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에세이2020. 2. 13. 15:01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테리 이글턴 저/이미애

당대 최고의 문학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특별한 문학 강의. 베스트셀러 『문학이론입문』이후 30년 만에 출간된 새로운 문학 입문서로서,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기본 전략들을 알기 쉽게 안내한다. 셰익스피어부터 해리 포터까지 광범위한 작가와 작품을 다루며, ‘섬세한 읽기’를 통해 문학 읽기의 진정한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더 깊고 섬세한 읽기를 경험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유용한 책이 될 것이다.

 

Chapter 1. 도입부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가장 빈번히 저지르는 실수는, 시나 소설이 말하는 것만 찾으려 하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을 제쳐둔다는 것입니다. […] 문학 작품은 보고서일 뿐 아니라 수사적인 글입니다. 그것은 특히 주의 깊은 독서를 요구하지요. 어조와 분위기, 속도, 장르, 구문, 문법, 문장 구성, 리듬, 서사 구조, 구두점, 다의성.

 

어떤 작품이문학적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의 일부는, 이야기되는 내용이 이야기되는 방식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작품을 뜻합니다.

 

『폭풍의 언덕』

우리가 실재에 대한 이 상충하는 해석들을 긴장 상태로 견지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두 해석 사이에서 합리적인 중도를 선택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극에서 중도가 제공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요.

 

시작, 그 중요한 단서에 관하여

- E. M. 포스터 『인도로 가는 길』

 

이런 사실은 작가와 그의 작품 사이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부인(否認)으로 시작하고 곧 거기에 단서를 붙입니다.

 

마라바 동굴이 실제로 특별한 곳인지와 관련된 이 모호함은 『인도로 가는 길』의 중심에 자리 잡은 문제입니다.

 

따라서 마라바 동굴이 소설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은 소설의 핵심에 일종의 공백이나 공허가 존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작품의 핵심에 실로 어떤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진실을 명확히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독자에게 처음 보내는 신호들

- 셰익스피어 『맥베스』 / 「창세기」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 허먼 멜빌 『모비 딕』

 

마녀들의 불경한 삼위일체’ <맥베스>

 

우리는 어떤 사물이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것일 수 있다는 모순을 명심하도록 강요받는 듯합니다. 결국 이것은 맥베스에게도 적용됩니다. 인간으로서 그의 존재는 대단히 활력적으로 실재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은 일종의 무()입니다. <맥베스>

 

[내게] 존재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뿐” <맥베스>

 

모든 문학도가 알고 있듯이, 모호함은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지만, 맥베스가 알게 되듯이 모호함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는 동화의 첫머리에 쓰이는 반면, “태초에는 기원을 다루는 신화의 첫머리에 등장합니다.

 

“옛날 옛적에라는 관용적 표현은 우화를 현재 시점에서 떼어내어 아주 멀리, 인간의 역사에 더는 속하지 않는 듯이 안개 자욱한 신화적 영역에 밀어 넣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태초에라는 관용적 표현은 어느 시점에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묻지 말라고 독자에게 지시합니다. 그 표현은 무엇보다도시간 그 자체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흔히들 사람이 죽을 때 영원이 시작되리라고 하는 말은 기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영원이란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혹시 사람이 시간에서 영원으로 옮겨갈 수 있더라도, 그것은 영원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일 수 없습니다. 영원에는 사건이 없으니까요.

