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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아고타 크리스토프

2020. 2. 26.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저/용경식

20여 개 언어로 번역된, 이름의 철자 순서만이 다른
쌍둥이 형제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의 처절한 운명이 교차하는 3부작 소설

소설 전체에서, 곧 제1부 「비밀 노트」와 제2부 「타인의 증거」와 제3부 「50년간의 고독」에서 작가가 서로 모순되는 현상들과 인물들을 서로 뒤얽어서 이미지를 조작하는 진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밀란 쿤데라에 때때로 비교되는 또다른 동유럽의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20여 개 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그녀의 대표작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책으로서 이 소설을 들면서, “철학자로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 세계가 그 안에 있다”고 말했다. 

밑줄긋기 왈, 이 책을 읽으면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떠오른다. 

 

 

(첫 문장)

 

할머니 집에 가다

 

우리는 대도시에서 왔다. 밤새 여행한 것이다. 엄마는 눈이 빨개졌다. 엄마는 커다란 골판지 상자를 들었고, 우리는 각자 작은 옷가방을 하나씩 들었다. 아버지의 대사전은 너무 무거워서 우리 둘이 번갈아가며 들었다.

 

(마지막 문장)

 

우리는 영구차를 따라갔다. 대사관 직원과 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흰색 카네이션 한 다발과 빨간 카네이션 한 다발을 들고 갔다. 나는 그것들을 꽃가게에서 샀다. 우리 집 정원에는 여름철에도 카네이션은 없었다. 어머니는 카네이션만 빼고 온갖 꽃들을 다 심었다.

아버지 무덤 옆에 새로운 구덩이를 팠다. 거기에 내 형제의 관을 넣고, 내 이름과 철자가 하나만 다른 이름을 새긴 십자가를 세웠다.  

 

나는 매일 묘지에 간다. 나는 Claus라는 이름이 새겨진 십자가를 바라보며 Lucas라는 이름이 새겨진 다른 십자가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또한 우리 네 사람이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만 돌아가시면,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기차, 그래, 그건 좋은 생각이다.

 

 

제 1부 비밀 노트

 

할머니 집

 

고양이도 한 마리 있다. 그 녀석에게는 먹을 것을 줘서는 안 된다. 항상 배가 고프게 내버려둬야 쥐를 잘 잡으니까.

 

할머니

 

우리는 그녀를 할머니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부른다.

그녀는 우리를 ‘개자식들’이라고 부른다.

 

노동

 

“이제 뭘 좀 안 모양이구나. 지붕 아래서 자고 배불리 먹으려면 그 정도 일은 해야지.”

우리는 말했다.

“그게 아니에요. 일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을 구경만 하는 것은 더 힘들어서 그래요. 더구나 노인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말이에요.”

할머니가 비웃었다.

“개자식들! 내가 불쌍하게 보인다 이 말이구나?”

“아니에요, 할머니.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이 부끄러웠을 뿐이에요.”

 

숲과 개울

 

더러움

 

거름, 물고기, 풀, 버섯, 연기, 우유, 치즈, 진흙, 개흙, 흙, 땀, 오줌, 곰팡이의 냄새가 뒤섞인 것이 바로 우리의 냄새이다.

그것은 할머니의 냄새와도 같다.

 

몸을 단련하다

 

우리는 발가벗는다. 서로의 알몸을 혁대로 갈긴다. 맞을 적마다 말한다.

“하나도 안 아프다.”

[…]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우리의 감각은 정말로 없어졌다. 아픈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 화상을 입고, 칼로 베이고, 고통을 받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제 울지 않는다.

 

당번병

 

정신을 단련하다

 

엄마는 우리에게 말했다.

“귀여운 것들! 내 사랑! 내 행복! 금쪽같은 내 새끼들!”

우리는 이런 말들을 떠올릴 적마다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런 말들은 잊어야 한다. 이제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추억은 우리가 간직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종이와 연필과 노트를 사다

 

우리의 공부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 이웃집 아주머니와 딸

 

“난 너희들이 주는 과일이나 생선이나 우유 따윈 필요 없어! 그런 건 다 내가 훔치면 돼.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들이 날 좋아해주는 거야.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거든. 우리 엄마조차도. 하지만 뭐, 나 역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우리 엄마도 너희들도! 나는 너희들을 미워해!”

