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소설/희곡 2020. 1. 15. 16:27
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은 서른 살의 나이에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가 죽기 일 년 전에 발표한 유일한 소설. 황량한 들판 위의 외딴 저택 워더링 하이츠를 무대로 벌어지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 에드거와 이사벨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잔인한 복수를 그린 이 작품은 작가가 ‘엘리스 벨’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을 당시에는 그 음산한 힘과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는 야만성 때문에 반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그녀의 언니 샬럿마저도 1850년에 출판된 소설의 서문에서 "어줍잖은 작업장에서 간단한 연장으로 하찮은 재료를 다듬어 만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에밀리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이 한 편의 소설과 완성되지 않은 단편적인 문장을 포함한 193편의 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불후의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 작품 『폭풍의 언덕』에서 보이는 빛나는 감수성과 시적이고 강렬한 필치, 그리고 새로운 문학사적 의의 때문이다. 백 년이 지난 오늘 이 소설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멜빌의 『백경』과도 곧잘 비교될 만큼 깊은 비극성과 시성(詩性)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첫 문장

1801 - 집주인을 찾아갔다가 막 돌아오는 길이다. 이제부터 사귀어가야 할 그 외로운 이웃 친구를. 여긴 확실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영국을 통틀어도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이렇게 완전히 동떨어진 곳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을 싫어하는 자에겐 다시없는 천국이다.

 

마지막 문장

무덤을 찾아보았더니, 벌판에서 가까운 언덕배기 위로 비석 세 개가 이내 눈에 띄었다. 가운데 것은 회색이었고 히스에 반쯤 묻혀 있었다. 에드거 린튼의 것만 비석 밑의 잔디와 이끼 때문에 어울려 보였다. 히스클리프 것은 여전히 벌거벗고 있었다.

나는 포근한 하늘 아래 그 비석들 둘레를 어슬렁거렸다. 히스와 초롱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방들을 지켜보고, 풀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렇게 조용한 땅속에 잠든 사람들을 보고 어느 누가 편히 쉬지 못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아름다운 자태와 기막히게 예쁜 얼굴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희디흰 살결, 곱다란 목덜미에 흩어져 있는, 황갈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금빛이 나는 곱슬머리, 그리고 두 눈은 표정만 상냥했던들 사람을 매혹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다정다감한 나의 마음을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눈이 나타내고 있는 감정이란, 그 눈매에는 이상하게도 어울리지 않게, 경멸과 일종의 절망 사이를 방황하는 것 같았다.

 

헤어튼에게는 학대할 맛이 날 만큼 소심한 감수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거겠지요. 그는 헤어튼을 짐승 같은 인간으로 만들려는 악의를 품었던 모양이었어요.

 

“참 이상하지요.”

“습관이라는 것이 우리의 취미나 관념을 만들어버리니까요.”

 

“당신이 말하는 그 히스클리프 부인이란 내 며느리요.”

[…]

그의 안면 근육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심중을 나타내지 못할 정도로 비뚤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미움의 표정이었다.

 

“오신 길로 해서 가세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고서 초 한 자루를 들고 그 길쭉한 책을 펴놓고 의자에 앉았다. “간단한 충고지만 그 이상 확실한 충고를 드릴 수 없답니다.”

 

거기 있으면 영락없이 악마가 우리를 데려갈 거라고 조셉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따로따로 구석을 찾아가 악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사교의 즐거움을 찾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버렸으니까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벗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요.”

 

“들어와! 들어와!” 그는 흐느꼈다. “캐시, 제발 들어와. , 제발 한 번만 더! ! 그리운 그대,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주오. 캐서린, 이번만은!”

그러나 유령은 유령다운 변덕을 보였다. 그것은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과 바람만이 사납게 회오리치며 들어와, 심지어는 내가 있는 데까지 불어 들어와서 촛불을 꺼버렸다.

 

인간이란 얼마나 허황한 바람개비같이 변덕스러운 존재인가! 세상과 모든 관계를 끊으려 결심하고 마침내 관계를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는 장소를 발견하여 내 운명에 감사한 나였건만, 약한 인간인 나머지 어두워질 때까지 우울과 고독과의 싸움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칠기는 톱니 같고 여물기는 차돌 같죠!

 

캐시 아가씨와 힌들리 도련님은 저를 몹시 괴롭혔지만, 그는 불평 한마디 없이 양처럼 순했어요. 얌전해서가 아니라 강해서 말썽이 없었던 거지요.

히스클리프는 살아났어요.

 

그것은 그 아이에게도 좋지 않았지요. 우리 가운데서도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은 주인어른의 짜증을 듣고 싶지 않아서 히스클리프에 대한 편애에 부채질을 하였고, 그 부채질은 히스클리프에게 오만과 나쁜 성미를 길러주었으니까요.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말괄량이기는 했지만 그 근방에서 가장 눈이 아름답고 웃음이 앳된, 발걸음이 가벼운 아가씨였답니다. 그리고 결국 별로 악의도 없었지요. 일단 누구를 울려놓고도 대개는 그 옆에서 달래느라 붙어 있어서 도리어 아가씨를 위로하기 위해 이쪽에서 울음을 그쳐야만 하는 판이었으니까요.

 

그 아이들은 둘 다 들짐승처럼 거칠게 자라날 게 뻔했어요. 젊은 주인은 자기 눈에 띄지만 않으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무슨 짓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으니까요. […] 그분이 그러한 책망을 듣고 한 일은 히스클리프에게는 매질이었고, 캐서린 아가씨에게는 점심이나 저녁을 굶으라는 명령이었어요.

 

늙은 린튼 영감과 그 부인은 없었어. 에드거와 그의 누이밖에 없었어. 그들이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 우리 같으면 천국에라도 있는 듯한 기분이었을 거야!

 

히스클리프. 나를 잊어버렸어?” 아가씨가 그렇게 묻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았지요. 수치심과 자존심이 그의 얼굴에 이중의 어둠을 던져 그가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모두들 아가씨를 너보다 소중히 하니까 네가 시기하는 것 같아.” 저는 말했습니다.

캐서린 아가씨를 시기하는 것 같다는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를 슬프게 한다는 말은 분명히 알아들은 것 같았어요.

캐시가 슬프대?” 그는 매우 심각한 얼굴로 물었어요.

네가 오늘 아침 다시 나갔대니까 아가씨가 울었어.”

나도 간밤에 울었단 말이야.” 그는 대답했어요. “캐시보다도 내가 울 이유가 더 많지.”

“그래, 네가 오기로 밥도 먹지 않고 자러 간 것도 이유가 있었겠지.” 저는 말했습니다. “오만한 사람들은 스스로 슬픈 일을 만드니까.”

 

“그렇지만 넬리, 내가 그 녀석을 스무 번쯤 때려눕힌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그 녀석이 덜 멋있어지고 내가 더 멋있어지지는 않겠지. 나도 머리 색이 엷고 살결이 희었으면. 그리고 그 녀석처럼 옷 잘 입고 행실 점잖고 그만큼 부자가 될 기회가 있다면 좋겠는데!”

