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소설/희곡 2020. 3. 25. 15:35
위대한 유산 (상)

위대한 유산 (상)

찰스 디킨스

찰스 디킨스가 선사하는 해학과 유머 가득한 세상 속 한 소년의 좌충우돌 성장기

19세기 이후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위대한 유산』은 어린 소년 핍이 이름 모를 사람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 핍의 1인칭 시점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서술 형태는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성장 소설〉 성격을 띠고 있다. 어린 핍이 여러 주변 인물과 극적인 배경의 전환을 통해 가치관의 변화를 겪으며 진정한 〈위대한 유산〉의 의미를 깨우치는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작품 속에는 당시 영국의 상반된 시대상과 인물상이 존재한다. 허영과 사치에 찌든 도시와 가난하지만 푸근한 시골, 허황된 명예를 좇는 인물과 진실한 명예를 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인물, 모든 것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사랑과 모든 것의 의미가 되는 사랑 등…… 극명한 대비가 자아내는 다양한 면면을 통해 독자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견해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첫 문장

 

내 아버지의 성은 피립이고 내 이름은 필립인데, 유아시절 내 혀는 둘 다 핍이라고 발음했지 그보다 더 길거나 더 분명하게 발음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그냥 핍이라고 불렀고, 결국은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마지막 문장

 

「그리고 우리는 친구라고 말해 줘.」 「우리는 친구야.」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내가 일어나서 그녀에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따로 떨어져 살아도 계속 친구일 거고.」 에스텔라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폐허에서 나왔다. 오래전 그 옛날 내가 처음 대장간을 떠나던 날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며 걷혔던 것처럼, 지금도 저녁 안개가 피어오르며 걷히고 있었다. 그리고 걷혀 가는 그 안개가 내게 보여 준 교교한 달빛이 광활하게 펼쳐지며 뻗어 나가는 모습 속에서, 나는 그녀와의 그 어떤 이별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제1권

 

1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생존 경쟁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노력을 너무 이른 나이에 포기해 버린 내 어린 다섯 동생들을 기억하고자 부모님 묘 옆에 가지런히 조성된 다섯 개의 작은 마름모꼴 묘비들 덕분에, 나는 그 애들이 모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누운 상태로 태어났다가 미처 손도 빼보지 못하고 죽어 이렇게 묻혀 있는 거라는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되었다.

 

2

 

내 누나인 조 가저리 부인은 나보다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았으며 나를 〈손수〉 키웠다는 이유로 자신과 이웃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나는 당시에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혼자서 알아내야 했다. 나는 누나가 매섭고 육중한 손을 가졌으며 나뿐만 아니라 남편에게까지 손대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형인 조 가저리와 나, 둘 모두가 누나에 의해 손수 키워졌다고 생각했다.

 

양심이란 어른이든 아이이든 그것에 비난이 가해지면 끔찍한 존재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아이의 경우, 양심이라는 그 비밀스러운 짐이 바짓가랑이 아래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은밀한 짐 덩어리와 더해지면 엄청난 벌이 되는 법이다. […] 조 부인에게서 도둑질을 한다는 사실로 인한 죄책감에다, 앉아 있을 때나 부엌 주변에 자잘한 심부름을 하러 갔다 오라는 지시를 받을 때마다 불가피하게 한 손을 바짓가랑이 속 빵 조각에 대고 있어야 하는 상황까지 더해지자,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징글맞게도 꼬치꼬치 캐묻는구나. 그만 좀 물어라. 그럼 어떤 거짓말도 안 듣게 될 테니.」

나는 누나의 그 말이 혹시 내가 누나에게 질문을 한다 해도 거짓말을 듣게 된다는 걸 의미하는 거라면 그거야말로 아주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사람이 옆에 없으면 결코 예의 바른 편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따져 보자면 꽤 오래전인 그 시절부터 나는 아이들이 공포감에 빠지게 되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비밀주의가 존재하게 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다. 공포감이기만 하면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더라도 상관없다. […] 나는 말 못 할 은밀한 공포감에 빠져 불가피하게 내가 저지르게 될 일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3

 

「습지대 때문에 죽을지언정 그전에 아침은 다 먹고 봐야겠다.」 그가 말했다. 「당장 저기 저 너머에 있는 교수대로 꽁꽁 묶여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침은 먹을 거야.」

 

4

 

조 부인은 지극히 청결한 주부였지만, 쓰레기나 먼지 자체보다 오히려 자신의 그런 청결함을 더 불편하고 참기 힘들게 만드는 기막힌 기술을 갖고 있었다. 청결함은 경건함의 사촌쯤 되며, 어떤 사람들은 온갖 일을 종교적인 태도를 지니고 하기도 한다.

 

「왜 애들은 좀처럼 감사할 줄을 모르는 걸까요?」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조의 입지와 영향력은 주변에 사람들이 없을 때보다 사람들이 있을 때 뭔가 더 미약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하기 미안하지만 내가 당신 고기 파이를 좀 먹었소.」

「그게 내 파이이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먹어도 좋다는 걸 하느님께서 아실 겁니다.」 조가 되도록 조 부인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엾고 불쌍한 동료 인간인 당신을 굶어 죽게 하진 않았을 겁니다.」

 

6

 

한마디로 나는 너무 겁이 나서 그른 일이라고 알고 있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 겁이 나서 옳은 일이라고 알고 있는 일을 할 수 없었다.

 

7

 

내가 버는 모든 돈은 그 통 안에 넣는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공표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모인 돈이 궁극적으로 국가의 부채 상환에 기부될 예정이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지만, 그걸 분배하는 데 있어 내 몫이 주어질 희망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겠다.

 

비디의 도움에 힘입어서 알파벳 철자가 들장미 덤불이라도 되는 듯 꽤나 고통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씩 긁히고 상처 입으며 헤쳐 나아갔다. 그 단계가 끝나자 나는 이번에는 아홉 개의 숫자라는 도적놈들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이놈들이 매일 밤 변장을 하고 내가 자신들을 식별해 내는 걸 방해하려고 뭔가 새로운 짓거리를 꾸미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반소경처럼 더듬거리는 방식으로나마 최소한의 수준으로 읽고 쓰고 계산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다, 핍, 술주정뱅이였어. 그런데 술에 취해 정신만 나가면 그는 정말 무자비하게 어머니를 마구 두들겨 팼어. 나를 팰 때 말고는 거의 유일하게 했던 주먹질이었지.」

[…]

「그 결과 어머니와 나, 우리 둘은 아버지로부터 여러 차례 도망쳤어. 그런 다음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하러 나갔지. 그리고 내게 말하곤 했어. 〈조, 이제 일만 잘되면 너도 학교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다, 얘야.〉 그리고는 어머니가 나를 학교에 넣어 주곤 했어. 하지만 아버진 본래 심성이 매우 착한 분이어서 우리 없이 사는 일을 견디지 못했어.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떼로 거느리고 와서 우리가 살던 집 문전에서 난리 법석을 피워 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우리 일에 관여할 수 없었고, 우리를 아버지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어.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또 두들겨 팼어. 너도 알겠지만 말이다, 핍.」 곰곰이 생각에 잠겨 불을 헤적이던 동작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조가 말했다. 「그런 상황이 내 교육에 장애가 되었던 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평한 정의를 유지하면서 말한다면, 우리 아버진 속마음은 아주 착한 분이었어. 알지?」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말이다!」 조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 밥은 먹게 해야 하는 법이야, 핍. 안 그러면 냄비에 음식 끓는 일이 없다는 건 너도 알지?」

「그 결과 아버지는 내가 일하러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천직을 갖게 된 거야.」

 

「자네한텐 따끔거리는 매질이 가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리네, 친구. 내가 매를 다 맞았으면 좋겠다는 소리야. 어쨌든 이런 일엔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평탄한 길도 있는 법이야. 그러니 네 누나의 결점일랑 부디 너그럽게 눈감아 주기 바란다.」

 

8

 