 

『창세기』는 신의 창조 행위를 혼돈 상태에서 질서를 끌어낸 것으로 간주합니다. […] 수많은 이야기는 질서처럼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러다가 질서가 어떻게든 붕괴됩니다. 어떤 격동이나 혼란이 없다면, 이야기는 결코 궤도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비열한 욕망을 자연 질서의 한 부분으로 합리화할 수 있을 때 더 편안해한다고 이 문장은 암시합니다. <오만과 편견>

 

그의 진짜 이름이 독자에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멜빌이 그 이름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숨길 수는 없으니까요. 한 인물로서 이스마엘에게 존재하는 것은 지면 위에 박힌 일련의 검은색 기호뿐입니다. <모비 딕>

 

어떤 소설은 한 인물이 진짜 이름을 가명 아래 숨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진짜 이름을 실제로 알게 되더라도, 그 이름은 가명 못지않게 허구의 일부입니다. <모비 딕>

 

겉으로 보이는 것과 늘 똑같은 것은 아니다

- 존 키츠 / 필립 라킨 / 에밀리 디킨슨 / 로버트 로웰 / 존 밀턴 『리시다스』

 

“관습(convention)”은 문자 그대로함께 모이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데, 내가 감정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오로지 내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합니다.

 

시는 감정과 형식이 반드시 반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형식은 감정을 억누르기도 하지만 감정을 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독자를 언어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선언들

-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 플랜 오브라이언 『세 번째 경찰관』/ 앤서니 버지스 『지상의 권력』 / 조지 오웰 『1984

 

할 일이 전혀 없어.” <고도를 기다리며>

 

일상적인 것과 낯선 것의 병치.

 

문학 작품은 독자가 모르고 있거나, 아직 알지 못하는, 어쩌면 결코 알지 못할 사실을알고 있는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떤 독자는 이런 해석이 터무니없이 기발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해석이란 엄밀히 말해서 당연히 기발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웰이 먼지를 긍정적 이미지로 그리려 했거나 그런 생각을 혹시라도 떠올린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작가의 의도일 거라고 짐작하는 바에 늘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뒤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984>

 

언어에 대한 고양된 감수성

 

Chapter 2. 인물

 

문학 속의 인물은 그 이전의 역사가 없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엠마』의 주인공 엠마 우드하우스는 누군가 그녀에 대해 읽고 있는 동안에만 존재합니다. 어떤 시간대에 그녀에 대해 읽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소설의 탁월함과 수십억에 달하는 영어권 독자를 고려하면 이런 경우는 있을 법하지 않은데) 그녀는 비-존재에 빠져듭니다. 엠마는 『엠마』의 결말 너머까지 존속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호화로운 시골 대저택이 아니라 텍스트 안에 살고 있고, 텍스트는 그 자체와 독자의 계약입니다.

 

텍스트는 의미의 패턴이고, 의미의 패턴은 뱀이나 소파처럼 자기 나름의 삶을 영위하지 않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극적 인물들의 취약성을 포착해서 실제 인간 삶의 덧없고, 환상에 지배된 속성을 비유합니다.

 

이 연극은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존재의 환영적 속성에 관한 진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꿈같은 속성, 인생의 짧음과 무상함, 확고한 기반의 결핍을 우리에게 경고할 수 있지요.

 

우리의 많은 도덕적 고충이 우리가 영원히 살 거라는 무의식적 가정에서 비롯되니까요.

 

“캐릭터”라는 단어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이라는 비유법의 일례입니다.

[…]

캐릭터라는 단어의 의미가 한 개인의 독특한 특징에서 개인 그 자체로 바뀐 것은 온 사회의 역사와 얽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현대 개인주의의 성장과 관련됩니다.

 

‘괴벽’이 일종의 광기와 동떨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매력적인 것과 괴이한 것은 그저 딱 한 발자국 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일탈도 없습니다. 괴벽스러운 사람들은 완고하게 자신을 내세우는 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제멋대로 굴려는 그들의 아집은정상적남녀의 존재에 달려 있습니다.

 

정상적 인물들이 온갖 미덕을 갖고 있다면 변덕스러운 인물들은 생명력을 갖고 있다. […]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이 검소함과 신중함, 인내심, 정절, 온순함, 자기 절제, 근면함을 정상적인 것으로 규정하자, 악마가 최고의 재미를 다 누리게 된 것이지요.

