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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수용소군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찐

2015. 11. 7.

 

수용소군도
국내도서
저자 : 알렉산드르 이자에비치 솔제니친(Aleksandr Isaevich Solzhenitsin) / 김학수역
출판 : 열린책들 200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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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찐이 [문학적 탐구의 한 실험]이라 부른 2천여 페이지의 [수용소군도]는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쓰이기 시작해 외국에서 완성되었다. 이 소설은 1926년부터 1946년까지의 거대한 숙청의 흐름을 오비 강, 볼가 강, 예니세이 강, 세 대하(大河)에 비유한 고백적 다큐멘터리이며, 기아와 고문과 폭력에 시달리며 사막이나 극지방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던 수백만 사람들이 겪은 혹독한 탄압에 대한 연대기이다.

- 출판사 서평

 

조지 오웰의 <1984>는 충격적이었다. 솔제니찐의 <수용소군도>는 조지 오웰의 소설의 모티브가 현실에 존재했다는 면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그래선 안 돼! 과거를 들추면 안 돼! <과거를 기억하는 자는 한쪽 눈이 빠져 버린다>는 속담이 있지 않느냐 말야. 그러나 이 속담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과거를 잊는 자는 양쪽 눈을 다 잃는다!>고.


그래서 어느 미래의 세기에는 그 군도, 그 공기 그리고 결빙체로 냉동된 그 주민들의 뼈들이 후손들 앞에 진실과는 거리가 먼 도마뱀으로 둔갑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행히도 <군도>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와 많은 편지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그러한 뼈와 살로 뭔가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살, 아직도 살아 숨쉬는 도마뱀으로.


고통받고 학살당한 모든 이들에 대한 우리 모두의 우정의 기념비.

 

 

제1부 감옥기업

 

제1장 체포

 

수많은 생물이 우주에 살고 있지만, 이 우주에는 생물의 수효만큼의 중심이 있다. 우리 모두도 각자가 우주의 중심이다.
그러나 <당신은 체포되었소!>라고 속삭이는 음성을 들었을 때, 당신의 그 우주는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내가? 무엇 때문에?


<나를? 무엇 때문에?>
체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것은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이며 타격이다. 이것을 당하는 순간 현재는 갑자기 과거로 변하고 불가능은 합법적인 현실로 탈바꿈한다.


체포라고 하는 전통적인 관념, 심지어 문학적인 관념으로까지 된 그 모든 일은 이미 당신의 혼란한 머리에는 기억될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의 가족이나 이웃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축적되고 형성되게 마련이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거기서 다 먹여 주고 거긴 따스하단 말이야!> (언제나 거짓말뿐이다. 그들이 서두르는 것은 공포를 주기 위해서이다.)


이 모든 것을 지식 계급의 입으로 표현하자면 아직도 한이 없겠으나, 일반 민중은 수색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들은 거기에 없는 것을 찾아 헤맨다>고.


그것은 언제나 깨끗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또 참으로 놀라운 것은 체포되는 순간 피해자 자신들은 자기의 파멸을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비밀경찰에 순응하며 되도록 점잖게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유죄 선고를 받은 어머니와 면회가 허가된다면 이것은 곧 대질 신문인 동시에 체포를 뜻하는 것이다.


체포는 가끔 장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들은 체포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궁리를 하며 배부른 정력을 쏟는다.


수십 년에 걸쳐 우리 나라에 있었던 정치범들의 체포는 하나같이 모두 아무 죄도 없이 잡혀갔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저항도 시도해 보지 못한 채 끌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GPU와 NKVD(내무 인민 위원부)의 마수를 피할 수 없다는 피해자의 통속적인 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전혀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라면 역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오라기 같은 희망에 기대를 건다. 너에게 죄가 없는 이상, 무엇 때문에 너를 잡아가겠는가?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일 거다!> 목덜미를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다짐을 한다.
<이것은 잘못된 거다! 조사해서 무죄가 드러나면 석방해 줄 것이다.>


아무것도 없고 또 아무것도 발견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은 그녀의 일기에 손을 댔다. - 중략 -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개인 감정과 애착이 체포에 의해서 타격을 입을 때 야기되는 그 공포는 감옥이나 정치 이념의 공포보다 훨씬 더 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압제에 대하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압제자보다 약한 입장에 서게 마련이다.


