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 이야기

참새 이야기

쑤퉁 저/양성희

『참새 이야기』는 1980년대 개혁개방 격변의 시기를 배경으로, 청소년 강간사건에 휘말린 세 청춘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렸다. 바오룬, 류성, 선녀 세 주인공이 각자의 시선으로 그 시대와 그 사건에 얽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작가인 쑤퉁 선생이 청소년기를 보낸 도시에 실제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작가의 눈에 비친 범인은 너무나 순수해 도저히 강간범으로 보이지 않았더란다. 실제로 당시 중국 사회에는 억울한 형사사건이 많았던 터라 자연스럽게 그가 진범이 아니라 억울한 피해자 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겉모습은 사납지만 마음은 한없이 순수했던 바오룬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순간적인 욕망을 참지 못해 죄를 저지른 진짜 강간범 류성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한 선녀는 세상을 증오하며 되는대로 살아간다. 십 년 후 다시 만난 세 사람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우여곡절 끝에 서로에 대한 감정의 빚을 청산하지만, 운명은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지 않았다. 작은 오해로 인해 류성은 결혼 첫날 밤 바오룬의 칼에 맞아 처참하게 죽고, 류성을 죽인 바오룬은 다시 교도소에 갇히고, 늘 떠돌이 인생이었던 선녀는 핏덩이 아기를 남긴 채 또 어딘가로 떠난다. 

바오룬의 봄

해마다 봄이 오고 꽃이 피면, 할아버지는 사진을 찍으러 갔다. 일흔을 넘기고부터 할아버지는 죽음을 산술적으로 인식했다

하루를 살면 하루를 번다

‘하루를 살면 하루를 번다’는 말을 산술적인 관점에서 풀어보면, 할아버지는 이미 25년을 더 살았으니 무려 9125일을 번 셈이다. 이렇게 많이 벌었으니 당연히 뿌듯할 수밖에.

‘사람은 자기 장례를 직접 치를 수 없으니 사후 일은 생전에 준비해둬야 한다’

모든 실수를 바로 잡을 수는 없는 법.

영혼을 잃은 노인은 존엄성까지 잃기 십상이다.

미치광이는 여러 가지 불행을 겪는 법인데 할아버지의 불행은 깊은 외로움이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미치광이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참죽나무거리에서만큼은 가장 유명한 미치광이였다.

바오룬은 할아버지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할아버지는 정말 미쳤다! 할아버지의 꿈은 특유의 비린내를 풍기며 저 늪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벽에 걸려 있던 검은 테두리 액자는 어쩌다 흙구덩이에 처박혔을까? 벽이 아닌 흙구덩이에 처박힌 할아버지는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진흙이 할아버지의 얼굴을 뒤덮은 상태였지만 작은 틈 사이로 언뜻 피해자 특유의 억울한 눈빛이 느껴졌다. 바오룬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은 간절한 구원의 외침이었다. ‘바오룬! 구해다오! 어서 와서 날 구해줘!’
바오룬은 액자를 주워 다시 벽에 걸고 할아버지 얼굴에 묻은 진흙을 걸레로 깨끗이 닦아냈다. 구덩이에 처박힌 할아버지 영정사진은 구해냈지만, 그뿐이었다. 할아버지의 일은 부모님 소관이었다. 그는 관여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할아버지를 내버려두긴 싫었지만 할아버지를 구하는 일은 아주 복잡하고 힘들 것이다.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탕, 탕, 탕. 망치질이 한층 빠르고 과감해지면서 할아버지 침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88쌍의 장부맞춤이 연쇄적으로 작별을 고했다. 오랫동안 붙어 지냈으니 지겹기도 했겠지만, 176개의 장부와 장붓구멍이 이별을 고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우지직, 우르르. 마치 벼락을 치듯 한순간이었다. 안녕, 한마디뿐이었다. […] 장부들은 주인을 그리워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별 인사를 남겼다. 날카로운 괴성, 둔탁하고 깊은 울림, 원망 섞인 탄식, 미련과 아쉬움……. 이 낡은 침대는 오래된 만큼 이별 방식도 예스러웠다

제아무리 거대했던 물건도 해체하고 나면 한없이 볼품없고 연약해진다. 조상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리인지라 확실히 조상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들의 체취를 통해 서글픔과 고통이 전해졌다.

