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소설/희곡 2020. 3. 10. 14:26
10 1/2 장으로 쓴 세계 역사

10 1/2 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언 반스

프랑스와 영국, 독일 등지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은 작가 줄리언 반스가 역사를 어떻게 포착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노아의 방주에 밀항한 좀벌레가 폭로하는 노아와 방주의 진실, 메두사호의 참극을 그린 제리코의 그림 「난파 장면」에 대한 재현과 추측 등, 역사 10편의 이야기와 1/2편의 단상이 패러디와 판타지, 에세이와 서간문 등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작가가 이 이야기들을 통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역사는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허구'라는 것이다. 역사는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역사가가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일뿐이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연관되어 있는 옛이야기들이 매우 코믹하게 결합되고 진전되면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역사가 어떻게 허구화되고 신화화되고 우화화되었는지, 작가는 색다른 시각으로 세계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제1장 밀항자

 

우리가 탄 방주, 그곳은 자연보호 구역이 아니라, 때로는 오히려 감옥선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았고, 인내하였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이 어색한 에피소드를 미화시키고 과거를 편리한 대로 왜곡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런 식의 제약이 없습니다. 나(나무좀)는 결코 선택된 일이 없습니다.

[…]

내가 그 〈항해〉를 회상할 땐, 의무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습니다. 제 이야기는 믿어도 좋습니다.

 

당신네 종은 언제나 날짜 계산이 엉망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7의 배수에 대한 당신네 종의 이상한 집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택받은 자들의 수용소> […] 의무적인 집단 결혼.

 

제가 알기로 당신네 종은 우리의 세계를 잔인하고, 서로 잡아먹고, 속이는 세계로 생각하고 깔보는 경향이 있지요(그러나 당신네들은 이 주장이 우리와 당신들 사이를 더 멀리하기보다는 더 가깝게 한다는 것을 인정할 겁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우리들 사이에는 평등 의식이 늘 있었습니다. 네, 물론, 우리는 서로를 먹었습니다. 힘이 약한 종들은 자신보다 더 크고 배고픈 어떤 동물의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너무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자연의 이치로 인식했을 뿐입니다.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로 해서 그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우수한 동물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더 위험한 동물이었을 뿐이지요.

아마 당신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겠지만,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상호 존중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른 동물을 먹는 것이 그 동물을 무시하는 근거가 되지 않았고, 또 먹히는 것이 희생자 ─ 또는 그의 가족들 ─ 에게 먹는 종에 대한 어떤 과장된 존경심을 심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노아 ─ 또는 노아의 신 ─ 는 동물에는 두 가지 계층, 즉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이 있다는 포고를 내렸습니다. 깨끗한 동물들은 일곱 마리씩 방주에 들어가고, 불결한 것은 두 마리씩이었습니다.

[…]

그들이 재빨리 깨달았듯이 〈깨끗하다〉는 것은 불순한 축복이었습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먹을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일곱 마리의 동물들을 반갑게 실었지만, 다섯 마리에게는 주방행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노아는 신을 매우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만일 신의 특성을 이해했다면, 그것이 아마 가장 안전한 노선이었을 테지요.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우리는 그저 물 위에 떠 있는 간이식당에 불과했지요.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 모두, 방주를 탄 그들에게는 똑같았습니다. 식사가 첫 번째이고, 신앙은 그다음, 이것이 실상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전적으로 노아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내 말은, 노아의 신은 정말로 가혹한 역할 모델이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먼저 하느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생각해 보고 난 뒤에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요. 항상 어깨 너머를 돌아다보며 재가를 구한다 ─ 이건 어른이 아니잖습니까?

 

리비아, 즉 방주에서 태어난 아이는 빨간 머리였습니다. 빨간 머리털에 녹색 눈. 바로 이런 것들이 문제의 진상이지요.

여기서부터 우리는 사실의 항구를 떠나 소문의 공해(公海)로 나갑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고, 그것을 계속 믿고 있습니다.

 

까마귀는 늘 자기가 올리브 나무를 발견했고 자기가 거기서 나뭇잎 하나를 방주로 가져왔으나, 노아는 비둘기가 그걸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결정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늘 까마귀를 믿습니다. 그는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비둘기보다 공중에서 훨씬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동물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노아다운 일이었다는 겁니다(또다시 그의 신을 모방해서 말입니다).

 

다시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 겁났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감옥과 그들의 교도관을 의지하게 되었던 거지요. 그다음 몇 세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예상할 만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전의 그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돌아다니는 돼지와 양들은 방주에 탔던 활기 있는 조상들에 비하면 죽었다 살아난 시체일 뿐입니다. 그들은 속을 다 빼버렸습니다. 그들 중 칠면조 같은 동물은 튀기거나 삶기 전에 다시 속이 채워지는 수모를 당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즉 인간은 동물에 비해 매우 진화가 덜된 종이라는 겁니다. 물론, 당신들의 영리함, 당신들의 상당한 잠재 능력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아직도 발전의 초기 단계에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입니다. 그건 진화되었다는 뜻이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의 본분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네 종은 진실에 너무 소홀합니다. 당신들은 계속 일들을 잊어버리거나, 잊는 척합니다. 바라디와 그의 방주의 실종 ─ 그에 대한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 있습니까?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도 긍정적인 면이 있으리라는 걸 압니다. 나쁜 일을 외면해 버리면 일의 계속적 수행을 용이하게 하거든요. 그러나 나쁜 일을 무시하면 결국 나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게 됩니다. 당신들은 항상 나쁜 일들로 놀랍니다. 총이 사람을 죽이고, 돈이 사람을 부패시키고,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을 당신들은 놀라워하지요. 그런 순진성은 매력적일 수 있지만, 슬프게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겨라. 이게 당신들의 변함없는 첫 본능이지요. 그리고 다른 누구를 비난할 수 없으면, 그 문제는 도대체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라. 규칙을 고쳐 써라. 골포스트의 위치를 바꾸어라.