[…]

너의 아버지는 중국의 황제이고 너의 어머니는 인도의 여왕이고, 두 사람 각자가 한 주일의 수입으로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 저택을 한꺼번에 살 수 있을 만큼 부자인 거야, 그럴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너는 고약한 뱃사람들에게 납치되어 영국으로 오게 된 거야. 만약 너 같은 처지라면, 나는 내 태생이 귀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면 하찮은 농부의 천대를 받는다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만한 용기와 위엄을 얻게 될 거야!”

 

“힌들리에게 어떻게 복수를 해줄까 생각하고 있었어. 언젠가 할 수만 있다면 기다리는 것쯤 괜찮아. 제발 나보다 먼저 죽지나 말았으면!”

창피한 줄 알아, 히스클리프!” 저는 말했습니다. “고약한 사람들을 벌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야. 우리는 용서를 배워야지.”

“아니야, 하나님은 내가 맛볼 만족감을 맛보시지는 못할 거야.” 그는 대꾸했어요. “나는 제일 좋은 방법을 알고 싶을 뿐이야! 나를 가만히 놔둬. 생각해 내게. 복수를 생각하는 동안엔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같은 거미라도 보통 집에 줄을 치면 반갑지 않지만, 감옥에서 줄을 치면 거기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것처럼 나로서는 도시 사람들은 재미가 없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매우 재미있소. 그러면서도 이 고장 사람들에게 깊은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처지 때문은 아니오. 이 지방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좀 더 깊숙한 자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도시 사람들처럼 껍데기뿐인, 분주하고 하잘것없는 외적인 사물에 별로 마음 쓰지 않으면서 살고 있소.

 

주인의 고약한 행실이나 나쁜 친구들이, 캐서린 아가씨와 히스클리프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지요. 히스클리프에 대한 그의 학대란 성인(聖人)도 악마로 만들기에 족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정말 그 무렵 그 아이는, 마치 악마라도 씐 듯했어요. 그 아이는, 힌들리 서방님이 구할 길 없이 타락해 가는 것을 보고 좋아했지요. 그리고 날로 점점 더 음흉스럽고 영악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답니다.

 

캐시 아가씨는 그 고장의 여왕과도 같았어요.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던 터라 아가씨는 거만한 고집쟁이가 되었답니다. 제가 그 오만을 누르려다가 자주 아가씨의 화를 돋우기도 했지요. 그러나 아가씨는 저를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아가씨에게는 이상하리만큼 옛 친구에게 한결같은 데가 있었지요. 히스클리프조차 변함없이 아가씨의 애정을 차지했을 정도니까요. 린튼 도련님은 그렇게 월등하면서도 그만큼 캐시 아가씨의 마음을 끌기는 어려웠어요.

 

집 사람들이 있는 데서는 거친 면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한결같이 예의 바른 사람들 앞에서 무례하게 구는 것은 창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묘하게 처신해서 자기도 모르게 린튼 부부를 속였던 거지요. 이사벨라 아가씨를 탄복게 했고, 그 오빠의 마음을 전적으로 사로잡았지요. 이렇게 그 남매의 호감을 산 것은 처음부터 아가씨에게는 기쁜 일이었어요. 아가씨는 꼭 누구를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차차 이중인격을 갖게 되었지요.

 

에드거 도련님이 찾아오는 것을 캐서린 아가씨는 싫어했던 것 같아요. 아가씨는 수완도 없었고, 아양을 떠는 일도 없었으며, 분명 에드거 도련님과 히스클리프가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요. 히스클리프가 린튼 도련님 앞에서 경멸감을 표시할 때에도 본인이 없는 데서 하는 것처럼 맞장구를 칠 수가 없었고, 린튼 도련님이 히스클리프에 대한 혐오나 반감을 보일 때에도 어릴 적 친구를 깎아내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 들어 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타고난 무뚝뚝한 성품이 과장되어서 거의 바보처럼 지나치게 붙임성 없는 침울한 성격으로 변해 버렸어요. 그리고 많지도 않은 아는 사람들에게 존경보다는 차라리 미움을 품게 하는 데 이상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한쪽은 들어서고 한쪽은 나가는데, 틀림없이 캐서린 아가씨는 그 두 친구 사이의 차이를 눈치 챘을 거예요. 두 사람의 대조는 황량한 언덕배기 탄광 지대를 본 다음에 아름답고 기름진 골짜기에 들어서는 것과도 같았거든요. 게다가 에드거 도련님은 듣기 좋은 음성으로 나직하게 말했고, 그 말투가 주인님 같은 도시 사람들과 같았지요.

 

저 인정머리 없는 녀석, 이리 와. 인심 좋고 늘 속기만 하는 아비를 속이는 법을 가르쳐주지. 그런데 저 녀석, 귀라도 잘라주는 게 보기 낫지 않을까? 귀를 자르면 개도 더 영악해 보이지. 난 영악한 게 좋단 말이야. 가위를 가져와. 영악하고도 깔끔한 게 좋아! 게다가 귀를 소중히 하는 것은 돼먹지 않은 겉치레이고 지독히 건방진 거야. 귀 같은 건 없어도 우린 원래 바보야.

 

“아가씨는 성미가 까다로워요. 친구는 그렇게 많고 걱정은 그렇게 적은데도 만족할 줄을 모르잖아요!”

 

“우선 무엇보다도 에드거 도련님을 사랑하세요?”

[…]

아가씨는 에드거 도련님이 잘생기고, 젊고, 명랑하고, 돈 많고,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죠. 하지만 마지막 이유는 아무 뜻이 없어요. 아마 그것이 없이도 아가씨는 사랑할 거예요. 그리고 설사 그분이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앞의 네 가지 매력이 없다면 아가씨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만약 현재만을 생각해서 결혼해도 좋다면 조금도 틀리지 않았어요. […]그러니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는데 어디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에요?”

여기에! 그리고 여기에도!” 캐서린 아가씨는 한 손으로는 이마를 치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치면서 대답하는 것이었어요. “어느 쪽에 영혼이 들어 있든 영혼에 물어봐도 가슴에 물어봐도 틀렸다고만 생각되는 거야!”

 

“내가 만약 천국에 간다면, 넬리, 나는 지극히 불행할 거야.”

아가씨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지요.” 저는 대답했어요. “죄지은 사람들은 모두 천국에서는 불행하니까요.”

 

저 방에 있는 저 고약한 사람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던들 내가 에드거와 결혼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나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거고,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전혀 다른 거야.”

 

“만약 히스클리프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면 그보다 불행한 사람은 없어요! 아가씨가 린튼 부인이 되기만 하면 그는 친구와 모든 것을 잃어버리니까요! 아가씨는 그와 헤어지는 걸 참을 수 있을지, 또 그가 이 세상에서 외톨이가 된다는 걸 어떻게 참을 것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것은 캐서린 아가씨…….”

