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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연인 | 마르그리트 뒤라스

2016. 7. 10.

 

마르그리트 뒤라스 |  김인환 | 민음사  

 

프랑스 현대 문학의 대표적 여성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공쿠르 상 수상작. 베트남에서의 가난한 어린 시절, 중국인 남자와의 광기 어린 사랑을 섬세하고 생생한 묘사로 되살려 낸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은 여러 시공간을 넘나드는 짤막한 문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가 프랑스인 소녀와 중국인 남자와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 순차적으로 사건을 진행시킨다면, 소설은 베트남에서의 어린 시절이, 프랑스로 귀국해 문단과 학계의 저명인사들과 교류하던 시절이, 노년에 이른 현재의 시간이 뒤섞여 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913983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 중략 - 열여덟 살에 나는 늙어 있었다.


가장 싱그러운 젊은 날을, 생애에서 가장 축복 받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이따금 충격적인 시간들이 후려치곤 한다.


내가 열여덟 살이 되던 그해, 어떤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 지금의 이런 얼굴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밤에 일어났을 것이다. 나는 그때 나 자신이 무서웠고, 하느님이 두려웠다. 낮 동안에는 죽음이 나타나도 덜 무섭고 덜 심각했다. 그런데 죽음은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았다.


나는 큰오빠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죽이고 싶었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를 이기고 그가 죽는 것을 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면전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그 아들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큰아들을 그렇게도 편애한 어머니를 벌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가족) 주위에서 다가가지 않고서 그 사물 같은 인간들 주변에서 글을 썼다.


내 생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중심이 없다. 길도 없고, 경계선도 없다. 광활한 장소가 있으면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곳에 있으려니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제는, 글을 쓴다는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 때가 자주 있다.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마구 뒤섞인 일들을 모두 내가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한 것도,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둔 것도 아닌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또한 뒤섞인 일들을 모두 매번 그 본질을 규명할 수는 없는 단 하나의 일에 흡수되어 버리는 이런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과시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나에겐 뚜렷한 주장이 없다. 모든 곳이 개방되어 있고, 더 이상 가로막는 벽도 없으며, 작품은 어디에 숨어야 할지, 또는 어디로 끌려나가 읽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의 본질적인 무례함이 더 이상 존중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나는 보았을 것이다. 남성용 모자 밑에서, 볼품없이 야윈 얼굴이, 어린 마음에 결점처럼 여겨지던 그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야윈 얼굴이 자연의 숙명적이고 잔인한 현상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떨치고 그와는 전혀 반대로 된 것을, 다시 말해, 기질이 선택한 어느 달라진 모습이 된 것을, 불현

듯,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삶에 대한 암담한 절망, 어머니는 날마다 그 절망에 시달리며 지냈다. - 중략 - 나는 그 절망에 완전히 절망해 버린 어머니를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지녔다. 그 절망은 너무나 순수해 인생의 행복조차도, 이따금 그 행복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절망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


그 여자들 스스로가 초래한 결핍감은 내가 보기에는 항상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되었다.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경험’하기 이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어머니는 미친 여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피 속에 흐르는 광기. 그 광기로 해서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마치 그게 그녀의 건강인 양 광기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아주 뚜렷한 어떤 감정도 없이, 증오심도, 혐오감도 없이 서 있다. 아마도 어느새 욕망이 고개를 든 것이다.


불현듯 그녀는 알게 된다. 그는 자기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며, 그토록 퇴폐적인 모습들을 인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그녀는 갑자기 깨닫게 된다. 나룻배에서 이미 그가 그녀의 마음을 끌었다는 것을. 그가 마음에 든다. 이제 모든 것이 그녀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 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그는 말한다. 그는 외롭다고,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처참하리만큼 외롭다고.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그녀 역시 외롭다고.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당신은 아무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날 따라온 것이군.”


그는 가증스러운 사랑에 빠져있다.