가끔 사람들은 체포를 당함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덜기도 하고 심지어 <기쁨>을 느끼기까지 한다.


1924년, 사회혁명당원 예까제리나 올리츠까야라는 여자는 자기 같은 건 투옥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훌륭한 사람들은 모두 감옥을 거쳐 갔지만, 그녀는 아직도 젊은 데다가 러시아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자유의 몸>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그녀는 긍지와 기쁨을 가지고 감옥으로 향했던 것이다.


<저항을! 당신들은 저항을 해야 했단 말이오!>
무사히 체포를 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감옥에서 고생한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나무란다.
그렇다. 저항은 체포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왜 자기가 희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해서 항상 그럴듯한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게 마련이다.


아무 관련도 없는 온순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구호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제2장 숙청의 흐름

 

(1929-1930 농민 강제 이주)
농민들이란 원래 말을 할 줄도, 글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아무런 호소문도, 아무런 회상록도 남기지 못했다.

- 중략 -
기억력이 왕성한 사람들조차도 이 흐름은 또한 러시아인의 야심에 상처를 남긴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사실 스딸린이(그리고 나나 당신이) 저지른 죄 중에서도 이보다 더 무거운 죄는 달리 없을 것이다.


1937년의 흐름은 상당한 사회적 지위에 있던 사람들, 당원이었던 사람과 지식인 등을 휩쓸어 <군도>로 떠내려 보냈다. - 중략 -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1937년의 참상을 글로 쓰기도 하고 이야기하기도 한고 회상에 잠기기도 한다. 1937년이야말로 전 국민적 비극의 볼가 강이었다고!


독재 정권의 최초의 탄압은 입헌 민주당원들에게 가해졌다.(입헌 민주당원들은 제정 러시아 시대엔 가장 위험한 혁명의 전염병 균이었고 프롤레타리아의 집권하에선 가장 위험한 반동의 병균이었다.)


이것(볼셰비끼 이외의 모든 당파의 사회주의자를 숙청하는 작전)은 상대도 없이 조용히 하는 복잡한 카드놀이와 흡사해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그 규칙을 전혀 알 길 없었고, 지금에 와서야 그 윤곽을 간신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는 일반 신자들, 노인들과 부녀자들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특히 부녀자들은 끝까지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에 유형지나 수용소에서는 오랫동안 <수녀님>이란 별명으로 통했다.
하기는 그들이 처형된 것은 신앙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 자기들의 신념을 공공연히 말하고 아이들에게 그런 정신으로 교육시켰기 때문이라는 편이 옳을는지 모른다.


네가 기도하는 것은 <자유>지만
오직 하느님 혼자만이 들을 수 있도록.


일단 붙잡히면 되돌아올 길은 없었다. <혁명의 파수병>에겐 과오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개인적으로 아무 죄도 없다는 걸 믿고 있소. 그러나 당신이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광범위한 《사회적 예방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거요.


쓸모없는 동반자 격인 썩어 빠진 인텔리들.


슬로건은 이렇다. - <온 세상이 공포에 떨도록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자!>


지금까지 체포되는 자의 수효는 전적으로 SLON, 즉 솔로브끼 특별 수용소의 규모에 따라 제한되어 있다.


새로운 맛을 보게 되면 새로운 식욕이 나게 마련이다. 당국의 지시에 재빨리 호응할 줄 모르는,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필요 불가결의 존재로 인정하고 있는 기술계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에 혁명 전에 학교를 나온 기술자 중에 아직도 배신자로 낙인 찍히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우선적으로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민중의 신중한 지혜를 나타내는 옛 속담 - <조용히 하는 자가 멀리 간다.>


일단 끄나풀이 될 것을 요구 받은 이상 그것을 어떻게 회피할 수 있겠는가? <손에 칼을 든 자에겐 당할 수가 없다>, <내가 아니면 다른 놈이 할 것이다>, <다른 나쁜 사람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좋은 사람이 내가 되는 편이 낫다>.