마지막 받침대를 들어내고 나자 조상의 흔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할아버지의 방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다. 햇살이 방안의 먼지를 불러 모으자 갈 곳 잃은 먼지들이 비틀거리며 느릿느릿 천천히 움직였다. 혼돈과 무질서를 뚫고 정렬과 조합을 수없이 반복한 끝에 할아버지 방 허공에 먼지 무지개가 가로걸렸다. 나른하게 늘어진 먼지 무지개 때문인지 할아버지 방이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랑이 뭐냐고? 사랑? 개소리야.”
“반은 맞았어.”
“개소리가 아니라 헛소리야. 더러운 헛소리!”

결박은 남을 돕는 일이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결박을 끝내고 돌아갈 때마다 너무 지치고 후회가 밀려들었다. 꼭 죄 없는 사람을 죽인 망나니가 된 기분이었다. 환자 가족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고마워했지만, 그 외의 보상은 없었다. 무료봉사인 셈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신 안 해.’ 매번 이렇게 다짐하지만 결박의 손맛은 너무 짜릿하고 신비로워서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미 중독됐는지도 몰랐다.

‘고기를 먹으려면 류씨 집안을 통해야 한다’라는 사실은 참죽나무거리의 기본 상식이었다. 신선한 돼지 살코기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돼지 내장이 파생시킨 막강한 권력에 다양한 인정이 뒤섞인 결과 류씨 집안은 참죽나무거리에서 지배적 위치에 올랐다.

흰색과 녹색으로 타래타래 꼬인 밧줄은 매혹적이면서 사악했고 심지어 허무함까지 휘휘 감아냈다. 4월은 4월이다. 사방 곳곳에 욕망이 만들어낸 온갖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너나 언년이 해라!” 
할아버지에게 강한 불만을 표시한 아이는 자신 있게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난 선녀야! 내 이름은 선녀라고!” 
여자아이는 제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선녀.

선녀는 깊고 적막한 숲속에서 자란 외로운 가시나무처럼 늘 온몸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분홍색 알약을 삼키고 기절했던 그날 이후 선녀는 세상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선녀가 호의와 애정으로 대하는 세상은 오직 토끼장뿐이었다. 토끼에게만 애정을 쏟다보니 외부 세계에 대한 배타성이 점점 강해졌다. 안타깝게도 선녀의 주변에는 그런 왜곡된 세계관을 바로잡아줄 사람이 없었다.

봄이 꼭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넌 류성이 먹으라면 똥도 먹을 거지?”
1초 간의 침묵, 곧이어 찰싹 소리와 함께 선녀의 손이 바오룬의 뺨을 강타했다. 바오룬은 뺨이 얼얼했다. 어떤 변명도 소용없어 보였다. 사실 바오룬은 이 ‘질투’라는 감정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혼잡한 군중 속에서 마주 섰다. 바오룬은 절망 속에 피어난 희망의 꽃을 찾은 심정이었고 선녀는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한 우비를 뒤집어쓰고 함께 걸어간 거리는 50~60미터쯤이었다. 길지 않은 거리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였다. 바오룬은 선녀를 향한 소중하고 특별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너무 갑자기 가까워지자 오히려 서로 조심스러웠다. 두 사람은 상대방이 말이라도 걸까봐 일부러 서로를 외면한 채 발걸음에만 집중했다. 점점 발걸음 호흡이 척척 맞았다. 후드득, 후드득. 비닐 우비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커질수록 우비 속 세상의 침묵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름 모를 꽃향기가 그윽한 이 작은 세상은 온전히 두 사람만의 세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정의라고 주장했다. 정의와 정의의 대립은 이렇듯 강한 적대감과 불쾌함만 남긴 채 등을 돌렸다.