 

구걸 연습

 

언청이

 

장님과 귀머거리 연습

 

한참을 그렇게 연습을 거듭하고 나니 이제 삼각 숄로 눈을 가리거나, 풀 뭉치로 귀를 막지 않아도 된다. 장님 역은 단지 시선을 자신의 내부로 돌리면 그만이고, 귀머거리 역은 온갖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탈주병

 

“난 이제 군인 생활이 싫어졌어.”

“더 이상 적과 싸우기 싫다고요?”

“난 아무하고도 싸우기 싫어. 나한테 적은 없어.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난 허가 없이 연대(聯隊)를 떠났거든. 도망친 거야. 난 탈주병이란 말이야. 잡히면 총살형이나 교수형이야.”

우리가 물었다.

“살인자처럼요?”

“그래, 꼭 살인자처럼.”

“그렇지만, 아저씨는 아무도 죽이려고 하지 않았잖아요. 다만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인데.”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우리가 말했다.

“아저씨도 아시다시피, 우는 건 소용없는 짓이에요. 우리는 절대로 울지 않아요. 우리는 아직 아저씨처럼 어른이 아니라구요.”

 

단식 연습

 

할아버지의 무덤

 

잔혹 연습

 

“죽일 게 있으면 저희를 불러주세요. 이제부터 죽이는 일은 저희 몫이에요.”

할머니가 말했다.

“그 짓이 그렇게 좋단 말이냐, 엉?”

“아니에요, 할머니, 그런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저희는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에요.”

“알겠다. 또 새로운 연습이구나. 너희 말이 옳아. 필요에 따라서는 죽일 줄도 알아야 하겠지.”

 

다른 아이들

 

“너희들은 왜 진작 날 도와주지 않았니?”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덩치 큰 세 녀석이 덤비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 물통을 놈들 대가리에 던져버리든지, 손톱으로 얼굴을 온통 할퀴어놓든지, 불알을 발로 걷어차든지, 그도 저도 안 되면, 고함을 치고, 울부짖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아예 달아났다가 나중에 다시 오든가.”

 

겨울

 

“돈을 보내주는 건 우리 엄마예요, 편지를 보내는 것도 엄마고요.”

할머니가 말했다.

“너희 엄마가 편지를 쓴 것은 나한테가 아니야. 내가 글을 못 읽는다는 걸 잘 아니까. 예전에는 내게 편지를 보낸 적이 한번도 없어. 지금은 너희들이 있으니까 편지를 하는 거지. 하지만 나는 편지 따위는 필요 없다! 너희 엄마가 보내주는 것 중에는 내게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우체부

 

구두장이

 

“우리는 선물 받는 걸 싫어해요.”

“그건 또 왜?”

“우리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 걸 싫어하거든요.”

 

도둑질

 

협박

 

“토요일마다 오너라. 하지만 내가 너희들의 협박에 못 이겨서 그런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마라. 난 자비심에서 그러는 것뿐이니까.”

우리가 말했다.

“우리가 신부님께 기대했던 것도 바로 그거예요.”

 

비난

 

전쟁이 모두를 인색하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신부의 하녀

 

목욕

 

신부님

 

“그러면 ‘십계명’도 알겠구나. 너희들은 그걸 지키니?”

“아니요, 신부님. 우리는 지키지 않아요.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거기에는 ‘살생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죽이기를 일삼고 있어요.”

신부가 말했다.

“그렇구나······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하녀와 당번병

 

외국인 장교

 

외국어

 

장교의 친구

우리의 첫 무대

 

“당신, 입 닥쳐. 여자들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그 여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보 같은 소리! 온갖 궂은 일, 온갖 걱정에 빠져 지내는 게 여자야. 아이들 먹여 살려야지, 부상병들 돌봐야지. 당신들은 일단 전쟁만 끝나면, 모두 다 영웅이 되잖아. 죽었으면 죽어서 영웅, 살아남았으면 살아서 영웅, 부상당했으면 부상당해서 영웅. 전쟁을 발명한 것도 당신들 남자들이고, 이번 전쟁도 당신들의 전쟁이야. 당신들이 원해서 그렇게 한 거야, 개똥같은 영웅들아!”

모두들 왁자지껄 떠들고, 고함치기 시작했다. 우리 옆에 있던 노인이 말했다.

“아무도 이런 전쟁을 원하지 않았어. 아무도, 아무도.”

 

한 단계 발전한 우리의 공연

 

술 마신 사람들은 돈을 쉽게 준다. 그들은 또한 쉽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한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의 온갖 비밀을 다 알게 되었다.