향락을 즐긴다.
형체가 없는 바다, 비길 데조차 없는 그 바다.


그는 나를 동정한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난 동정 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 누구도 동정 받을 이유가 없어요. 우리 어머니만 제외하고는.


바람을 많이 피우는 남자, 무서움을 타는 남자, 그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바람을 많이 피우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고 났을 때 이내 그는 내가 뜨거운 여자이고 앞으로 사랑의 행위를 즐기게 될 것이며, 그를 배신하게 될 것이고, 그런 식으로 모든 남자를 배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그리고 자기로 말할 것 같으면 자신의 불행을 만드는 도구였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그 행위에서는 모든 것이 다 좋아. 아무런 찌꺼기도 없어. 찌꺼기들은 뒤덮이고, 모든 것이 거센 물결, 욕망의 힘 속으로 흘러가는 거야.


그는 내가 일생을 두고 그날 오후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비록 그의 얼굴, 그의 이름까지 잊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오후만은 기억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나는 내가 그 집에 대해서도 기억하게 될 것 같으냐고 묻는다. 그가 나에게 말한다. “잘 봐.” 나는 그 집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집이라고 그에게 말한다. 그래 맞아. 언제나 볼 수 있는 거지 하고 그가 말한다.


사덱의 커다란 별장 같은 그 집.
그것은 난파선 같은, 비탄의 장소이다.


항상 끝나고 나면 비참한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서로 사랑을 하든 사랑을 하지 않든, 항상 비참해. 이제 곧 밤이 될 텐데, 밤이 오면 그런 감정은 사라질 거야.”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난이 우리 집의 사면 벽을 허물어뜨려 버렸기 때문에 모두들 집 밖에서 맴돌았다고,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면서 떠돌았다.


온몸에 퍼붓는 입맞춤이 나를 울게 만든다. 그 입맞춤이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울지 않는다. 그날 그 방 안에서 눈물은 과거를 달래주었고, 미래 역시 달래 주었다.


내 어린 시절 내내 어머니의 불행이 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늙어 있었다. - 중략 - 그가 말했다. “당신은 지쳐 있어.”


결코 서두르는 기색이 없이 한데 섞여 걷고 있던 그들. 아무런 행복도, 슬픔도, 호기심도 없이 혼잡한 무리 속에서 각자 홀로 있는 것 같은 표정들. 어딘가 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갈 계획도 없어 보이면서 다만 어슬렁거리기 위해 걷고 있는 것 같은 그들. 혼자인 동시에 무리에 끼어 있고, 항상 모여 있으면서 절대로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그러면서도 늘 무리 속에서 고립된 존재들로 있는 그들.


갑자기 고통이 느껴진다. 아주 경미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나에게 입힌 생생하고 신선한 상처에서 느껴지는, 빗나간 심장의 고동이다.


우리의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 거의 1년 반 동안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한 번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문 기사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눌 것이다. 늘 같은 감정으로.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그가 잘못 생각한 대로, 그가 나를 사랑하는 대로, 그에 합당한 동시에 진지한, 일종의 연극적인 감정 속에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그가 자기 아버지와 맞서서 나를 사랑하거나, 나를 아내로 맞아들이거나, 나를 데리고 도망칠 용기가 없음을 깨닫는다. 두려움을 넘어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곧잘 운다. 그의 영웅심, 그것은 바로 나이고, 그의 노예근성,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재산이다.


큰오빠 앞에서는 내 연인으로서의 그가 사라진다. 그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더 이상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는 불타 버린 장소가 된다. 내 욕망은 큰오빠에게 순종하고, 내 연인을 차 버린다.


돌로 된 가족이다. 어떤 접근도 불가능한 두꺼운 퇴적물 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가족이다. 날마다 우리는 자살을, 혹은 살인을 기도한다.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향한,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 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어머니는 그저 살아가기만 했다. 우리 세 아이는 모두, 소위 사랑이라는 것을 넘어 그녀를 사랑했다.


