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의 야간열차

용의자의 야간열차

타와다 요오코 저/이영미

다와다의 작품은 충돌하는 언어와 뒤얽힌 도시의 세계를 지나는 극적인 여행과도 같다. - 빅토르 펠레빈

독일어와 일본어, 두 언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 다와다 요코의 『용의자의 야간열차』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8번으로 출간됐다. 다와다는 한 언어에 익숙해져 거기에 안주하려는 이들에게 제동을 걸고, 낯익은 개념에 새로운 언어를 입혀 낯설게 만들고자 하는 작가다. 그는 두 언어로 글을 쓰면서, 우리가 기정사실이나 확실한 대상이라 믿는 것에 의문부호를 찍고 정체성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출발……

 

첫번째 바퀴

파리로

 

역무원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뭣하니, 그저 묵묵히 관찰할 수밖에 없다. 역 전체가 가면을 들쓰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벗겨내지 못한다.

 

당신은 파업을 응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 파리 공연과 그 출연료는 어떻게 되는가.

 

인연과 세월은 기다리는 게 제일.

 

배는 뱃사공에게 맡기고 당신은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련만, 당신은 시각표 끄트머리에 자신의 일정표를 덧붙이며, 모처럼의 중단을 뛰어 넘어 조급히 미래로 내달리려 한다.

 

기능을 멈춘 도시는 유원지로 변모한다.

 

두번째 바퀴

그라츠로

 

그렇게 일찍 가서 뭐해. 역은 따분하잖아, 라고 친구가 말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하다. 역은 분명 따분한 장소일지 모른다. 따분해서 쉬 지겨워지기에 오히려 바쁘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긴장이 풀린다. 따분함은 여유다.

 

아침을 먹고, 도나우 강의 원천이라는 곳을 구경하러 갔다. 여기가 저 웅대한 도나우 강의 발원지라는 말을 듣고, 그곳에 있는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적은 물이 대체 어떻게 그 큰 강줄기로 성장해갈까. 그것은 오직 물만 안다. 뱀의 길은 뱀이 알고 물길은 물이 안다.

 

계획과 다른 열차를 타고 빨리 도착한다는 마음에 우쭐해 있으면, 여행의 신들에게 노여움을 사서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애초에 타려고 한 열차에서 사고가 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앞 열차를 탔다가 쓸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모두 자기 책임이 되어버릴 것 같아 싫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 전철을 떠나보내고 멍하니 플랫폼에 서 있었다.

 

구체적인 직업은 묻지 않았다. 상대는 신원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데 이쪽에서 무리하게 캐물어 새빨간 거짓말을 하게 만들면 가여우니까.

 

새벽 네시에는 따듯한 잠자리와 이별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 괴로운 상황을 피하려고 늘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고 시간에 맞추려 애를 썼는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은 밤을 절단당하는 게 끔찍이 싫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운명을 눈앞에 맞고 보니 신선함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낯선 시간 속으로 던져졌다. 출발점과 도착점은 그대로인데, 그 사이의 시간과 공간이 꾸깃꾸깃 구겨졌다.

 

세번째 바퀴

자그레브로

 

로마에는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에서 엇비슷한 배낭을 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고, 같은 반 친구인  양 인사를 주고 받았다. - 중략 -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같이 자기는 전쟁을 싫어하고 여행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었고, 돈이 없는 것과 아직 일도 가족도 없는 게 공통점이라고 막연히 느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의 공통점은 오히려 돈이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있다는 것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늘 사용하는 돈을 외화로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악마는 말처럼 발굽이 있다.

 

가정적인 온기가 느껴지는 수제 밀수였다. 바구니 바닥에 담배를 감추고 그 위에 달걀을 잔뜩 올리거나 겉옷 안감에 구멍을 내서 그 속에 담배를 숨기고 다시 꿰매는 등, 자잘한 작업이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쁘게 이어졌다.

 

네번째 바퀴

베오그라드로

 

그 여자에게 길을 물어볼까 했지만, 망설임이 앞섰다.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딱히 걱정되지 않지만, 우리가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느껴졌다. 그 망막 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뭘 물어보려 했는지 잊고 말았다. 길을 묻는다 해도 어디로 가는 길을 물을 것인가. 당신은 이 마을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갈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청년이 자기랑 같이 미술관에 가겠느냐고 물었다. 당신은 망설임 없이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미술관에 가고 싶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침내 갈 곳이 정해지자 마음이 놓였다.

 

설령 이 남자가 끔찍한 악인이라도 내게는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좋은 행동만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남자가 악인이라도 내게는 선인이 되는 셈이다.

 

다섯번째 바퀴

베이징으로

 

강철 마찰음이 달을 갉아먹고, 암흑 우주의 한가운데로 역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불한 요금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호화로운 침대차였다. 계급 없는 사회의 일등칸이었다.

 

여섯번째 바퀴

이르쿠츠크로

 

청춘의 아름다움은 다리가 없어도 쏜살같이 도망친다.