 

연극

 

공습경보

 

끌려가는 사람들

 

“너희가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는 사실은 퍽 유감스런 일이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구나.”

“신부님도요.”

“그래, 난 늙어서 그런 거란다.”

“그러면 우리는요? 추워서 그러는 거예요.”

 

“너희는 너무 예민해. 너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희가 본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우리는 영원히 아무것도 잊지 못할 거예요.”

그녀가 우리를 밖으로 내몰았다.

“자, 진정하라고! 그런 일은 너희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 너희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그 사람들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니까.”

 

할머니의 사과

 

형사

 

신문

 

감옥에서

 

노신사

 

우리의 사촌 누나가 말했다.

“내가 너희들보다 더 크다.”

우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둘이야.”

 

우리의 사촌 누나

 

보석

 

사촌누나와 그녀의 애인

 

축복

 

패주

 

당번병이 말했다.

“만사 끝장이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 지는 것이 낫지.”

 

시체 더미

 

우리 엄마

 

사촌 누나가 떠나다

 

새로운 외국인들이 도착하다

 

화재

 

전쟁은 끝나고

 

학교도 문을 열고

 

할머니가 포도밭을 팔다

 

할머니의 병

 

할머니의 보물

 

우리 아빠

 

아빠가 다시 돌아오다

 

이별

 

아빠는 두 번째 철조망 직전에 쓰러져 있다.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 가게 하는 것이다.

마대를 쥐고, 앞서 간 발자국을 따라간 다음, 아빠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밟고, 우리 가운데 하나만 국경을 넘어갔다. 남은 하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제2부 타인의 증거

 

1

 

“넌 슬퍼해야 할 일이 없겠구나?”

“네, 그래요. 저는 슬픈 일이 있으면, 기쁜 일로 마음을 달래거든요.”

 

 

“제가 가져다드리는 걸 드세요. 그리고 돈 이야기는 이제 하지 마세요.”

“난 받아들일 수 없네.”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훨씬 쉽지 않을까요? 오만도 죄입니다, 신부님.”

 

“그 민족은 벌써 벌을 받았다네. 과거와 미래에 대해.”

 

2

 

“얘는 불행해질 거야.”

“너도 불행해, 하지만 넌 불구는 아니야. 애는 어쩌면 너보다, 또는 그 누구보다도 더 불행하지 않을지 몰라.”

 

“네가 잘못 안 거야, 마티아스. 넌 클 거야. 다른 아이들보다 좀 늦기는 하겠지만, 너도 크기는 클 거야.”

아이가 물었다.

“왜 늦게 크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지. 넌 다른 사람들만큼 크지는 않겠지만, 영리하잖아. 키는 중요하지 않아. 영리한 게 더 중요하지.”

 

3

 

“어른들 책도 다 마찬가지야. 자, 보게. 소설들도 다 체제를 찬양하는 것들이야. 이 나라에는 이제 작가가 없는 것 같아.”

루카스가 말했다.

“네, 저도 그런 소설들을 알아요. 그런 것들은 종이 무게만큼밖에 가치가 없죠.

 

“상자에 담아놓으면 사람들이 실어가서 폐기 처분시키죠.”

“금서가 많은가요?”

“거의 다예요.”

루카스는 책이 가득 담긴 커다란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참 슬픈 일을 하시는군요.”

 

“아니요. 그는 떠났어요. 국경을 넘어갔어요.”

“당신은 왜 같이 떠나지 않았어요?”

“우리 중 하나는 여기 남아서 가축이랑, 채소밭이랑, 할머니 집을 지켜야 했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각자 홀로 살아가는 법도 배워야 했어요.”

클라라는 루카스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형제의 이름이 뭐죠?”

“클라우스(Claus).”

“클라우스는 돌아오겠죠. 하지만, 토마스, 그 사람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어요.”

 

“넌 지난 몇 년 동안 마치 아들처럼 내 수발을 들어왔어.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이 많은 사랑과 은혜에 무엇으로 감사해야 하지?”

루카스는 말했다.

“제게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사랑도 은혜도 모르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루카스? 난 그 반대야. 넌 심한 상처를 입었고,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태야.”

루카스는 입을 다물었고, 신부가 덧붙여 말했다.