 

 

제 2장 방문자

 

자기들을 구금하고 있는 자들은 예상과 달리 그렇게 신경질적인 살인자들은 아니었다. 반면에, 불길한 점은 다행스러운 점과 아주 가까이 있었다. 신경질적이 아니기 때문에 방문자들은 신용할 수 있을 것 같고, 능률적일 것 같고, 따라서 그들의 목적을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산타 에우페미아호를 납치했는가? 그들은 누구와 협상하고 있는가? 그리고 프랭클린이 알고 있기로는, 크고 느리게 계속 원을 그리며 선회하는 이 저주받은 배는 누가 조종하고 있는 것인가?

 

근년에 서구 정부들은 테러리즘과 위협에 의연하게 용감히 맞섰다고 떠들어 왔었다. 그러나 위협에 용감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테러리스트들은 인식하지 않은 듯 위협은 계속되었다. 중간에 있는 사람들만 살해되고, 정부와 테러리스트들은 살아남았다.

 

「법? 휴즈 씨, 사람들은 항상 〈우리〉에게 무엇이 법인지 말하고 있지요. 그들이 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불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나는 가끔 당황합니다.」

「예컨대, 피난민 캠프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합법적인가요? 이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규정한 법을 자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황한 논쟁거리이고, 나는 법이 무의미하듯이 논쟁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때때로 생각하지요.」

 

「…사람들을 죽여야 이룩된다고요? 유쾌한 철학이군요.」

「세계는 유쾌한 곳이 아니지요.」

 

어미는 실험자들 아내의 모성애적 행동과 별 차이 없는 태도로, 젖먹이에게 여전히 젖을 먹이고 털을 골라 주고 있었다. 그다음 그들은 스위치를 돌려 원숭이 우리의 금속 바닥을 가열하기 시작했다.

원숭이는 실험자들이 표현하듯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간의 선택에 직면했다. […] 그리고 모든 사례에서 빠르든지 늦든지 간에 언제나 이기주의가 이타주의를 이겼다.

 

그는 자신이 트리시아의 시체 위에 올라서서 자신의 불타는 발을 보호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치가 떨렸다. 강연을 해야만 되겠지. 그 점이 원숭이와 인간과의 차이점이었다.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인간은 이타주의가 가능했다. 이래서 그는 원숭이가 아니었다. 물론, 그가 강연을 하면 그의 청중들이 정반대의 결론, 즉 프랭클린은 이기주의에서 움직이고 있고, 더러운 아첨으로 무사히 위기를 모면했다는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타주의의 문제로서, 항상 오해를 받기 쉬운 일이었다. 나중에 모든 것을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지, 나중이란 게 있다면. 그들 모두가 살아 있다면.

 

그는 초기 시온주의자 정착민들과 땅 소유권에 대한 서구적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다. 밸푸어 선언. 유럽으로부터의 유대인 이민. 제2차 세계 대전.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유럽인의 죄를 아랍인에게 속죄시키는 일.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치와 같이 되는 것임을 나치 박해에서 배운 유대인들. 그들의 군국주의, 팽창주의, 인종주의. 6일 전쟁 초, 이집트 공군에 대한 그들의 선제공격은 도덕적으로 진주만 공격과 똑같다는 것(프랭클린은 일부러 일본인들 ─ 또는 미국인들 ─ 을 그 순간, 또 그 후 얼마 동안 바라보지 않았다). 피난민 캠프들. 땅 도둑질. 달러에 의한 인위적인 이스라엘 경제 지원. 재산을 빼앗긴 자들에게 범한 잔학 행위. 미국의 유대인 압력 단체. 아랍인들이 서구 열강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미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과 동등한 중동에서의 정의라는 것. 나치에게서 유대인이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게서 아랍인이 배운 교훈, 즉 유감스럽게도 폭력이 필요하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제3장 종교 재판

 

곤충 측 변론

 

본인은 말하는 저의 혀로 말 못하는 그들의 혀를 대신해서 봉사할 것을 아주 겸허하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주교 측 반대 변론

 

당 법정이 파문의 철퇴를 가벼이 또는 함부로 던져서는 안 되며, 가벼이 또는 함부로 던지면, 특별한 에너지와 힘 때문에, 만약 그것이 겨냥한 대상을 명중시키지 못하면, 그것을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계층 구조에서 그들의 위치가 무엇이 될는지 ─ 그들이 자연스러운 존재인지, 살아 있는 타락인지, 악마의 창조물인지─ 는 그러한 문제를 연구하는 교회의 위대한 학자님들이 밝히실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비천한 교회를 유린하도록 왜 나무좀의 재앙을 허용하셨을지 그 많은 이유를 모두 알 수도 없습니다.

 

교회 재판관의 판결

 

1년에 한 번, 브장송의 주교, 위고께서 무능력의 어둠으로 영락했던 그 가증스러운 날이 돌아올 때마다….

 

여기서 브장송 시립 문서 보관소의 사본은 끊기고, 법정이 과했던 연례 회개 또는 추도의 세부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양피지의 상태로 보아 지난 450년 동안 어쩌면 한 번 이상, 어떤 흰개미 종의 공격을 받았던 것 같고, 이로 인해 교회 재판관의 결론 부분이 없어진 것 같다.