「독한 맥주에 대해 말한다면 그건 지하 술 창고에 충분히 있어. 이 〈매너 하우스〉 저택을 잠기게 할 정도로.」

「그게 이 댁 이름이에요, 아가씨?」

「저택 이름들 중 하나야, 얘.」

「그럼 이름이 하나 이상이네요, 아가씨?」

「하나 더 있어. 다른 이름은 〈새티스 하우스〉야. 그리스어이거나 라틴어이거나 히브리어이거나, 아니면 이 세 가지 다일 거야. 모두 다 내겐 한 가지 의미, 즉 충분하다는 의미에선 매한가지이지만.」

「충분한 집.」 내가 말했다. 「참 재미난 이름이네요, 아가씨.」

 

짧은 순간에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보긴 했지만 처음부터 이 모든 광경을 다 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의당 하얀색이어야 하는 시야의 모든 물건들이 이미 오래전에 하얀색이었다가 지금은 그 빛을 잃어버려 퇴색한 누런빛을 띠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신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신부도 드레스처럼 시들어 버렸고 움푹 파인 눈의 광채 말고는 그 어떤 밝은 빛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나는 원래 그 드레스가 통통한 젊은 숙녀의 몸에 입혀진 것이었지만 이젠 그 옷을 헐겁게 걸치고 있는 그 주인공의 몸이 뼈와 가죽만 남아 앙상하게 쪼그라들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내가 지금 뭘 만지고 있는지 알겠느냐?」 그녀가 왼쪽 가슴 위에 두 손을 차례로 올려 포개 놓으며 말했다.

「네, 마님.」 (그 모습이 습지대에서 만났던 젊은 죄수를 생각나게 했다.)

「내가 뭘 만지고 있느냐?」

「마님의 가슴요.」

「찢어진 가슴이지!」

 

「이 아이와 카드놀이하는 모습을 내게 보여 주렴.」

「이런 애하고요! 세상에, 얘는 비천한 노동자 집안 아이라고요!」

나는 미스 해비셤이 대답하는 소리를 엿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너무나도 대답 같지 않은 대답이었을 뿐이다. 「그래? 얘 가슴을 찢어 놓을 수 있잖니.」

 

바로 그때 나는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손목시계와 괘종시계처럼 오래전에 멈추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모든 것들이 이렇게 정지되어 있지 않았거나 창백한 빛으로 퇴색한 모든 물체들이 고요히 정지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극도로 쇠약해진 몸 위에 걸치고 있는 빛바랜 그녀의 신부 드레스가 그토록 수의 같아 보이진 않았을 터이고 긴 면사포가 시체를 덮는 천 같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모든 걸 종합해 볼 때 그녀는 몸과 마음, 안과 밖 모두가 자신을 강타하여 짓뭉개져 버린, 어떤 일격의 무게에 의해 푹 꺼져 버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굴욕감이 들었고, 상처받았고, 모멸감을 느꼈고, 마음이 상했고, 화가 치밀었고, 슬퍼서 ─ 나는 대체 이런 상심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적절한 말조차 생각해 낼 수 없었다 ─ 눈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힐 정도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한 순간 그 애가 그 눈물을 솟아나게 한 장본인이 자기라는 걸 재빨리 알아차리고 즐거워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길이 내게서 눈물을 거둬들였고 소녀를 마주 볼 힘을 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경멸로 가득 차서 고개를 홱 쳐들고 ─ 하지만 내가 심하게 상처받았다는 걸 너무나도 확신하다는 태도로 ─ 그곳을 떠났다

 

누나가 나를 키웠던 탓에 나는 예민한 아이였다. 사실 누가 키우든 간에 아이들에게는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작은 세계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일만큼 예민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는 법이다. 그 부당한 일이라는 건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작고, 아이들의 세계도 작으며, 아이들이 탄 흔들거리는 목마는 그저 그 높이가 우람한 골격을 지닌 아일랜드 사냥개의 키 정도로, 자로 재보면 그저 몇 뼘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나는 비천한 노동자 집안 아이였다는 것, 내 손은 거칠고 내 반장화는 투박하다는 것, 내가 악당 카드 〈네이브〉를 〈잭〉이라고 부르는 천박한 습관에 젖어 있다는 것, 지난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보다 사실은 내가 훨씬 더 무식하다는 것, 그리고 모든 걸 종합해 볼 때 나는 천박한 하층민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었다는 것 등을 나는 마음속 깊이 되뇌고 되뇌었다.

 

9

 

말해 봤자 제대로 이해되지도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내 가슴속에 숨겨져 있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다른 아이들 가슴속에도 숨겨져 있다면 ─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 별종 괴짜라고 의심할 만한 별다른 이유가 없었으니 나는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바로 그런 두려움이야말로 아이들이 하는 많은 기만적인 답변들의 이유일 것이다.

 

미스 해비셤의 집엔 끔찍하게 도도한 예쁜 소녀가 있었는데 그 소녀가 나더러 비천한 아이라고 말했으며, 나도 내가 비천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고, 내가 비천한 아이가 아니길 바라고 있으며,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 모든 사정에서 내 거짓말이 생겨난 것이라고 조에게 설명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라는 거야. 어떻게 해서 생겨났든 간에 거짓말은 절대로 생겨나서는 안 되는 거야. 거짓말은 그 왕초 격인 악마란 놈으로부터 와서 돌고 돌아 다시 같은 놈에게 돌아간단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마, 핍. 〈그런 일〉은 비천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네, 친구. 그리고 그 비천하다는 말 말이야.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분명히 이해가 안 돼. 넌 어떤 일들에선 비범해. 넌 비범할 정도로 작아. 또한 넌 비범한 학자이고.」

 

「그게 그런 거든 안 그런 거든 간에 네가 비범한 학자가 되기에 앞서 평범한 학자가 되기를 바랄게! 머리에 왕관을 쓰고 옥좌에 앉아 있는 왕이라도 아직 즉위하지 않은 왕자 시절에 알파벳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거기 앉아서 의회의 법령들을 인쇄체로 쓸 수 없다니까. 그럼, 그렇고말고!」

 

「진정한 친구로서 네게 하는 말이니 잘 들어, 핍. 진정한 친구나 이런 말을 해주는 법이라고. 똑바른 길을 통해서 비범한 신분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넌 결코 굽은 길을 통해서도 거기 도달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거짓말은 하지 마, 핍. 그리고 잘 살다 행복하게 죽으라고.」

 

그날은 내게 기억할 만한 날이었다. 내게 큰 변화를 만들어 준 날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건 어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생에서 하루를 선택하여 삭제한다고 상상해 보고, 그러고 난 후 그 인생행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글 읽기를 멈추고 쇠로 만들어졌건 황금으로 만들어졌건 가시로 만들어졌건 꽃으로 만들어졌건 간에, 당신을 얽어매고 있는 긴 사슬이 만약 그 제일 첫 번째 연결 고리가 어떤 기억할 만한 날 맨 처음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당신을 꽁꽁 얽어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 보라.

 

10

 

우리 중 누구도 우리가 읽고 있는 게 무슨 내용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으며 그것에 대해 경외감을 품지도 않았다.

[…]

그런 상황에서 비범한 사람이 되는 일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고.

 

11

 

「정말 가여운 사람이에요!」 누나와 아주 흡사한 느닷없는 태도로 이 숙녀가 불쑥 말을 던졌다. 「자기 자신의 적이지 누구의 적도 아니에요!」

「누군가의 적이 되는 게 차라리 더 칭찬할 만한 일일 거야.」 신사가 말했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 일이고.」

 

「오늘이 내 생일이다, 핍.」

[…]

「1년 중 하필이면 바로 오늘, 네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저기 저 썩어 빠진 덩어리가 이곳으로 배달되었다.」 […] 「저것과 내가 함께 썩어 가면서 닳아 없어지고 있는 거지. 쥐새끼들이 저걸 갉아먹고, 쥐 이빨보다 더 예리한 이빨들이 나를 갉아먹고 있는 거다.」

[…]

「이런 몰락이 완결된다면 말이다.」 그녀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신부 드레스를 입고 죽은 나를 사람들이 저 결혼 축하연 식탁에 누이면 말이다.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거고, 그게 그놈한테 내리는 저주의 완결편이 되겠지. 오늘이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에게 그토록 날렵한 솜씨가 있는 걸 보고 나서 나는 은근히 겁이 났다. 하지만 나는 엷은 색 머리카락이 난 그의 머리와 내 명치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런 무례한 방식으로 조심하라고 강요당했을 때 그걸 부당하게 여길 권리가 내게 있다는 것을 도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확신했다. 따라서 나는 아무 말 없이 후미진 정원 구석으로 그를 따라갔다.