 

디킨스의 기괴한 인물들이 규범을 위반한다는 주장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관습적 행위 양식을 조롱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점잖은 인물들이 관습의 포로이듯이, 그들은 자기들의 이상스러운 습관의 포로이지요.

 

유형은 인물의 개성을 보존하며 더 넓은 배경을 부여한다

-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 셰익스피어 『오셀로』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 T. S. 엘리엇 『황무지』

 

개인의 유형을 정한다는 것은 그들을 비길 데 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어떤 범주 안에 넣는 것입니다. 하지만 괴짜 유형이란 더할 나위 없이 이해가 잘 되는 말입니다. 특히 그런 인물들이 주위에 많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개인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모두는 특유함이라는 동일한 자질을 공유하게 됩니다. […] 모든 사람이 특별하지요. 이 말은 곧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터무니없이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플로베르의 묘사는 그 자체를 해체합니다

 

고정관념은 인간을 일반적인 범주로 격하시키는 반면, 유형은 그들의 개성을 보존하면서 거기에 더 넓은 배경을 부여합니다.

 

사실 문학, 어쩌면 특히 시는 우리로 하여금 달리 바뀔 수 없는 독특한 것을 대면하는 듯이 느끼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교묘한 솜씨가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독특한 것은 없습니다.

 

인물이 없는 비극.

 

우리에게 내적 삶이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언어와 문화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적 인물에 대한 현재 우리의 관념은 대체로 강력하게 개인주의적인 사회 질서에서 생성된 개념입니다. 그 관념은 또한 꽤 최근의 역사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그것이 인간을 그려내는 유일한 방법은 결코 아닙니다. 

 

“자율”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자신에게 적용되는 법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기법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개체적 인물이 단순히 어떤 유형이나 상징으로 제시되는지 아니면 미묘하게 심리학적으로 고찰되는지, 인물이 내면에서 포착되는지 아니면 다른 인물들의 관점에서 그려지는지, 또한 일관성 있게 보이는지 아니면 자기 모순적인지, 정적인지 아니면 서서히 변화하는지, 확고하게 각인되어 있는지 아니면 가장자리가 흐릿한지,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보여지는지 아니면 다 배제되고 플롯의 기능만 남았는지, 인물들이 그들의 행위와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지 아니면 육체에서 이탈된 의식으로 아련히 떠오르는지, 우리가 그들을 생생한 물적 존재로 느끼는지 아니면 본질적으로 말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느끼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포착하기 어려운 심오함이 넘치는 존재인지를 살펴보아야지요.

 

나는 글쓰기를 인물 탐구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훈련으로 여긴다. 나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 특수한 심리학적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내 흥미를 끄는 것은 드라마와 말, 그리고 사건이다.

- 에벌린 워

 

자아란 우연히 집적된 감각과 인식의 덩어리일 뿐이고 그 핵심에는 다만 공허가 존재할지 모르지요.

 

만일 조지 엘리엇이 아침 식탁에 앉아 있는 인물을 그려낸다면, 조이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변기에 앉아 있는 주인공을 그려낼 것입니다. 블룸은 영국의 굳건한 사실주의자의 뺨을 찰싹 갈긴 아일랜드 반대자가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또 다른 전복적 아일랜드인으로서 영국인을 지분거리며 그런 일로 출세한 오스카 와일드는 진실을가장 최근의 기분으로 규정했습니다. 그에게 진정한 자유로움이란 일관성 있는 자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고 또한 영국 귀족의 아들들과 자유롭게 동침하는 것을 뜻했지요.

 

의식적 삶은 이제 자아라는 빙산의 꼭대기에 불과하니까요. 로렌스가 탐구한 자아는 관념이나 감정, 성격, 도덕적 관점이나 일상적 관계를 넘어선 어딘가에 존재합니다. 모호하고, 원시적이고, 심원하며 비개인적 존재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사실주의 작가들이 발을 내디디려 하지 않았던 영역입니다. 로렌스에게 자아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그 나름의 수수께끼 같은 논리가 있고, 그 나름의 유쾌한 방식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로 자기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맡길 수 없겠지요. 그러므로 이런 식의 관점에는 어떤 윤리와 정치적 견해가 수반됩니다.

