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인생

위화 저 / 백원담

《인생》은 망나니 같은 부잣집 도련님에서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푸구이라는 인물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해방 전후부터 약 40년간의 중국 역사를 가혹하다는 의식조차 없이 묵묵히 살아낸 중국 민초들의 삶을 ‘생명과 죽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기꺼이 인정한 작품으로, 위화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어판 개정판 서문 - 십 년 만의 만남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한국어판 서문 - 개인과 그 운명의 우정

원제 ‘살아간다는 것(活着)’

나는 진정한 작가가 찾으려는 것은 진리, 즉 도덕적인 판단을 배격하는 진리라는 걸 깨달았다. 작가의 사명은 발설이나 고발 혹은 폭로가 아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 첫문장
십 년 전에 나는 한가하게 놀고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촌에 가서 민요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어지러이 노니는 참새처럼, 시끄러운 매미 소리와 햇빛 가득한 시골 마을 들녘에서 빈둥거렸다.

- 끝문장
천천히 들판은 고요 속에 잠기고, 사방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노을빛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나는 이제 곧 황혼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두운 밤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단단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부름의 자세다. 여인이 자기 아들딸을 부르듯이, 대지가 어두운 밤을 부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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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시! 유칭! 게으름 피워선 안 돼. 자전! 펑샤! 잘하는구나. 쿠건! 너도 잘한다.”
[…]
“이 소는 도대체 이름이 몇 개나 됩니까?”
[…]
“소가 자기만 밭을 가는 줄 알까 봐 이름을 여러 개 불러서 속이는 거지. 다른 소도 밭을 갈고 있는 줄 알면 기분이 좋을 테니 밭도 신나게 갈지 않겠소?”

그들의 얼굴에 팬 주름에는 햇빛과 진흙이 꽉 들어차 있었고, 그들이 나를 향해 웃을 때면 그 텅 빈 입 속으로 몇 개 남지 않은 이가 보였다. 그들은 종종 탁한 눈물을 흘렸지만, 슬퍼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기쁠 때도, 심지어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때에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울고 나서는 시골의 진흙길처럼 거친 손가락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몸에 붙은 검불을 털어내듯 그렇게 말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젊었을 때 살았던 방식뿐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좋아했고, 자기 이야기 하는 걸 좋아했다. 마치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 또 한 번 그 삶을 다시 살아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 말씀이 사람은 즐겁게 살 수만 있다면 가난도 두렵지 않은 법이라 하셨지. 

다시 묻어주는 일 같은 건 없었어. 그런 지경에 이르면 누구도 죽은 사람의 뼈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거든. 아마 그 뼈들을 옆에 두고 잠을 잔다고 해도 악몽을 꾸는 일은 없었을 거야.

그런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어린 춘성도 두려움이 없어졌지. 하긴 그땐 두려움도 소용이 없었으니.

한 달쯤 총포 소리를 들으며 겨우 겨우 살다보니, 죽는다는 게 그리 두렵지 않았다네. 다만 내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어이없게 죽는다는 게 억울했을 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아찔한 기분이었다네. 옛날에 아버지와 내가 집안을 말아먹지 않았다면 그날 사형당할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었겠나.

“저는 복 같은 거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 

나는 자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네. 앞으로 우리가 또다시 헤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지.

“소도 늙으면 사람 나이든 거하고 똑같다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일단 한숨 쉬어야 뭘 먹을 수 있거든.”

나는 나 같은 놈이나 집안을 말아먹는다고 생각했지, 우리 대장도 그런 놈일 줄은 몰랐네. 그때 나는 백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인간들이 멀쩡한 기름을 지붕에 들이붓는 걸 봤어. 그 기름은 모두 우리 입에서 짜낸 건데, 그렇게 불태워 없애다니.

생각해보니 그것도 다 운명이더구먼. 다만, 그 쓰디쓴 운명을 쑨 선생이 당한 것뿐이지. 자전은 우리가 쑨 선생한테 재앙을 밀어낸 거라고 여겼다네. 나도 그랬고 말이야. 하지만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네. 