바오룬은 부모가 부자 되는 것을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을 보니 부자가 되는 길은 온통 진창투성이였다. 저속하고 야비하고 냉혹했다.

실기도 그럭저럭 잘 치러 무난하게 요리사 자격증 시험에 통과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그의 ‘장래’라 하고, 어머니는 그의 ‘밥그릇’이라고 했다.

바오룬은 선녀의 희미한 신음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불타오르던 분노의 불꽃은 이미 식어 검붉은 재로 변했고, 잿더미 사이로 흘러나온 눈물이 창백한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수치, 두려움, 절망이 어렸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아래턱이 쇠사슬에 부딪히면서 그 진동으로 목걸이가 끊어졌다. 검붉은 모조 자마노紫瑪瑙 펜던트가 토끼장 안으로 떨어졌다. 토끼장은 다 찌그러졌지만 분홍 하트 푯말만은 멀쩡한 모습으로 변함없이 경박하고 일방적인 사랑 고백을 이어갔다. ‘사랑해.’ ‘사랑해.’

바오룬은 멀리 취수탑을 바라봤다. 붉은 취수탑 상공에 엷은 꽃구름이 드리웠다. 그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고요한 숲속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구름이, 탑 꼭대기에 걸린 구름이 마치 토끼처럼 보였다. 흰 구름은 흰 토끼, 먹구름은 회색 토끼. 토끼들이 하늘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수수께끼 같은 모양을 만들었다. 바오룬은 자신이 한없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봄날의 하늘은 수수께끼가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해 봄, 그의 영혼이 그의 육체에 수많은 수수께끼 신호를 보냈지만 육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육체도 그의 영혼에 수많은 수수께끼 신호를 보냈지만 영혼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바오룬은 아무것도 몰랐다.

누가 감옥살이를 해야 하고 누가 죄가 없는지는 그쪽이 정할 일이 아니야. 물론 내가 정할 일도 아니고. 그 여자애, 피해자 말이 진실 아니겠어? 안 그래?”
[…]
“누구 말도 진실이 아니야! 돈이 진실을 만드는 거지! 뇌물이 진실을 만드는 거지!

류성의 가을 

“엊그제 봤잖아요. 미스 바이라고 부르세요.”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반격을 예고했다. “그쪽은요? 기사님은 이름이 뭐예요?” 류성은 말문이 막혀 멈칫했다. 두 사람이 맺은 무언의 약속은 종잇장처럼 얇아 언제 찢어질지 몰랐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과거는 컵에 담긴 썩은 찻물이었다. 뚜껑을 조심해야 한다. 뚜껑을 여는 순간 썩은 찻물이 튄다. 절대 뚜껑을 열면 안 된다. 절대 서로 알은 척해선 안 된다. 절대 이름을 말해선 안 된다. 류성은 묵묵히 운전만 했다.

이제 참죽나무거리에도 먹고 사는 걱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새로운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차오 원장 사무실에 들어서자 은은한 여자 향수 냄새가 났다. 이 향기는 어수선한 사무실 분위기에 모호함을 더했다. 그녀가 왔다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어디를 가나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향수와 분 냄새, 혹은 돈이었다

“대박! 대단한 스케일이야! 돈 있는 사람은 역시 다르군요. 총이 대단하긴 하지만 확실히 돈이 더 대단해요. 총 있는 사람이 위협해도 돈 있는 사람은 전혀 곤란해 하지 않잖아요.”

취수탑은 류성에게 금단의 장소였다.
[…]
오래 전 범죄현장은 켜켜이 쌓인 세월에 가려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과거는 모두 잊혔고 취수탑은 영원히 침묵할 것이다. 그런데 취수탑 꼭대기에 자리 잡은 까마귀 두 마리가 마음에 걸렸다. 서늘한 공기 중에 울려 퍼지는 불안하고 날카로운 까마귀 울음소리는 지나간 과거를 상기시켰다.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그는 그 날 취수탑에서 도망쳐 나오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황혼이 깔리던 취수탑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때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여기 목격자가 있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부처의 손짓은 용서가 아니라 망각을 의미한다. 그는 그 금빛의 힘을 굳게 믿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미스 바이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다들 그녀가 돌부처처럼 냉정하고 차갑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공평한 논리로 포장된 불공평한 일들이 많다.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모인 유흥업소에 드나드는 남자들은 조금씩 목적이 다르지만, 타락의 순간만큼은 한마음 한뜻이 된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들락거리는 별 의미 없는 행위일 뿐인데.