재판에 끌려 나오는 것은 투옥된 사람들 중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관대한 처분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하에 터무니없는 죄목을 자기 자신과 동료에게 들씌우는 데 동의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치에 맞지 않는 심리를 거부할 용기와 이성을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기사들은 비밀리에 재판을 받았다.


바로 이 시기에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즉 배수 공사에 전체 인민을 참가시켜 책임을 다 함께 나누어 지자는 것이었다. - 중략 - 이만저만한 선견지명이 아니다! 10년, 20년이 지나 역사가 바로잡히는 날이 오더라도, 유독 신문관과 판사, 검사들만이 우리 일반 국민보다 더 나빴다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건과 비밀리에 처리된 사건과의 비례가 어떻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희생자들의 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밀의 장막 속에 사라져 갔겠는가?


누구에게나 자기 차례가 있는 법이다.


1929년 말부터 저 유명한 <금 열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열병에 고통당하는 것은 금을 찾는 자가 아니라, 금을 몰수 당하는 자이다.


감방에 짠 음식만 들여보내고 물을 안 주는 방법이다. 금을 내놓는 자는 물을 마실 수 있다! 1-루블 금화 한 닢에 맹물 한 잔!


사람들은 금속 때문에 멸망해 간다.


가뭄도 전쟁도 없는 괴이한 흉년이 3년이나 계속되어…


그들(농민들)은 꼴호즈(집단농장)의 집단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아직 제 눈으로 보기도 전에 그것이 게으름뱅이의 지배하에 강제 노동과 굶주림만을 가져다줄 것이라 예견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우리 형법은 <의도>와 <범죄> 자체를 구분하지 않는다. 여기에 부르주아적 법률에 대한 소련 법률 제도의 <우월성>이 있는 것이다.


제58조 중에서 제10항만큼 혁명적 양심을 불태우면서 무한정으로 확대 해석된 항목은 없었다. <소비에뜨 정권을 전복, 와해, 약화하려는 목적을 내포하는 선전 및 선동…… 또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문서의 작성 및 보관> - 이것이 제10항의 골자이다.


<강화하지 않는> 모든 것은 <약화>를 의미하며, 완전히 <일치되지 않는>모든 것은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법이 있는 곳에 범죄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어느 주를 막론하고 주 당 제1서기와 주 집행 위원회 위원장이 끝까지 무사히 남아 있었던 곳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딸린은 보다 더 자기 마음에 드는 자들을 그 자리에 올려 앉히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일 먼저 박수를 멈추는 것만은 하지 마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 우리는 어떻게 박수를 멈추란 말인가?)


그 당시 투옥의 참다운 법칙은 <인원수의 할당>, 기준량(노르마)에 따른 계획 배분이었다.


스베르드로프스끄에서는 주 교육부의 부장 뻬렐리를 위시하여 서른 명의 중학교 교사를 잡아들여, 그들이 <학교를 불사르기 위해> 자작나무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영원히 배부를 줄 모르는 <군도>


전국 범죄 사건을 보면 이상하게도 항상 같은 종류의 사건만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온 나라가 강간 사건만이 일어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살인 사건만이, 또 어떤 때는 밀주 양조 사건만이 나타난다. 언제나 가장 최근의 공포된 법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모든 범죄를 한시바삐 없애려고 자진해서 법령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제3장 신문

 

그들의 끊임없는 활동은 <기관>의 존재 가치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비밀경찰의 첫 질문은 이러했다. <무슨 일로 잡혀 왔소?> 즉 피의자 스스로 그 이유를 말하게 함으로써 기관원들의 사건 날조를 도우라는 뜻이다.


<기관은 절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전통이 확립된 것이다.