“나는 네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있는 걸 보고도 너를 버리고 떠나게 된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하지만 난 늘 너를 생각하고 네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거야. 넌 지금 나쁜 길에 빠져 있어. 난 네가 어디까지 갈까를 가끔 생각해보지. 너의 정열적이고 불안한 영혼은 너를 최악의 경우까지 몰고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어. 신의 자비는 무한하니까.”

 

“젊은 날에 신을 섬기도록 해야 해. 불행한 날이 닥치기 전에, 그리고 네 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루카스는 고개를 숙였고, 그의 이마가 노인의 가슴에 닿았다. 루카스가 신부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태양과 빛이, 또 달과 별들이 빛을 잃고, 구름이 끼기 전에······.’ 그것은 「전도서」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바싹 마른 노인의 육신이 흐느낌으로 떨렸다.

 

“신부님이 내일 떠나셔. 이제부터는 식사를 날라다드릴 필요가 없게 됐어.”

아이가 물었다.

“네가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떠나는 거지? 엄마하고 나도 떠날 거야, 네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토마스 꿈을 자주 꾸세요?”

“매일 밤. 하지만 그의 사형 집행에 관한 것뿐이야. 토마스의 활기차고 행복한 시절에 관한 꿈은 안 꿔.”

루카스가 말했다.

“나는 어디에서고 클라우스 형을 봐요. 내 방에서도, 뜰에서도, 거리에서도 내 옆에서 걷고 있어요. 형이 내게 말도 하지요.”

“뭐라고 하지?”

“자기는 죽도록 외롭게 살고 있다고.”

 

4

 

“그럼 그들은 지금 어디 있어?”

“죽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거야.”

 

“죽은 사람들하고 떠난 사람들하고는 한 가지 차이밖에 없어, 그렇지? 죽지 않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노트를 돌려주세요, 숲속 어딘가에 묻어둬야겠어요.”

“그러게, 땅속에 묻는 게 제일 안전하지. 아니면 더 좋은 방법은 불태워버리는 거야. 아무도 못 보게 하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루카스가 말했다.

“저는 그걸 꼭 보관해야 해요. 클라우스를 위해서. 이 노트들은 클라우스 혼자만의 것이거든요.”

 

“자네는 그 여자를 사랑하나?”

루카스가 문을 열었다.

“저는 그 단어의 뜻을 잘 모르겠어요. 아무도 그 뜻을 모르는 것 아닐까요? 당신이 하는 그런 질문은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질문이 자네 인생에서 가장 흔한 질문이 아니겠어? 때로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걸.”

“그러면, 당신은요? 당신은 그런 질문에 한번 답해보세요. 당신이 연설을 하면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더군요. 당신이 한 말들을 당신은 진심으로 다 믿습니까?”

“난 내 말들을 믿어야 하네.”

“하지만 정말 마음 속 깊이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그건 나도 모르지. 나에겐 그 정도의 사치가 허용되지 않았다네. 난 어려서부터 두려움에 시달려왔어.”

 

‘당신 남편은 무죄입니다. 우리는 그를 실수로 죽였습니다. 우리는 실수로 몇몇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지만, 이제 질서가 회복되었고, 우리는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더 이상 그런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들은 살인을 하고, 복권을 시키고, 사과를 하고 있어. 토마스는 이미 죽었는데! 그들이 그를 되살려낼 수 있을까? 그들이 백발이 된 내 머리를 다시 까맣게 만들 수 있을까? 미쳐버릴 것 같은 불면의 밤들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나를 볼 수 없도록 하려고 방구석에 앉아 있었어. 나는 이제야 내가 창가에 남아 있는 이유는 오직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그 불면증 환자를 관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불면증 환자가 될 거라는 걸 알았어.

 

나는 작가가 되어서 책을 쓰고 싶었거든. 그건 내 젊은 시절의 꿈이었어. 누나와 나는 종종 그 꿈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누나는 나를 믿었고, 나도 나 자신을 믿었는데, 결국 나는 책을 쓰겠다던 꿈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어.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5

 

“고아원은 중앙난방이 안 돼 있어. 방마다 난로를 피워야 하는데, 방이 일곱 개나 되니까. 자네는 내가 우리 집 우리 방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느낀 행복을 이해 못 할 걸세. […] 지옥의 문턱에까지 갔었네. 이건 비유법을 쓴 게 아니야. 실제로 수용소 건물 문 뒤에서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네. 인간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 인간이 피워놓은 불이었다네.”