류성은 문득 십여 년 전 취수탑의 황혼이 떠올랐다. 저주받은 황혼. 타락의 황혼. 자신을 저주하던 그녀의 입술이 닫히고 타락의 흔적도 깨끗이 지워버렸다. 두 육체가 동시에 겪은 일이지만 그가 아는 것은 이쪽의 사정뿐이다.

그녀는 유령처럼 소리 없이 그의 인생에 파고들었다. 신비롭고 요사스러운 그녀의 유령은 불길한 기운을 가득 안고 어두운 구석에 숨어 가만히 그를 지켜보거나 유혹의 손짓을 보냈다. 백마는 사라졌지만 그녀와의 약속은 아직 유효했다. 그녀의 유령은 살기를 품은 예리한 칼처럼 늘 그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는 백마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걱정했다. 그녀에 대한 걱정은 조금 특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이 옅어지고 점점 도의적인 책임으로 변해갔다.

어머니 염주는 매번 행운 대신 불행만 예고했지만, 결국 류성은 그 영험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행운이든 불행이든,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기 마련이다. 

류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바오룬에게 다가가 사진을 봤다. 물 얼룩 때문에 군데군데 지워졌는데, 지워진 부분이 정말 절묘했다. 어린 바오룬 목에 걸린 빨간 삼각 수건은 그대로인데 목 위쪽만 지워졌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를 입은 바오룬 어머니는 몸통 절반이 지워졌고, 바오룬 아버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신발 한 짝만 남았다. 가족사진에서 온전히 살아남은 사람은 할아버지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물 얼룩과 세월의 빛바램을 교묘히 피해갔다. 노쇠하고 비루하고 나약한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짙은 중산복中山服에 해방화解放靴를 신었고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카락에서 광이 났다. 당시 할아버지는 몸도 정신도 건강했다. 그러나 불안한 눈빛에서 옹색한 영혼이, 카메라 렌즈를 회피하는 시선에서 지금 상황을 예견한 깊은 유감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너희들은 모두 사라지고 나만 끝까지 장수할 거야.’ 

“혹여 내가 장씨한테 기댈 수 없게 되더라도 너한테 의지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차라리 양로원에 가고 말지, 참죽나무거리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아!” 이 순간, 바오룬은 자신을 둘러싼 냉정한 현실을 인식했다. 잉여 인간의 미래. 그 미래에 더 이상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스 바이의 여름

6월 첫날,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우리가 사는 이 도시와 뭔가 불공평한 약속을 맺은 것 같았다. 운명이 정해 놓은 약속으로 인해 그녀는 이 도시를 가질 수 없었지만, 이 도시를 떠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제 세상인 양 온 강물을 휘저으며 헤엄치다가 결국 어망에 걸려드는 물고기처럼.

그녀는 몸의 일부를 점령당했고, 오랫동안 지켜온 인생의 굳은 신념이 와르르 무너졌다. 왜 그랬을까? 그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쩌다 그 사람 아이를 품었을까? 그녀는 그제야 봄날의 죽순처럼 여린 자신의 약점을 직시했다. 봄비가 온 세상을 적시기 시작하면 대나무 죽순이 대지를 뚫고 나온다. 그대로 잘 자라 큰 대나무가 되면 좋으련만 어리고 여린 죽순은 대부분 사람에게 잡아먹힌다.

수술실 앞에는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아가씨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초조하고 증오 어린 표정이었다. 이들은 공통된 특별한 이유로 한자리에 모였다. 그녀들은 자궁 속에 곧 짧은 인생을 마무리할 작은 생명을 은밀히 감추고 있었다. 이 은밀한 비밀은 오직 의사에게만 보일 것이다. 잘못된 섹스. 한순간의 실수. 이 시대에는 그 많은 실수를 대부분 ‘수술’로 해결했다.