그가 외톨이가 된다고! 우리가 헤어진다고!” 아가씨는 화가 난 어조로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갈라놓는단 말이야? 그따위들은 밀로와 같은 꼴이 될 거야!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그를 버리지 않아, 엘렌. 그 누구를 위해서도. 린튼 가문의 사람이 지상에서 모조리 사라지더라도 히스클리프를 버릴 생각은 없어. , 전혀 그럴 생각 없어. 그럴 작정은 아니고말고! 그러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면 나는 린튼 부인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히스클리프는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내겐 소중해! 에드거는 그를 싫어해선 안 되고 적어도 그에게만은 너그러워야 해. 히스클리프에 대한 나의 진정을 알면 그도 그렇게 할 거야. 넬리, 넬리는 나를 지독히 이기적인 계집애라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우리가 거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내가 린튼과 결혼한다면 히스클리프가 오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울 수가 있어.”

아가씨 남편의 돈으로 말이죠, 캐서린 아가씨?” 저는 물었어요. “그분은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하지는 않을 거예요. 게다가 나로서는 뭐라고 할 수 없지만 린튼 도련님과 결혼하는 동기로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 가운데서도 그게 제일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 아가씨는 반박했습니다. “그것이 제일 훌륭한 동기지! 다른 동기는 내 변덕을 만족시키는 것들이었고, 에드거를 위해서도 만족할 만한 거야. 하지만 이것은 에드거나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느낌을 몸소 이해해 주는 사람을 위한 것이거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당신이든 누구든 자기를 넘어선 삶이 있고, 또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이 지상만의 것이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내게 큰 불행은 히스클리프의 불행이었어. 그리고 처음부터 나도 각자의 불행을 보고 느꼈어.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생각한 것은 히스클리프 자신이었단 말이야.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그러니 다시는 우리가 헤어진다는 말은 하지 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만일 오빠가 그를 내쫓는다면 나도 그와 함께 가겠어요. 하지만 기회는 없을 거예요. 그는 가버렸을 테니까.”

 

우리 인간이란 결국은 자기 본위가 되고 마는가 보죠. 순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 해도 거만한 사람보다는 더 정당하게 이기적이라는 차이뿐이지요. 그리하여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서로 상대가 자기의 이해를 자기 위주로 생각해 주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을 때 그분들의 행복은 끝장이 났던 거랍니다.

 

“그분에게 히스클리프 칭찬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어릴 적에도 서로 싫어했으니 히스클리프도 그분을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 마찬가지로 싫을 거예요. 그것이 인간이니까요. 둘 사이에 싸움을 일으키고 싶지 않거든 그분 앞에서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요, 아씨. 그분들이 아씨의 비위를 맞추는 거죠. 그분들이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뻔하거든요. 그분들이 아씨 소원을 들어주려고 애쓰니까 아씨도 그분들의 일시적인 변덕을 너그럽게 봐주실 수가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양쪽이, 같은 정도로 중요한 일에 부딪치면 결국은 싸우실지도 몰라요. 그러면 아씨가 약하다고 말씀하시는 그분들도 아씨 못지않게 고집을 부릴 수도 있는 거예요.”

 

“그는 생각하지 마요, 아가씨.” 저는 말했습니다. “불길한 징조를 가지고 오는 새 같은 사람이죠. 아가씨의 짝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정직한 사람들은 자기가 한 짓을 감추지 않아요

 

“쉿!” 캐서린 아씨는 안쪽 문을 닫으면서 말했어요. “나를 흥분시키지 마. 왜 내 부탁을 무시했지? 아가씨가 일부러 당신한테 접근한 거야?”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는 으르렁거렸어요.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내게는 입을 맞춰줄 권리가 있지만 당신이 반대할 권리는 없어. 나는 당신의 남편이 아니야. 내게 질투할 자격 없어!”

당신한테 질투하는 게 아니야. 당신을 위해서 질투하는 거야. 얼굴을 펴. 날 보고 찌푸리지 말고! 이사벨라가 마음에 들거든 결혼시켜 줄게. 하지만 정말 좋아해? 똑바로 말해 봐. 저 봐, 대답하려 하지 않지.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해!”

 

“당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니야.” 히스클리프는 조금 누그러져서 대답했어요. “그럴 계획은 아니야. 폭군이 노예들을 학대해도 노예들은 반항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 밑에 있는 자들을 못살게 굴지.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재미나거든, 나를 죽도록 골려도 좋아. 대신 나도 마찬가지로 재미 볼 수 있게 해줘.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나를 모욕하진 말아줘. 내 궁전을 헐고 대신 오막살이를 세워주고는 내게 집을 지어줬다고 우쭐해서 생색내지 말란 말이야.” […]

“아, 내가 질투하지 않는 게 나쁘다는 거지? 그렇다면 다시는 당신한테 아내를 권하지 않겠어. 그것은 어차피 지옥으로 갈 사람을 사탄에게 데려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당신은 사탄과 같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게 재미나는 거지. 당신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어.”

 

공격할 용기가 없으면 사과를 하든지 두들겨 맞든지 해요. 그러면 실력 이상으로 허세 부리는 버릇이 고쳐질 테니.

 

“제발, 이제 그 이야기는 하지 마요. 당신의 차가운 피는 아무리 해도 뜨거워지지가 않는군요. 당신의 혈관은 얼음물로 가득 차 있지만 내 혈관은 끓고 있어서 그렇게 찬 것을 보면 더욱더 끓게 돼요.”

[…]

“대답을 해야만 해. 당신의 끓는 피도 겁나지 않아. 당신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 못지않게 냉철하다는 걸 알았어. 지금부터 히스클리프를 버리겠어, 그렇지 않으면 나를 버리겠어? 당신은 동시에 내 친구도 되고 그의 친구도 될 수는 없어. 그리고 나로선 당신이 어느 쪽을 택하든지 꼭 알아야겠어.”

 

그런데 넬리는 나(캐서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네. 좀 이상해! 모든 사람이 서로 미워하고 멸시하더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 뒤에는 모두 돌아서서 적이 되거든. 정말 그렇단 말이야,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싸늘한 얼굴에 둘러싸여 죽는다면 얼마나 쓸쓸하겠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어줘. 잠드는 게 두렵고 꿈꾸는 게 무서워.

 

창밖에 서 있는 전나무를 잡아 흔들던 그 바람 소리, 그 바람을 쐬게 해줘. 바로 저 벌판으로 불어오니까, 그 바람을 한 번만 들이마시게 해줘!

 

왜 그렇게 미칠 듯이 슬펐는지는 모르겠어. 틀림없이 일시적인 정신 착란이었을 거야. 별다른 원인이라곤 없었으니까. 그러나 열두 살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워더링 하이츠와 어렸을 때 친숙했던 모든 것과 그 당시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던 히스클리프한테서 억지로 떨어져 나와서 단박에 린튼 부인이며,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안주인이며, 낯선 사람의 아내가 되어버린 거지. 그때부터 쭉 자기 세계에서 쫓겨나고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걸 생각해 봐. 그러면 깊은 구렁을 기어 다닌 듯한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거야!