“재앙이 그를 찾아간 거지, 우리가 그 사람한테 밀어낸 거라 할 수는 없소.”

대장은 현에서 양식을 보내줄 거라 했지만 양식이 오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다 믿을 수는 없게 된 거지. 믿지 않는 것이기도 했고, 감히 믿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나날들을 어떻게 살아갈지 누구도 자신할 수 없었거든.

“나 아직 죽지 않았다구요. 당신 날 죽은 사람 취급하는군요.” 

어찌 할 방법이 없었지. 여자란 사람들은, 한번 화가 나면 못 하는 일도 없고 못 하는 말도 없다네. 내가 일을 못 하게 하니까 자기를 내치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야.

“유칭은 이제 이 길을 달려올 수 없겠군요.” 

난 구불구불 성안으로 난 작은 길을 바라보았지. 내 아들이 벗은 발로 뛰어가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네. 달빛만 처연하게 길을 비추는데, 마치 그 길 가득 하얀 소금을 흩뿌려놓은 것 같았어.

“사람은 이 네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네.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잠은 아무데서나 자서는 안 되며, 문간은 잘못 밟으면 안 되고, 주머니는 잘못 만지면 안 되는 거야.”

집안에서 한꺼번에 두 사람이나 없어지면, 앞으로 얼마나 살기가 어렵겠나. 솥의 반쪽이 부서져나간 거나 다름없지. 그 솥은 이미 솥이 아니고, 그런 집도 집이라 할 수 없지 않겠나.

“푸구이, 배고파요. 죽 좀 끓여주세요.” […]
사람이 뭔가를 먹고 싶어 하면, 이제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거라네.

“모두 이리로 와서 마오 주석의 훈화를 들으시오.” 

우리는 평범한 백성들이었지. 나라 일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다네. 우리는 모두 대장의 말을 들었고, 대장은 상부의 말을 들었지. 상부에서 뭐라고 말을 하면,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렇게 행동했다네.

우리는 한평생 제법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았지. 사람도 때가 되면 익어야 하는 법이라네. 배가 다 익으면 땅으로 떨어지듯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지. 하지만 우리는 펑샤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어. 펑샤는 남들과 다른데, 그 애가 늙으면 누가 보살펴줄지.

자전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웃는 얼굴로 울음을 터뜨렸지. 눈물이 내 목을 타고 흘러 내렸다네. 그녀가 말했어. 

“당신이 돌아온 다음 모든 게 다 좋아졌어요.”

“다 늙어서 신발에 진흙 묻는 걸 신경 쓰나?”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사람은 늙어도 사람이잖아요. 자고로 사람은 깔끔해야 하는 법이라구요.”

검고 큼지막한 두 그림자가 하나는 눕고, 다른 하나는 꿇어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어. 움직이는 거라고는 얼시의 눈물뿐이었다네. 나는 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두 그림자 사이에서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모습을 봤지.

“내 한평생도 이제 다 끝나가네요.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니, 나도 마음이 흡족해요. 나는 당신을 위해 두 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다음 생에서도 우리 같이 살아요.” 
다음 생에서도 내 아내가 되고 싶다는 말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지. 그 눈물이 자기 얼굴에 떨어지자 자전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펑샤와 유칭 둘 다 나보다 앞서 떠났으니 내 마음도 편안하네요. 더 이상 그 애들 때문에 마음 졸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쨌든 나도 어미였고, 두 아이 모두 살아 있을 때 나한테 지극정성이었으니 사람이 그 정도 살았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죠.”

“자전은 죽기도 잘 죽었다구.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깨끗하게 말이야. 죽은 뒤에 아무런 시비도 남기지 않았지. 죽고 나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여자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우는 소리가 길면 배가 고픈 거구요, 짧으면 엉덩이 쪽이 불편한 거예요.” 