심리를 위해 부여된 시간은 범죄의 규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1백 건 중 아흔다섯 건까지가 피고를 지치게 하고 녹초를 만들어, 죽어도 좋으니 한시바삐 끝장을 내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중세의 사형 집행인들처럼 우리 나라의 신문관, 검사, 재판관들은 주로 피고 자신의 자백 속에서 죄의 증거를 찾는 데 동의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유인으로 있다가 방금 체포되어 들어온 사람은 아직도 내적인 흥분에 들떠 있어서 자기 자신을 해명하고 싶어 하고 따지고 싶어하고 싸우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이 감옥의 첫걸음에서 맞닥뜨리는 곳은 상자와 같은 조그만 칸막이 별실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들을 책망하지 말아 다오. - 맥없이 끌려간 사람들, 용감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리고 강요에 못 이겨 서명을 한 사람들을…. 제발 그들을 비난하진 말아 다오.


거짓말을 하려면 진실에 가까워야 한다. - 러시아 속담


그는 의무적으로 모든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 때문에 그는 죄를 뒤집어쓴다. 아무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진실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어느 교육, 어느 교양, 어느 실험도 가장 커다란 인생의 시련이랄 수 있는 체포(아무 죄도 없이 잡혀가는)나 신문(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를 않는다.


삼대양 저 너머 어딘가에서는 피고가 변호사의 도움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즉, 투쟁의 가장 괴로운 순간에 모든 법률을 통달하고 있는 빛나는 지혜를 자기 옆에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나라의 신문은 피고로 하여금 법률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죄수를 혼자 격리시켜 두는 방법! 이곳부터가 부정 신문의 성공적인 요인이다.


<기관들>은 그의 미래를 체념시키고 그의 현실을 왜곡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기운이 쇠진해서 제발 조서를 읽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기도 한다. 그저 한시바삐 서명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자신들도 죄가 있어요. 우린 너무나 연약했어요. 이런 타락이 나라에 만연되고 있으니.


정부에서 일했던 대부분의 고관들은 자기 자신이 투옥되는 바로 그 순간까지 무자비하게 다른 사람을 투옥시켰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픔에 민감하고 연약한,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뒤에 남기고 온, 아무 경험도 없는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이 난관을 버텨 나가야 하는가?
- 중략 -
자기 뒤에 남겨 두고 온 따스한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도 미련을 갖지 말고, 감옥으로 들어가야 한다.


모든 것을 체념하는 자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


이런 추억들이 나에게 후회의 고뇌를 안겨 주지 않는 것은, 다행히도 나는 다른 사람을 아무도 감옥에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이 건물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색과 노작들이 파멸되었을까! - 완전히 파멸된 문화! 아, 그을음, 루비얀까 굴뚝의 그을음이여! 나중에 우리 후손들이 우리 세대의 실정을 모르고 우리를 우둔하고 무능하고 비겁했다고 평가할 생각을 하니 더욱더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직선을 그으려면 그저 두 점만을 정하면 충분하다.


1920년 에렌부르그는 비상 위원회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고 회상하고 있다 - <당신이 브란겔리의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입증하십시오.>


<기관>은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키고 만 것이다!


한 구석의 의자에 앉혀진 죄수는 적대적인 <의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스스로> 찾아내어 게으른 신문관 앞에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러한 사실을 찾아내지 못하면(그런 것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자기 죄를 입증하는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국가 체제는 불신과 융통성 없는 고질로 해서 자기 자신을 벌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신문은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할 수 없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우리는 <자유의 척도>를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를 판가름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우리 민족은 <아시아>적이다.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비폭로에 관한 이 끝없는 서명을 우리에게서 받아 내고 있다.
우리는 이미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제4장 푸른 제모

 

이 거대한 <야간 시설>의 톱니바퀴 사이를 지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 육체는 부랑자의 누더기처럼 축 늘어져서, 우리는 너무나도 괴롭고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창백한 밤의 <사형 집행인>의 얼굴을 예언자와 같은 투시력있는 눈길을 바라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한 번 투옥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신문 과정을 - 그들이 어떻게 자기를 괴롭히고 어떻게 쥐어짰는가를 상세히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신문관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을뿐더러, 가끔 그 이름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중략 -
한 가지 우리에게 공통된 확실한 추억이 있다면, 그것은 남김없이 죄다 썩어 문드러진 무서운 공간이 있을 뿐이다. - 중략 - 그들은 저열하기 이를 데 없는 타인의 괴로움을 기뻐하는 악마와 같은 사악한 인간들, 아니 어쩌면 길을 잘못 든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확고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령의 정확한 수행 능력과 고통받는 자에 대한 무자비함뿐이다. 그들은 바로 이런 인간들이고, 또 그것이 그들에게는 어울리는 것이다. 그들의 손을 거쳐 온 우리는 인간의 공통적인 면모를 완전히 상실한 그들의 손을 거쳐 온 우리는 인간의 공통적인 면모를 완전히 상실한 그들의 본질만을 숨막히게 느낄 뿐이다.


