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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2012. 10. 13.

 

 

  

 

생일, Birthday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관련 링크

MoMA          http://bit.ly/TuhUaW

위키백과       http://bit.ly/TufuZO

wikipedia      http://bit.ly/TufxoC

 

 

남자나이 사십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여자나이 삼십이 되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아야 한다.
지는 가을과 뜨는 겨울 사이에는 수많은 조급한 연인들이 있다.
…… 여러분의 축복 속에서 첫발을 내딛는 ……
회사 게시판에 붙은 청첩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지없이 날아드는 질문이 있다.
"어, 근데 박정남 씨는 언제 국수 먹여줄 거야?"
언제나 그랬듯이 정남은 그냥 살짝 웃어넘긴다.
가끔은 그런 질문을 할 정도의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엉뚱한 사람에게서도 비슷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언제 봤다고?
같은 질문을 계속 받게 되면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답을 찾아야 한다. 이해할만한 답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질문을 해댄다. 정남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습관적인 인사치레랄까. 요즘 정남은 다른 이들이 이해할만한 보편타당한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비록 그것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 변명거리.
정남은 치밀한 계산으로 일을 처리했다.
우선, 그녀의 각본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할 조연이 하나 필요했다. 회사 내의 소식통인 떠버리 정 대리를 점찍었다. 활달함이 지나쳐 경박스러움에 가까운 정 대리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회사의 중요 경영정보에서부터 비밀리에 데이트를 즐기는 사내 커플에 대한 정보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다.
만약 당신이 회사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이건 비밀인데,’라는 전제를 붙이고 정 대리에게 얘기해주면 된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한 번 입 밖으로 뱉어진 말은 더는 비밀이 아니다. 하물며 정 대리에게서 비밀이 지켜지길 원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늘이 도왔는지, 정 대리와는 퇴근길도 같은 방향이라 정남은 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정 대리님, 오늘 술 한 잔 사주실래요?"
물론 정 대리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흔쾌히 포장마차에 들어섰다. 마침 내리는 가을비가 분위기를 한층 더해준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정남은 정 대리 앞에서 소주 두 잔을 들이켰다.
"어이, 정남 씨 술도 못하면서, 왜 이리 급해. 무슨 일 있어?"
정남은 취한 척 슬쩍 이야기를 흘린다.
"정 대리님, 오늘 우울한 소식을 들었거든요."
정남은 술잔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계획대로 밀고 나갔다.
"정 대리님도 제가 왜 결혼을 안 하는지 궁금하시죠? 사실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이 있었어요."
정 대리의 두 귀가 쫑긋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늘 그 사람이 떠났어요. 이제는 내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라네요. 그는 아주 오래전에 떠났는데 아마 제가 계속 기다렸나   봐요. 그가 영원히 떠나버리자 그동안 제가 기다렸다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왜 헤어졌는데?"
"웃기죠? 그게 절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래요. 그걸 알게 된 것도 며칠 안 돼요."
‘아냐, 이건 아냐. 너무 유치하고 흔한 얘기잖아. 자, 잘 생각해보자고.'
"그는 암이었대요. 헤어질 때 스물여덟이었으니까, 정말 아까운 나이죠. 근데,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만 만나자고 했어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그냥 인연이 아니니 끝내자고 그러더라고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죠."
‘너무 감상적으로 빠지지 말고. 여기서 한 박자 죽여야겠지!'
정남은 또 한 잔을 들이켰다.
"얼마 전에 동창을 만났어요. 그 애 남편이 그 사람 친구거든요. 친구가 그러더군요. 그 사람이 죽었다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사랑한 사람은 저밖에 없었다고 했대요. 정말, 우울한 얘기죠? 제가 왜 이리 슬픈지 아시겠어요?"
정남은 자신의 각본으로 훌륭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자신이 자랑스러울 정도였으니까.
"그는 왜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절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지만, 속으로는 제 사랑을 못 믿은 것은 아닐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걸 알았다면 그의 마지막까지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왜 이제야 그 소식을 제게 전했을까요? 왜 이리 마음이 복잡한 줄 모르겠어요."
가을비가 굵어지자 포장마차 주인은 빗방울 무게로 쳐지는 천막 지붕에서 빗물을 쏟아버리기 위해 기다란 막대기로 지붕을 쑤셔댄다. 참으로 둔감한 양반이다. 세상 사람들이 저렇게 둔감할 수 있다면 정남의 이런 웃긴 짓거리는 필요 없을 텐데.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은 거짓말일 뿐이죠. 그가 아무 이유도 없이 헤어지자고 한 이후 3년여 동안 그 사람을 미워하며 살았고, 앞으로의 세월동안은 죄책감을 지닌 채 살아가야겠죠. 이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짓입니까?"
옆에서 정대리도 술잔을 우울하게 비우고 있었다.
이제 결론만 남았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더 큰 아픔일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할까요. 그는 날 믿지 못했어요.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부담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도 그때 진실을 얘기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혹시 알아요. 그의 마지막 순간에 제가 옆에 있었을지도. 그는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죠. 그는 나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상처받기 싫었던 겁니다. 정 대리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정말 좋은 말이군. 어떻게 내가 이런 말을.’
정남은 말을 마치고 흘낏 정 대리를 쳐다봤다. 뜻밖에 정 대리는 많이 취해있었다.
‘설마 못 들은 건 아니겠지.’
다음날.
정남은 흐뭇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정말 나쁜 사람이거나 앞뒤를 잴 줄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라면, 비록 뒤에서 수군거릴지언정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아픔을 건드리려 하지 않는다. 정남은 이걸 노린 것이다. 뒤에서 수군거림은 참을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이 의도 한 바라면, 웃어 넘길만한 여유로움도 준비하고 있었다.
근데 어찌 된 일인지 정 대리가 조용하다. 유난히 열심히 일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전혀 수군거리는 기미가 없다.
‘도대체, 정 대리는 뭐하는 거야. 내 얘기가 그렇게 슬펐나? 아니면, 감동이라도 한 건가? 그래도 저럴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정남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번 연극에서 얻은 건 못 먹는 술을 먹는 바람에 생긴 위장병과 어색하게 웃어넘겨야 하는 계속되는 질문들뿐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건 정 대리의 사표뿐이었다.
‘젠장, 사람 잘못 봤네.’
정 대리의 부재는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갔다.