 

, 내 몸이 불덩이 같아! 밖으로 나갔으면, 다시 야만에 가까운, 억세고 자유로운 계집아이가 되어 어떠한 상처를 입더라도 미치거나 하지 않고 깔깔 웃을 수 있었으면! 왜 나는 이렇게 달라졌을까? 왜 조금만 뭐라고 해도 내 피는 끓어오를까? 저 언덕 무성한 히스 속에 한번 뛰어들면 틀림없이 정신이 날 텐데. 다시 창을 활짝 열어줘, 빨리. 왜 가만히 있어?”

 

“아하! 당신이 왔군요, 당신이 에드거 린튼?” 아씨는 노여운 빛을 띠면서 말했어요. “당신은 바라지도 않을 때 나타나고 바랄 때는 나타나지 않는 그런 사람이군요!”

 

저기에요. 예배당 안에 묻혀 있는 린튼 가문의 조상들 사이가 아니라 빈 터의 묘석 아래 묻히겠어요.

 

그 녀석을 사랑하는 거야, 그 히스…….”

!” 하고 아씨는 외쳤습니다. “지금은 말하지 마요. 당신이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면 나는 창에서 뛰어내려 당장 끝장을 내버리겠어요! 지금 당신의 손이 닿고 있는 내 몸은 당신 것일지 몰라도, 당신이 다시 내게 손을 대기 전에 내 영혼은 저 언덕 꼭대기에 가 있을 거예요. 당신은 소용없어요, 에드거. 당신이 필요한 때는 지났어요……. 당신은 책 있는 데로 돌아가요……. 당신이 책이라는 위안을 가진 것이 반갑군요.”

 

히스클리프 씨가 인간인가 하는 것이야. 만약에 인간이라면 미친 것인지,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귀신인지? 내가 이렇게 묻는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 그러나 엘렌이 알고 있다면 대체 내가 결혼한 상대가 무엇인지 설명해 줬으면 해.

 

주위에 아무런 위안도 없다는 것을 넋두리하는 것은 다만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야. 위안이 그리울 때가 아니면 위안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지만, 만약 주위에 위안이 없다는 것이 내 불행의 전부이고 그 나머지는 터무니없는 꿈이라면 나는 기뻐서 웃고 춤출 거야!

 

이걸 봐요!”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조끼에서 이상한 모양의 권총을 꺼냈는데 총신에는 용수철을 장치한 쌍날칼이 붙어 있었어. “자포자기한 사내에게 이건 대단한 유혹 아니오?”

 

“참 좋은 집이군, 조셉 영감.” 하고 나는 말해 주지 않을 수 없었어. “사람들도 좋고. 내 운명이 이 집 사람들과 연결된 날부터 온 세상 모든 광증(狂症)의 응어리가 한데 엉겨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 같아!”

 

거기서 의젓하게 보이는 것은 그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그렇게 좋아 보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환경이 신분을 뒤바꿔 놓아서 그를 모르는 사람 같으면 신사로 태어나서 신사로 자란 것처럼 보았을 테고, 그의 부인은 단정치 못한 여자로 보았을 거예요.

 

싫어도 캐서린 아씨와 같이 계실 수밖에 없는 우리 집 서방님은, 이제부터는 아씨에 대한 옛 추억과 인정과 의무감 때문에 겨우 애정을 지탱해 나가실 거예요!

 

“당신 주인이 인정과 의무감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은 아주 그럴 법한 얘기야. 하지만 당신은 내가 캐서린을 그 사람의 의무와 인정에 맡겨두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은 캐서린에 대한 내 감정과 그의 감정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은 그녀가 나를 거의 잊었다고 생각해? , 넬리! 그렇지 않다는 건 당신이 알잖아! 린튼을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나를 천 번이나 생각하고 있다는 걸 당신은 잘 알잖아! 내 평생 가장 비참했던 시기엔 나도 캐서린에게 잊혀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작년 여름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도 줄곧 그런 생각을 했지. 하지만 이제는 캐서린 자신이 그렇다고 단언하지 않는 한 다시는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만 됐다 하면 린튼이고 힌들리고 내가 지금까지 꾼 꿈이고, 다 아랑곳없어질 테니까. 나의 장래는 단 두 마디면 족할 거야.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내 삶이란 지옥일 거야.”

 

“아가씨께서는 이리로 오셔서 얼굴이 더 나빠지셨어요. 분명 사랑이 부족한 모양인데, 어느 분의 사랑인지 짐작은 가지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죠.”

“나는 이사벨라 자신의 사랑이 모자라는 걸로 짐작하는데. 아주 게으른 여자가 돼버렸단 말이야! 나를 기쁘게 하려는 데도 지쳐버렸으니 여자치고는 유난히 빠른 셈이지.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결혼 다음 날 벌써 집에 가고 싶어서 울고 있었으니까.”

 

“집사람은 잘못 생각하고 그러한 집과 가족을 버린 거지. 나를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상상하고는 내가 기사처럼 헌신적으로 무엇이든 바라는 대로 해주리라고 기대한 거야. 이사벨라는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는 볼 수가 없어. 그렇게도 끈질기게 나라는 사람에 대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그릇된 인상을 가지고 행동했으니 말이지. 그런데 드디어 나라는 사람을 알기 시작한 것 같아.”

 

영리하지 못한 이사벨라로서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참으로 대단한 노력이 필요했지. 나도 한때는 무슨 짓을 해도 이 사람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리고 지금도 잘은 모르고 있어. 내가 실제로 자기로 하여금 나를 미워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는 듯이 이야기하니 말이지!

 

“저이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믿어서는 안 돼. 저이는 거짓말쟁이에 악마고 괴물이지,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 나는 오직 저이가 악마 같은 집념을 버리고 나를 죽여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야.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단 한 가지 기쁨이라고는 내가 죽거나 저이가 죽는 것을 보는 것뿐이야!”

 

내가 불쌍히 여길 줄 알아! 어림도 없지! 벌레가 꿈틀거리면 꿈틀거릴수록 나는 더욱더 짓밟아서 창자가 튀어나오게 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마치 이가 돋아나느라 아픈 거나 마찬가지지. 아프면 아플수록 더 힘을 주어 지그시 물고 싶거든!”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아요? 평생 조금이라도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낀 일이 있나요?’

 

“당신과 에드거는 내 가슴을 찢어놓았어, 히스클리프! 그러면서도 당신들은 둘 다 불쌍한 것은 자기네인 것처럼 나한테 와서 탄식하고 있는 거야! 나는 당신네를 불쌍히 여기지는 않겠어. 않고말고. 당신들은 나를 죽여놓고는 마치 그 덕에 잘 사는 것 같아. 굳세기도 하지! 내가 죽은 뒤 몇 해나 더 살려고들 하는 거야?”

