렇게 화내는 것을 평생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아이를 때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나도 모르게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뜻대로 되는 게 많지 않죠? 사랑받고 자란 착한 딸이니 따님도 정말 힘들겠어요. 부모님 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결국은 우리가 지겠죠.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딸애가 고집을 굽히지 않으면 남편도 결국 허락할 거예요. 그래서 더 답답했는지도 몰라요. 끝을 아니까. 어쨌든 우리는 딸을 사랑하니까.”
여자가 시계를 본다. 여자의 눈길을 따라간 그곳에 시곗바늘이 막 1시를 지나고 있었다. 딱 거기까지다.
“저런 끝날 때가 되었군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별소리를 다 하죠, 미안해요.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해하라든지 틀렸다고 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서 고마워요. 넋두리가 길어졌네요.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그런 일도 있더라구. 얼마나 답답했으면 처음 보는 내게 그런 이야기까지 하겠어. 주변에 말할 사람이 없었다는 거겠지. 안쓰럽기도 했어. 어느 부모가 원하는 건 다해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어. 부럽기도 했고. 그 딸은 이혼남과 결혼했을까? 본디 알았던 사람도 아니고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가끔은 궁금해.”
“그러게 말이야. 별사람이 다 있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나라면 절대 못할 거야.”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흘러가고 있다. 평일 한낮의 카페 안은 너무 조용해서, 등 뒤에서 친구인 듯 보이는 두 여자의 대화가 또렷이 들렸다. 그 이야기는 언젠가를 기억나게 했다. 딸은 어제 결혼식이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대화내용은 내 이야기였다.
여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나도 그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여자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등지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발가벗고 있는 듯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보지 못할 거라는 전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얘기였다. 한번 뱉어진 말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된다. 그 속에 내가 없고, 그 누군가를 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는 알아서 흘러간다. 그렇게 내 아픔은 통속적인 얘깃거리가 된다. 더는 특별하지 않다. 이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 다시는. 기막힌 우연을 기막히게 만나게 되면 두 번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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