 

밖으로 나가도 갈 곳이 없는 유폐된 몸, 창밖에는 광활한 시베리아가 펼쳐져 있건만, 통로는 맞은편 사람과 간신히 스쳐지날 정도로 비좁다.

 

자고로 욕심에는 눈멀고 갈증에는 가늠을 못하는 법.

 

창밖은 시베리아였다. 시베리아는 광활해도, 창틀을 액자 삼아 바라보는 풍경은 그림 한 장에 불과하다.

 

연인들은 싸우면서 늙어가는구나.

 

일곱번째 바퀴

하바롭스크로

 

이틀째 밤, 잠이 깨버린 직후, 변명처럼 방광에 압박감을 느꼈다. 화장실에 가고 싶구나 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일어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게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화장실에 가고 싶은 인간과 잠이 깨버린 인간과 일어나기 싫은 인간을 다 더해도 결국은 단 한 사람이다. 자신이 혼자라고 이토록 절절히 느껴지는 순간은 없다. 설령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동행을 깨워서 화장실에 갈 수는 없다. 인간은 화장실에 갈 때는 늘 혼자다. 피할 길 없는 운명인 것이다.

 

여덟번째 바퀴

빈으로

 

막상 여자의 평범하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고 보니 불안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평범하고, 상대는 평범하지 않다는 마음이 갑자기 든 것이다. 그것은 이 여자의 불안이자 나의 불안이 아니다. 이 여자가 살해당할 거라는 말은 망상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것은 이 여자의 문제이고, 그것은 이 겉모습, 새처럼 손톱을 기른 이 여자의 육체에 들러붙은 사건인 것이다.

 

아홉번째 바퀴

바젤로

 

이 여자는 분명 불면증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당신은 점점 숨이 막혔다. 늘 때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수면은 인생의 3분의 1, 가장 아름다운 3분의 1이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겉옷은 벗고 싶어도 벗을 수 없다. 자기 피부는 벗을 수 없다.

 

열 번째 바퀴

함부르크로

 

시간을 죽인다는 말은 얼마나 끔찍한 표현인가. 마치 시간이 파리라도 되는 것 같다. 시간파리라는 종류의 파리가 있다. 타임 플라이스 라이크 언 애로 Time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쏜살같이. 이 문장을 컴퓨터 번역기에 돌리면, ‘시간파리들은 화살을 좋아한다는 번역문이 나온다는 얘기를 어제 막 읽은 참이었다. 그러나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시간이 절대 화살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파리처럼 날아가버리지도 않는다. 정말이지 완전히 반대로, 달팽이 같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번들거리는 한 줄기 선이 남는다. 그것을 만져보면 끈적끈적할까? 선로처럼 배후에 궤적을 남긴다. 달팽이는 전철의 일종일까. 머리에 안테나 두 개가 뻗어 있어 멀리 있는 누군가와 통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한번째 바퀴

암스테르담으로

 

그때 일을 떠올린 당신은 자기 손으로 양쪽 뺨을 찰싹찰싹 몇 번쯤 때려보았다. 분노 같은 반응이 몸속에서 확 뿜어져 나온다. 마치 타인의 감정처럼. 그렇다. 살 속에는 자신의 분별과는 관계없이 멋대로 작동하는 감정이 깃들어 있는 모양이다. 당신은 호기심에 이끌려 다시 한번, 이번에는 세게 자기 뺨에 따귀를 날렸다. 증오가 쓰디쓴 즙처럼 베어 나온다.신기하다. 기분 나쁜 일은 하나도 없는데 이런 감정이 베어 나오다니.

 

열두 번째 바퀴

뭄바이로

 

사람들 행렬이 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뱀은 짧아지지 않는다. 영원이라는 이름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 대신 열차표가 있어요. 그렇지만 이건 보통 열차표가 아니에요. 부적 같은 겁니다. 이걸 지니고 있으면, 계속 열차를 타고 다닐 수 있죠.”

계속이라니, 언제까지요?”

이 여행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여행이 찾아옵니다. 그게 끝나면 바로 다음 여행이 시작되죠. 그렇게 끊임없이 여행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날 나는 당신에게 영원한 승차권을 내주고, 그 대신 자신을 자신으로 여기는 뻔뻔한 넉살을 사들여 가 되었다. 당신은 더 이상 스스로를 라고 부르지 않게 되어, 언제나 당신이다. 그날 이래로 당신은 줄곧 묘사되는 대상이 되어, 2인칭으로 열차를 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열세 번째 바퀴

어디에도 없는 마을로

 

잊힌 이별이 가장 쓰라린 법.

 

침대가 네 개인데, 우리는 왜 늘 한 사람을 내리게 하려고 싸울까요.

방해되는 녀석이 있으면 못 자니까.

자는 동안에는 우린 모두 혼자잖아요. 꿈속에는 창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출발지에 남겨진 사람도,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버린 사람도 있어요. 우리는 애당초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요. 보세요. 땅의 이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침대 밑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요. 발밑에서 땅을 빼앗기는 속도가. 아무도 내릴 필요 없어요. 모두 여기 있으면서 여기 없는 채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달려가는 거예요.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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