 

“우리가 둘 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붙잡고 있을 수만 있다면.” 아씨는 분한 듯이 말을 계속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괴롭든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당신의 괴로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이라고 괴롭지 말라는 법 있어? 나도 이렇게 괴로운데! 당신은 나를 잊겠지? 당신은 내가 땅에 묻히면 행복하겠어? 이십 년 뒤에 당신은 이렇게 말할 거야? ‘저것이 캐서린 언쇼의 무덤이야. 오래전에 나는 그녀를 잃고 슬퍼했지. 그러나 지난 일이야. 그 뒤로 나는 그 밖에 여러 사람을 사랑했고 내 아이들이 그녀보다도 더 소중하지. 죽을 때도 그녀에게 가는 게 좋기보다는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슬플 거야!’ 그렇게 말하겠지, 히스클리프?”

 

“당신은 죽어가면서도 내게 그런 투로 말하다니 악마에게라도 홀린 거야?” 히스클리프 씨는 사납게 말을 계속했어요. “당신이 지금 한 말이 내 기억 속에 새겨져 당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영원토록 내 가슴에 파고들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캐서린, 내가 내 존재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잊을 수 없으리라는 것 알잖아! 당신이 무덤 속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을 때 나는 살아남아서 지옥 같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지독히 자기만 생각하는 당신이라도 만족할 것 아닌가?”

나는 편히 잠들지 못할 거야.” 캐서린 아씨는 고르지 못한 격렬한 심장 박동으로 자기 몸의 쇠약함을 깨닫고 신음하듯이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보다 더한 고통을 당신에게 주고 싶지는 않아, 히스클리프. 나는 오직 우리가 언제까지라도 헤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그러니까 내가 한 말이 훗날 당신을 슬프게 하는 일이 있거든 나도 땅속에서 마찬가지로 슬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날 용서해 줘. 이리 와서 다시 무릎을 꿇어줘. 당신은 지금까지 나를 해친 적이 없었어. 아니, 당신이 노여움을 품고 있다면 내 모진 말보다 그것이 더 나쁜 기억일 거야! 다시 이리 와줘, 제발!”

 

“오, 저렇다니까, 넬리! 저이는 잠시 동안이라도 나를 가엾게 여겨 살리려고 하질 않아. 내가 받은 사랑이란 저런 것이야. 하지만 괜찮아. 저런 것이 나의 히스클리프는 아니니까. 나는 그래도 나의 히스클리프를 사랑할 것이고, 저승까지도 데리고 갈 거야. 그는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 그리고 잠깐 쉰 다음에 아씨는 생각에 잠긴 듯이 말했어요. “내가 싫어하는 것은 결국 이 부서진 감옥 같은 육신이야. 이런 육신 속에 갇혀 있는 것에 지칠 대로 지쳤어. 나는 한시바삐 저 영광스러운 세계로 피해 가서 항상 거기에 있고 싶어. 눈물을 통해 어슴푸레하게 보고, 아픈 가슴의 벽을 사이에 두고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것과 함께 있고 그 속에 있고 싶은 거야.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위선적이었는지 알겠어. 왜 나를 경멸했지?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어, 캐시? 나로선 위로할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없어. 당신에게는 그래 마땅해.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인 거야. 그래, 나에게 입 맞추고 울려면 울어도 좋아. 나의 입맞춤과 눈물을 빼앗으려면 빼앗아도 좋아. 그러면 당신은 더욱 시들 것이고, 자신을 저주하게 될 거야.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 그러면서도 무슨 권리로 나를 버리고 간 거지? 무슨 권리로. 대답해 봐. 린튼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어?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거야.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놓은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건강한 만큼 나는 불리하지.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 당신 같으면 마음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나를 가만히 둬. 가만히 좀. 내가 잘못했다면 나는 그 때문에 죽는 거야. 그것으로 족하지! 당신도 나를 버리고 가지 않았어? 그러나 당신을 책망하지는 않겠어. 나는 당신을 용서해. 당신도 나를 용서해 줘.”

“용서하는 것도, 그 두 눈을 보는 것도, 그리고 그 여윈 손을 만지는 것도 괴로운 일이야. 내게 다시 입을 맞춰줘. 하지만 당신 눈은 보이지 말아줘. 당신이 내게 한 짓은 용서하겠어. 나는 나를 죽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바로 당신을! 내가 어쩔 수 있겠어?”

 

이건 거의 괴벽인지 모르겠지만, 미친 듯이 또는 절망에 빠져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만 않으면 저는 시신이 있는 방을 지키고 있는 동안 대개 행복을 느낀답니다. 이승의 괴로움도, 저승의 괴로움도 깨뜨릴 수 없는 안식이 있거든요.

 

“네, 돌아가셨어요!” 저는 흐느낌을 억누르고 볼을 훔치면서 대답했어요. “천국으로 가셨을 거예요. 우리도 조심해서 악을 버리고 선을 좇는다면 누구나 아씨와 함께 그리로 갈 수 있겠지요!”

그럼 캐서린은 조심했단 말인가?” 히스클리프 씨는 일부러 비웃는 듯이 물었어요. “성자처럼 죽었단 말이야? , 죽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이야기해 줘. 어떻게 해서…….”

[…]

‘가엾은 사내 같으니!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은 마음과 신경을 가지고 있었어! 그것을 왜 그렇게 숨기지 못해 안달했을까? 아무리 버텨봐도 하나님을 속이지는 못할 텐데!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힘에 못 이겨 굴욕의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군!’

 

부디 저승에서도 그렇게 살며시 눈을 뜨셨으면.”

고통 속에 눈을 뜨라지!” 하고 그는 발을 구르며 걷잡을 수 없는 격정으로 발작을 일으키며 무시무시하게 외치는 것이었어요. “그래, 끝까지 거짓말쟁이였군! 어디로 갔지? 거기가 아니야, 천국이 아니라고, 없어진 것도 아냐. 그러면 어디로 간 거지? ! 당신은 내 괴로움 같은 건 알 바 아니라고 했지! 난 한 가지만 기도하겠어. 내 혀가 굳어질 때까지 되풀이하겠어,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 견딜 수가 없어!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

 

“그자는 사람이 아냐. 내게 너그러운 마음을 요구할 권리 같은 건 없어. 난 그에게 내 마음을 바쳤는데, 그자는 그걸 받아 비틀어 죽이고는 도로 내던진 거야. 사람이란 마음이 있으니까 느끼는 거지, 엘렌. 그런데 그는 내 마음을 파괴해 버렸으니, 내겐 그를 동정할 힘도 없지. 그리고 설사 그가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신음하고 캐서린 언니를 위해 피눈물을 흘린대도 난 동정하지 않겠어! 그렇지, 정말 동정하진 않을 거야!”

 

“무엇 때문에 결국 내가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느냐고 물었지? 그냥 심술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야. 붉게 달군 족집게로 신경을 집어내는 일이 주먹으로 머리를 두들기는 것보다 더 냉정이 필요한 거야. 그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자 그가 뽐내는 악마 같은 조심성도 잊어버리고 살인이라도 할 듯이 폭력을 휘둘렀어. 난 그를 격노하게 할 수 있다는 데 쾌감을 느꼈어. 쾌감이 나 자신을 지켜야겠다는 본능을 눈뜨게 한 거야.”

