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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비너스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2012. 9. 10.

 

   

 

두 비너스, DUE VENERE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관련 링크

네이캐스트   http://bit.ly/PhnvQR

위키백과      http://bit.ly/PhntbX

wikipedia     http://bit.ly/Phna0K

 

 

“유방암 2기입니다. 절제수술을 해야 합니다.”
의사는 병증과 치료과정과 수술일정, 심리적 안정 등 여러 사안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하나도 제대로 들리질 않는다. 암이라는 단어와 가슴을 잘라내야 한다는 소리만 귓가에 멍멍대고 있을 뿐인데, 의사는 눈앞에서 계속 뻐끔거리고 있다.
“저, 선생님, 다시 오겠습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이 …….”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보호자도 함께 오세요.”
보호자? 결혼도 하지 않은 중년의 여자에게 누가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보호자가 누가 있지? 가족과 친구 한둘 정도의 인간관계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보호를 부탁해야 하는 적절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부터 혼자였다는 듯이 내 주위에서 모두 사라지고 없다.
병원 문을 나서자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다. 추위는 느껴지는데 찬바람이 오히려 상쾌하다. 숨통을 틔워 준다. 병원 문을 나서기까지 암이 아니라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더불어 생각도 막혀버렸다.
꽤 오랫동안 병원 앞 버스정류장에 앉아, 집으로 데려다 줄 버스 몇 대를 그냥 보내버렸다. 집에 갈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어디에도 안식처가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었다.  
의사가 뭐라고 했더라. 수술하면 살 수 있는 건가? 얼마나 살 수 있는 거지? 가슴을 잘라낸다고? 보기 흉하겠지? 결혼은 다했군. 애를 낳아도 젖을 물릴 수는 없겠어. 사우나는 갈 수 있나? 복원수술을 하면 감쪽같을까? 후후.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사우나 갈 걱정이나 하는 자신이 너무 웃겼다. 눈물이 나와야 하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 앉은 이가 미친 여자 보듯이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개의치 않았다. 미쳐버렸으면 했다. 그러면 행복할까?
“저,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릴까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털모자를 쓰고 폭신한 머플러에 폭 파묻힌 채 눈만 빼꼼 내놓고 있는 핼쑥한 얼굴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30대 초반 정도, 파리한 얼굴의 그녀는 언뜻 봐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여자였다. 초면의 여자를 따라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아메리카노 한 잔만 주문했다.
“커피를 끊었어요. 커피 향만으로도 충분해요. 향이 따뜻하다는 거 알아요? 커피를 참 좋아했는데, 요즘은 향에 만족하려고 해요. 어쩔 수 없으니까요.”   
여자는 대화할 생각은 없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기 얘기만 했다. 여자도 유방암 수술을 했다고 한다.
“수술하고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병행하고 있어요. 뭐 그렇게 불쌍하게 볼 필요는 ……. 이제 많이 익숙해졌어요. 의사 말로는 나아지고 있다고 해요. 꽤 희망적이잖아요.”
여자는 이미 내 처지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처음 진단을 받으면 왜냐고 묻죠.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구에게도 이유가 없지만, 누군가는 이 병을 선고받아요. 모두가 당신만큼이나 선량하게 살았답니다. 암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무섭잖아요. 죽음과 동일시되니까. 암은 천벌이 아니에요. 물론 축복도 아니지만요. 병 또한 삶이죠. 요즘은 죽음조차 삶이라는 생각을 종종 해요. 모든 인간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죠. 다만, 우리는 그걸 알고 있고, 다른 이들은 그걸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유리한 면이 있어요. 우리는 적어도 알고 있고 대비하고 있으니까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도 커피 향을 들이켰다.
“가슴을 잘라낸다는 것이 충격적이긴 했어요. 여성의 상징이니까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성(性)이 되어 버리는 느낌이랄까. 남자친구와도 헤어졌어요.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헤어지자고 했죠. 자꾸 움츠러들고 당당하지 못한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병을 가지면 짐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건강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지레 겁먹고 도망쳤어요. 못난 행동이죠. 사랑이란 건 짐을 질 생각도, 짐이 될 생각도 해야 해요. 짐이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짐을 질 생각도 없다는 것이니까. 당신은 어때요.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가 당신에게 짐이 될 때 짐을 질 준비가 되어 있나요?”
그래서였나? 그래서 가족에게 알리지 못한 걸까?
“유방암 생존율은 다른 암에 비해 나은 편이에요. 초기에 발견하면 5년 이상 생존율이 90%가 넘는다고 해요. 요즘 같은 발전추세면 5년 뒤면 또 다른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죠. 한번 진단을 받으면 지속적이고 치열한 관리와 치료가 필요해요.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병은 친구로 생각하고 평생 함께 가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 누구나 신경통 하나쯤은 가지게 마련이듯이, 우리에겐 조금 사나운 친구가 조금 일찍 찾아온 겁니다. 함께 투병하는 모임에서 서로에게 해주는 말이죠. 적어도 삶이 지루하진 않을 겁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치받으면서 살아야 해요.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될 준비가 되면 다시 사랑도 할 수 있을지 모르죠. 모든 건 열려 있습니다.”
그녀는 머플러를 다시 목에 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나를 병원 문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들어가 봐요. 필요한 것을 듣고, 필요한 사람에게 연락하고, 필요한 결정을 해요.”
병원을 막 들어서려다, 돌아서서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
“정말 시간이 지나면 당신처럼 관조하며 병과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요?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뇨. 그럴 순 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한 얘기는 내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입니다. 나는 항상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을 붙잡고 이렇게 말해요. 당신에게 희망이 되길 바라며, 더불어 나도 희망을 품고 싶어서. 말을 하면 할수록 나도 믿게 됩니다. 쉽게 이해하긴 힘들어도, 크게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믿음이 필요해요. 이해를 넘어서는 믿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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