 

 

제4장 생존자

 

그 여자는 산타클로스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 침대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간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순록이 날았다는 건 믿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버리라고 설득하면서, 그런 것을 믿으면 세상에 못 믿을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여자도 이제 열네 살의 완고한 애송이로서, 언제나 준비된 답이 있었다. 〈아닙니다, 만약 순록이 날 수 있다고 믿기만 하면, 그러면 어느 것도 다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거예요〉라고 그 여자는 말했다. 어느 것이나.

 

모든 것은 〈정말〉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부분들, 특히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부분들이 그렇다.

 

우리는 왜 항상 동물을 학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좋아하는 척하고, 애완동물로 키우고, 그들이 우리처럼 반응을 한다고 생각하면 감상적이 되곤 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동물을 학대해 오지 않았는가? 그들을 죽이고 그들을 고문하고 우리의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아무도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해 보지 않는다. 우리는 물고기가 먹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이들이 돈을 내야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요사이는 물고기까지도 착취당하고 있구나 하고 그 여자는 생각했다. 착취당하고, 그다음엔 독살당하고. 저쪽의 바다는 독이 채워지고 있다. 물고기도 죽게 될 것이고.

 

나는 날짜를 세지 않는다.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제 날짜의 수로 사물을 재지 않을 것이다. 주일과 주말과 휴일 ─ 이것은 회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물을 재는 방법이다. 우리는 아주 옛날의 사이클, 우선 일출에서 일몰의 사이클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달이 등장할 것이고, 그다음 계절들, 그리고 날씨 ─ 새로운, 끔찍한 날씨 속에서 우리는 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연명할 수 있을 만큼만 먹는다. 나는 얼마나 오래 바다에 있을 것인지 계산하고 나서 식량을 48등분 한다거나 하는 그런 따위의 일은 안 할 것이다. 그것은 낡은 사고방식이고, 그런 사고방식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연명할 수 있을 만큼만 먹는다. 그뿐이다.

 

나쁜 꿈들. 악몽들인 것 같다. 꿈은 언제 악몽이 되는가? 이러한 나의 꿈들은 깨어난 후에도 계속된다. 숙취 현상이 있는 것 같다. 나쁜 꿈들은 삶의 평온을 중지시킨다.

 

〈걱정 많이 하는 자들의 생존〉 ─ 이란 말인가? 그레그 같은 사람들은 공룡처럼 사멸할 것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이 법칙임에 틀림없다. 빙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더 안전하고, 따뜻한 기후를 찾아서 길고 위험한 여행을 떠났던 동물들이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공룡은 자기들이 신경 쇠약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월경전긴장증 탓으로 돌렸고, 어리석은 여자라고 말했다고 나는 믿는다.

 

1492년

콜럼버스는 푸른 바다를 항해했다.

그리고 그다음이 뭐더라? 사람들은 늘 척척 외우는데. 이름, 날짜, 업적. 나는 날짜를 증오한다. 날짜는 난폭자, 날짜는 척척박사이다.

 

「무슨 말씀인가요, 동물원이라니?」

「빗장 말이에요, 멍청하게.」 나는 정말이지 그게 동물원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들이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과 싸운다는 건 늘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여자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이제 믿을 마음이 생겼다. 죽기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다. 그게 아니고, 그 여자는 일어나고 있는 일을 구경하고 있는, 곰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나서 그 속에 빠지는 걸 구경하는 어떤 존재를 믿고 싶어진 것이었다. 주변에 그것을 전할 자가 아무도 없으면 그건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라 ─ 그들은 자신들을 폭파해 버렸다.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제5장 난파

 

계획은 완벽하게 잘 짜인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일행 중 두 사람이 증언했듯이, 그것은 지반 약한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어서, 결국 자기 중심주의의 숨결에 무산되고 말았다.

 

아주 극심한 절망감이 지배하는 가운데 격론을 벌이고 나서 건강한 15명 사이에서 합의된 것은,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의 공동 이익을 위해 병든 동지들은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 마치 깨끗한 자와 더러운 자가 분리되듯 건강한 사람과 건강치 못한 자로 분리된 것이었다.

 

재난을 어떻게 예술로 전환하는가?

오늘날은 그 과정이 자동적이다. 핵발전소가 폭발한다? 1년 이내에 런던의 어느 극장에서 상연될 것이다. 어떤 대통령이 암살된다? 책 또는 영화 또는 영화화된 책 또는 책으로 된 영화가 나온다. 전쟁? 소설가들이 몰려든다. 엽기적인 연쇄 살인 사건? 시인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해야 하고, 물론, 이번의 재난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상상해야 하고, 따라서 상상 예술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건, 즉 이 재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최소한일망정 그것을 용인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 즉 이 대자연의 광적인 행위, 이 광란의 순간이 왜 발생했는가? 자, 적어도 이 재난은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다. 결국, 〈예술을 위해〉 재난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리지 않은 것부터 시작합시다. 그가 그리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메두사호가 좌초되는 모습.

2) 예인 밧줄을 팽개치고 뗏목을 포기했던 순간.

3) 밤사이의 반란.

4) 불가피했던 인육식.

5) 자기 방위적 대량 살육.

6) 나비의 출현.

7) 허리, 또는 장딴지, 또는 발목까지 물이 차 올랐던 생존자들의 모습.

8) 실제 구조 순간.