 

“저는 물론 아이였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인생의 기적이었어. 그녀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게 가볍고, 쉽고, 아름다웠지. 처음에는 내가 그녀 때문에 이곳에 오곤 했는데, 이제는 주디트, 살아 있는 여인 때문에 이곳에 오네.

 

“하나도 우습지 않아요.”

“내 나이를 생각해도 말인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본질만이 중요해요.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시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많은 여자들이 실종되거나 죽은 남편을 기다리며 울고 있어요. 하지만 노인께서 방금 말했듯이,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있지요.’”

불면증 환자는 눈을 뜨고 루카스를 바라본다.

“희미해지고, 줄어들고, 그래, 내가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네.”

 

“넌 정말로 내가 너를 고아원에 맡기려고 거기 보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 하지만 막상 그 문 앞에 가보니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났어. 알 수 없어. 엄마도 결코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서 떠났잖아. 난 이제 거기에는 심부름 안 갈 거야. 난 할머니 집 방향으로 가는 것도 싫어.”

 

“네 진짜 아빠는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어, 사고로, 내 아버지처럼.”

“아빠들은 항상 사고로 죽는군. 너도, 곧 사고로 죽겠네?”

“아니. 난 아주 조심을 하거든.”

 

과격한 글을 쓰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써 혁명이 시작되고 있어. 학생들에게도 번지고 있다네.

[…]

“그런 현상은 모든 계급의 인민을 대변하고 있는 거예요.”

“예외가 하나 있지. 내가 소속된 계급.”

“당신네들은 반대세력들에 비하면 극소수예요.”

“물론. 하지만 우리는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어.”

루카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페테르가 문을 열었다.

“우리는 아마도 다시 못 만나게 될 걸세, 루카스. 서로 미워하지 말고 헤어지세.”

[…]

“말해주세요, 페테르 씨! 당신은 부끄럽지 않으세요?”

페테르는 루카스의 손을 잡아 그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그는 눈을 감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루카스. 무척 부끄러워.”

그의 꼭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누가 혁명에 이긴 거야? 그리고 왜 뭐든지 금지하지?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못됐지?”

루카스가 라디오를 껐다.

“이제 라디오는 듣지 말아야 해. 들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저항운동과 투쟁과 동맹파업이 계속되었다. 체포, 투옥, 실종, 처형도 계속되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이만여 주민이 국외로 떠났다. 몇 달 뒤, 다시 침묵과 평화와 질서가 다시 지배했다.

 

혁명은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페테르가 말했다.

“역사가 심판할 거야.”

 

“그녀는 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참가했을 걸요. 그녀는 토마스를 따라가고 싶은 것 같았어요. 그녀에게도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나을 걸요. 그녀는 끊임없이 토마스 얘기를 했거든요. 토마스만 생각하고 토마스만 사랑하고, 토마스 때문에 병까지 났어요. 그녀는 결국 토마스 때문에 죽을 걸요.”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시도할 수 있네. 아이는 핑계일 뿐이지.”

[…]

“당신이 옳아요. 그러나 난 클라우스를 만나러 가고 싶지는 않아요. 돌아오는 건 그의 몫이지요. 떠난 것도 그였으니까.”

 

“혼자라도 마찬가지야.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해.”

“난 못해. 난 누구를 때리고 다치게 할 수는 없을 거야.”

“왜? 다른 아이들이 너를 때리고 상처를 주는데.”

“내가 당한 몸의 상처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참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거야.”

 

“잘 자, 마티아스. 너무나 고통스럽고, 너무나 슬플 때는, 그러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때는 소리를 질러. 그러면 속이 시원해질 거야.”

아이가 대답했다.

“난 벌써 그렇게 썼어. 난 뭐든지 다 써. 우리가 여기에 살면서부터 나한테 일어난 일은 다 써뒀어. 내 악몽들이랑, 학교랑, 뭐든지. 나도 너처럼 커다란 노트를 가지고 있어. 너는 여러 권 가지고 있지만, 난 아직 한 권뿐이야. 그나마도 아직 조금밖에 못 썼어. 난 그걸 너한테 절대로 안 보여줄 거야. 너도 네 것을 못 읽게 했으니까, 나도 못 읽게 할 거야.”

 

6

 

누나는 얘기했다. 이웃집 여자들, 누나의 고객들, 옷과 옷감, 누나의 피곤함, 누나가 자신의 남동생, 즉 나, 빅토르의 작품 활동과 성공을 위해서 치르는 희생에 대해서.

