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소설/희곡 2020. 1. 11. 15:34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저/김화영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어두운 기억의 거리를 헤매는 한 남자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정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작이자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파트릭 모디아노의 대표작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퇴역 탐정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여정을 그린 소설로, 흥신소의 퇴역 탐정인 작중 화자는 조...

 

 

첫 문장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

나는 프레디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우리들의 사진들을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어린 시절의 게이 오를로프의 사진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다른 끝, 오랜 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 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소녀가 멀어져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 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위드는 입구의 문을 열었고 나는 현관의 불을 껐다. 층계참에서 위드는 문을 닫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쾅하고 닫히는 문의 금속성이 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생애의 어떤 기나긴 시기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 나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 말입니다…….” […]

그렇지만 이거 봐요, . 나는 그것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지요?” 하고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물었다.

우리는 날짜 같은 것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서요.”하고 소나쉬체가 말했다. “하여간 새까만 옛날이죠……”

 

밤이 내리고 있었다.

 

정말 이 모든 기념될 사진들을 간직해두고 싶지 않으세요?”하고 내가 물었다.

아뇨, 그건 이제 당신 겁니다. 횃불의 바통을 당신에게 넘기는 겁니다.”

 

국적을 갖는다는 것은 그녀의 강박관념이었으니까요……

 

거기 강변로의 나무들 아래서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무엇 때문에 이미 끊어진 관계들을 다시 맺고 오래전부터 막혀버린 통로를 찾으려 애쓴단 말인가?

 

우리는 현대 미술관 앞 광장을 건너가서 층계 위에 앉았다. 나는 그 아래 뉴욕 가를 따라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유일한 표시였다. 우리들 주위의 모든 것이 황량하게 굳어 있었다. 심지어는 저쪽, 센 가의 반대편에서 바라보곤 했던 에펠탑, 평소에는 그토록 이나 마을을 가라앉게 해주던 에펠탑마저도 메마른 쇠붙이 덩어리같이 보였다.

 

당신은 그 여자가 너무 늦어지기 전에 사라져버리길 잘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기이한 사람들. 자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

 

나는 식도락 비평가입니다.” […]

나는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입니다…… 내 생활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항상 먹어야만 하니 말입니다.”

 

우리는 불행한 가문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운이 없었어요…… 내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먹고살기 위하여 하는 일이 뭔지 좀 보세요……”

 

그는 상자를 집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스티오파 드 자고리에프와 그 역시 나에게 주었던 빨간 상자를 생각했다. 결국 모든 것이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담았던 낡은 상자들 속에서 끝이 나는 것이었다. 혹은 담배 상자 속에서.

 

글자들이 춤을 춘다. 나는 누구일까?

 

침묵과 공허.

 

당신은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를 몰랐습니까?”

몰라요.”

게이 오를로프도요?”

몰라요.”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은 벽으로 막힌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의 친구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도대체 므제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여자가 나에게 이 질문을 어찌나 강요하는 듯한 어조로 물어왔는지 나는 처음으로 절망감에, 아니 절망감보다도 더한 감정, 모든 노력, 모든 유리한 점, 모든 선의에도 불구하고 넘을 수 없는 장애물에 부딪히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느껴지는 그런 충격에 사로잡혔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금방 꾼 꿈을 되살리기 위하여 붙잡으려 애써도 도무지 붙잡히지 않는 덧없는 꿈의 조각들처럼, 어떤 인상이 번뜩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에 습관적으로 그곳을 드나들다가 그 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 같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의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흩어진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왜 과거의 어떤 것들은 사진처럼 정확하게 불쑥 솟아나는 것일까?

 

어제저녁에 그 거리들을 훑어 지나가며 나는 그 거리들이 전과 다름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건물들도 거리의 폭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는 빛이 달랐었고 다른 무엇이 대기 속에 떠돌고 있었다……

 

어떤 상점 유리창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은 보랏빛 감도는 반사 광선을 제외하고는 캉봉 가에는 불빛 하나 없다. 나의 발걸음이 인도 위에서 울린다. 나는 혼자다. 다시 공포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미라보 가를 내려갈 때마다 느끼는 그 공포감. 누가 나를 알아보고 나를 불러 세워 증명서를 보자고 할 것만 같은 공포감. 목적지를 십여 미터 앞두고 그렇게 된다면 억울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뛰어가서는 안 된다. 규칙적인 걸음으로 끝까지 걸어야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거리감을, 풍경에서 오는 어떤 정일한 슬픔을 느꼈다.

 

어떤 것의 몇 개의 조각들, 한 귀퉁이들이 갑자기 탐색의 과정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이었어요…… 하기야 따지고 보면, 어쩌면 바로 그런 것이 인생일 테지요……

이것이 과연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것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해설 - 잃어버린 과거의 신기루를 찾아서(김화영)

 

과거, 사라짐, 공허, 부재하는 자의 자취를 추적하기, 두려움, 정체성의 위기.

 

그의 기억이 그를 한 집단과 이어주는 끈이라는 사실, 그의 기억의 모험이 그 인물 자신을 초월하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낸다는 사실.

 

그가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한 시대의 기억, 아니 어떤 인간 조건 자체다.

 

잃어버린 시간은 산산조각난 삶의 편린이며 슬픔이 가득 담긴, 그러나 아름다운 기억의 어둠이다. 그의 인물들은 망각과 고독과 침묵으로 구멍 뚫린 존재들이다.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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