 

14

 

자기 집을 창피해한다는 건 몹시 비참한 일이다. 그런 일엔 흉악한 배은망덕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에 따른 벌이 인과응보로 당연히 주어질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게 비참한 일이라는 사실은 내가 입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앞으로 덧붙이려는 내용을 포함하는 이야기이지만, 내가 말하는 일들의 모든 공이 바로 조에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뛰쳐나가 군인이 되거나 뱃사람이 되지 않았던 건 내가 성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가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성미에 맞지 않았는데도 내가 웬만큼 열의를 갖고 대장간 일을 했던 것은, 내가 근면이라는 미덕을 강렬하게 의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가 그 미덕을 강렬하게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스럽고 정직한 심성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어떤 사람의 영향력이 세상에 얼마나 멀리 퍼져 날아가는지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바로 자기 옆을 지나가면서 자신의 자아를 어떤 식으로 건드리는지 아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내 도제 생활에 혹시 어떤 이익이 뒤섞이게 되었다면 그건 소박하게 만족할 줄 아는 조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 들뜬 열망만 잔뜩 품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나로 인해 생겨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만약 선물이 토스트용 포크라면 놋쇠를 가지고 만들어야 할 거고, 그러면 아무 자랑도 할 수 없지. 석쇠로는 아무리 비범한 장인이라도 자신의 비범함을 과시할 수 없어. 왜냐하면 석쇠는 결국 석쇠니까.」 […] 「그리고 넌 원하는 걸 목표로 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건, 네겐 미안하지만, 그리고 거듭 미안하지만, 석쇠가 될 거야. 그러면 넌 어쩔 수 없이 -」

 

「핍, 미쳐 날뛰다가 그 날뛰는 일을 멈췄다가 하는 게 말이다. 그런 게 바로 인생이다!」

 

16

 

내 어린 시절의 주문(呪文)을 풀어 버리고 조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아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나는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그 후 몇 달 동안 나는 매일같이 그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고, 다음 날 아침이면 그 질문을 재개해 다시 논쟁을 벌이며 지냈다. 결국 계속 갈등을 겪던 끝에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비밀이 너무 오래되었고 이젠 내 안에서 자라나 내 일부가 되었으니 그걸 떼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나는 물론 나 자신과는 타협을 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보면 늘 상황이 끝나 버리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가해자를 밝혀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생긴다거나 해서,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된다면 그때 가서 모든 걸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17

 

「내가 거칠고 비천하게 산들 무슨 대수겠니? 아무도 내게 그렇다는 말만 안 한다면!」

[…]

「신사가 되고 싶다는 게 그 아가씨한테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니, 아니면 환심을 사기 위해서니?」 비디가 잠시 주저하다 조용히 물었다.

「몰라.」 나는 시무룩해져 대답했다.

「만약 앙갚음을 하고 싶은 거라면 말이다.」 비디가 계속해서 말했다. 「내 생각에 ─ 물론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만 ─ 그런 일은 그 아가씨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네 자존심을 살리며 훨씬 더 잘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만약 그 아가씨의 환심을 사고 싶은 거라면 말이야. 내 생각은 ─ 물론 네가 가장 잘 알겠지만 ─ 그 아가씨가 네 환심을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라는 거야.」

 

「한 가지 사실은 기뻐.」 비디가 말했다. 「뭐냐 하면 네가 마음속 비밀을 내게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핍.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도 기뻐. 뭐냐 하면 내가 그 비밀을 지켜 줄 것이고, 내가 언제까지라도 그 비밀을 간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란 게 말이야. 물론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를 믿어도 좋다는 거야. 네 첫 번째 선생이었던 내가(세상에! 정말 형편없는 선생이었지. 그리고 자기 자신부터 배워야 할 게 너무나 많았던 선생이었고!) 만약 지금도 네 선생이라면, 네게 어떤 교훈을 가르쳐 주어야 할지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그건 배우기 힘든 교훈인 데다 넌 이미 나 같은 선생을 넘어선 사람이 되었어. 그러니 그런 교훈은 이젠 아무 소용이 없어.」

 

「너한테는 언제까지나 모든 걸 다 말할게.」

「네가 신사가 될 때까지겠지.」 비디가 말했다.

「내가 신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알잖아. 그러니 〈언제까지나〉야. 딱히 너한테 뭔가를 말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야. 넌 이미 내가 아는 모든 걸 아니까. 어젯밤 집에서 너에게 얘기했듯이 말이야.」

 

18

 

〈허풍은 착한 개지만 신중은 더 착한 개>

 

조가 여성스러운 손길로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그때 이후로 종종 그가 힘과 부드러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떤 사람이든 박살을 내버릴 수 있으면서 동시에 달걀 껍질도 살살 두드릴 수 있는 증기 해머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아, 다정하고 착하고 그리운 조! 내 팔에 닿던 당신 손의 사랑스러운 떨림이 천사의 날갯짓처럼 오늘 이 날까지도 경건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그저 조를 달래기만 했다. 나는 미래의 행운이라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기에 우리가 함께 지나다녔던 샛길들을 살필 수 없었다.

 

「핍이 엄청난 재산을 지닌 신사가 되었대.」 조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에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빌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두 사람 모두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의 축하 속에 뭔가 슬픔이 깃들어 있어 나는 약간 화가 났다.

 

「바로 그게 싫다는 거야, 조. 그들은 내 모습을 보고 퍽도 대단한 일인 양 야단법석을 떨 거야. 상스럽고 천박한 야단법석 말이야. 내가 나 자신의 모습을 못 견딜 정도로.」

 

그는 곧바로 내 방 창문 바로 밑 문가에 서서 파이프 담배를 피웠으며, 비디도 그곳에 서서 그와 조용히 얘기를 나눴다. 나는 두 사람이 내 얘기를 한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 모두 애정이 담긴 어조로 내 이름을 한 차례 이상 말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 나는 빛나는 행운으로 가득 찬 이 첫날 밤이 어쩌면 여태껏 내가 알아 왔던 밤들 중에서 가장 외로운 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참 슬프고 이상하다고 느꼈다.

 

열린 창문 쪽을 바라다보니 조의 파이프에서 피어올라 그곳까지 둥실 떠오른 화환 모양의 동그란 담배 연기 고리들이 보였다. 나는 그게 조가 보낸 축복의 선물 같다고 생각했다. 내게 억지로 불쑥 내밀어지거나 내 앞에 전시되어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공기에 스며들어 있는 선물 말이다. 나는 불을 끄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이제는 불편해진 침대였다. 그리고 나는 그 침대 안에서 더 이상 예전처럼 달콤한 단잠을 자지 못했다.