 

바꾸어 말하면 그의 첫 번째 관심은 1) 정치적, 2) 상징적, 3) 연극적, 4) 충격적, 5) 전율적, 6) 감상적, 7) 사실 기록적 또는 8) 직접적인 그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819년 살롱 전람회의 전시장에 걸린 제리코의 그림을 본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알고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메두사호 뗏목의 생존자들이고, 수평선의 그 배는 (비록 첫 시도에서는 못했다 해도) 결국 그들을 구조했으며, 그리고 세네갈 원정에서 일어난 사건은 주요한 정치적 스캔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은 그림은 그림의 배경이 되었던 이야기 자체를 뛰어넘어 남아 있는 것이다. 종교는 쇠퇴해도 그 우상은 남듯이, 이야기는 잊혀져도 그 상징물은 여전히 사람을 끌고 있다(무지한 눈이 승리하니 ─ 박식한 눈이 얼마나 안달하겠는가).

 

실로, 역사는 우리의 동정심을 민주화시키고 있다.

 

세월이 가면 이야기는 용해되어 하나의 형태, 색깔, 느낌이 되고 만다. 현대인이고 또 무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를 달리 상상한다. 즉 낙관적으로 노랗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슬픈 반백의 노인을 지지하는가? 우리의 눈은 하나의 기분, 하나의 해석에서 다른 기분, 다른 해석으로 왔다 갔다 한다. 이것이 바로 이 그림의 목적이 아닌가?

 

물론, 처음에는 현실에 충실하다. 그러나 일단 제작 과정이 진행되면, 예술에 대한 충실이 더 큰 의무가 된다. 사건은 결코 그림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숫자가 부정확하고, 인육식은 문학적 시사 정도로 축소되고, 아버지와 아들 그룹은 실제 기록과 견주어 보면 그 정당성이 아주 희박하고, 술통 그룹은 전혀 기록상의 정당성이 없다. 뗏목은 마치 비위 약한 군주의 공식 방문을 대비한 듯 말끔히 청소되어서, 인육 조각들도 싹 치워졌고, 모든 사람의 머리털은 금방 구입한 화가의 붓만큼이나 윤기가 있다.

 

그가 그리지 않은 다른 어떤 것, 즉 배역을 야윈 사람들로 재배치한 「난파 장면」을 상상해 보자. 쭈글쭈글한 육체, 곪은 상처, 벨젠의 포로들 같은 홀쭉한 볼,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들은 아무 문제 없이 우리들을 감동시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할 것이다. 캔버스의 소금물과 맞먹을 소금물이 우리의 눈에서 솟아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솔한 일이 될 것이다. 즉 너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그림이 될 것이다. 넝마를 입은 야윈 조난자들은 뗏목에 날아 왔던 나비와 똑같이 감정의 유발자가 된다. 후자가 우리를 쉽게 안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전자는 우리를 쉽게 슬프게 한다. 이런 책략은 어렵지 않게 성공한다.

 

대부분의 인간 감정에 아무런 응답이 없듯이, 그 그림의 주요한 열정에도 아무런 공식적 응답은 없다. 단순한 희망뿐만 아니라, 어떤 성가신 열망, 즉 야심, 증오, 사랑(특히 사랑)도 없다. 우리의 감정이 그것을 쏟을 만한 대상을 만나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얼마나 절망적으로 신호를 보내며, 하늘은 얼마나 어두우며, 파도는 얼마나 큰가. 우리는 모두 항해 중 실종해서, 희망과 절망 사이를 휩쓸려 내려가고, 결코 우리를 구조하러 오지 않을 어떤 것을 환호하고 있다. 재난은 예술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재난을 줄이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재난을 풀어놓은 것이고, 확대시키는 것이고, 설명하는 것이다. 재난은 예술이 되었다. 결국 그것이 재난의 존재 이유이다.

 

방주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처음으로 그림 구성에서 우위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장면의 우측 뒷전으로 밀려났다. 전경을 채우고 있는 것은 선택받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구원받았을 때 버림받아 죽어 버린 대홍수 이전의 숙명적 인간들의 수심에 찬 얼굴들이다. 여기서는 실종된 자들, 버림받은 자들, 내버린 죄인들, 신의 부스러기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 스스로 합리주의자 미켈란젤로가 되어서, 연민의 정으로 신의 무정을 교묘하게 비난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경건한 자 미켈란젤로가 되어서, 교황과의 계약을 이행하고, 우리가 우리의 습관을 고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여 주어야 할까? 그 결정은 어쩌면 순전히 미학적인 문제였다 ─ 화가는 또 다른 나무 방주를 충실히 표현하는 것보다 저주받은 자들의 일그러진 육체를 선호했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동요하는 제리코 작품의 정서 구조는 그림물감으로 강화된다. 즉, 뗏목은 밝게 조명되는 부분과 아주 어두운 부분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림자를 가능한 한 까맣게 하기 위해서, 제리코는 비튜멘(역청)을 많이 써서 그가 추구한 어른거리는 음산한 검은색을 내었다. 그러나 비튜멘은 화학적으로 불안정해서, 루이 18세가 그 작품을 살펴본 순간부터 그림 표면이 서서히, 돌이킬 수 없게 퇴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플로베르는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우리의 일부는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걸작은 일단 완성되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점점 더 나빠진다. 우리의 뛰어난 제리코 전문가도 그 그림은 〈이제 부분적으로 몰락했다〉고 확인한다. 만약 액자를 조사하면 틀림없이 나무좀이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제6장 산

 

「진일보한 거야.」 그해 6월, 대령은 퍼빌리언 전시관에서 열린 고별 공연에 혼자 다녀온 뒤, 이렇게 거듭 말했다.