 

‘내가 죽을 거라는 건 알겠는데, 페테르, 이해는 못 하겠어.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신, 그는 분명히 아닐 거고. 그는 우리의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러면 사회가 원하는 건가? 사회는, 나를 살려두면, 아무에게도 소용없는 시체 한 구 대신에 한 권이나 또는 여러 권의 책을 얻게 될 텐데.’

 

7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그런 큰 실수를 할 수 있어. 우리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긴 뒤이지.”

 

8

 

“자. 이걸 당신에게 주겠소. 처음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는데, 그가 불필요한 것을 삭제하고 고치고 다듬었다오. 그에게 시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다 지워버리고 말았을 거요.”

클라우스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죠, 모두는 아니겠죠. 핵심만은 간직했을 겁니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는 노트들을 받아들고 미소 지었다.

“결국 이것이 루카스의 존재의 증거이겠군요. 감사합니다, 페테르 씨.

 

그는 방에 없었소. 어두운 거리나 공동묘지를 배회했던 거요. 잠이 가장 잘 오는 곳은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이라고 말하더군.

 

“당신은 왜 그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소?”

“우리는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했거든요. 완전히 분리되기로 했던 겁니다. 국경만으로는 부족해서, 침묵까지 지켰던 거지요.”

“그렇지만 당신은 돌아왔소. 왜 왔지요?”

“시련이 너무 오래 계속되었지요. 나는 지치고 병들어서 루카스를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그를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아셨을 텐데.”

 

“여전히 비가 오는군요. 차가운 보슬비예요. 집에도, 나무에도, 무덤에도 내리죠. 그들이 날 보러 오던 날도, 그들의 수척한 얼굴 위로 빗물이 흘러내렸어요. 그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고 추위는 점점 심해졌어요. 나의 벽은 나를 더 이상 보호해주지 못했어요. 벽은 나를 결코 보호해주지 못했어요. 벽의 견고함은 착각일 뿐, 벽의 흰색은 더럽혀져 있었어요.”

 

“거기에서의 생활은 훨씬 더 수월했소?”

클라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돈에 기초를 둔 사회입니다. 인생에 대해 회의를 느낄 여지도 없죠. 나는 삼십 년 동안 끔찍이도 외롭게 지냈습니다.”

 

 

제3부 50년간의 고독

 

제1편

 

“제가 관심 있는 것은요, 당신이 쓰시는 글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 하는 점이에요.”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는 나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좋아요. 하지만 내가 이겨도 화내시면 안 돼요.”

그가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오. 내가 바라는 건 배우는 것이오.”

 

나는 어린 시절에 살던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그곳은 죽은 도시이다. 집집마다 출입문은 물론이고 창문도 모두 닫혀 있다. 도시 전체가 침묵 그 자체이다.

 

아이는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퓨마를 쓰다듬는다.

아이가 내게 말한다.

“이놈은 사납지 않아요. 제 거예요. 두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이놈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아요. 고기를 안 먹거든요. 영혼만 먹어요.”

 

그는 나를 보자 일어선다.

“넌 너무 늦게 왔어. 우린 서둘러야 되겠어.”

우리는 공동묘지로 올라가서 누런 풀밭에 앉는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은 썩어가고 있다. 십자가들, 나무들, 덤불들, 꽃들 모두가. 내 형제가 자신의 지팡이로 땅을 건드리자, 하얀 벌레들이 기어나온다.

내 형제가 말한다.

“모두 다 죽은 건 아니야. 이것들은 살아 있어.”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나는 이것들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난다.

내가 말했다.

“생각에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인생을 사랑할 수 없어.”

내 형제가 자기 지팡이로 내 턱을 들어올린다.

“생각하지 마. 저길 바라봐! 저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본 적이 있어?”

나는 눈을 든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아니, 한번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어.”

 

“안 돼! 그러면 안 돼! 멈춰! 내려와! 떨어지겠어!”

그는 내가 있는 곳 위에서 멈춘다.

“넌 생각 안 나? 우리는 지붕 위에서 걸어다녔잖아, 그래도 우리는 떨어질까봐 겁낸 적이 없었어.”

“그땐 어렸고, 현기증이란 걸 몰랐지. 지금은 다르잖아, 어서 내려와!”

그가 웃는다.

“걱정 마, 난 안 떨어져. 난 날 수가 있거든. 나는 밤마다 도시 위를 날아다녀.”