 

19

 

「내가 결코 조를 잊지 않을 거라는 걸.」

「잊지 않겠지, 잊지 않고말고.」 조가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나야말로 그걸 확신한다. 그럼, 그렇고말고. 우린 오랜 친구잖니! 정말이지 그런 확신을 가지려면 마음속에 그걸 집어넣고 푹 익히는 게 필요하거든. 하지만 그렇게 푹 익히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걸리지. 그런데 너무 뜻하지 않게 〈털썩!〉 하고 변화가 찾아왔어. 그렇지 않니?」

 

「그런데 참 딱한 게 하나 있어, 조.」 내가 말했다. 「우리 둘이 이곳에서 함께 공부했었는데 조의 실력은 조금 더 향상되지 못했다는 거야. 안 그래?」

「글쎄, 난 모르겠다.」 조가 대답했다. 「난 지독하게 멍청해. 내 직종에서만 장인일 뿐이야. 내가 그토록 지독한 멍청이라는 사실은 늘 딱한 일이었어. 하지만 열두 달 전 오늘도 딱했으니 지금이라고 해서 더 딱한 건 아닐 거다. 모르겠니?」

 

「만약 내가 재산을 완전히 물려받게 되고, 그래서 내가 마음먹고 있듯이 조를 보다 고상한 삶의 분야로 옮겨 놓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 같은 조의 예절이 조가 좀처럼 정당한 대접을 못 받게 만들 거라는 소리라고.」

[…]

비디가 말했다. 「아저씨가 자긍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느냐고.」

[…]

「아저씨는 아마 자긍심이 너무 강해서 자신이 충분히 감당할 능력이 있는 자리, 그것도 존중받으면서 잘 메우고 있는 그런 자리에서 누가 자신을 빼내려고 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실지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저씨가 정말 그러실 거라고 생각해. 분명히 네가 나보다 아저씨를 훨씬 더 잘 알 테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주제넘은 것 같긴 하구나.」

 

내가 거듭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건 말이다, 그건 인간의 본성 중에서 나쁜 면모야.」

「네가 나를 꾸짖든 칭찬하든 상관없어.」 가엾은 비디가 응수했다. 「어떤 경우든 너는 내가 이곳에서 언제나 내 능력이 닿는 한 모든 일을 다 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똑같이 믿어도 좋아. 그리고 네가 내게서 그 어떤 면모를 보았든지 간에 그게 너에 대한 내 기억을 바꿔 놓진 않을 거야. 하지만 신사라면 절대로 부당하게 처신해서는 안 되는 거야.」 고래를 돌리며 비디가 말했다.

 

새 양복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아마도 옷이 생겨난 이래로 열렬히 고대하던 새 옷이란 모두 처음 입어 볼 때는 입는 사람의 기대에 다소 못 미치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은 휴대용 여행 가방을 들고 다음 날 새벽 5시에 우리 마을을 떠날 예정이었다. 조에게는 이미 나 혼자 걸어서 집을 나서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둔 터였다. 만일 마차 타는 곳까지 그와 내가 함께 간다면 두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될 것인지 신경이 쓰여서 그리 말했다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그것도 정말로 아팠다. 나는 이런 의도에 불순한 생각이 전혀 묻어 있지 않은 척 나 자신을 속였다.

 

하늘이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결코 우리의 눈물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눈물이란 우리의 딱딱한 가슴에 덧칠되고 우리의 앞을 가리는 땅 위의 흙먼지 위에 내리는 빗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바탕 울고 나니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 미안해하고, 내가 얼마나 배은망덕했는지 더 잘 알게 되고, 더 신사다워졌다는 말이다. 만약 좀 더 일찍 울었더라면 그 순간 내 옆에는 분명히 조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제2권

 

21

 

「이곳은 아주 나쁜 곳입니까?」

「런던에선 사기나 강도나 살인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디든 핍 씨에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많지요.」

「피해자하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 사이에 악감정이 존재한다면 그렇겠네요.」

「오! 악감정에 대해선 모르겠습니다.」 웨믹 씨가 대답했다. 「그런 일엔 악감정이 그리 많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뭔가 얻어 낼 게 있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죠.」

「설상가상이군요.」

 

빈방들에 적힌 〈세놓음, 세놓음, 세놓음〉이란 글자들은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가련한 그 어떤 새 세입자도 그곳에 살러 오지 않을 것이며 현 세입자들의 단계적인 자살과 그들의 성스럽지 못한 매장으로 인해 바너드의 영혼이 복수심을 서서히 진정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22

 

그(허버트)가 앞으로 절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며 부자도 되지 못할 거라고 암시하는 면모도 깃들어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포크도 필요 이상으로 입안에 너무 깊이 집어넣어선 안 돼. 말할 가치도 없는 사항이지만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만큼만 하면 좋은 거니까.

[…]

그가 하도 쾌활한 태도로 이런 친절한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둘 다 껄껄 웃었고 나는 얼굴을 붉힐 일이 거의 없었다.

 

「좋은 기회를 보게 되는 때. 그러면 그 기회 속으로 뛰어들고 덤벼들어서 자기 자본을 확보하는 거야. 그러면 결국 다 되는 거지! 일단 자본만 확보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걸 활용하는 일 말고는 아무 일도 할 게 없어.」 그건 예전에 정원에서 만났을 때 그가 보여 준 대책 없는 행동 방식과 아주 닮은 방식이었다. 가난을 감내하는 그의 방식은 그날 그가 패배를 감내하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허버트는 회계 사무소로 출근했고 나는 그와 동행했다. […] 내게는 젊은 보험업자들을 부화시킨 알들이 마치 타조 알처럼 흙먼지와 열기 속에서 인공 부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까지 미숙한 단계에 있는 거인 같은 그들이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여 들어가고 있는 장소들을 놓고 판단해 볼 때 그랬다.

 

23

 

어찌 되었건 그는 자기 딸 포켓 부인을 요람에 있을 때부터 필연적인 순리로써 작위를 받은 사람과 결혼해야만 할 사람으로, 그리고 집안일에 대한 범속한 지식 습득 같은 것에서 보호되어야 할 사람으로 키우겠다고 방침을 정했다. 이 어린 숙녀에 대한 현명한 부모의 감시와 감독은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 결과 그녀는 더없이 장식적인 인물로, 하지만 더없이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아기도 명예로운 자존심을 지닌 정신의 소유자였는지라 온 힘을 다해 엄마에게 반항했다. […] 그렇게 극도로 반항하던 중에 엄마에게 들려서 나갔다. 하지만 아기는 결국 자기 목표를 달성했다. 얼마 있다 창문을 통해 보니 어린 제인이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

 

25

 

그녀는 포켓 씨의 사촌 누이로 소화 불량에 시달리는 독신녀였으며 자신의 고집불통의 성격을 종교라고 부르고 자신의 성질머리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여자였다.

 

유죄 판결을 받고 난 죄인들이 쓴 원고 형식의 고백록들이 있었다. 웨믹 씨는 이 고백록들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했는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26

 

내 후견인은 대화 주제를 직접 꺼낸다기보다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편이었지만 식사는 즐겁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서 우리의 가장 취약한 면모를 억지로 끌어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내가 입을 벌려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나에게 사치스러운 낭비 성향과, 허버트에게 선심 쓰듯 은혜를 베푸는 태도와, 내 창창한 앞날을 자랑하는 성향을 내보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27

 

내가 조의 방문을 어떤 기분으로 기다리고 있었는지 정확히 고백해 보겠다.

비록 많은 인연으로 그와 얽혀 있긴 했지만 그건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난 불안감, 다소 창피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와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통렬한 느낌이 엄습했다. 돈이라도 주어 그의 방문을 막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리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이런 낭비벽이 하도 빠르게 진척되어서 심지어 반장화 ─ 승마화를 말한다 ─ 를 신은 정복 차림의 하인 소년까지 부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 소년에게 내 일상의 나날들을 노예처럼 속박되다시피 내맡기며 살아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이 괴물 같은 하인 놈(원래 내 세탁부의 가족 중에서 인간쓰레기처럼 빈둥대던 놈이었다)을 고용하고 파란색 외투와 밝은 카나리아색 조끼와 하얀색 넥타이와 크림색 반바지를 입히고 이미 언급한 반장화를 신기고 나서 쥐꼬리만큼의 일거리와 태산 같은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끔찍한 두 가지 필수 사항들로 인해 녀석은 내 삶을 악몽처럼 괴롭히는 존재였다.