〈단순히 신기하다고 해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에요〉

 

믿지 않는 자들이 망각을 기대하며 평생 인내했던 고통은 주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생기는 사후의 고통으로 연장될 것인가?

 

「아라라트 산기슭에 있습니다.」 퍼거슨 양이 대답했다. 「아르구리라는 이름은 〈그가 포도를 심었다〉는 뜻을 가진 두 개의 아르메니아 낱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곳은 홍수 이후에 노아가 농사짓는 일을 했던 곳입니다

 

「제 아버님의 영혼을 중재하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 그 산 위에 수도원이 하나 있습니다.」

「먼 길이군요.」

「적당한 거리라고 믿습니다.」

 

「〈성스러운〉 산입니다.」

「모든 것에는 항상 두 가지 설명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 의지를 타고 났고, 그것은 우리가 옳은 설명을 선택토록 하기 위한 것이지요.

 

아라라트 대봉은 버팀벽을 한 둥근 지붕처럼 크고 폭이 넓은 산이었고, 아라라트 소봉은 약 1,200미터쯤 낮고, 매끄럽고 고른 등성이를 가진 우아한 원추형의 산이었다. 아라라트 산의 대조적인 모양과 높이에서, 남녀 양성(兩性)이라는 인류의 원초적 분할의 구현을 감지할 수 있다.

 

「아버지는 그림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조명과 음악과 특허 스토브와 함께. 그것이 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로건 양은 이전보다 사정을 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대꾸를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달을 보세요. 저 달은 음악과 채색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제7장 세 개의 간단한 이야기

 

I

 

그의 노쇠함 ─ 역사에 얼룩진 옷, 허옇게 턱에 매달려 있는 침 ─ 은 나에게 인생과 필연적인 죽음의 상황에 대해 청소년이 갖는 보편적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것은 그런 상황을 참고 견디는 당사자에 대한 증오로 자연스럽게 바뀌는 감정이었다.

 

인생은 사기이고 모든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옛날에 그렇게 생각했고 이제는 알고 있다.

 

마르크스의 금언, 즉 역사는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笑劇)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II

 

신은 결국 그 도시를 용서하기로 결정했고, 이를 본 요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분개했다. 주지하는 바, 도시를 파멸시키는 취미가 실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데도 불구하고, 식은 죽 먹듯 마음을 바꾸어 버리는 주님만을 위해, 파괴의 메시지를 전하는 엄청난 수고를 했던 사람으로서는 정상적인 분개였다. 이것으로도 불충분한 듯 계속해서 자신이 승리자임을 증명하고자, 신은 이제 자기의 앞잡이에게 환상의 우화로서 자신의 처사를 설명했다.

 

구약 성서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처에 자유 의지 부재로 절름발이가 널리고, 자유 의지는 그림자도 없다. 신이 모든 카드를 장악하고 있고 모든 판을 다 이긴다. 불확실한 것은 이번에는 신이 어떤 수를 쓸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III

 

1939년 5월 13일, 토요일 오후 여덟시에, 정기선 〈세인트루이스〉호는 함부르크 모항을 출발했다. 그것은 순양선이었고, 대서양 횡단 항해를 예약한 937명의 승객들은 대부분 그들이 〈유람 여행 관광객〉임을 확인해 주는 비자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의 여행 목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대인들로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추방시키고, 멸종시키고자 하는 나치 국가에서 온 난민들이었다. […] 그들은 더 유용한 선전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허용하는 금액만 가지고 떠난다면, 쥐처럼 허둥지둥 도망치는 천한 Untermenschen(하등 인간)으로 묘사될 수 있었고, 만약 그 제도를 속여 넘기고 용케도 더 많은 돈을 휴대하면, 그들은 훔친 재산을 가지고 도망치는 경제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출국과 마찬가지로, 입국에도 원칙이나 법률 못지않게 돈이 중요하고, 두 가지 중 어느 것보다 돈이 더 효력을 가질 때가 많다. 돈은 입국 대상국 ─ 또는 쿠바의 경우에는, 일시 체재국 ─ 에 새로 도착한 사람들이 그 국가에 짐이 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해 준다. 돈은 또한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 관리들을 매수하는 데도 쓰인다.

 

이렇게 각계각층의 인물이 참여하는 협상 소식을 기다렸다. 이 협상은 며칠 간 계속되었다. 고려되고 있는 사항은 돈, 자존심, 정치적 야심, 쿠바의 여론이었다.

 

난민들의 몸값은 얼마인가? 그것은 그들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그들의 후원자가 얼마나 부자인가, 그들을 받아들일 측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입국 허가와 공포의 세계에서는 항상 파는 사람이 거래의 주인이다. 가격은 제멋대로이고, 투기적이고, 일시적이다.

 

9월 1일, 2차 대전이 시작되었고, 세인트루이스호의 승객들은 유럽 유대인과 운명을 같이했다.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할당된 나라에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추정 숫자는 구구하다.

 

 

제8장 상류로!

 

악의 없는 거짓말을 할 때는 간단하게 하는 것이 규칙이지 않소

 

네 명의 인디언이 그들이 약속한 장소, 즉 강의 굴곡부에 있는 개간지에 나와 있었고, 태어난 그대로 벌거벗고 똑바로 서 있지만 키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우리를 바라보는 눈에 두려운 빛이 전혀 없었소. 또한 하등의 호기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어요. 인디언은 창으로 사람을 찌르거나, 뭔가 그런 짓을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그러나 그들은 이상한 것은 우리들이지 자기들이 아닌 듯 그대로 거기에 서 있었소.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것 아니겠소

 

찰리에게 오는 편지는 하나도 없군요. 비상시에만 편지하라고 말한 건 진담이 아니었는데 말이오. 당신도 알아차렸을 텐데.