그는 두 팔을 치켜들고, 펄쩍 뛰어오르더니, 뜰에 서 있는 내 발 아래로 떨어진다. 나는 몸을 굽혀 그를 내려다본다. 나는 그의 두개골과 주름진 얼굴을 잡고 운다.

얼굴이 분해되어, 눈은 사라지고, 내 손에서는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두개골이 부서져서 가는 모래알처럼 뼈들이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달아난다.

 

저 멀리 있는 집들의 창문에는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그 창문 뒤에는 삶이 있다. 평온한 삶, 정상적이고 조용한 삶이 있다. 부부, 아이들, 친척들. 멀리로부터 자동차 소리도 들려온다. 나는 사람들이 왜 밤에까지 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하는지 궁금하다. 그들은 어디를 가는가? 무엇을 하러?

죽음이 당장 모든 것을 지워버릴 것이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나는 죽을까봐 겁이 나기는 하지만, 병원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또한 주사바늘과 간호사의 하얀 상의, 대답 없는 질문, 그리고 특히 기다림을 기억한다.

 

작은 방의 다른 침대에서 잠자면서 나와 같은 리듬으로 숨 쉬던 사람, 즉 내가 아직 그 이름을 알고 있다고 믿는 그 형제는 죽은 것일까,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일까?

 

“오늘 저녁, 모두들 잠들면, 몰래 내 방으로 와.”

나는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동시에 다 같이 잠드는 법이 없었다.

 

“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가 말했다.

“그래, 난 그럴 권리가 있어. 하지만 나는 진실을 좋아하지 않아. 먼젓번 것이 차라리 나았어. 간호사가 내게 편지를 다르게 읽어준 것은 잘한 짓이야.”

그는 울었다.

 

원장님, 제가 누군가를 돕는 것을 금지시키시려거든, 누군가가 제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금지시켜주세요.

 

그 수녀는 나를 그곳에 맡겼다. 나중에 내가 ‘할머니’라고 부르게 되는 그 노파의 집에.

그녀는 나를 ‘개자식’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드디어 도착했다. 기차가 멈췄다. 국경경비대, 세관 관리, 경찰들이 기차에 올랐다. 그들은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고, 웃으며 되돌려주었다. 반대로 우리말을 쓰던 여행자 두 명은 오랫동안 심문을 받았고, 가방도 수색당했다.

 

그 호두나무는 거기에 있었지만, 발육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것은 곧 죽을 기색이었다.

나는 내 동행인에게 말했다.

“곧 죽을 것 같군요, 내 나무가.”

그가 말했다.

“감상에 빠지지 마세요. 모두가 죽어요.”

 

“아니, 넌 피우면 안 돼. 나는 지금 담배 때문에 죽어가고 있어. 너도 담배 때문에 죽고 싶니?”

소년이 내게 말했다.

“어떠어떠한 것 때문에 죽는다······아무튼, 학자라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지요······.”

“학자들이 뭐라고 한다고?”

“지구는 끝장났다. 이제 거기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너무 늦었다고.”

 

밤 아홉 시, 광장은 텅 비어 있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덧문을 닫고, 커튼을 친다. 광장은 폐쇄된 공간이 된다.

 

나는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틈만 나면 역으로 가서 여행자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의 짐을 날랐다.

그 덕택에 나는 종이 몇 장,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한 개 그리고 커다란 노트를 한 권 사서 나의 첫 번째 거짓말을 적기 시작했다.

 

“나도 저 바깥세상으로 건너가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내 형제가 말했다.

“발견할 건 아무것도 없어. 너는 뭘 찾고 있는데?”

“너. 내가 다시 돌아온 것도 너 때문이야.”

내 형제가 웃었다.

“나 때문이라고?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단지 꿈일 뿐이라는 걸. 그걸 받아들여야 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어디에도.”

 

나는 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

“나는, 나는 싫어. 두 분을 다시 뵐 수 없어.”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너는 싫어도 해야 해. 난, 나는 두 분을 매일 뵙지. 너는 단 한번만이라도 두 분을 뵈어야 해, 단 한번만이라도!”

그가 갈색 문 쪽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서 나는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식탁 위에 있던 꽤 무거운 유리 재떨이를 집어서,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이마가 문에 부딪치면서 그는 쓰러졌고, 그의 머리 언저리와 마룻바닥에 피가 낭자했다.