 

「자, 신사분.」 조가 말을 이었다. 「그 경위는 이렇게 된 거랍니다. 일전 어느 날 밤, 내가 〈얼큰한 세 선장〉에 갔었단다, 핍.」 그는 다정한 감정에 빠져들 때면 나를 〈핍〉이라고 불렀고, 다시 격식을 차리는 태도로 돌아갈 때면 〈신사분〉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말했어. 〈에스텔라가 집에 왔는데 그를 만나면 기뻐할 거라고요.〉」

나는 조를 바라보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나는 그렇게 얼굴이 달아오른 이유 중 미약한 이유 하나가 만약 이런 그의 용무를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그의 기운을 북돋아 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길 바란다.

 

핍, 사랑하는 내 단짝. 인생이란 너무나도 많은 부분들이 하나로 용접되어 결합된 구성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장장이, 어떤 사람은 양철공, 어떤 사람은 금 세공업자, 어떤 사람은 구리 세공업자인 거야. 그런 식의 구분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게 생기면 반드시 만족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란다. […] 나는 대장간과 부엌을 벗어나거나 습지대만 떠나면 실수를 저질러. 손에 망치를 들고 있거나 파이프를 들고 있을지언정, 대장장이 작업복을 입은 나를 떠올려 본다면 넌 내가 저지른 실수의 절반도 찾아낼 수 없을 거야. […] 나는 끔찍할 정도로 우둔한 사람이란다. 그래도 올바른 생각에 가까운 이런 최종적인 생각을 망치로 두드려 펴듯 생각해 낸 것이길 바란다

 

28

 

세상의 모든 사기꾼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기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29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랑에 빠진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항상 사실일 수는 없다. 절대적인 진리는, 내가 남자의 사랑으로 에스텔라를 사랑했다면 그건 그녀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고 생각했기에 그랬다는 사실이다. 결단코 단언한다. 서글프게도 너무나 자주(물론 늘 그랬던 건 아니다) 내 이성과는 반대로, 내 밝은 앞날과는 반대로, 내 마음의 평화와는 반대로, 내 희망과는 반대로, 내 행복과는 반대로, 내 모든 낙담과 실의와는 반대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의식했다. 결단코 단언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를 아무런 흠결 없는 완벽한 인간이라고 깊게 믿었던 경우 못지않게 나를 제지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옛날처럼 도도하고 제멋대로였던 그녀는, 이제는 그런 자질들을 아예 자신의 미모에 완전히 종속시켜 버려서 그것들을 그 미모로부터 분리해 낸다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자연스럽지도 않은 ─ 내가 그렇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일이었다. 진정 그 옛날 내 마음을 어지럽혔던 돈과 상류층 신분에 대한 그 모든 비참한 갈망으로부터 ─ 우리 집과 조에 대해 처음으로 창피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던 통제 불능 상태의 그 모든 열망으로부터 ─ 그녀의 존재를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활활 타오르는 화덕 불 속에서 불러내고 모루 위에 쇳덩이를 올려놓고 치다가 상상했던 그녀의 얼굴, 그리고 어두운 밤 대장간 나무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다 휙 사라졌던 그녀의 환영, 그런 모든 환상들로부터 그녀의 존재를 분리해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과거든 현재든 내 인생의 가장 깊숙한 부분과 그녀를 분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떨며 그녀의 옷단까지도 숭배한다는 태도를 보였고, 그녀는 지극히 침착하고 더없이 단호하게 내 옷단 따위는 전혀 숭배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나를 울렸던 것도 기억 안 나?」 내가 말했다. 「안 나.」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걸 기억 못 하는 그녀의 모습과 옛일에 전혀 개의치 않는 그녀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나를 울렸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건 모든 울음 중에서 가장 비참한 울음이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게 있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 보여 줄 법한 우월감 어린 태도로 에스텔라가 말했다. 「내겐 심장이 없다는 사실이야. 만약 내 심장이 내 기억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말이야.」

「내 말뜻이 뭔지 넌 알아. 심장에 온기가 없다는 거야. 동정심, 감정, 어리석은 생각 같은 게 없다는 거야.」

 

그녀의 몇몇 표정이나 몸짓에는 미스 해비셤과의 희미한 유사성이 배어 있긴 했다. 그건 종종 많은 관계를 맺거나 함께 격리되어 생활해 온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이 얻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지나고 난 후 사뭇 다른 얼굴이어야 할 얼굴에서 가끔 놀랄 정도로 그 어른들과 비슷한 표정을 만들어 내는 그런 종류의 유사성이었다.

 

「내 말 잘 들어라, 핍! 나는 사랑받게 만들려고 저 애를 양녀로 삼았다. 나는 사랑받게 만들려고 저 애를 키우고 교육시켰다. 나는 사랑받을 수 있게 만들려고 저 애를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시켰다. 저 애를 사랑해라!」

[…]

그렇게 여러 번 되풀이한 그 말이 사랑 대신 증오였다 하더라도 ─ 그게 절망, 복수, 비참한 죽음이었다 하더라도 ─ 내게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저주처럼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진정한 사랑이 뭔지 말해 주마.」

「그건 맹목적인 헌신이고, 의심하지 않는 겸손이고, 완전한 존중이고, 너 자신과 세상 모든 사람들의 뜻을 거스르는 신뢰고 믿음이다. 네 모든 마음과 영혼을 포기하고 그걸 너를 매혹하는 사람에게 다 주는 거지. 바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30

 

「그래. 그자는 적임자는 아니네, 핍.」

「사실 믿고 맡길 만한 일자리를 차지한 자가 적임자인 경우는 결코 없네.」

 

「넌 정말 행운아구나, 헨델.」 허버트가 말했다. 「네가 그녀의 짝으로 선택되고 예정되었으니 말이다. 금지된 전제 조건을 깨지만 않는다면, 우리 둘 사이에 그 사실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겠지.」

[…]

「그럴 때면 말이다, 친애하는 나의 허버트, 내가 얼마나 의존적이고 자신감이 부족한 놈인지, 그리고 얼마나 무수한 우연에 노출된 놈인지 너에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방금 전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내게 금지된 전제 조건을 피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내가 받게 될 유산은 어느 한 사람의 (나는 누구의 이름도 직접 말하지 않았다) 변치 않는 마음에 의존하고 있다고. 그리고 기껏해야 그 유산이 무엇인지 그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일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인지도 말할 수 있겠지!」

 

우리는 날카로운 사랑의 열정으로 인해 낙심에 빠지게 되면 <선물받은 말의 입안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선물의 흠을 잡는 것 같아. 또한 내가 보기에는,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말의 입안을 들여다보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다가 그 동물의 가장 훌륭한 장점을 완전히 간과해 버리는 것 같아.

33

 

에스텔라가 방 안에 함께 있으니 내게는 그 방이 더없이 소중하기만 했다. 나는 그녀만 함께 있다면 그런 방에서 평생을 살아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때 그곳에서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지금 내 손을 내줄게.」 […]

「내 경고는 안 받아들인 거니? 그게 아니라면 옛날에 내가 내 뺨에 입을 맞춰도 좋다고 허락했을 때의 기분으로 내 손에 입을 맞춘 거니?」

「그게 무슨 기분인데?」 내가 말했다.

「잠깐 생각해 보자. 아첨꾼들과 음모꾼들에 대한 경멸감.」

 

나는 그 집 안에 들어가 그녀와 함께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막상 함께 살면 결코 행복하지 않고 늘 비참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집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34

 

우리는 최대한 많은 돈을 소비했고, 그 대가로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마음먹은 최소한의 것들만 받았다. 우리는 늘 다소 궁핍했으며 우리를 아는 대다수의 지인들도 같은 처지였다. 허버트와 나 사이에는 우리가 늘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공상이 존재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끔찍한 진실도 존재했다. 내가 진정 믿기로는, 두 번째 측면에서의 우리의 사례가 오히려 흔히 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35

 

「비디.」 내가 말했다. 「조를 보러 이곳에 자주 내려올 거라는 말을 했는데도 넌 눈에 띌 만큼 침묵으로 대응했어. 비디, 왜 그랬는지 이유를 좀 말해 봐.」

「그럼 넌 〈정말로〉 아저씨를 보러 자주 내려올 거라고 자신하는 거니?」 비디가 좁은 산책길에 멈춰 서더니 별빛을 받으면서 맑고 순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 저런!」 내가 절망에 빠진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비디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태도야말로 정말이지, 인간 본성의 나쁜 면이야! 제발 부탁이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비디. 네 말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

 

「비디.」 작별 인사로 손을 내밀면서 내가 말했다. 「난 화나지 않았어. 다만 상처를 입었을 뿐이야.」

「안 돼. 상처 입지 마.」 그녀가 애처롭다는 듯이 간청했다. 「내가 속 좁게 굴었다면, 상처는 나만 받을게.」

집을 떠나 걸어가고 있을 때 또다시 안개가 피어오르며 걷히고 있었다. 혹시 그 안개가 ─ 내가 지금 그랬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듯이 ─ 내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비디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노라고 내게 비밀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안개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뿐이다.