 

〈이곳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 같소. 미국의 우주 비행사들이 달에 갔다가 지구를 바라보고 아주 작고 멀리 떨어져 있는 여느 늙은 행성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어 돌아온 것을 당신도 기억하고 있지요? 그들 중 일부는 종교에 빠진 사람도 있고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아주 달라졌다는 것이오. 나의 경우도 비슷한데 과학 기술적 미래로 진입한 게 아니고 과거로 돌아갔다는 거요. 실제로 과거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아니고. 이곳의 모든 대원들은 인디언들이 라디오가 없으니 매우 원시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라디오가 없기 때문에 매우 진보하고 성숙했다고 본다오. 그들은 내게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가르쳐 주는 셈이지. 나는 시야가 훨씬 더 넓어지기 시작했소.

 

자신들을 뭐라고 부르는가, 즉, 그 부족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하였소. 뭐냐 하면,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어!!! 그들의 언어도 이름이 없고, 놀라운 일이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성숙한 것이오. 말하자면 민족주의여 안녕이지요.

 

단원들은 그들이 매우 원시적인 문명이어서 아직 연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소. 내 생각엔 사실은 정반대이고 그들은 말하자면 탈연기(脫演技)의 문명이 아닌가 하오. 말하자면, 더 이상의 연기가 필요 없기 때문에 연기를 망각했고 이제는 연기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지. 아주 멋진 생각이지요!

 

그 사건 때문에 인디언들보다도 우리가 훨씬 더 당황했소. 그 사람이 누군가의 형제 또는 남편이거나 또는 어떤 친척이라도 있었겠지만 아무 울음소리도 없었다는 말이오. 우리가 그날 밤 야영 캠프를 치면 모종의 의식(儀式) ─ 모르긴 해도, 옷 보따리를 태우는 등의 의식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얼마간 하고 있었소. 그런 의식이 없었다오. 여느 때와 똑같이 즐거운 캠프파이어 생활을 계속했어요.

 

이 인디언들은, 연기할 줄을 모르는 것과 똑같이, 거짓말하는 일이 없소. 게다가 난 척하는 일도 없어요. 이것이 전혀 원시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정말로 성숙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도시가 아니라 정글에서 살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소. 모든 시간을 자연에 둘러싸여 보내고, 자연이 하지 않는 것 한 가지가 거짓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오

 

이것은 모든 시대, 모든 문명의 인간 생활에 계속되고 있는 그런 갈등임을 다루고 있지요. 규율과 관용, 법조문 고수와 법 정신 고수, 수단과 목적. 그릇된 명분을 위한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명분을 위한 그릇된 행동. 교회 같은 위대한 이념이 관료주의의 수렁에 빠지는 과정,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로 출발했다가 다른 종교들처럼 결국 횡포의 종교가 되는 과정. 공산주의 또는 그 외의 어떤 위대한 이념도 똑같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그게 무슨 뜻인가?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모두 무슨 뜻인지 알지만, 뜻을 음미해 보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되지. 영화도 그렇고, 여행도 모두 그렇다오. 모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멈춰 서서 음미해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의미가 있는 척하니까 우선 그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보였을 뿐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삽입장

 

우리들의 밤은 서로 다르다. 그녀는, 부드럽게 끌고 있는 온화한 조류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처럼 잠이 들고는, 아침까지 마음 턱 놓고 표류한다. 나는 파도와 싸우면서 좋은 하루와의 작별을 망설이거나, 나빴던 하루를 여전히 투덜대면서 아주 어렵게 잠이 든다. 우리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서로 다른 해류가 흐른다. 시간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다가오는 공허에 대한 공포로 인해서 나는 번번이 침대 밖으로 떨어진다. 두 손으로 머리를 에워싼 채,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안 돼, 안 돼, 《안 돼》〉라고 쓸데없는(실망스럽게도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면 그 여자는, 마치 더러운 강에서 짖어 대며 돌아온 개를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듯, 나를 쓰다듬어 나의 공포감을 씻어 준다.

 

그건 그렇고, 내가 더 엄청난 꿈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꿈은 공포를 민주화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구두, 놓쳐 버린 기차에 대한 공포는 게릴라 공격이나 핵전쟁에 대한 공포와 똑같이 크다.

 

〈당신을 사랑해.〉 나는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인다. 〈당신을 사랑해〉라고. 모든 소설가들은 소설이 가는 길은 우회적인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가가 교훈주의의 유혹을 받을 때는, 말쑥한 선장이 전방의 폭풍을 주의 깊게 살피고, 물레바퀴 도안의 금장을 달고 여러 계기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면서, 송화기를 통해 기민한 명령을 내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갑판 아래에 아무도 없다. 기관실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키도 여러 세기 전에 부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선장은 자신뿐만 아니라 일부 승객까지도 납득시키면서, 꽤나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떠 있는 그들의 세계가 항해를 끝낼지의 여부는 선장이 아니라 사나운 바람과 암울한 조류, 빙산과 갑작스러운 암초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시인들은 산문 작가들보다 더 쉽게 사랑에 대한 시를 쓰는 듯하다. 우선, 그들은 유연성 있는 〈나〉를 소유하고 있다(내가 〈나〉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한두 문단 이내에서 내가 줄리언 반스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가상의 어떤 인물을 뜻하는지 알고 싶어 하겠지만, 시인은 양자 사이를 오가면서 심오한 감정과 객관성을 모두 달성했다는 인정을 받는다). 또 시인들은 나쁜 사랑 ─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랑 ─ 을 훌륭한 사랑의 시로 전환시킬 수 있는 듯하다. 산문 작가들은 이러한 놀라울 정도의 부정직한 변형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나쁜 사랑을 나쁜 사랑에 대한 산문으로 전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때 질투심(그리고 약간의 불신감)이 생긴다.