 

그가 애원하는 신이란 오직 아무런 감각도 없는 흙이 되어버린 캐서린 언니지. 그리고 어쩌다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이상스럽게 하나님도 악마와 혼동이 되는 거야! 그런 귀중한 기도를 끝마친 다음에는 - 기도는 대개 목이 점점 쉬어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안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 또 나가는 거야.”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지만 않는다면 나도 얼마든지 보복을 하겠어요. 하지만 배반이나 폭력은 양쪽 끝이 뾰족한 창과 같아서, 그것을 쓰는 사람이 그걸 받는 사람보다 더 크게 다치는 법이지요.’

 

그의 이마에는 침울한 그림자가 서려 있었고 뱀 같은 두 눈도 잠을 못 자서 거의 빛을 잃었어. 그때 눈썹이 젖어 있는 걸 보니, 아마 울고 있었던 모양이야. 입술에서도 그 사나운 냉소는 가셨고 말할 수 없이 슬픈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어. 그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그런 비통한 꼴에 난 그만 얼굴을 가리고 말았을 거야. 그런데 바로 그자의 꼴이라 속이 후련해졌고, 쓰러진 적을 모욕하는 것 같아 야비하기는 하지만, 그를 쏘아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어. 악을 악으로 갚는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건 오직 그가 약해졌을 때뿐이니까.”

 

나도 한몫 끼어 혼내주지 않는다면, 히스클리프가 아무리 비참한 일을 당한대도 시원치 않아. 만일 내가 그에게 고통을 줄 수 있고 또 그렇다는 걸 그자가 알기만 한다면 그가 지금보다 고통을 덜 당하더라도 난 상관없어. , 난 그에게 갚을 것이 너무나 많단 말이야.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조건은 한 가지뿐이야. 그건 내가 만약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다고 한다면, 내가 당한 모든 쓰라린 괴로움을 그렇게 쓰라린 괴로움으로 되돌려주고 그자를 나와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거야. 그자가 먼저 해를 입혔으니까 그자가 먼저 용서를 빌게 하는 거지. 그런다면그러고 난 다음이라면엘렌, 나도 너그럽게 대할 수가 있어.”

 

워낙 착하신 분이라 언제까지나 그렇게 불행하게 지낼 수만은 없었지요. 그분은 캐서린 아씨의 영혼이 자신에게 나타나게 해달라고 빈다든가 하지는 않았어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체념하게 되었고, 우울도 흔해 빠진 즐거움보다 달콤한 것이었지요. 그분은 열렬하면서도 부드러운 애정과 천국에 대한 희망에 찬 동경으로 부인을 회상했고 부인이 틀림없이 천국에 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분들은 다같이 좋은 남편들이었고, 똑같이 아이들을 사랑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좋은 길이건 나쁜 길이건 간에 같은 길을 걷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저는 더 똑똑해 보이는 힌들리가 오히려 더 나쁘고 더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 보인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들의 경우를 난파선에 비유한다면, 힌들리는 배가 암초에 부딪혔는데 선장이 자기 자리를 버리고 승무원들도 배를 건지려고 애쓰지 않고 소동과 혼란 속에 빠져 그들의 불행한 배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와 반대로 린튼 서방님의 경우는 고지식하고 충실한 정신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용기를 보이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도 그를 위로한 것이지요. 한 사람은 희망을 가졌고, 또 한 사람은 희망을 버렸어요.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으니 마땅히 그것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지요.

헤어튼에게는 학대할 맛이 날 만큼 소심한 감수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거겠지요. 그는 헤어튼을 짐승 같은 인간으로 만들려는 악의를 품었던 모양이었어요.

 

아버지의 욕심이 아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겠구나.

 

만약 힌들리가 살아서 저 녀석을 볼 수 있다면 내가 거의 내 자식을 자랑하지 않듯이 그자도 제 자식을 자랑할 것 같지는 않지? 그러나 그런 차이는 있지, 말하자면 한쪽은 금덩어리인데도 길에 까는 돌로 쓰이고, 다른 한쪽은 양철 조각을 은처럼 보이려고 닦는 셈이야. 내 자식은 쓸 데라고는 조금도 없는 놈이지만 그래도 그런 빈약한 놈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게 해서 되도록 소질을 살려볼 작정이야. 힌들리의 아들 놈은 여러 가지 훌륭한 소질을 타고났지만 다 잃어버리고 말았거든. 쓸모가 없기는커녕 그보다도 더 나빠졌어. 나야 조금도 섭섭할 게 없어. 그가 얼마나 많이 후회할지는 내가 아니면 모를 거야.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것은 헤어튼이란 놈이 나를 몹시 좋아한다는 사실이지! 그 점에서는 내가 그보다 낫다는 걸 당신도 인정할 거야. 그 죽은 악한이 자기 자식을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나를 비난하기 위해 무덤에서 기어 나올 수 있다 해도, 나는 그 자식 놈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 친구에게 욕하는 것에 분개하여 그를 되쫓아 보내는 것을 재미있게 보고 있을 거란 말이야!

 

앞으로 올 불행을 이십 년이나 앞당겨 슬퍼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 아니에요?

 

난 밤마다 내가 아빠 뒤에 남게 해주십사고 기도를 드린다는 걸 말이야. 왜냐하면 난 아빠가 슬퍼하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슬픈 일을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이것으로도 내가 나 자신보다 아빠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안 돼! 난 누구도 아빠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어.” 아가씨는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 아내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하지만 남매간에는 그렇지 않단 말이야. 네가 만약 내 동생이라면 너는 우리와 함께 살게 되고, 아빠는 나와 마찬가지로 너도 귀여워하실걸.”

 

“좋지 않은 짓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그래요. 그렇지 않다면야 나한테 거짓말을 해야 할 까닭이 없을 텐데요. 그게 나는 슬퍼요.”

 

그런데 우린 한 번 싸울 뻔했어. 그 애가 그러는데 7월의 더운 날을 유쾌하게 지내는 방법은 말이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벌판 가운데 있는 히스 나무 위에 누워서 꽃 사이를 꿈꾸듯이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는 벌 소리를 듣고, 머리 위로 높이 날며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도 듣고,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보면서, 내리쬐는 맑은 햇볕을 쬐는 거라지 뭐야. 그게 린튼의 가장 완전한 행복이라는 거야.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행복은 말이지, 살랑거리는 푸른 나무 위에 앉아 흔들거리며, 불어오는 서풍을 받으며 맑고 흰 구름이 하늘을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종달새뿐만 아니라 지빠귀, 굴뚝새, 방울새, 그리고 뻐꾸기 같은 새들이 사방에서 울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거기에 시원해 보이는 으스름 골짜기를 드문드문 이루며 멀리 뻗쳐 있는 벌판이 보이고, 가까이는 산들바람에 물결치듯 나부끼는 긴 풀이 무성한, 굽이치는 커다란 언덕이 있고 숲이며 소리 내며 흐르는 시내, 그리고 온 세상이 기쁨에 깨어 날뛰는 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라고 했어. 린튼은 모든 것이 평화의 황홀경에 취해 누워 있기를 원했고, 나는 모든 것이 눈부신 환희 속에서 빛나고 춤추는 것이 더 좋다고 했지.