 

36

 

「핍 씨.」 그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월워스 집은 월워스 집이고, 사무실은 사무실입니다. 우리 노친은 우리 노친이고, 재거스 씨는 재거스 씨인 것처럼 말입니다.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월워스에서의 내 의견은 월워스에 가서 구해야 합니다. 이 사무실에서는 내 공식적인 의견 말고는 그 어떤 의견도 구할 수 없습니다.」

 

38

 

「너, 경고를 결코 안 받아들일 거니?」

「무슨 경고?」

「나에 대한 경고 말이야.」

「너한테 매혹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야, 에스텔라?」

「내가 의미한다고? 내 경고의 의미를 모른다면 넌 눈이 먼 거야.」

그때 그녀에게 본래 사랑의 신은 눈이 먼 것으로 유명하다는 말을 해야만 했던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늘 나를 제약하고 있던 이유 ─ 이런 이유도 나를 적잖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 즉 그녀가 미스 해비셤에게 복종해야만 할 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걸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마당에 나까지 그녀에게 압박을 가하는 건 너그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그 말을 막았다. 내가 늘 걱정했던 건, 그녀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늘 그녀의 도도한 태도에 대해 과도하게 불리한 입장에 처한다는 것, 그리고 그게 나를 그녀의 가슴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항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미스 해비셤의 그런 유령 같은 모습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으며, 내가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고 심지어 타락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통해 에스텔라가 남자들에게 미스 해비셤의 복수를 대신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준비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에스텔라가 그 복수를 완수할 때까지 일정 기간 동안은 내 차지가 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미스 해비셤의 그런 모습을 통해, 나는 에스텔라가 내 짝으로 미리 정해진 이유도 알아차렸다. 남자들을 매혹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그들에게 해를 가하라고 에스텔라를 세상에 내보낼 때, 미스 해비셤은 그녀가 사실 모든 구애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며 주사위 던지기 같은 그런 게임에 돈을 거는 자들은 모두 확실히 패배하게 될 거라는 악의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목석같이 찬 것!」 미스 해비셤이 소리쳤다. 「차갑고도 차가운 심장을 가진 것!」

「어머니는 반드시 아셔야 해요.」 에스텔라가 말했다. 「제 모습을 바로 어머니가 만드셨다는 걸요. 그러니 저에 대한 모든 칭찬과 모든 비난과 제 모든 성공과 모든 실패를, 요컨대 제 모든 걸 받아들이세요.」

 

「대체 어머니가 갖고 싶은 게 뭔가요?」

「사랑이다.」

[…]

「양어머니, 어머니께 제 모든 걸 빚지고 있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어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 것이에요. 어머니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은 어머니 명령 한마디로 다시 가져가실 수 있어요. 그런 것 말고는 제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제게 결코 주신 적이 없는 걸 달라시면 어떡해요. 그런 일은 제 보은의 감정으로도, 의무감으로도 해드릴 수가 없어요.」

 

「내가 자기한테 한 번도 준 적이 없대, 사랑을!」

「내가 자기한테 질투심과 뗄 수 없고 날카로운 고통과도 뗄 수 없는 불타는 사랑을 단 한 번도 준 적이 없대. 나한테 저렇게 말하면서! 저 애한테 내가 미쳤다고 말하라고 해, 미쳤다고 말이야!」

「제가 왜 어머니가 미쳤다고 말해야 하나요?」 에스텔라가 대들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제가요? 어머니가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신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어머니가 얼마나 건실한 기억력을 갖고 계신지 제가 알고 있는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바로 이 난롯가에서, 심지어 거기 어머니 옆에 놓여 있는 그 작은 걸상 위에 앉아서, 어머니 얼굴이 이상하게 보여 무서워할 때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을 배우고 얼굴을 올려다보며 살았던 제가, 어머니가 미쳤다고 말해요?」

 

「저렇게 오만할 수가!」 미스 해비셤이 두 손으로 하얗게 센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음하듯 말했다.

「제게 오만을 가르친 사람이 누군데요?」 에스텔라가 대들었다. 「제가 그 가르침을 배우자 칭찬한 사람이 누군데요?」

「저렇게 매몰찰 수가!」 미스 해비셤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행동하며 신음하듯 말했다.

「제게 매몰차게 굴라고 가르친 사람이 누군데요?」 에스텔라가 대들었다.

「제가 그 가르침을 배우자 칭찬한 사람이 누군데요?」

「하지만 〈나한테까지〉 오만하고 매몰차게 굴다니!」

 

「이게 더 진실에 가깝겠네요. 어머니께서 그 양딸이 맨 처음 사물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모든 에너지와 힘을 총동원하여 그녀에게 햇빛 같은 게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지만 그건 어머니의 원수이자 파괴자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 햇빛이 어머니를 말려 죽이든지 아니면 딸을 말려 죽일 테니 늘 그것에 등을 돌려야만 한다고 가르쳤다고 쳐요. 그런데 그러고 나서 어떤 목적을 위해 그 딸이 햇빛을 자연스럽게 좋아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리고 그 딸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때도 어머니께서 제게 실망하고 화를 내셨을까요?」

[…]

「그러니 제가 만들어진 모습대로 저를 받아들이셔야 해요.」 에스텔라가 말했다. 「성공도 실패도 제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 두 가지가 합쳐져서 저를 만들고 있죠.」

 

「바로 오늘 밤에도 네가 그에게 지어 보이는 그 표정과 미소를 내가 봤다고. 내겐 단 한 번도 지어 보인 적이 없는 표정과 미소 말이야.」

「그럼 넌 말이야.」 에스텔라가 화를 내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정색하여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널 기만하고 함정에 빠뜨리길 바라니?」

「그 말은 네가 저놈을 기만하고 함정에 빠뜨리고 있다는 소리니, 에스텔라?」

「그래. 그리고 다른 많은 남자들한테도 그러고 있어. 너만 빼놓고 다. 저기 브랜들리 부인이 온다. 더 이상 말 안 할게.」

 

39

 

「나는 붙잡히면 분명히 교수형에 처해질 거다.」

이 가련한 사람이 나같이 가련한 놈에게 그 수많은 세월 동안 금 사슬과 은 사슬을 잔뜩 선물하고 나서 이제 나를 보겠다고 목숨을 걸고 찾아왔고, 그 목숨이 이제 내게 맡겨져 있었다! 내가 그를 혐오한 게 아니라 사랑했더라면, 그리고 그가 너무 싫어 몸을 움츠리며 빼내는 게 아니라 더없는 존경심과 애정을 갖고 그에게 이끌렸다면 더 나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지켜 주는 일이 그때 자연스럽게 그리고 측은하게 내 가슴에 와닿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내가 가장 먼저 신경 쓴 일은 밖에서 안의 그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게 문들을 꽉 잠그는 일이었다

 

그 모든 고통들 중에서 가장 예리하고 통렬했던 고통은, […] 런던 중앙 형사 재판소 문간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은 방 안의 죄수 때문에 조를 버렸다는 것이었다.

 

 

제3권

 

40

 

「저는 말입니다, 변호사님. 제 잘못이나 제가 잘못 결론 내린 일에 대해 변호사님에게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늘 제 은인이 미스 해비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조금도 책임이 없네.」

「하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았습니다.」 풀이 죽은 모습으로 내가 항변하듯 말했다.