“난 진지하게는 못 해. 일단 부딪쳐 보는 거지. 어떻든 지금까지도 암흑 속을 걸어왔으니 어둠 속을 걷는 건 두렵지 않아. 작은 빛이라도 보이면 그쪽으로 가면 돼.” 
“팡 선생이 빛이라고 생각해?”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나도 모르겠어. 그 사람이 내 인생의 빛인지 아닌지, 이번에 알 수 있겠지.”

화려한 네온사인이 만들어낸 여자는 얼굴 옆선, 엉덩이, 미니스커트, 하이힐만 강조되어 동양 여자인지 서양 여자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저 네온사인은 그녀의 경력 중 하나였다. 그녀의 과거는 화려하게 빛났지만 그 빛이 향하는 곳은 늘 공허했다.

그녀는 이 도시를 잘 알지만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팡 선생에게 가는 길은 원래 후미진 골목이었고, 어쩌면 막다른 길일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었다. 팡 선생의 빛은 원래부터 약하고 희미했다. 게다가 그녀가 실수하는 바람에 완전히 꺼져버렸다. 팡 선생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녀의 세상이 너무나도 작다는 사실이었다. 단 한 번의 여행, 단 한 번의 충동 때문에 그녀는 세상 끝으로 내몰렸다.

갈 곳을 정하고 나니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내 운명은 왜 이렇게 가혹한가? 하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나의 선택은 왜 늘 최악일까? 가혹하기만 한 인생, 도대체 언제쯤 보상받을 수 있을까? 그녀는 분수를 모르는 물고기처럼 대양을 누빌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환상임을 깨달았다. 쉬지 않고 열심히 헤엄쳤지만 결국 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후죽순처럼 뻗어나간 이 도시의 고층빌딩이 그녀의 그림자를 삼켜버렸다. 이 도시는 성기고 커다란 어망처럼 수시로 그녀를 놓아주고 다시 잡아들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야릇한 생선비린내가 풍겨왔다. 어쩌면 그녀는 물고기보다 못한 신세인지도 모른다. 물고기는 헤엄칠 바다라도 있지만 그녀의 바다는 이미 다 말라버렸다.

그녀의 표정에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그녀의 눈빛은 죄책감, 불안, 억울함, 교활, 그리고 용기까지 수많은 감정을 담아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자 얼른 닦아내고 날카롭게 외쳤다. 
“백 번쯤 말해줄까? 그럼 되겠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됐어?”
[…]
“내가 잃어버린 것을 배상하란 말이야. 시간. 십 년의 시간, 그리고 자유. 십 년의 자유를 보상해.”

“정치가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한 대우예요.” 
“공평? 지금은 공평도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이야. 결국엔 돈이라고! 미스 바이, 솔직히 말해봐. 도대체 원하는 게 돈이야, 사람이야?”

기름기 도는 퉁퉁한 그의 얼굴을 응시하는데 어렴풋이 글자가 떠올랐다. 한쪽 뺨에 ‘비즈니스’, 반대쪽에 ‘도의’道義. 한때의 어리석은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똑똑하고 세상사에 밝은 그에게 어리석은 감정은 일회용품일 뿐이므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여자는 절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지금 정신을 잃어버리면 나중에는 체면을 잃게 돼. 얼굴을 들 수 없게 된다고.

또한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관대했다. 정신이든 체면이든, 잃어버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불분명해졌다. 나는 누구인가? 그녀는 누구도 아닌 그저 광산일 뿐이었다.

작은 여관방에 누워 있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더 불쾌했는지 모른다. 생일축하 노랫소리를 들으니 자신의 처지가 더욱 처량했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고독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녀의 자기연민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간 그녀는 양치컵에 물을 받아 창밖으로 뿌렸다. 연거푸 세 컵을 뿌렸을 때 아래층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위로가 됐다.

