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백의 그림자

황정은

폭력적인 이 세계에서 그림자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쓸쓸하고 따뜻하고 애잔한 사랑 이야기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의 작가 황정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도심 한복판의 40년 된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두 남녀, 은교와 무재의 사랑 이야기다. 재개발로 전자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오게 되고,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내력이 하나씩 소개된다. 그 와중에 이 소설은 시스템의 비정함과 등장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인지 묻는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마요.

 

우리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요.

글쎄요.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죽지 않을까요.

죽나요.

어디서든 언젠가는 죽겠지만 나가지 못한다면 나가지 못한 채로 죽겠죠.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무서워요?

.

성큼성큼 걸어가며 무재 씨가 말했다.

무서워요, 나도.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가마와

가마와

가마는 아닌 것

 

그림자에 이빨이 있나요? 이빨 달린 것에 붙은 놈이니 당연히 있지 않겠어?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번엔 틀림없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틀림없다는 그 계산, 틀리지 않은 적이 있었나.

이번엔 다릅니다.

뭐가 달라.

틀림이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유곤 씨는 뭘 하러 왔던 걸까요, 라고 물으면 외로워서 들른 거라고 여 씨 아저씨가 말했다.

유곤 씨가 외로운가요?

외롭지.

수리실을 자주 드나드는 상가 오디오 상인 중엔 저런 자에게 뭘 돈을 주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여 씨 아저씨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눈치였다.

 

입을 먹는

 

그런데 말입니다, 라고 유곤 씨가 말했다.

쥐며느리가 정말 물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입이 있는데, 어째서 물지 않습니까. 입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깨문다는 의미인데 말입니다.

 

고함도 질러 보고 팥도 던져 보고 갖은 노력을 해 보았지만 이런 것은 그림자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 무서워, 무서워, 하면서도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전

 

이상한 악의를 무심한 듯 버티는 것도 무상해지고, 무리 틈에서 더는 애를 쓰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동의 차례가 되면 우리도 임시 상가로 가느냐고 나는 물었다. 여 씨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도 돈이 있어야 가지.

그러면 어디로 가나요?

다동으로 가야지, 라고 여 씨 아저씨가 말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모르도록 어두워지자,

 

아버지는 죽어서 빚을 남기고 소년은 빚을 갚으며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이므로.

그렇게 되나요.

빚을 갚기 위해 빚을 지고,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지고, 전심전력으로, 그 틈에 점점 불어나는 먹고사는 비용의 빚을 져 가는 일의 연속.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무재 씨도 그런 것을 사 본 적 있나요.

가끔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오무사

 

빽빽하다. 라는 말의 이미지 사전을 만든다면 아마도 그런 광경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빽빽하다.

라고 생각한 뒤엔 아무런 말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눈앞이 빽빽했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항성과

마뜨료슈까

 

마뜨료슈까는요, 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 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사람이란 어느 조건을 가지고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건, 어느 정도로 공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인생에도 성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본래 허망하니, 허망하다며 유난해질 것도 없지 않은가, 하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대학에 다닌 적이 있었어요?

다녔지만 금방 그만뒀어요.

빚을 져 가며 배울 만한 내용은 아니라는 생각에.

 

버려진 염전은 왠지 붉었다. 먼 바다를 향해 꿈에서 본 것처럼 띄엄띄엄 이어진 섬들은 송전탑을 하나씩 이고 있었다. 섬도, 송전탑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가까이 있는 듯하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 조금씩 사라지는 듯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전류가 바다를 건너 어디로 이어진 것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무재 씨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하늘이 굉장하네요.

.

나는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 인간은 역시 유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별이요?

시끄럽고 분주하고 의미도 없이 빠른 데다 여러모로 사납고.

……무재 씨, 그건 인간이라기보다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 같아요.

도시일까요?

하며 무재 씨가 웃었다.

아무튼 이런 광경은 인간하고는 너무도 먼 듯해서, 위로가 되네요.

 

너무 어두워서요, 밤이니까 어둡죠, 그게 아니고요, 너무 어두워서, 정말로 밝은 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무재 씨.

무재 씨.

걸어갈까요?

라고 말하자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나루터로.

……이렇게 어두운데 누굴 만날 줄 알고요.

만나면 좋죠, 그러려고 가는 거잖아요.

만나더라도 무재 씨, 그쪽도 놀라지 않을까요, 우리도 누구라서, 라고 말하자 무재 씨가 고개를 기울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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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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