신문관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모든 사건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러 해 동안 그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걸까(이것은 이미 인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아니면 그저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걸까 - 지령을 내리는 인간에겐 절대로 과오란 있을 수 없으니까. - 중략 -
어쩌면 그것이 진보적 학설이요, 바윗돌 같은 이데올로기인지도 모른다.


신문이나 재판 같은 건 단지 법적인 형식에 불과한 거야. 그런 것이 <미리부터 예정된> 너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어.


사람만 있으면 <사건>이야 만들어 내는 거지.


그들이 모두 기를 쓰고 달리고 있는 이 경주는 진실을 위한 경주가 아니라 죄수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경주인 것이다. 그들이 전체적인 흐름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숫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 중략 - 왜냐하면 스딸린은 그곳이 어디건 간에, 도시에서도 부대에서도 자기의 적이 갑자기 없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직업 선택과 활동의 종류에 따라 인간 생활의 <상부>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푸른 기관> 근무자들은 하부 세계에서 더욱더 탐욕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을 지배하고 그들을 이끄는 것은 하부 세계의 가장 강한(식욕과 성욕 이외의) 본능적 욕망, 즉 <권력>에 대한 욕망과 <재물>에 대한 욕망이었다.


권력 - 그것은 독이다.


상부 세계를 상실한 자에게는 권력도 그야말로 죽음의 독이다. 이 독에 일단 감염되기만 하면 이미 구원의 길은 없는 것이다.


너(푸른 제모)는 - 존재한다. 모두들 너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너의 존재를 모르는 것같이 행동해야 한다.


이 기관은 촌충이 인간의 내부에 기생하고 있듯이, 국가 속에 그것과 일체가 되어 살아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저건 사람이 아니니까.


왕성한 물욕은 그들의 공통된 욕망이다.


체포괸 사람 중의 4분의 3 가량은 순전히 인간의 탐욕과 복수심 때문에(그중의 반수는 지방 내무 인민 위원부와 검찰의 물욕 때문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일단 <흐름> 속에 말려들기 시작하면 국가 안전 위원회의 앞잡이들도 그 고난의 길에서 좀처럼 헤어날 길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흐름은 불가항력적인 자연현상이어서 <기관> 자체의 힘보다도 오히려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흐름은 기관들의 <혁신>이라는 그 어떤 신비적인 법칙에 따라 발생하곤 했다. 남아 있는 자가 정화된 듯이 보이기 위해 <혁신>에는 반드시 주기적인 소수의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정의의 백색 망토를 치켜들 필요도 없이, 각자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자.
<만약 나의 인생이 다른 길을 걸었다면 나도 그런 사형 집행인이 되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하자면, 이것은 무서운 질문이다.


그것은 머리에서 짜낸 어떤 저항이 아니라, 가슴 한구석에서 우러나온 저항이었던 것이다. 사방 주위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외치면 자신의 머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대답하지만, 가슴만은 그것을 부정한다.


동화와 은화로 몸값을 치르고 자기 몸의 자유를 되찾던 그 시대부터, 즉 도덕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인정되지 못하던 그 시대부터, 선과 악은 순전히 마음에 의해서 구별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전에 6개월 동안 억눌린 사병 생활을 했다. 나는 그때 굶주린 배를 안고라면 항상 누구에게나 복종할 용의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을 지푸라기만도 못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피부를 통해 실감했다.


나는 적어도 대학생다운 자유 애호 사상만은 가지고 있었던가! 그런 것은 애초부터 우리에게 있어 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는 그저 대열 애호 정신과 행진 애호 사상이 있었을 뿐이다.