 

“그래서, 너는 그를 죽였어?”

내가 대답했다.

“네.”

노인이 말했다.

“너는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잘했어. 꼭 해야 할 일을 제때에 하는 사람은 드문 법이지.”

내가 말했다.

“그가 문을 열려고 했기 때문이에요.”

“넌 잘한 거야. 그가 하려는 짓을 못 하게 막은 것은 잘한 짓이야. 넌 그를 죽여야 했어. 모든 게 다 이치에 맞아야 하듯이.”

내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거기에 없을걸요. 이치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만약 그가 거기에 영원히 없어야 한다면.”

노인이 말했다.

“그 반대지. 지금부터, 그는 네가 가는 곳마다 네 옆에 있을 거야.”

노인은 멀어져갔다. 어떤 작은 집 문 앞에서 초인종을 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은 거짓말에 불과했다. 내가 이 도시에서 할머니 집에 살 때, 분명히 나 혼자였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둘, 즉 내 형제와 나라는 우리를 상상해왔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겠지요. 당신이 당신의 형제에 대해서 계속 말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돌았다고 생각할 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나는 단지 당신이 문학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당신의 문학.”

 

소년은 조서에 서명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국경을 같이 넘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소년은 열여덟 살이 아니고, 열다섯 살이다. 이름은 클라우스(Claus)가 아니다.

 

“여기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정말 궁금하군. 일종의 일기 같은 거니?”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니요, 순 거짓말이죠.”

“거짓말이라고?”

“네. 꾸며낸 얘기예요. 진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얘기지요.”

 

제2편

 

사실, 그가 우리를 다시 찾았던 곳이 이곳이다.

그것이 그라면.

그것은 분명 그이다.

나는 그를 알아보는 데 아무런 증거도 필요 없다. 나는 그를 안다. 나는 그를 알았고, 그가 죽지 않고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왜 이제야? 왜 이렇게 늦게? 왜 오십 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나는 나를 지켜야 한다. 나는 어머니를 보호해야 한다. 나는 루카스가 우리의 평화, 우리의 일상, 우리의 행복을 깨뜨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삶이 뒤집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루카스가 다시 과거를 들춰내고, 추억을 되살려내고, 어머니에게 질문을 해대면, 나도 어머니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아빠는 다른 도시로 떠나야 한단다. 전쟁이 터졌어. 동원명령을 받았어.”

우리가 말했다.

“우리는 아빠가 군인인 줄 몰랐어요. 아빠는 군인이 아니고 신문기자였잖아요.”

그가 말했다.

“전쟁 중에는, 모든 남자가 군인이 되는 거야. 신문기자들까지도, 특히 신문기자는.”

 

“왜 그들은 모두 자고, 나는 안 자는 거죠?”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됐구나. 가끔씩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하지. 한 가족이 다 잠자리에 들더라도 혼자 안 자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난 혼자 남아 있는 거 싫어요. 나도 자고 싶어요, 루카스처럼, 그리고 엄마, 아빠처럼.”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해. 그래야 그들이 돌아올 때, 말하자면 그들이 깨어났을 때, 돌봐줘야 하잖니.”

 

“제게 다 말해주세요. 다 알고 있는 편이 나아요. 저도 이제 진실을 알 만큼 충분히 컸어요.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인 걸요.”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은 내 엄마가 아니에요. 나를 사랑해야 할 사람은 우리 엄마예요. 그런데 엄마는 루카스만 사랑해요. 당신이 잘못해서.”

 

우리가 신문에 인쇄하는 내용들은 전부 현실과는 완전히 반대다. 우리는 매일매일 백 번도 더 “우리는 자유이다”라는 문장을 찍어내지만, 실제로 거리에는 사방에 외국 군대의 군인들이 널려 있고, 감옥에는 정치범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며, 해외여행은 물론 금지되어 있고, 심지어는 국내에서도 우리는 어디로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사라를 찾아 소도시 K에 갔을 때다. 그때 나는 그 이웃 마을까지 갔다가 체포되어 하룻밤 조사를 받고 수도로 보내졌다.

 

내가 우리는 왜 매일 거짓말을 찍어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가스파르 씨가 대답했다.

“어쨌든 그런 소리하지 말게. 다른 생각 말고 자네 일이나 열심히 하게.”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작가와 작품 해설

 

이별—조국과, 모국어와, 자신의 어린 시절과의 이별—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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