정말 그렇더군. 쿠건이 똥을 싸거나 쉬를 한 뒤 앙 하고 우는데 처음에는 꼭 웃는 것처럼 들렸다네. 그렇게 어린 아이가 다르게 울 줄 알았던 건 아마 제 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이었겠지. 자기가 뭘 원하는지를 제 아비가 단번에 알게 했으니, 얼시는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들볶일 필요가 없었다네.

“이 닭들이 자라면 거위가 되고, 거위는 자라서 양이 되고, 양은 또 소가 된단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부자가 되는 거지.” 

녀석은 그 말에 깔깔 웃어대더니, 그 몇 마디를 완전히 외워서는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올 때마다 노래처럼 흥얼거렸어.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나도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네.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만인 거야. 내 주검을 거둬줄 사람을 구태여 바랄 필요가 없단 말일세. 마을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는 와서 묻어줄 거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냄새가 나서 견딜 수가 없을 테니. 나는 남들한테 공짜로 나를 묻어달라 하지는 않을 거라네. 베개 밑에 십 위안을 넣어뒀는데 그 돈은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건드리지 않을 거야. 마을 사람들 모두 그 돈이 내 시체를 거둬줄 사람 몫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 또 내가 죽은 다음 자전이랑 우리 애들이랑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말이야.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아옹다옹해봐야 자기 목숨이나 내놓게 될 뿐이라네. 나를 보게나. 말로 하자면 점점 꼴이 우스워졌지만 명줄은 얼마나 질기냔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가 죽으면 또 하나가 죽고 그렇게 다 떠나갔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소는 인정이 통하는 동물이라 오는 길에 놈은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걸 안다는 듯이 몸뚱이를 연신 내 몸에 기대며 아주 친한 듯 굴었지.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다네. “너 그렇게 좋아하지 마라. 내가 너를 끌고 가는 건 일을 시키려는 거지, 네놈을 아버님 모시듯 봉양하려는 게 아니야.” 

“오늘 유칭과 얼시는 한 묘를 갈았고, 자전과 펑샤는 칠 할에서 팔 할 정도 갈았고, 쿠건은 아직 어려서 반 묘를 갈았단다. 네가 얼마를 갈았는지는 내 말하지 않으마. 그걸 입 밖에 내면 내가 너한테 무안을 준다고 여길 테니까. 돌려 말하자면 너는 나이가 많으니 이 정도 가는 데도 온 마음과 힘을 다 썼다고 볼 수도 있지.”

해설

인생이라는 장도에는 큰 난관이 두 가지 있다. 갈림길과 막다른 궁지가 그것이다.

운명의 존재를 인정하되, 그 거대한 힘에 그저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거부하고, 새롭게 개척하고, 그러면서 운명의 길과 자기 삶의 길을 허허롭긴 해도 나란히 함께 걸어가는 그 담담함의 미학.

주체적 오독(誤讀)

소설 속에서 개인과 그의 운명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그 개인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개인이고 집체로서의 가족이다. 따라서 그 운명은 역사적 현실이 된다.

삶이란 이 원론과도 같은 사랑과 우정을 힘으로 운명, 역사적 현실 앞에 때로는 물러서기도 하지만 결코 늦출 수 없는 긴장 속에서 이마를 맞대고 나아가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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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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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iiii668

    안녕하세요 에스라님^^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이 똭! 아주 오래전에 허삼관 매혈기, 가랑비속의 외침을 잼나게 읽었었는데 명절이라 집에왔거든요 찾아서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인생도 형제도요^^ 언제와도 풍요로운 에스라 월드 넘나 좋은곳! 에스라님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

    2019.09.12 18:06 [ ADDR : EDIT/ DEL : REPLY ]
    • 안녕하세요, hiiii668님! 명절 즐겁게 보내셨나요? 한동안 중국소설을 좀 읽었는데, 위화를 빼놓을 순 없겠죠.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여긴 너~~무 조용하거든요.^^
      가을 풍성하게 마무리하세요.

      2019.09.14 10:27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