사관학교에서 체험한 <단순화의 기쁨>이라는 것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군인이 되려면 <사고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동일한 생활 방식에 몰두해야 하는 기쁨, 우리 군인들의 동료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활에 <몰두해야 하는 기쁨>, 어릴 때부터 길들여 온 그 모든 섬세한 감각을 잃어야 하는 기쁨.


그들은 우리에게 되도록 많은 원한을 품게 했다. 나중에 그 원한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풀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름 아닌 계급장이 사람에게 이런 짓을 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인생을 수없이 회상하고 현재의 입장을 자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곤봉에 맞아 머리가 갈라진 듯한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강력한 애국심은 언제나 후방에 있기 마련이다.


선과 악의 분기선은 어느 누구의 가슴에도 다 가로놓여 있다. 그러니 누가 자기 가슴의 한쪽을 박멸시킬 수 있겠는가?

한 심장이 살아가는 공안 이 선(線)은 때로는 기쁜 악으로 짓눌리기도 하고 때로는 어둠을 제거하는 선(善)에 공간을 내주면서 심장 위에서 이동을 계속한다. 동일한 인간이라도 연령과 인생의 위치가 변함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곤 한다. 어떤 때는 악마에 가까워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성인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우리를 박해한 자들을 구덩이 속에 떠밀어 넣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이때 사형 집행인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다는 관념을 조성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게 마련이다.


선에서 악까지는 단 한 걸음밖에 안된다.


그 악인들은 자기 자신을 악인이라 자인하고 또 자기의 마음이 검다고 스스로 느낀다. 악당들은 생각한다 - <악을 행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악한 짓을 하기에 앞서 인간은 먼저 그것을 선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자기 행위의 합법성을 찾아야 한다. 자기 행위에다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악당들의 공상과 정신력은 불과 열 사람 정도의 사람도 제대로 죽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 그것은 사악한 일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요한 장기간에 걸친 강인성을 제공해 준다.


종교 재판관은 그리스도교로, 침략자는 조국의 찬양으로, 식민주의자는 문화로, 나치스는 인종으로, 자코뱅파(초기와 후기의)는 다가올 세대의 평등과 우위와 행복으로 무장을 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가진 악인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태연히 그 선을 뛰어넘는 것이다.


인간은 악과 선 사이에서 일생 동안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동요한다. 그러나 악의 한계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선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을 갖는다. - 중략 - 악행의 밀도, 혹은 그 정도, 혹은 권력의 절대성에 의해서 일단 한계를 넘어서기만 하면 그는 이미 인류에게서 떠난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선이 승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비겁한 자들에 의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그런 시대에까지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지칠 대로 지친 선이 누더기를 걸치고 감방 한구석에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시대이다.


선이 녹초가 되도록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거기에는 죄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수백만의 인간이 교수형 당했는데도 거기에는 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5년 동안 우리는 그런 죄인을 본적도 없고 그들을 재판에 회부한 적도 없다. 우리는 <그들의> 상처를 들추어내지 않으려고 조심할 뿐이다.


독일에서는 …… (중략) 한 피고는 머리를 부둥켜 쥐고 변호를 거절하면서 판결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앞에서 열거되고 다시 재연된 일련의 죄상에 혐오감이 복받쳐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재판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성과다. 범인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 정도로 죄악이 철저하게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후손들은 몇몇 세대를 가리켜 소심하기 짝이 없는 세대였다고 말할 것이다. 맨 처음 우리는 수백만의 동료들이 학살당하도록 순순히 내버려 두고, 그 다음엔 살인자들의 안일한 노후를 보장하도록 그들을 보살펴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우리 조국과 우리 자식들 앞에 <모든 죄인을 찾아내서> 그들 <모두를 재판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재판하기보다도,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재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세기의 우리들은 재판의 야만성이 무엇이며, <들추어내서는 안 된다>는 <낡은 것>이 무엇인지를 수십 년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구분해 둘 의무가 있는 것이다.


악에 대해 침묵을 지키면서 그것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도록 슬그머니 허리춤에 숨겨 둔다면, 그 악은 앞으로도 수없이 고개를 들고 일어날 것이다.