이곳 취수탑은 그녀 인생의 기념비였다. 어쩌면 내내 그녀가 돌아와 자신의 혼을 참배하고 추모하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내가 널 존중하지 않는다고? 그렇지 않아. 이것 봐. 매화매듭이야. 가장 편안한 매듭이지.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매듭은 다 싫어! 날 묶지 마! 난 짐승이 아니야! 넌 또 범죄를 저지르는 거야, 알아? 이제 막 감옥에서 나왔는데 또 들어가고 싶어? 내가 신고하면 또 감옥에서 십 년은 썩게 될 거야.” 
“상관없어. 이번 춤만 추고, 나가서 신고해. 내가 감옥 가는 게 무서울 거 같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 년이 사라졌어. 십 년 더 썩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목이 날아가도 상관없고.”
[…]
폭력적인 남자도 겪어봤지만 이렇게 절망적인 폭력은 없었다.
[…]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이 축축해졌다. 남성 특유의 절제된 뜨거운 눈물이었다. 곧이어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너희 둘은 전생의 악연으로 만난 거라 같이 있으면 불행해져. 둘 다 좋을 게 전혀 없단 말이다.” 
“난 똑똑해요. 아줌마 아들이 멍청해서 문제지. 어서 나가요. 가서 아드님한테나 물어봐요. 도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지.”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도 유산되지 않은 건 정말 기적입니다. 엄마보다 아기 운명이 대단하네요.”
[…]
사실 그녀의 모성은 아직 태아처럼 미미했다.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갑자기 커지기도 하고 갑자기 작아지기도 했다. 그녀의 모성은 흔히 말하는 모성과 아직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작고 귀여운 동물을 좋아했지만 아기는 좋아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지금 그녀는 모든 걸 다 잃었고 배 속의 아기 하나만 남았다. 이것이 과연 기뻐해야 할 일일까?

검은 구름에 가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씩 불러오는 자신의 배뿐이었다. 알 수 없는 생명을 품은 신비로운 광산. 그녀의 몸에는 두 개의 생명이 살고 있다.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아기를 품은 순간 아기도 그녀를 품기 시작했다. 과연 이 아기가 그녀의 미래일까? 지금 이 순간, 아기는 그녀의 유일한 재산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허리가 굵어지고 다리가 붓는 등 임신에 따른 신체 변화가 새롭고 신기했다. 황무지 같던 그녀의 몸에 외로운 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열심히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지만 나무를 심은 사람은 냉정하게 떠나버렸다.

그녀는 류성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출산하는 날을 상상해봤다. 어쩌면 자신을 분만실에 들여보내줄 사람이 류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인생이 결국 류성에게 맡겨지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그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밧줄이 있었다. 이 밧줄은 그녀의 육체와 정신을 꽁꽁 묶고 있다. 그녀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녀의 운명은 밧줄에 좌우되었다. 그 기묘한 밧줄은 여러 남자의 손을 거쳐 결국 류성의 손에 쥐어졌다. 이제 그녀는 류성에게 묶였고, 밧줄은 그녀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여기 있어. 넌 영혼을 잃었어. 그러니 내 말을 들어.”

무미건조한 거리에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은 맞춤옷처럼 그녀의 절망에 꼭 들어맞았다. 그녀는 죄수, 아기를 품은 죄수였다. 그녀는 인질, 불확실한 미래의 인질이었다. 그녀는 담보물, 운명의 손에서 이 낯설고 낡은 집으로 옮겨진 담보물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사용하던 부엌, 침대, 신발, 옷가지, CD플레이어 등이 이웃들에게 낱낱이 공개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들은 그녀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며 그녀의 숨겨진 사생활을 캐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참죽나무거리에 이미 선녀라는 이름까지 떠돌고 있으니 이제 와서 뭘 더 숨기겠는가? 
이제 그녀는 배 속의 아이말고는 정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불안보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 봐라! 맘대로 봐! 이런 보잘 것 없는 인생, 더 보잘 것 없는 인간들한테 다 보여주지, 뭐.’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고 얼마 전 쓰다 만 유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세상을 증오해! […]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증오해! 여기에 이어 쓴다면 뭐라고 써야 할까?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되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왜 머릿속이 하얀지 잘 알았다.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가야 하는지,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을 마주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그저 증오하는 것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볼록 솟은 자기 배를 보자 갑자기 우울해졌다. 아들이든 딸이든 어차피 팡 선생 자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모성은 아직 생기지 않았다. 가끔 사랑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감정이 느껴졌지만 대부분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과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왜 엄마가 되려 할까? 그녀는 수없이 많은 잘못된 선택으로 자기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 선택이 그 수많은 잘못 중 가장 어리석은 잘못이 될지도 모른다. 인생을 건 이번 도박에서 돈말고 무엇을 얻을 수 있나?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배를 응시하다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됐어! 다 필요 없어!”