「증거가 티끌만큼도 없지 않나, 핍.」 재거스 씨가 고개를 흔들고 옷자락을 거머쥐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 겉모습만 보고 받아들이지 말게. 모든 일을 증거에 입각해 받아들이게. 그보다 더 훌륭한 원칙은 없네.」

 

42

 

이게 바로 내가 산 방식이어서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거울을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가구가 있는 집들 중에서 내가 그 내부를 아는 집은 별로 없었다) 정말로 불쌍해 보이는 누더기를 걸친 아이가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상습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

나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고, 구걸을 했고, 도둑질을 했고, 할 수 있으면 가끔 일도 했다. 물론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주 그랬던 건 아니다. 너희들이었다면 내게 기꺼이 일감을 줄 마음이 들었을지 자문해 볼 때까진 그런 생각은 유보해라.

 

43

 

그(드러믈)가 나를 못 본 척했기 때문에 나도 그를 못 본 척했다. 양쪽 모두 아주 어색한 위장이었다. 특히 더 어색했던 건 둘 다 커피룸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44

 

「오랜 세월에 걸쳐 내가 빠져 있었던 그 착각이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히 이 말을 더 일찍 했을 거야. 그 착각이 나로 하여금 미스 해비셤께서 우리 두 사람을 서로 짝지어 주려고 작정하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게 만들었던 거야. 말하자면 네가 네 마음대로 스스로의 일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생각했던 동안 이 말을 삼가고 있었어. 하지만 이젠 이 말을 해야 되겠다.」

 

「이젠 너를 내 짝이라고 부를 희망이 영원히 없어졌다는 걸 알아, 에스텔라. 앞으로 얼마나 급작스럽게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내가 얼마나 가난해질지, 혹은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나는 몰라.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이 집에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쭉 너를 사랑했어.」

 

「만약 미스 해비셤께서 자신이 행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숙고해 본 뒤에도 가여운 꼬마의 여린 감수성을 기만하고, 그 애가 그 모든 세월 동안 헛된 희망을 품게 하고, 그 애가 부질없는 일을 추구하게 하면서 고통받게 하셨던 거라면 그건 잔인한,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분이 설마 그러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분이 자신의 시련을 참아 내느라고 내 시련은 잊으셨던 거라고 생각해, 에스텔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나 공상 ─ 그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 이 있는 것 같구나.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나는 그 낱말의 의미는 알아. 하지만 그 이상은 전혀 몰라. 네 말은 가슴에 전혀 와 닿지 않아. 그리고 그곳 어디에도 감동을 주지 않아. 나는 네가 하는 말에 전혀 관심이 없어. 이런 점을 너에게 경고해 왔었고. 자, 내가 안 그랬었니?」

 

「네가 그 말을 진심으로 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그러기를 바랐어. 그토록 어리고 순진무구하고 어여쁜 네가 설마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에스텔라, 분명히 그건 인간의 본성에는 없는 태도라고.」

「〈내〉 본성 속엔 있어.」

「그게 내 안에 형성된 본성 속엔 있어. 내가 이만큼이라도 얘기할 때는 너하고 다른 남자들하고 큰 차이를 둔다는 거야. 너한테 그 이상 더 많은 걸 해줄 수는 없어.」

 

「그 소수의 남자들 중에, 비록 나만큼 오랫동안 너를 사랑해 오진 않았겠지만 나만큼 너를 극진히 사랑하는 남자가 있을지 몰라. 그 남자를 선택해. 그러면 나는 너를 위해서 그걸 더 잘 감내할 수 있을 거야!」

[…]

「이미 결혼 준비가 진행되고 있어. 곧 결혼하게 될 거야. 왜 무례하게 내 양어머니 이름은 들먹이는 거니? 이건 내가 알아서 결정한 일이야.」

「너 혼자 결정을 했다고, 에스텔라? 그런 짐승 같은 놈한테 너 자신을 내던지는 일을?」

 

「내가 그에게 축복 같은 존재가 될 거라는 걱정은 하지 마.」 에스텔라가 말했다. 「나는 그런 존재는 안 될 테니. 자! 여기 내 손을 내줄게. 이걸 잡고 작별해 주겠니, 이 몽상가 소년아? 아니, 이 몽상가 남자야?」

 

「너는 일주일이면 네 생각 속에서 나를 지우게 될 거야.」

「내 생각 속에서 너를 지운다고! 너는 내 존재의 일부야. 나 자신의 일부야. […] 넌 그때 이후로 내가 보아 왔던 모든 풍경들 속에 ─ 강물 위에, 배의 돛들 위에, 습지대에, 구름 속에, 햇살 속에, 어둠 속에, 바람 속에, 숲 속에, 바다에, 길거리들 위에 ─ 있었어. […] 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는 존재의 일부로, 내 안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선한 면의 일부로, 또 악한 면의 일부로 남아 있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이별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턴 너를 오직 내 선한 면하고만 결부시킬게. 그리고 앞으로는 충직하게 늘 그런 면만 붙들고 있을게. 지금은 비록 너무나 쓰라린 고통을 느끼게 하고 있지만, 너는 그동안 분명히 내게 해보다는 이로운 도움을 더 많이 주어 왔어!」

 

그 이후로 쭉 기억나는 모습 하나가 있다. 에스텔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반면에, 미스 해비셤이 여전히 가슴에 한 손을 얹고 나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면서 연민과 회한이 가득 깃든 유령 같은 얼굴로 변해 가던 모습이다.

모든 게 끝장나고 모든 게 사라진 셈이었다! 너무나 많은 게 끝장나고 사라져 버렸기에 대문을 나왔을 때 쏟아지던 밝은 대낮의 햇살이 들어갈 때보다 더 어두운 빛깔로 보일 정도였다.

 

45

 

웨믹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그걸 직접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말뜻은 처음부터 그랬다고 말할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앞으로 그럴 것이고, 아니면 그럴 위험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리틀브리튼에 대한 충직함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하는 걸 삼가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얼마나 정도를 벗어나서 자신이 한 일을 내게 말해 주고 있는 건지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로〉 당황스러워했습니다. 내가 당장은 그 톰인지, 잭인지, 아니면 리처드인지 하는 사람을 너무 먼 곳으로 피신시키는 건 안전하지 못할 거라고 내 의견을 밝혔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핍 씨, 한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일단 대도시 안으로 들어왔다면 그만한 장소가 없다는 겁니다. 뚜껑을 너무 빨리 깨지 마세요. 납작 엎드려 숨어 있으세요. 비록 외국의 공기를 마시러 나가겠다는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뚜껑을 열려고 시도하기 전에 상황이 느슨해질 때까지 기다리세요.」

 

46

 

나는 비상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유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이란 일단 뇌리에 자리 잡으면 좀처럼 떠나지 않는 법이다. 내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의심했는지,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것이다.

간략히 말해 나는 숨어 있는 어느 무모한 사람 때문에 늘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49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이냐!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이냐!」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비틀고, 흰 머리를 마구 뭉개며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이 말을 외쳤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이냐!」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녀가 감수성 예민한 아이를 양녀로 데려와서, 자신의 미칠 듯한 분노와 퇴짜 맞은 애정과 상처 입은 자존심에 대한 복수의 수단으로 주조해 내는 가혹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밝은 대낮의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무한정 더 많은 것들을 차단시켜 버렸다는 것, 격리된 은둔 생활을 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치유의 힘을 지닌 많은 영향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버렸다는 것, 고독한 수심에 빠진 그녀의 정신이, 창조주께서 정한 질서에 역행하는 모든 정신이 반드시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병들어 왔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파멸에 빠져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심히 부적합한 자의 모습으로, 헛된 참회와 헛된 후회와 헛된 자기 비하,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저주가 되어 버린 다른 모든 헛된 망상들처럼 지배적인 광증(狂症)이 되어 버린 헛된 슬픔에 사로잡힌 그녀를 내가 어찌 동정심 없이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얘야! 내 말을 믿어 다오. 사실 그 애가 처음 내게 왔을 때 나는 그 애를 나와 같은 비참한 불행으로부터 구해 줄 생각이었단다.」

「그렇군요! 그랬어요!」 내가 말했다. 「저도 그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애가 자라나면서 점점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질 징조를 보이자 나는 서서히 몹쓸 짓을 하기 시작했다. 내 찬사와 내 보석들과 내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내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강조하기 위한 경고로 이 몰골을 늘 그 애 앞에 내세우면서, 나는 그 애의 심장을 몰래 훔쳐 내고 그 자리에 차디찬 얼음을 채워 넣었다.」

 

51

 

이 말을 하자 아무리 재거스 씨라지만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장 경미한 놀람이었고, 가장 조심스럽게 억제되고 가장 신속하게 중단된 놀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놀람을 손수건을 꺼내는 동작 속에 묻어 버리려고 했어도, 그가 놀란 건 분명했다.