내가 그의 천국은 반만 살아 있고 반은 죽은 거라고 했더니 그 앤 내 천국이 술에 취한 상태라는 거야.

 

아마 그 도련님은 그저 뽐내기 위해서 배운 게 아닐 거예요. 전에도 그 도련님이 글을 모른다고 아가씨가 창피를 준 일이 있지요. 틀림없어요. 그래서 그 도련님은 모르는 걸 배워가지고 아가씨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던 거죠. 그 도련님의 노력이 숫자를 모를 만큼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서 그를 비웃는다는 건 아주 버릇없는 짓이에요.

 

린튼은 […] 야윈 얼굴과 커다란 눈에는 광기를 띠었지만 무력한 분노에 그치고 말았어.

 

‘옳거니, 영락없는 제 아비로구먼!’ 하고 영감이 소리를 치는 거야. ‘영락없는 제 아비래도! 하기야 우린 누구나 조금씩은 부모를 닮긴 하지만.’

 

전에는 그곳에 가는 것이 잘못인 것 같았는데 이젠 가지 않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생각됐어.

 

캐서린. 누난 나보다도 훨씬 행복하니까 좋은 사람이 돼야 해. 아빠는 늘 내 결점만 이야기하고 야단만 치니까 자연히 난 나 자신을 잃게 돼. 그래 아빠가 자주 말씀하시듯이 정말로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 그러니까 내 성격이 비뚤어지고 고약해져서 누구나 보기 싫은 거야! 나라는 사람은 아무 가치도 없고 성질도 나쁜 데다 거의 언제나 기분이 우울하단 말이야. 그러니 그렇게 하려면 해도 좋아. 누나는 귀찮은 일을 한 가지 더는 셈이지. 캐서린, 다만 이것만은 믿어줘. 나도 누나같이 상냥하고 친절하고, 또 착해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걸 말이야.

 

저 앤 왜 나를 만나고 싶어 했을까? 전엔 몹시 까다롭게 굴었을 때도 지금 저렇게 이상한 기분에 젖어 있는 것보다는 나았었는데. 이건 마치 억지로 시켜서 하는 일 같아. 이렇게 만나는 게 말이야. 아빠한테 야단맞을까 봐 무서워서 하는 짓 같아. 하지만 난 히스클리프 고모부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 오고 싶지는 않아.”

 

그날부터 갑작스레 악화된 린튼 서방님의 병세는 누구나 그 증세를 알 수 있을 만큼 심했답니다. 전에는 몇 달에 걸친 파괴였던 것이 이제는 거의 몇 시간의 잠식과 맞먹었지요.

 

“내가 사랑하는 척한다고?” 도련님은 중얼거렸어요. “그게 뭔데? 제발, 캐서린, 그렇게 화난 얼굴 하지 마! 마음대로 실컷 멸시해도 좋아. 난 아주 쓸모없는 겁쟁이니까. 난 아무리 욕을 먹어도 괜찮아! 하지만 난 누나가 화를 낼 상대도 못 돼. 우리 아빠를 미워하고 난 멸시의 대상으로 놓아두란 말이야!”

 

“아, 넌 나 같은 건 무섭지 않다고 했지? 용기를 잘도 꾸며대는군. 내가 몹시 무서워 보이는 모양인데!”

지금은 무서워요.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아빠가 몹시 걱정하실 테니까요.”

 

린튼은 자신의 온 관심과 친절을 제 몸에 쏟아야 할 애거든. 그 녀석은 작은 폭군 노릇을 잘 해낸단 말이야.

 

고모부는 잔인하긴 하지만 악마는 아니겠지요. 그리고 순전히 악의에 찬 마음으로 제 모든 행복을 여지없이 파괴하지는 않겠지요. […] 고모부는 평생 아무도 사랑해 본 일이 없나요? 한번도 없어요? 아이! 한 번만이라도 쳐다보셔야 해요. 저는 슬퍼서 못 견디겠어요. 고모부는 제 얼굴을 보면 가엾고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가겠어요. 린튼은 이 세상에서 제가 사랑해야만 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아저씨는 린튼이 제게 미워 보이고 저는 린튼에게 미워 보이게 하려고 갖은 짓을 다 하시지만, 우리를 서로 미워하게 하지는 못할 거예요!” […]

“당당한 투사로군! 하지만 난 그 녀석을 해칠 정도로 너한테 잘하고 싶진 않은걸. 괴로움이 지속되는 동안 네가 그것을 실컷 맛보게 해주겠단 말이다. 그를 너에게 미워 보이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야. 그건 그 녀석 자신의 훌륭한 정신이지. 그 녀석은 네가 도망친 일과 그 뒤에 일어난 일 때문에 죽을 지경이야. 너의 그 고귀한 헌신적인 사랑에 대해서 그 녀석이 고맙게 생각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마. 그 녀석이 말이야, ‘만약 내가 아빠만큼 힘이 세다면 뭘 어떻게 할 텐데.’ 하는 유쾌한 이야기를 질라에게 하는 것을 내가 들었지. 그 앤 그런 생각을 하는 아이란 말이야. 몸이 몹시 약하니까 힘 대신 머리가 날카로워지는 거지.”

“저도 그가 성질이 고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캐서린 아가씨는 말했어요. “아저씨의 아들이니까요. 하지만 다행히 저는 성격이 좋으니 그의 나쁜 점을 용서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가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도 그를 사랑해요. 히스클리프 씨, 당신은 아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무리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아저씨의 그 잔인한 성격은 아저씨가 우리보다 훨씬 비참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풀려요. 아저씨는 비참해요, 그렇지 않아요? 악마같이 외롭고 시기심이 많은 거죠. 아무도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저씨가 죽어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을 거예요! 저는 아저씨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그녀가 내 옆에 있음을 느꼈어. 거의 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았어! 내 애달픈 그리움과 오직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열렬한 애원으로 말한다면 나는 그때 피땀을 흘려 마땅했지! 단 한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생전에도 종종 그랬듯이 악마 같은 짓을 한 거야. 그리고 그 뒤로는 어떤 때는 좀 더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좀 덜하기도 했지만 나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려온 거야! 지긋지긋한 노릇이지.

 

‘자, 캐서린! 기분이 어떠냐?’

[…]

‘저 사람은 안전한 곳으로 가버렸고 저는 자유로운 몸이 됐군요. 제 기분이 좋아야겠지요. 하지만, […] 아버님이 저 혼자 죽음과 맞서도록 무작정 내버려 두셨으니 저야 죽음만을 느끼고 죽음만을 볼 뿐이에요! 저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이란 말이에요!’