 

잠재의식의 어떤 차원에서 여러분은 모두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운 좋게 유럽에 사는 사람은, 스스로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유럽의 마음이라 불리는 그 무언가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레오포르 블룸은, 이미 보았듯이, 선명하게 개체화된 인물이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대변할 수 있는 익명의 만인이기도 합니다.

 

모더니즘 계열의 수많은 글에 대해서, 그것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런저런 인물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인물

- 토머스 하디 『무명의 주드』

 

수가 주드에게 헌신하기 어렵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녀가 바람둥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말괄량이(tomboy)로 성장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양성 통칭적 또는 무성적 자질 때문에 그녀는 관습적인 성적 행태의 범주 밖에 존재하므로, 자신에 대한 남자들의 성적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지요.

 

비평가들이 수를 불감증에다 신경과민인 여자로 간주하기 쉬운 한 가지 이유는, 그녀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기 나름의 주체가 아니라 주드의 비극의 도구로 존재합니다.

 

감정 이입 vs. 비판적 이성의 고양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코이너 씨 이야기」

 

수의수수께끼는 성적 관능이 억압적으로 이용되는 사회 질서에서 그 관능의 복합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성격에서 기인합니다. […] 소설이란 실제로 도덕적 설교가 필요하지 않은 도덕적 사상(事象)입니다.

 

엘리엇에게 창조적 상상력이란 이기주의와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상력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적 삶에서 배제되어 자신의 사적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예술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아주 가까이 붙어 있지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해서,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우월한 외적 관점에서 그들을 비난하려는 충동이 줄어들겠지요. 이해하면 용서하게 됩니다.

 

소포클레스는 독자가 오이디푸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그 연극은 우리가 불운한 운명의 주인공에게 동정심을 느끼리라고 가정하지만, 누군가에 대해서 느끼는 것(동정)과 그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감정이입)은 차이가 있습니다. […] 판단한려면 무언가에 대해 약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하는데, 그 행위는 동정과는 양립하지만 감정이입과는 양립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존재가 모순적인 것들로 구성되고 이 모순들이 사람들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고 자기 분열된 존재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인물이 통합되고 일관성 있다는 개념은 환상이라고 브레이트는 생각했지요.

 

Chapter 3. 서사

어린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의미심장하게 낯선 곳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서사는 주인공과 세계와 은밀히 공모한다
- D. H.
로렌스 『아들과 연인』 / 조지 엘리엇 『아담 비드』 /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 / 에벌린 워 『몰락과

멸망』 / 조지 오웰 『동물농장』 /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 존 밀턴 『실낙원』

역사는 연속되는 사건들에 불과하지요. 역사는 어떤 도덕적 계획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탐욕적인 자기 이익에 따라 결정됩니다. 미덕은 그것을 소유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소설이 말하는 것과 보여주는 것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것이지요.

 

서사는 고용된 암살자 같아서, 인물들이 꽁무니를 빼는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해주지요.

[…]

스토리는 거의 확실한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끼어들어서 적시의 유산 상속이나 바람직한 신랑감의 도착,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부유한 친척의 발견 같은 해결책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런 결말의 목적은 위안을 주려는 것인 반면에, 많은 모더니즘 소설의 결말은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예술의 기능 중 하나가 독자의 사기를 북돋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울함은 정신적 쇠약을 일으킨다고 여겨졌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활기 없는 사람은 불만을 품게 되니까요. 거의 모든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이 긍정적인 분위기로 끝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불만스러운 현실의 수정.