 

〈우리에게서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다.〉

[…]

우리에게서 살아남을 것이 사랑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만약 사랑이 우리의 사후에도 계속 꺼지지 않고 빛을 발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면 위안이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

비타민 C 튜브처럼 집 주변에 이 말들을 놔두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너무 손쉽게 손에 넣으면 생각 없이 쓰게 될 것이며,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천만에, 〈사랑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용할 것이다. 술에 취하거나, 외롭거나, 또는 ─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 매우 희망적일 때, 이 말을 동원해서, 소모하고, 먹어 치워 버린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 말이 어울리나 확인하려 사용해 보는 것 아닌가? 우리가 하는 말을 직접 귀로 들어야 우리의 생각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만두어라. 소용없는 짓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숭고한 말이니까 우리가 쓸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그 언어와 제스처에 대해 정확해야 한다. 만약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려면, 우리가 죽음을 분명히 볼 줄 알아야 되는 것만큼이나 사랑 또한 똑똑히 보아야 한다.

 

원점에서 시작하자. 사랑은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가? 아니다. 사랑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 아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하는가? 정말로 아니다. 나는 전에 이 모든 것이 그럴 거라고 물론 믿었었다. 누가 믿지 않았는가? (그리고 누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직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의 책, 우리의 영화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무수한 이야기의 결말도 그러하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사랑을 열망하는 힘 자체로 판단하면, 사랑은 일단 성취되면 일상의 아픔을 덜어 주고, 저절로 진통의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 평생 두 번(내게는 벅찬 횟수였던 것 같다) 사랑했는데, 한 번은 행복했고, 또 한 번은 불행했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것은 불행한 사랑이었다 ─ 당시도 몰랐고, 몇 년 후에도 몰랐지만.

[…]

우리가 고안한 사랑의 방정식의 오류를 안타까워하면서, 우리는 여러 해 동안 같이 살았다. 서로 간의 사랑은 행복을 증가시키지 않았다. 고집스럽게도, 우리는 증가시킨다고 우겨 댔다.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서 아주 큰 만족을 얻는 사람들은 공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며, 빌린 껍질에 들어앉아 바다 밑을 으스대며 기어 다니는 게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은 분명 〈새빨간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행복을 생산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행복을 생산하건 안 하건 간에 사랑의 으뜸가는 효능은 활기를 주는 것이다. […] 그리고 사랑은 척추를 쭉 펴는 자신감을 준다.

 

우리의 사랑은 인디언들의 도둑질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남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개성과, 우리의 목적을 제공한다.

 

만약 우리가 사랑에 안달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도래에 그처럼 감격해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결혼도 더 솔직하고 ─ 어쩌면 매우 오래 지속될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했다. 어쩌면 사랑도 불필요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중앙의 한 쌍은 매우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렇다고 말해 보아라. 그들은 그들의 상태가 전에 없이 더 정상적으로 느껴진다. 〈이것이〉 정상이라고 서로에게 말한다.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전의 시간은 모두 전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한 정상의 확신, 그들의 알맹이가 사랑으로 현상 인화되었고, 이제 영원히 틀에 넣을 수 있다는 그러한 확신으로 인해 그들은 감동적인 오만함을 갖게 된다. 이것은 완전히 비정상이다.

 

세계의 역사는 사랑이 없으면 야수적인 자부심만 키운다. 돌연변이로 생긴 사랑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필수적이다.

 

1492년

콜럼버스는 푸른 바다를 항해했다.

그다음이 어쨌는가? 모두가 더 현명해졌는가? 사람들은 해묵은 박해를 행할 수 있는 새로운 게토의 설립을 중단했는가? 해묵은 실수, 또는 새로운 실수, 또는 현대판 해묵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가?

 

날짜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날짜는 우리에게 고함친다 ─ 좌, 우, 좌, 우, 길에 합류하라, 너 부끄러운 놈. 날짜는 우리가 항상 전진하고 있다, 항상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그러나 1492년 이후 무엇이 일어났는가?

 

1493년

그는 바다를 다시 건너왔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그런 날짜이다. 1492년이 아니라 1493년, 발견이 아니라 귀환을 축하합시다.

 

역사를 지지할 만한 것이 한 가지 있다. 역사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일에는 매우 능숙하다. 사실을 감추고자 노력해도, 역사는 그것을 허용치 않는다. 시간과 과학이 역사의 편에 있다.

 

사랑은 그 밖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랑을 선전한다면, 사랑은 시민 도덕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상상의 교감 없이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달리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예술은, 종교의 쇠퇴에서 자신감을 얻어서, 예술의 세속성 초월을 천명한다(그리고 예술은 영속하고 영속한다! 예술은 죽음을 물리친다!)

 

종교와 예술은 사랑에 굴복해야 한다. 사랑은 우리의 인간성을 부여하고, 또한 우리의 신비주의를 제공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이상의 것이 있는 것이다.

