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장

생사의 장

샤오훙 저 / 이현정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태어나 31년이라는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작가 샤오훙. 독특한 필법으로 당당하게 중국 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그녀는, 자신이 나고 자란 동북지역(랴오닝 성(遼寧省), 지린 성(吉林省),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이 포함된 중국 동부에 위치한 북쪽 지방)의 색채를 기조로 한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생사의 장』한 편으로 샤오훙은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된 1930년대, 동북지역의 한 농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강자에 의해 학대받는 약자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식민지가 된 농촌에서 가장 약자에 속하는 것은 여성과 아이, 그리고 장애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샤오훙은 처절한 학대와 폭력적인 억압 속에서도 자신의 삶에 순응하는 여성(약자)들의 태도에 동정을 표하면서도 비판의 어조를 감추지 않는다. 소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동물의 묘사는 그녀의 비판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서문 - 루쉰

 

북방 인민들의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와 죽음에 대한 저항.

 

스스로 안전지대에 있다고 여기는 신문사의 신문들은 이 피난민들을 범인(범인)’이나 우민(우민)’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나는 그 피난민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들은 경험을 통해 겉만 번드르르한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말들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됨을 알고 있다. 그들은 기억력이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오래된 우물 속의 물과도 같이 작은 파문도 일지 않은 마음으로 마비된 것처럼 위의 글자들을 써내려왔다. 이것은 바로 노예의 마음이다. 하지만, 만약 독자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래도 노예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밀마당

 

성 밖으로 길게 뻗은 큰길에는 느릅나무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 마치 일렁일렁하며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우산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울타리에 널어둔 옷은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더러운 김을 내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불 속에서 질식해갔다. 정오의 태양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노란색, 아니 누르스름한 빛깔의 밀밭에는 짤막한 그루터기들만 남아 있었다. 이런 밀밭은 멀리서 보면 사람을 슬프게 한다.

 

그녀는 반항하거나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숨 죽은 한 조각 목화솜처럼 영원히 슬픔을 품고 있는 듯 했다.

 

간혹 말이 못 견딜 정도로 지쳐 걸음이 느려지면 주인은 채찍이나 다른 무언가로 말을 때렸다. 그래도 말은 결코 펄쩍 뛰거나 하지 않았다. 지나온 모든 세월이 이 말을 그렇게 만든 탓이다.

 

채소밭

 

이년아, 제대로 망쳐놨구나. 익지도 않은 토마토를 따서 버리다니. 어젯밤에 내가 몇 마디 했다고 성이 나서 그런 거야?”

어머니는 늘 이런 식이었다. 딸을 사랑했지만 딸이 채소를 망쳐놓으면 채소를 더 걱정했다. 농민들에게는 채소 한 줄기나 곡식 한 포기가 사람보다 귀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늙은 말

 

왕씨 아주머니는 머리에 낙엽을 인 채로 자신의 늙은 말을 몰고 가고 있었다. 늙은 말, 늙은 사람이 늙은 나뭇잎 한 장과 함께, 시내로 가는 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당 전체가 비린내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비린내 나는 인간 세계에서 왕씨 아주머니는 납덩어리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무겁고 감각도 없는!

 

집에는 지주가 보낸 심부름꾼이 벌써 찾아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주들은 가난한 농민에게 동전 한 닢도 그냥 남겨놓는 법이 없다. 심부름꾼은 돈을 받아 가버렸다.

왕씨 아주머니의 한나절 고통에는 아무런 대가가 없었다! 그녀 일생의 고통 역시 아무런 대가가 없었다.

 

황량한 산

 

다섯째 고모는 자기네 집 대문에 다다르자 왕씨 아주머니에게 잘 가라고 인사했다. 더 길게 남은 길은 더 많은 인생 경험을 가진 나이 많은 아주머니가 걷도록 남겨 두었다.

 

죽은 사람은 죽었다! 산 사람은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를 생각했다. 겨울이면 여자들은 여름옷을 준비했다. 남자들은 다음 해의 농사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형벌의 나날들

 

따뜻한 계절이 오면 온 마을은 새끼 낳기에 바쁘다.

 

시골에서는 사람 동물 가릴 것 없이 모두 태어나느라 바쁘고 죽느라 바빴다…….

 

죄악의 단오절

 

묘지는 죽음의 성()이었다. 꽃향기도 없고, 벌레 울음도 없었다. 설사 꽃이 있었다 해도, 설사 벌레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모두 이별가를 부르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망자의 영원한 고독을 함께하는 것일 뿐이다.

공동묘지는 가난한 농민들이 죽고 난 뒤에 지주가 베풀어주는 주택이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의 농민은 늘 지주에게 쫓겨, 보따리를 들고 어린아이를 안고 낡은 집에서 나와 더 낡은 집으로 옮겨 가곤 한다.

 

왕씨 아주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온 마을에 퍼졌다. 여자들은 관 옆에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콧물을 짜내면서,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면서. 아이를 생각하며 울기도 하고, 남편을 생각하며 울기도 하고,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생각하며 울기도 했다. 요컨대 무엇이든 가슴에 맺힌 것이 있으면 모두 이곳에 와서 풀어냈다. 마을에서 나이 많은 사람이 죽으면 여자들은 늘 이렇게 했다.

 

전염병

 

자오싼은 중얼거리면서 대문을 나섰다.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농지가 황폐해지고 있었지만, 그는 기어코 낫을 팔아야만 했다. 낫을 집 안에 두면 영원히 그의 심장을 찌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 죽고 싶어?

 

개는 결코 이리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나라가 망한 뒤 자오싼은 죽어간 그 용맹한 동지들이 불현듯 그리웠다. 살아남아 늙은 그는, 비분강개하는 마음만 있을 뿐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자오싼은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

 

옳소! 젊은이들을 모읍시다. 우리도 혁명군이라고 이름 지읍시다.”

사실 자오싼은 자신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혁명군이 무엇을 뜻하는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유 없이 위안을 느꼈다.

 

자오싼은 자신이 중국인이라는 것만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그는 자신이 중국인 가운데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비록 그렇긴 해도, 자오싼은 매우 발전적이었다. 그는 온 마을 사람들의 성장을 대변할만했다. 그는 예전에는 국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자신이 어느 나라 국민이지도 잊고 살았다.

 

도시로 가다

 

진즈는 용감하게 도시로 들어왔다가 수치심에 쫓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

집에 왔으니 하룻밤 자고 내일 또 가봐!”

진즈는 캉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뻐근한 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이 왜 기뻐하지 않는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 장의 지폐를 보고 또 다른 한 장을 상상했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지폐가 그녀의 수중에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딸을 격려해야만 했다.

 

예전에는 남자가 원수더니, 지금은 일본 놈들이 원수네요.”

끝내 그녀는 가슴 아픈 생각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전 중국인이 원망스러워요. 그 외에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실패한 노란 약봉지

 

애국군이 노란 깃발을 펼쳐 들고 삼가촌을 지나갔다. 깃발에는 붉은 글씨로 애국군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따라갔다. 그들은 애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애국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들에게는 먹을 밥이 없었다.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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