 

제5장 첫 감방, 첫사랑

 

<우리들!> - 바깥 세상에 있을 때 이 말은 인간의 개성을 무시하는 것이라 하여 너는 혐오감을 느꼈을 테지만(<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 우리는 뜨거운 분노를 느낀다! …… 우리는 강력히 요구한다! …… 우리는 굳게 맹세한다! ……>) 이제 이 말은 너에게 더없이 상쾌하게 들릴 것이다. - 너는 이 세상에서 결코 혼자가 아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이성적인 현명한 존재 -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룻밤의 평온한 잠은 지구상의 어떤 운명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 이전에 러시아어로 말을 하고 러시아어로 글을 쓰던 사람들의 고매하고 굳건한 정신은 우리 시대에 와서 상실된 많은 것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것이다. (중략) 한 사회가 멸망하기 전에는 깊은 사색의 세계에 사는 그런 현명한 계층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비웃음을 받았으며 얼마나 비난을 받았는가!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아야 하네! (중략) 자넨 수학자야. 자넨 데카르트의 말을 잊어서는 안 돼. <모든 것>을 의혹의 눈으로 보라!


노동 계급이 아직 정권을 잡을 준비가 안 되었을 때, 정권을 장악하는 것보다 더 큰 역사적 불행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엥겔스의 가르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전쟁의 공통적 특성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 즉 한쪽에서 전쟁이 슬픔을 가져오면 가져올수록 다른 한쪽에서는 기쁨이 날개를 펴는 법이다.


모든 것을 승리를 위해 희생하라! 전쟁은 그것을 모두 기록해 줄 것이다! 이것이 전시의 생활 원칙이다.


잔인성 밑바닥엔 반드시 감상이 깔려 있는 법이지. 이건 이를 테면 상호 보완의 법칙이야. 예를 들어 독일 사람들에겐 이것이 민족적 특성으로 되어 있거든.


어두운 감방 속, 축축한 갱도에서 말없이 죽어간다 할지라도
우리의 외침은 살아남은 세대 속에 메아리쳐 살아나리라!


봄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약속하지만 우리 수감자에겐 열 배나 더 큰 행복을 안겨 준다. 오, 4월의 하늘이여! 감옥살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총살형만은 면하게 될 모양이니까. 그 대신 나는 여기서 더욱더 슬기로운 인간이 되련다.


산책 후 감방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새로 다시 체포되어 온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마음을 졸여야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찾아와서 문자 밑에서 점이 발견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옳기 때문에 어떤 증명도 통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나 생애 중 한 번은 자기의 운명과 신념과 열정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계기에 봉착하게 마련이다.


만일 그가 살아남을 운명이었다면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만 했다.


애매한 결론밖에 내릴 수 없는 사람은 전혀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사색하고 괴로워하기 위해 살고 싶은 거다! - 뿌쉬킨의 시 <엘리지>의 한 구절.
우리도 괴로워하며 사색하고 있다. 그 밖에 우리가 이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너무나도 쉽게 이 이상이 실현된 셈이다.


<무슨 죄로?>
(이것은 그에게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무리한 질문이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하긴 누구나 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잡혀 들어왔다고 대답한다.

 

제6장 그해 봄


전쟁 개시 4주년 기념일인 6월 22일 ……
건물의 토대로 놓인 돌들은 짓눌려 신음소리를 낼지언정 건물의 장식물이 될 수는 없다. 이 전쟁의 첫 타격을 자기의 이마와 갈비뼈로 막아 내고 적의 승리를 저지한 사람들은 지금 완전히 버림받아 그 토대의 돌이 되는 하찮은 명예조차 거부당하고 말았다.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숙청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들은 <조국에 대한> 배신자가 아니라 <조국에 의한> 배신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무슨 <사실 때문에> 사람들을 투옥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짓을 <하지 못하도록> 투옥하고 처벌하는 것이다.


이들 포로들은 모두 투옥한 것은 그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유럽얘기를 떠벌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지 못한 것은 꿈꿀 수도 없는 법이다.