 

질서가 와해된 곳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
포드 매독스 포드 『훌륭한 군인』 / 엘리자베스 개스켈 『메리 바튼』 / 조셉 콘래드 『암흑의 핵심』 /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섄디』

스토리가 전개될 수 있는 까닭은 초반에 어떤 질서가 와해되었기 때문입니다. […] 수많은 사실주의 소설의 결말은 이 질서를, 어쩌면 더 풍부한 형태로, 복원하고자 합니다.

 

고전적 사실주의에서는 세계 자체가 이야기로 형성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많은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독자가 스스로 구성하는 질서 말고는 다른 질서가 없습니다.

 

일부 모더니즘 작품은 서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서사는 세계에 균형 잡힌 형체가 있고 원인과 결과가 질서정연하게 이어진다는 암시를 함축하니까요. 서사는 때로 (언제나 그런 것은 결코 아니지만) 진보에 대한 믿음, 이성의 힘과 인류의 전진에 대한 믿음과 결합됩니다. 이런 고전적 서사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고무하지 못한 사건, 즉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기발하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진실의 최고 근사치는 우리 자신의 부득이한 무지의 고백인 듯합니다

 

이야기는 자립적이어야 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나 단테의 『신곡』과 달리, 이야기는 그 자체 외의 다른 권위에 호소할 수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작가가 조작할 여지는 훨씬 더 커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적인 자유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서술될 수 없는 것이 없지만, 서술될 필요가 있는 것도 없는 곳입니다.

 

이야기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진보가 야만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역사뿐 아니라 서사도 더는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듯합니다. […] 직선적 역사 관념은 물러나고 순환적 역사 관념이 등장합니다. 이야기는 그물을 던져 교묘히 빠져나가는 진실을 붙잡으려고 끝없이 노력합니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공허에 형체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조지 엘리엇과 토머스 하디는 진실이 본질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은 반면, 콘래드와 울프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진실이란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합니다. 그것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서술할 수는 없습니다. 커츠는 무시무시한 진실을 흘끗 보았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빡빡하게 조이는 이야기 형식에 억지로 밀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암흑의 핵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소설은 사실주의가, 엄밀히 말해서,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글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사실주의란 전부 다 현실을 어떤 각도에서 편집한 해석입니다. 인간의 삶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손톱의 작은 얼룩에 대해서도완벽한설명은 불가능합니다. 사실주의 소설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온갖 들쑥날쑥한 세부 묘사로 상세히 반영하리라 여겨집니다. 또한 사실주의 소설은 이 무정형의 것을 모양새 좋은 서사로 만들어내리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목표는 실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지요.

 

스토리텔링이란 부조리하기 그지없는 기획입니다. 그것은 전혀 연속적이지 않은 실재를 연속적인 형식 안에 넣으려고 하니까요. 언어 자체도 그렇습니다. 어떤 것을 말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을 배제한다는 뜻이 됩니다.

 

예술 작품이 그렇듯 인생은 목적이 없더라도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사와 플롯이 항상 공존하지는 않는다
-
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의 책』

 

마지막으로 서사와 플롯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크리스티의 범죄 스릴러는 거의 다 플롯뿐입니다. 배경 설정이나 대화, 분위기, 상징, 묘사, 숙고, 심층적 성격 묘사 등 서사의 다른 특징들이 가차 없이 제거되어 남은 것은 적나라한 사건의 뼈대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플롯은이야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사물의 조합을 의미합니다

 

Chapter 4. 해석

한 편의 글을문학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뜻하는 의미 중 하나는 그것이 특정한 맥락에 매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학 작품은 출생 시에 고아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성장해가면서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게 되듯이, 시인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상황에서 읽힐 것인지 또는 그 작품을 독자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문학 작품의 의미는 그것을 발생시킨 상황에 그리 예속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품은 본질적으로 의미의 확장이 가능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작품에 대한 온갖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모비 딕』은 죄의식과 죄, 욕망과 정신 이상에 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 단순히 고래의 지방층과 작살에 관해서나 19세기 미국에 관한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이것이픽션이라는 단어의 한 가지 의미입니다. 기본적으로 픽션이란 진실이 아닌 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 작품이 전달하는 진실을 상상력을 통한 픽션으로 바꾸어놓습니다