1년 후, 그맘때 가을!
정남은 낯선 청첩장을 한 통 받았다. 이름만 보고 그 주인공이 정 대리라는 것을 알아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정 대리는 관심 밖의 사람이었다. 대강 눈치를 보건대, 정 대리는 정남에게만 그의 결혼을 알린 것 같았다.
정남은 지난 가을 그녀의 헛된 노력에 대한 씁쓸함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녀 또한, 여느 보통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호기심에 가득 차서 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정 대리는 정남을 보자,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정남 씨!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정남 씨! 정말 고마워요. 정남 씨 덕분에 오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어요."
정남은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정남 씨가 했던 말 생각나요? 사랑한다면 기회를 줘야 한다는. 난 이제 사랑할 기회를 얻었어요. 우리는 정남씨 덕분에 다시 태어났어요. 정말 행복해요!"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정남은 무슨 말인지 더 묻고 싶었지만,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에 따라 정 대리는 식장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신부 입장!"
정남은 그제야 정 대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는 정 대리의 팔에 안겨 입장하고 있었다. 주례 앞에는 신부를 위한 아름다운 의자가 놓여 있었다. 몸이 불편해서 그를 떠났던 신부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모양이다. 정남은, 그날 다시 태어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랑을 보았다. 정남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랑의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이 가을에 사람들이 귀찮다고 섣부른 거짓말을 해대기보다는,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아주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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