그(스딸린)는 단 한 사람의 간첩을 놓치지 않기 위해 999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독일 국방군의 <블라소프 부대>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절박한 사정, 극도의 절망감, 소비에뜨 체제에 대한 격렬한 증오, 그리고 자기 보호에 대한 경멸뿐이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발견한 한 가지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러시아인이라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렀을까?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정신적인 공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인간은 약하다. 약한 것은 인간이다. 우리 중의 가장 고집 센 사람들조차도 그해 봄에는 모두 사면을 바랐으며, 조금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양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해의 봄은 봄 자체로서 동정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토록 엄청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봄이 아닌가!


우리가 이렇게 수백만씩 잡혀 들어온 건 바로 전쟁이 끝났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선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후방에선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먼 변방의 건설 현장에선 우리가 없으면 벽돌 한 장도 쌓아 올릴 수 없지 않은가!


진정 축복을 받아야 할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전쟁에서의 패배인 것이다! 정부의 입장에선 전쟁에 이겨야 하지만 민중의 입장에선 전쟁에 지는 편이 유리하다. 승리를 거두고 나면 또 다른 승리를 바라게 마련이지만, 패전 후에는 자유를 바라게 되고 대개의 경우 그 자유를 획득하게 마련이다.


모든 빛의 원천은 크고 작건 간에 태양과 비교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양만은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기대는 특사에 대한 기대와 비교해서 말할 수 있지만, 특사에 대한 기대만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제7장 기관실에서

 

괜찮아. 우린 아직 젊으니까, 앞으로 얼마든지 더 살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여기서> 더 후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지. 수용소에 가면 추가형을 받지 않도록 <말조심하고 그저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는 거야>.


나는 그때 이미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 만약 앞으로 참된 삶을 위해 <삶을 버려야>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무튼 사건의 본질은 <개인적인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위험성에 있다>고 그들은 우리에게 설명해왔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인 이단자라면 죄가 없어도 감옥에 처넣을 수 있고, 사회적인 열성분자라면 죄인이라도 석방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헌법에도, 형법에도, 그 어느 곳에도 언급되고 있지 않은 특심이지만 그것은 가장 편리한 도살 기계와 다를 것이 없다. 법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융통성 있는 탐욕스러운 기계, 바로 그것이 특심이라는 기계이다.


특심의 중요한 특권은 일단 결정을 내리면 절대로 항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보다 높은 법정도 없거니와 그보다 낮은 법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판해서 벌을 주기보다는 자비로운 오판이 더 낫다.


형사 법전이 재판이란 길 위에 돌처럼 굳어 버려서는 안 된다.


모든 <선거>도 단일 입후보로 실시되는데, 재판이라고 <두 개>의 결말을 가질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 무죄 선고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무의미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보원들도, 기관원들도, 신문도, 검사국도, 감옥 내의 경비대도, 경호병도 - 그 모두가 다 헛되이 일해 온 것이 되지 않느냐 말이다.


<XX! 제58조 1항, 25년.>
그러자 옆에 있던 호송대장이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무슨 죄인가?>
<아니오, 아무 죄도 없습니다>
<거짓말 마. 아무 죄도 없으면서 10년이란 말이야!>


군법 회의 대기실의 벽이란 벽은 못으로 긁고 연필로 쓴 낙서로 범벅을 이루고 있다 - <사형 언도를 받음>, <25년>, <10년>. 그들은 이 낙서를 지우지 않는다 - 교훈을 주기 위해서다. 두려워해라, 기를 죽여라, 너희들의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부당한 재판은 강도보다 흉악하고
법이 잠자는 곳에 법관은 원수가 되나니
너희들 앞에 뻗어 있는
무력한 시민의 목이여.
- 러시아 시인 제르쟈빈


도대체 어느 쪽이 먼저일까 - 닭일까, 아니면 달걀일까? 사람들일까, 아니면 체제일까?


법을 두려워 말고, 재판관을 두려워하라.


만약 진리의 이 조그만 첫 물방울 하나가 마치 심리적인 폭탄처럼 이토록 폭발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면, <진리>가 폭포처럼 무너져 내릴 때 과연 우리나라에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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