지난밤에 진심을 토로한 후 맞이한 다음날의 여명은 달콤했다. 그녀는 이 여명의 달콤함을 충분히 누리고 싶었다. 세월이란 참 신기했다. 세월은 소녀 시절 그녀의 토끼장을 꼭 닮은 대형 토끼장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 안에 갇힌 한 마리 토끼가 되었고, 누군가 그녀를 지켜줬다. 지금 그녀는 이 대형 토끼장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락방을 비추는 여명 사이로 어렴풋이 바오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 집 위 아래층을 자유자재로 떠돌아 다녔다. 깊은 상처를 간직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주시했다. 감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켜주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난 벌써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사는지 알아? 혼을 잃어버려서야. 혼이 없어서 장수하는 거야. 혼이 없어서 건강한 거라고. 이 상황에서 굳이 혼을 찾는 건 할아버지보고 빨리 죽으라고 하는 거잖아?

“네 할아버지가 정신이 온전치 않은데 그렇게 오래 사시는 거, 할아버지가 네 발목을 붙잡는 거 싫지 않아?” “싫지 않아. 미쳤어도 내 할아버지잖아. 어쨌듯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야.”

“할아버지, 왜 이렇게 사리분별을 못해요? 할아버지는 혼이 없어서 이렇게 장수하는 거라고요. 할아버지 혼은 그냥 강물에 가라앉아 있는 게 좋아요.” 
“난 장수하고 싶지 않아. 혼 없이 살아가는 건 죄인이나 다름없어. 평생 죄인으로 살면서 다음 생을 기대했어. 내 혼이 강물에 가라앉아 있으면 난 다음 생에 물고기가 될 거야. 내가 평생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다음 생에 고작 물고기가 되란 말이야? 아가씨, 제발 내게 자비를 베풀어줘. 내 혼을 돌려줘.”

그녀는 자신과 선란의 운명을 비교해봤다. 누가 더 비극적이고 누가 더 불행한지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마약 몇 번 한 것뿐이야. 그냥 좀 타락한 것뿐이야. 그게 뭐 어때서? 그녀는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더 비뚤어졌다. 어차피 다 타락한 거야. 어떻게 타락하든 거지같은 건 다 똑같아!

“이길 수는 없어도 피할 수는 있겠지요? 난 떠납니다. 이 집은 다시 돌려드릴 테니, 여기서 뭘 하든 맘대로 하세요.” 
담장 귀신은 별말이 없었다. 침묵은 대략 긍정의 뜻이리라. 가든지 남든지 맘대로 하라는 뜻이리

“선녀야, 죽도록 후회되는구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류성을 감옥에 보내는 건데, 너한테 지은 죄를 그때 씻어냈어야 했는데. 선녀야, 선녀야. 난 널 때릴 생각도 없고, 욕할 생각도 없다. 그저 하나만 묻자. 류성이 죽었어. 이제 만족하니?” 
그녀는 부집게를 내던지고 발로 밟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아주 좋아요!”

미스 바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노영의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노영의 얼굴을 언제 볼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차오 원장 일행은 할아버지 품에 안긴 노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주 편안해보였다. 할아버지 품에 안긴 노영은 소문과는 달리 아주 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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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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