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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흰색 |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2012. 10. 10.

 

   

 

작은 흰색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1866-1944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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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는 남의 지갑 안에 있던 오만 원권 10장에서 시작되었다. 은밀하고도 소란스럽게 진행된 음흉한 하루였다.
놀이공원 화장실에서 영하가 지갑을 주웠다. 소매치기라면 돈만 빼고 지갑을 휴지통에 버리기 마련인데, 그 지갑에는 신분증이나 신용카드는 없고 오히려 현금 50만 원만 들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영하는 한창 놀이기구 타고 있는 우리 넷을 불러 모아, 노래방이나 가자고 했다. 나머지는 이제 왔는데 무슨 소리냐며 더 놀기를 원했지만, 영하는 막무가내였다. 투덜대며 영하를 따라 노래방에 앉아 노래를 고르려고 하는데 영하가 지갑을 꺼냈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야, 이게 뭐야?”
 준상이가 가장 먼저 지갑을 열고 안에 든 돈을 확인하면서 영하의 대답을 다그쳤다.
“화장실에서 주웠어.”
“야, 그러면 주인을 찾아줘야지. 이걸 여기 가져오면 어떡해! 놀이공원에는 분실물 처리하는 곳이 있을 텐데.”
착해서라기보다는 겁이 많은 나는 기겁을 하며 영하에게 항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공범이 된 기분이었다. 영하가 노래방까지 그 지갑을 가져온 의도는 너무나 분명했다.
“도대체 얼만데?”
민준이 금액의 많고 적음을 보고 그의 행동을 결정하겠다는 듯이 금액을 물었다. 나는 조마조마했다. 지갑을 습득한 현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주운 사람이 아니라 훔친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내가 주운 것도 아닌데 훔친 사람에는 나도 포함되어 버렸다.
“와, 기가 막히네. 딱 50만 원이야. 우리가 다섯인 줄 어떻게 알고 말이야.”
준상이가 돈을 다 세고 오만 원권 10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고등학생에게 50만 원은 큰돈이었지만 오만 원권 10장은 그 가치가 느껴질 정도의 부피를 가지지 못했다. 죄책감도 훨씬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한편으로는 눈을 피하면서 각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난 더럭 겁이 났다. 금방이라도 노래방 문을 벌컥 열고는 형사들이 들이닥쳐 우리에게 쇠고랑을 채우고 끌고 나가는 환각이 보였다. 부모님이 경찰서에서 울고불고 난리고 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무서워서 벌벌 떠는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친구 넷의 얼굴이 보였다.
“야, 우리 이러지 말고, 분실물센터에 가져다주자. 아니면 원래 있었던 장소에 다시 가져다 놓던지.”
“야, 그게 얼마나 된다고 그래. 우리한테나 큰돈이지, 어른들은 이 정도는 찾지도 않아. 하룻밤 술값이란 말이야. 그리고 거기 가져다준다고 주인이 찾아간다는 보장도 없고. 원래 있던 장소? 그건 더 말도 안 되지. 그거야말로 다른 사람 좋은 일만 하는 거잖아. 그냥 10만 원씩 나눠 갖고 말자.”
잠자코 상황만 지켜보고 있던 성일이가, 모든 상황을 한칼에 정리하듯이, 생각은 있지만 누구도 먼저 꺼내지 못한 말을 우리에게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 돈이 아니잖아.”
“거참, 말귀 못 알아듣네. 50만원 찾아 줬다고 고맙다는 소리나 들을 줄 알아. 평일에 놀이공원에 올 어른이면 어려운 사람도 아냐. 봐, 지갑도 좋은 거잖아.”
어려운 사람이 아니면 괜찮다는 듯이 준상이가 성일이를 거들었다. 나머지 셋 표정도 성일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꾸 성가시게 구는 것이 못마땅한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 나쁜 일인데 …….”
“야, 너만 정직하고 착하냐? 별일도 아냐. 나눠 가지면 10만 원이야. 뭐 그리 죽을죄나 진 것처럼 그래. 짜증 나게.”
민준이 얼굴에는 정말 짜증이 묻어났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내가 자꾸 뭔가 대단한 나쁜 짓인 것처럼 꾸미고 있다는 듯이.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자, 여기 두 장씩.”
성일이가 다 귀찮다는 듯이 오만 원권 두 장씩을 나머지 넷 앞에 놓고, 나머지 두 장을 자기 호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난 빠질래. 난 싫어. 이런 거.”
모두 나를 죽이기라도 할 기세로 나를 흘겨보았고, 민준이는 내 멱살까지 잡았다.
“이 자식아, 그래, 너 잘 났다. 우린 친구잖아. 정확하게 나누는데 너만 빠진다는 게 말이 돼?”
그나마 성일이는 나를 달래볼 심산이다.
“그러지 마라. 우리 이런 일로 싸우지 말자. 모두가 아니면 안 돼. 죄책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정확하게 5분의 일씩 나누는 거야. 돈뿐만 아니라. 여기 두고 간다.”
모두 제 앞에 놓인 10만 원과 다섯 등분된 죄책감을 지닌 채 노래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내 겁먹은 정의는 10만 원을 주머니에 넣을 용기를 내지 못했고, 가벼워져야 할 죄책감과 두려움은 다섯 배는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스스로 한없이 못나 보이기까지 했다.
모두가 검다면 그 속에 있는 작은 흰색은 흰색이 아니라 얼룩이 된다. 깨끗이 없애버려야 하는. 깨끗하다는 것이 한 점 얼룩 없는 까만색으로 규정되어버린 세상과의 첫 만남이었다.
노래방을 나섰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왔더니 눈이 부셨다.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다시 밝은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길을 걸었다. 걸을 때마다 주머니 속 오만 원권 두 장이 자꾸 손끝에 걸린다.

“딱 오만 원권 10장, 우리 다섯, 우연치곤 너무 우연스럽지가 않잖아. 꼭 누가 모든 상황을 알고 딱 알맞게 판을 꾸민 것 같지. 넌 지갑만 던져 놓고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았어. 우리끼리 티격태격하다가 결론이 나니까 할 수 없이 결과에 따른다는 듯이 돈만 챙겼어. 신분증 하나 없는 돈만 있는 지갑 이상하잖아. 보통은 그 반대 아냐. 그냥 공평하게 나머지 금액의 반만 줘. 나머지 애들이 의심하면 더 곤란하잖아. 정민이 같은 애는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일러바칠지도 몰라. 워낙 겁쟁이니.”
성일이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고, 영하는 은밀히 돈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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