 

‘헤어튼, 그리고 당신들, 모두 잘 알아둬. 난 당신들이 위선적으로 친절을 꾸며 보이는 것은 어떤 것이든 거절한다는 것을 말이야! 나는 당신들을 경멸해. 그리고 당신들 누구하고도 얘기할 게 없어! 내가 당신들한테서 친절한 말 한마디만 들어도, 아니 당신들 가운데 누구라도 좋으니 얼굴만이라도 좀 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누구 한 사람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불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당신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여기 온 것도 아니고, 당신들과 한패가 되어 놀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추워서 어쩔 수 없이 온 것뿐이니까.’

 

‘저 아가씬 그리 상냥한 사람은 아닌 것 같군. 딘 부인이 나더러 믿으라고 누누이 이야기한 것만큼 미인임에는 틀림없지만 천사는 아니야.’

 

“하지만 부인, 우리는 누구나 시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의 문턱에서는 넘어지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런 우리를 깨우쳐주지 않고 비웃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할 겁니다!”

 

헤어튼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더 이상 괴로움을 참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의 건방진 입놀림을 막기 위해 손으로 한 대 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부당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딱한 여인은 자기 사촌의 거칠기는 하지만 예민한 감정을 끝까지 상하게 했으니, 헤어튼이 그 감정을 청산해서 상대편에게 그 결과를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력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쇼 도련님은 소원대로 금세 교양이 느는 것도 아니었고, 또한 아씨도 학자도 아니고 본받을 만한 인내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두 분의 마음은 같은 목표를 향했던 것이지요. 한 사람은 상대방을 사랑하고 인정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그 상대방 역시 사랑하고 인정받으려고 결심했으니까요. 그들은 노력한 결과, 그 목표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캐서린 아씨는 이 말을 듣자 슬그머니 약이 오르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도련님은 만약에 자기가 아씨의 아버지 욕을 한다면 어떻겠느냐고 물어 아씨의 말을 막는 방편으로 삼았어요. 아씨는 언쇼 도련님이 히스클리프 씨에 대한 평판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성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더욱 강렬한 유대로 맺어진 관계, 즉 습관으로 다져진 쇠사슬 같은 관계라는 것, 그러니 그 관계를 끊으려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는 것 등등을 깨닫게 되었지요.

 

“초라한 종말이군그래.”

[…]

“나의 그 맹렬한 노력이 이렇게 끝장난단 말인가? 두 집을 부숴버리려고 지렛대며 곡괭이를 장만해 놓고 헤라클레스와 같이 괴력을 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훈련했건만, 막상 만반의 준비가 되고 내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자 어느 쪽 집에서도 기와 한 장 들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으니!”

 

오 분 전까지만 해도 헤어튼이란 놈은 인간이 아니라 내 젊은 시절의 화신 같았어. […]

첫째로, 그 녀석은 놀라울 만큼 죽은 캐서린을 닮아서 녀석을 보면 무서울 정도로 그녀가 연상된단 말이야. […] 내 눈에 그녀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뭐가 있겠어? 무엇 하나 그녀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어야 말이지! 이 바닥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그녀의 모습이, 깔린 돌마다 떠오른단 말이야! 흘러가는 구름송이마다, 나무마다, 밤이면 온 하늘에, 낮이면 눈에 띄는 온갖 것들 속에, 나는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둘러싸여 있단 말이야! 흔해 빠진 남자와 여자의 얼굴들, 심지어 나 자신의 모습마저 그녀의 얼굴을 닮아서 나를 비웃거든. 온 세상이 그녀가 전에 살아 있었다는 것과 내가 그녀를 잃었다는 무서운 기억의 진열장이라고!

 

어젯밤엔 지옥의 문턱까지 갔었어. 오늘은 내 천국이 보이는 곳에 있지만. 난 지금 천국을 눈앞에 보고 있어. 불과 3피트도 떨어져 있지 않아!

 

제가 이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불빛이 그 양반의 얼굴을 반짝 비췄어요. 정말이지, 그 순간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요! 깊이 팬 검은 눈, 그 미소와 오싹 소름이 끼칠 만큼 창백해진 얼굴, 그건 히스클리프 씨가 아니라 귀신의 모습이었답니다.

 

그의 비석에 새길 비문. […]

그는 성()도 없고 나이도 알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단 한마디히스클리프라고 쓸 수밖에 없겠다는 것 등이었지요.

 

그 양반은 차려놓은 아침상을 한 손으로 쓸어 앞을 비워버리고는 더 잘 보일 수 있게 앞으로 몸을 기대는 것이었어요.

그제야 저는 그가 벽을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답니다. 그만 놓고 주의해서 보니 분명 2야드쯤 거리를 둔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했으니까요. 그리고 응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틀림없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과 고통을 아울러 주는 것 같았어요. 고통이 어려 있으면서도 황홀해하는 표정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암시하는 것이었어요.

 

초조하게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는 히스클리프 씨의 발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이따금 신음 소리에 가까운 깊은 한숨이 적막을 깨고 들려왔지요. 그는 또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마디씩 중얼거렸어요.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오직 캐서린이라는 이름뿐이었는데, 그 말에는 그리움과 괴로움이 뒤섞인 다소 거친 말투가 겹치는 것이었어요. 마치 앞에 사람을 두고 하는 말 같았어요. 낮고 진지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지요.

 

내 잘못에 대해서 뉘우치라고 하지만 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뉘우칠 게 없어. 난 너무 행복하지만 아직 충분히 행복하진 못해. 내 영혼의 행복은 내 육체를 죽이고 있지만 영혼 자신은 만족하지 못하거든.”

 

목사는 올 것 없고 설교 같은 것을 할 필요도 없어. 사실 나는 내가 바라는 천국에 거의 와 있으니까. 그리고 남들이 원하는 천국은 나로서는 전혀 바라지 않고 또 가고 싶지도 않아!”

 

누구보다도 고인의 학대가 심했던 헤어튼 도련님만이 가엾게도 혼자서 진정으로 슬퍼하더군요. 도련님은 밤새껏 시신 옆에 앉아서 복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는 것이었어요. 망자의 손을 만지기도 하고 누구든지 제대로 마주 보기를 꺼릴 그 비꼬는 듯한 험상궂은 얼굴에 입을 맞추기도 했어요. 비록 두드려서 늘린 강철처럼 단단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너그러운 마음에서 절로 우러나는 깊은 슬픔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었어요.

 

“그럼 여기에는 누가 살게 되지?” […]

“거기 살고 싶어 하는 귀신들이 쓰도록 말이지.”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주인님.” 넬리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죽은 사람은 고이 잠들어 있는데, 그이들의 이야기를 경솔하게 입 밖에 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

“저 사람들은 두려운 게 없군.”

[…]

“저 사람들이 함께라면 악마와 그 군단도 무찌르겠는데…”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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