 

53

 

나는 코앞에 다가와 있는 죽음이 두려웠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 건 죽음 이후에 내가 잘못 기억될 거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마음이 나약해졌다. 나는 겸손하게 하늘의 용서를 구하고 있는 처지였고,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작별도 하지 못했으며 이제 그들과 결코, 결코, 작별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또한 그들에게 내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고, 내 비열한 과오들에 대해 그들의 동정을 구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런 모든 생각들에 가슴이 녹아내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저지를 생각이었다.

 

54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몇 시간 안에 다시 완벽하게 자유롭고 안전해질 겁니다.」

「글쎄다.」

「그래, 그렇게 짐작한다, 얘야. 지금보다 더 평온하고 태평하다면 우린 당황스러울 거다. 하지만 방금 전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던 건데 ─ 보트가 강물을 헤치며 너무나 부드럽고 쾌적하게 흘러가고 있어서 아마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구나 ─ 우리는 지금 내가 손을 적시고 있는 이 강물의 밑바닥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몇 시간 후에 벌어질 상황의 밑바닥을 볼 수 없단다. 또한 내가 이 강물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몇 시간의 흐름을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단다. 강물이 손가락들 사이로 흘러가면서 사라지는 게 너도 보이겠지!」

 

이제 그에 대한 혐오감은 이미 다 녹아 사라지고 없었다. 내 손을 자기 손 안에 꼭 쥐고 있는, 쫓기고 부상당하고 쇠고랑이 채워진 그에게서 나는 오직 내 은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의 모습과, 긴 세월 동안 늘 한결같은 애정을 갖고 고마워하며 나를 아낌없이 너그럽게만 대해 주었던 사람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그저 내가 조에게 보여 주었던 모습보다 훨씬 더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어제 우리가 뒤에 남겨 두고 떠나왔던 저무는 해를 향해 다시 돌아가면서, 그리고 우리의 희망이 담긴 강 물줄기가 온통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에게 그가 나 때문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른다고 말했다.

「얘야.」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렇게 위험을 무릅썼던 일에 대해 아주 만족해한단다. 나는 나의 꼬마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는 나 없이도 신사가 될 수 있다.」

 

「내가 수도 없이 했던 맹세들 중에 마지막 맹세를 하게 될 때, 그때 부디 내가 너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어 다오.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아저씨 옆에 결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아저씨 옆에 있도록 허락된다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아저씨가 내게 그랬듯이 나도 아저씨에게 충실히 신의를 지키겠습니다.」

 

55

 

「분명히 말하지만 그토록 가슴이 아팠던 적이 없었답니다. 내가 주목하는 건 그토록 많은 휴대용 동산들이 희생되었다는 거지요. 세상에!」

「〈내가〉 생각하는 건 말이죠, 웨믹 씨. 그 동산의 주인뿐이랍니다.」

[…]

「나로서는 그를 구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휴대가 가능한 그의 동산은 분명히 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게 재산과 그 재산의 주인의 차이점입니다, 알겠지요?」

 

56

 

그가 보인 순종과 체념의 태도는 인생살이에 지쳐 녹초가 된 사람의 태도였다. 나는 가끔 그의 태도나 그에게서 새어 나온 한두 마디 속삭이는 말에서, 자기가 지금보다 더 나은 환경에 처해 있었더라면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재판은 매우 짧았고 매우 명확했다. […] 그런 죄목으로 그를 재판하면서 그에게 유죄 판결이 아닌 다른 판결을 내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탄원서들을 제출하고 난 다음에는 그것들을 제출한 장소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서류들 가까이에 있어야 더 희망적이고 덜 절망적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딸이 살아서 유력한 친지들을 만났답니다. 그 딸이 지금도 살아 있어요. 숙녀가 되었고 아주 아름답기까지 하지요. 그리고, 내가 그녀를 사랑합니다!」

미약하지만 최후의 안간힘을 쓰면서, 그나마 내가 그런 안간힘에 호응하며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무기력하게 끝나 버렸을 안간힘을 쓰면서, 그는 내 손을 자기 입술에 갖다 댔다. 그러고 난 후 천천히 내 손을 다시 자기 가슴 위에 내려놓은 뒤 그 위에 자신의 두 손을 포갰다. 천장을 바라보는 평온한 표정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고 나서 머리를 가슴 위로 조용히 떨어뜨린 채 세상을 떠났다.

 

57

 

마침내 어느 날 내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거기 있는 게 정말 조야?」

그러자 옛날의 그 그립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조라네, 친구.」

「오, 조. 내 가슴을 왜 그리 찢어 놓는 거야! 화가 난 모습으로 나를 봐, 조. 차라리 나를 때려, 조. 내 배은망덕을 지적해 줘. 내게 이렇게 잘해 주지 마!」

[…]

「자네와 나는 늘 친구였다네.」

 

58

 

소박한 성실함과 명석한 인생의 지혜

 

「사랑하는 조, 부디 사랑하는 아이들을 갖기를 바라. 그래서 어느 겨울날 이 난로 굴뚝 가에 어떤 꼬마가 앉게 되고, 그 아이가 조에게 그 자리에서 영원히 사라진 다른 꼬마를 기억나게 해줄 수 있게 되길 바라.」

[…]

「부디 두 사람 다 내게 직접 말로 해줘. 나를 용서한다고! 부디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걸 내가 듣게 해줘. 내가 그 용서의 말을 갖고 갈 수 있도록 말이야.」

[…]

「오, 친애하는 핍, 이보게, 친구.」 조가 말했다. 「혹시 내가 자네에게 뭔가 용서할 게 있다면, 내가 이미 용서했다는 건 하느님께서 아실 거네!」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일들을 늘 밝고 근면하고 준비성 많은 허버트에게 신세 졌기 때문에, 나는 종종 어쩌다 내가 한때 그가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건지 의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문득, 아마도 그런 무능은 결코 그의 안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59

 

「이보게, 친애하는 친구. 우린 자네를 위해 이 아이에게 핍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네.」

「그리고 우리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너와 비슷하게 크기를 바라고 있어. 실제로 그렇게 크고 있다고 생각하고.」

 

「집 부지는 내 소유야. 권리를 양도하지 않은 유일한 내 소유의 재산이지.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조금씩 내 손을 떠났지만, 나는 이것만은 지켰어. 비참했던 그 모든 세월 동안 결연한 마음으로 버티며 유일하게 지켜 냈던 대상이 이거야.」

 

「부족하지 않은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어. 그래서… 그래, 잘해 나가고 있어.」

「종종 너를 생각했어.」 에스텔라가 말했다.

「그래?」

「최근 들어선 무척 자주. 그 가치를 까맣게 모른 채 내가 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을 멀리 떼어 놓고 살았던 힘들고 오랜 세월이 있었어. 하지만 내 본분이 그 기억을 인정하는 일과 서로 모순되지 않게 된 순간부터 나는 가슴속에 그 기억이 들어설 자리를 내주었어.」

「넌 늘 내 가슴속 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 때까지 침묵했다.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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