 

문학의 현실과 독자의 현실 사이
-
헨리 제임스 『비둘기 날개』 / 대니얼 디포 『몰 플랜더스』

언어는 그것이 다루는 것에 독자가 직접 접근한다는 느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위적 책략이나 의례적 형식을 없애버린 듯이 보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환상입니다. 디포의 문단이 제임스의 단락보다현실에 더 가까운것은 아닙니다.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현실에 더 가깝지 않습니다. 언어와 현실의 관계는 공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작품이 사실주의적이라고 묘사할 때, 어떤 절대적인 방식에서 그 작품이 비사실주의적 문학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작품이 어떤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사람들이 현실로 간주하는 것에 부합된다는 뜻이지요.

 

모더니즘은 한바탕 말의 향연을 벌입니다만, 일반적으로 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지요. T. S. 엘리엇과 사뮈엘 베케트가 그렇듯이, 모더니즘의 더욱 전형적인 특징은 언어에 대한 불신입니다. 언어가 실로 인간 경험의 직접성을 포착하거나 우리가 절대적 진실을 일견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까요?

 

문학은 의미를 내포하지 않고 생산한다
-
작자 미상 동요 「바아 바아 검은 양」

시의 언어는 그 자체가 실체이고, 그것과 다른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매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경험은 시 그 자체의 경험이지요. 시와 관련된 느낌과 생각은 시어 자체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리처드슨의 『클래리사』가 19세기에 굴욕적으로 퇴출되었다가 우리 시대에 와서 다시 새롭게읽을 만한책으로 부각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현대의 여성운동 덕분입니다. 우리는 과거가 결국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에 대해 그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압니다. 어떻든, 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사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완전히 상실한 역사적 지식 형태가 있습니다.

 

문학 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가진 텍스트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양한, 가능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모태라고 간주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요. 작품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기보다는 의미를 생산합니다.

 

의미가 공적인 것.

 

의미는 언어에 속하고, 언어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의미를 추출합니다. 언어는 자유로이 떠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 작용하는 방식이나 한 사회의 가치, 전통, 가설, 제도, 물적 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말하듯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온갖 행위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나는 문학 작품에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는 것이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공유될 수 있어야 우리는 그것을 의미라고 부릅니다.

 

유도하기, 강요하기, 자극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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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벌린 워 「러브데이 씨의 짧은 여행」

독자는 추측을 하면서 문학 작품을 읽는 반면에, 문학 작품은 독자에게 태도를 암시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를 믿지 말고, 이야기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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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

소설은 어린애와 범죄자 간의 유사점을 암시합니다. 둘 다 인습적 사회에 절반쯤 속하면서도 절반쯤은 배제되어 있어서 특권을 빼앗기고 극심한 억압을 받습니다. 양쪽 모두 많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데 익숙합니다.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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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은 동화를 꿰뚫어봅니다. 이 작품은 관대한 요정, 해비셤 양이 실은 사악한 마녀이고, 꿈은 오염되었으며, 보물은 부패했고, 야심은 연기처럼 공허한 소재로 짜여 있음을 인식합니다

 

문학 작품을 읽는 몇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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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K. 롤링 『해리 포터』 시리즈

 

핍과 올리버의 부모는 제자리에 없습니다. 그런 처지의 아이로서 그들은 탐 존스에서부터 해리 포터에 이르기까지 영문학의 책장을 채우고 있는 고아나 반쪽 고아, 피보호자, 버림받은 아이, 사생아, 바꿔친 아이, 풀 죽은 의붓자식 등의 눈에 띄는 계보에 속합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은, 자신의 힘겨운 노력으로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된 인물에 매료됩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리허설인 셈이지요.