 

 

제9장 아라라트 계획

 

인간 생애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도주와 귀환이 그 특징이다.

 

스파이크는 비행사이자 과학자였고 기술자였다. […] 아이가 텅 빈 하늘에서 포효하는 전투기를 조종하는 비행사로 성장한 때는, 압록강 이남의 맑은 하늘에서 어렵게 고공으로 올라와 은빛 날개를 활짝 펴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졌고, 대부분 혼자였다. 이것이 삶이었고, 그를 추락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자신뿐이었다

 

한국전이 끝난 뒤 그는 메릴랜드 주 패턱센트 리버에 있는 해군 시험 조종사 학교로 전출되었다. […] 우주 비행사는 철사 줄을 뻗치고 있는 하나의 화물, 과학자가 연구할 한 점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제10장 꿈

 

꿈을 깼다는 꿈을 꾸었다. 꿈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꿈이었는데, 내가 방금 그런 꿈을 꾸었다. 꿈을 깼다는 꿈을 꾸었다.

 

나는 항상 이런 꿈을 꾸었다. 저, 정확히 꿈이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무척 원했던 어떤 것을 말한다. 심판받는 꿈이다. 아니, 적당한 말 같지가 않다. 마치 내가 단두대에서 내 목을 잘리거나 또는 채찍을 맞거나 하기를 바라는 소리같이 들리니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고, 나는 〈판정〉받기를 원한다, 알겠나? 이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음, 인생의 결산을 원했고, 나의 삶을 살펴보고자 했다. 만약 우리가 재판정에 출두하거나 또는 정신과 의사가 우리를 대강 훑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판정을 받지 못한다. 나는 두 가지 중 어느 판정도 받아 보지 못했고, 내가 범법자이거나 미치광이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정확히 말해 실망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고, 나는 그저 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원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삶을 살펴보고 싶었다. 알겠나?

 

「신은 어디에 계신가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 당신은 신을 원하나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 신인가요?」

「그게 내가 원해서 되는 문제인가요?」

「바로 그게 문제지요. 신을 원하나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신이 있거나 아니면 신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이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어쨌든 내게 달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당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오오.」

「오늘날은 천국도 민주적이지요.」

「민주적이라니, 무슨 뜻인가요?」

「우리는 이제 사람들에게 천국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천국을 원하지요?」

「글쎄요, 그들은 인생이 계속되는 천국을 원하더군요.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보다 나은 인생을 원하지요.」

 

「옛날같이 다양하지는 않군요.」

「아, 옛날.」 그녀는 미소 지었다.

「물론, 전생 때 이야기지만 그때는 천국에 대한 꿈이 훨씬 더 야심적이었지요.」

「그런데 지옥은?」 나는 물었다.

「무슨 말씀인가요?」

「지옥이 있습니까?」

「오오, 없어요.」 그녀는 대답했다.

「지옥은 불가피한 선전이었을 뿐이죠.」

 

「그래 지옥은 없나요?」

「글쎄요, 우리가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공원에 있는 유령의 집 같은 곳이지요.」

[…]

「악질적인 으름장이 아니라 선의의 으름장이군요.」 나는 한마디했다.

「그렇지요. 요사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옛 시절의 천국에 대하여 알고 있나요?」

「아, 폐쇄된 셈이지요. 사람들이 더 이상 원하지 않았거든요.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그들을 위해 존재하나요?」

「오오, 물론입니다.」

「저를 위한 신은 아니지요?」

「그럴 것 같군요. 천국에 대한 당신의 요구를 바꾼다면 달라지겠지만요.」

 

「당신이 원하는 것과 당신이 기대하는 것을 다 갖게 된다는 것이 천국의 원칙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이 이런 것이 아니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만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어요. 」

「사람들은 받을 만한 것을 받기보다는 원하는 것을 받기를 더 좋아하죠.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응분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다소 화를 내기도 했지만요. 천국에 대한 그들의 기대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듯했습니다. 별로 기독교인답지 않은 것이지요.」

 

「그럼 누가 제일 일찍 죽음을 요청하나요?」

「〈요청한다〉는 말은 잘못된 말인 듯하네요. 죽음을 소망하는 겁니다.」

[…]

「당신의 질문에 답한다면 ─ 죽음을 제일 일찍 요청하는 사람들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영원한 섹스, 맥주, 마약, 빠른 자동차 ─ 그런 것들을 원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의 행운을 믿지 못하지만, 그다음 몇 백 년에는 그들의 불운을 믿을 수 없게 되죠. 그게 바로 자기들 부류 사람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들은 정상적인 심신의 유지에 집착합니다. 수천 년 계속 정상적인 심신 상태를 유지하는 일 말이죠. 그들이 제일 먼저 죽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세요, 천국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결코 영원히 싫증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떤가요?」

[…]

「글쎄요, 논리적 난점이 있는 것 같아요. 현재의 당신을 중단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 ─ 당신처럼, 틀림없이 스포츠에 열중했던 사람 ─ 은 싫증나지 않는 영원이란 달리는 사람이 영원히 움직이는 기계로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그저 다시 뛰기를 원했어요.」

 

「천국은 매우 좋은 개념이고, 완벽한 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우리 본성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죠? 왜 우리에게 천국이 있습니까? 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천국의 꿈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죠.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완전히 정상인 것 같습니다. 천국에 대하여 미리 안다면, 천국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죠.」

「원하는 것을 항상 얻게 되면 잠시 후에는 원하는 것을 항상 얻지 못하는 것과 매우 유사해지죠.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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