나는 어머니를 관찰하는 자, 그녀의 불행을 관찰하는 자가 되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원칙, 즉 우리의 불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배웠다.


내게 전쟁은 큰오빠와도 같다. 전쟁은 큰오빠처럼 도처에 번지고, 침입하고, 훔치고, 또 감금한다. 또한 모든 것에 섞여 들어 머릿속에도 몸속에도 생각 속에도 존재하며,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나 시종일관 제어할 수 없는 취기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사랑스러운 영토 같은 어린아이의 몸을, 나약한 자들이나 패배한 민족들의 육체를 점령한다. 악은 바로 거기에, 우리 피부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페르낭데즈 부부는 대독일 협력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쟁이 발발하고 2년 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절대적인, 결정적인 대등함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이 취한 행동과 내가 취한 행동은 대등한 것이었다. 그것은 똑 같은 일, 똑 같은 연민, 똑 같은 구조 요청, 똑같이 나약한 판단이었다. 다시 말해 개인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똑 같은 미신이었다.


그(큰오빠)는 자신이 위험해질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건달이란 그런 인간들이다. 결단성도 없고, 큰일도 못 벌이는, 겁 많은 자들인 것이다. 그도 겁쟁이였다.


황혼은 매년, 같은 시각에 갑자기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그런 죽을 것만 같은 희열은 사랑이 없는 연인들에게는 신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문제는 바로 이 죽어 버리고 싶은 기질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를 좋아해 줄까?”
“그럼요. 여하튼 그들은 나를 좋아해요.”
“네가 그런 아이이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거겠지.”


어떤 일에서도 끝까지 버텨 내는 기질 말이다. - 중략 - 내가 그녀에게서 깊은 매력을 발견하는 건 그녀의 이런 무모한 용기에서였다.


이 육체는, 다른 몸들과 달리, 무한하다. 침실 안에서 그녀의 육체는 점점 확대된다. 정해진 형태도 없다. 육체는 매 순간 생성되어, 그가 보고 있는 곳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시야 너머로 퍼져 나가 유희와 죽음을 향해 확장된다. 이 육체는 유연하여, 마치 성숙한 여자의 육체처럼 완전한 쾌락에 빠진다. 그녀의 육체에는 속임수가 없다. 놀라운 감각을 가진 육체이다.


그는 내가 바라던 것을 넘어, 내 육체의 숙명에 적합한 곳까지 나를 데려갔다. 그렇게 나는 그의 아기가 되었다. 그도 역시 나에게는 또 다른 무엇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콜랑의 남자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도 이제 나와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H. L.이 나에게 던지는 이런저런 질문을 듣고 싶다. 그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자들만이 지닌 특별한 주의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몇 초 동안 저지른 실수는 온 우주에 파급되었다. 이 놀라운 사건은 신의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내 작은오빠는 불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그를 보지 못했다. 그의 불멸성은 그가 살고 있었을 때, 작은오빠의 육신에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불멸성이 바로 육신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 작은오빠의 육신은 죽었다. 그의 불멸성도 그와 함께 죽었다.


불멸성은, 결코, 불멸성으로서 눈에 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절대적인 이원성이다. 그것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근원 속에서만 존재한다.


불멸성이 살아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


그는 이해라는 걸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그런 유의 사람이었다.


여자들이 그들을 그냥 떠나게 내버려 두는 것도 막지 못했다. 여자들은 결코 떠나지 않고, 태어난 고장, 민족, 재산과 남자들이 돌아올 이유를 지키며 남아 있었다.


그가 이 고통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주 강렬하게, 너무 강렬해서 죽음에 이를 정도로 나를 사랑하듯, 그는 그렇게 이 고통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울었다.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이었고, 또 이런 종류의 연인들은 눈물을 흘려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배는 새벽에 다시 출발했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해는 또다시 떠오르고 바다는 텅 비어 있다. 사람들은 수색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거기서 떠난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하늘의 지시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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