 

사실주의 소설은, 이미 보았듯이, 일종의 정착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전형적인 모더니즘 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사회적 의무나 가정적 의무에서 벗어나 고독하게 환멸을 느끼며 떠나는 것으로 끝납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은 누군가와다르면서도 우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볼드모트처럼 V로 시작하면서 부정적 의미가 함축된 단어가 눈에 띄게 많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악당(villain), (vice), 독수리(vulture), 문화 파괴자(vandal), 유독한(venomous), 사악한(vicious), 부패한(venal), 우쭐대는(vain), 맥빠진(vapid), 독설적인(vituperative), 멍청한(vacuous), 게걸스러운(voracious), 흡혈귀(vampire), 악의적인(virulent), 암여우(vixen), 관음증에 걸린 사람(voyeur), 토하다(vomit), 모험 투자가(venture capitalist), 현기증(vertigo), 짜증나게 하다(vex), 천박한(vulgar), 비열한(vile), 살모사(viper), 바가지 긁는 여자(virago), 사나운(violent), 흑인차별 지지자(verkrampte), 보복적인(vindictive), 해충(vermin), 복수심에 불타는(vengeful), 자경단원(vigilante), 그리고 (아일랜드 음악의 전통적 연주 방식의 열광자들을 위한) 밴 모리슨(Van Morrison)62)이 있습니다. V자 신호는 모욕적이고 거세를 상징하는 제스처입니다. 볼드모트는 프랑스어로죽음의 도주를 뜻합니다만, 당당하지 않은 또 다른 동물인 들쥐(vole)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또한 지하납골당(볼트, vault)과 곰팡이(몰드, mold)를 암시할 수도 있지요.

 

Chapter 5. 가치


과학은 발달할 수 있어도 예술은 그렇지 않습니다. […] 예술의 임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생생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현재란 대체로 과거의 재순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충실성이 현재에 정통성을 부여합니다.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대체로 과거이고, 미래는 이미 지나간 것을 주제로 한 일련의 가벼운 변주곡들을 연주하겠지요. 변화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고 다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물론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변화무쌍함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요.

 

각각의 예술 작품은 기적과 같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것은 신의 세계 창조 행위의 모방이자 반복이지요. […] 그것을 고무하는 것은 상상력이고, 상상력이란 현실성보다는 가능성과 관련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것을 재활용하고, 바꾸고, 풍자하고, 본떠서 다른 것을 만드는 세계를 열렬히 수용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복사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어딘가에 원본이 있다는 의미가 함축될 텐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본은 없이 모조품만 있습니다. 태초에 모조품이 있었지요. […] 그렇지만 절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가짜일 수 없으니까요.

 

우리가 닮은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밀접한 관련성과 상응성에 대단히 매료된 신화적 사고나 마술적 사고의 유산일지 모르지요. 낭만주의자와 모더니스트에게, 예술의 의미는 삶의 모방이 아니라 변형입니다.

 

무릇 문학적 고전이란 변함없는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기보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어떤 비평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문학 교수들도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전등 불빛으로 루퍼트 베어의 모험담을 열심히 탐독할지 모르지요. 예술 작품을 즐기는 것과 경탄하는 것은 다릅니다. 경탄하지 않는 책을 즐길 수 있고, 즐기지 않는 책을 경탄할 수도 있습니다.

 

시는 단지 경험의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경험에 관심을 갖습니다.

 

소설의 언어: 작위적 기교 vs. 독창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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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업다이크 『토끼 잠들다』 / 에벌린 워 「전술 훈련」 / 윌리엄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 캐럴 실즈 『사랑 공화국』

시의 언어: 감상적 고백 vs. 정제된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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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 찰스 스윈번 『캘리던의 애틀랜타』 / 에이미 로웰 「풍향계가 남쪽을 가리키네」 / 윌리엄 맥고나걸 「은빛 테이 강의 철교」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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