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소설/희곡 2020. 4. 15. 13:30
곤충극장

곤충극장

카렐 차페크 저/김선형

똥 한덩어리에 일생의 욕망을 투자하는 쇠똥구리, 타자의 목숨을 빨아 부와 권력을 누리는 맵시벌, 무책임한 연애로 청춘을 탕진하는 나비, 과학으로 무장한 채 종족학살을 위해 전진하는 개미들...

양차대전 사이 유럽을 살아간 휴머니스트의 치열한 고민, 그러나 위트 넘치는 기록들. 유한하고 덧없고 치졸하고 비루하며 지독히도 어리석은, 그러하기에 아름다운 드라마로 변신하는 모든 순간에 바치는 찬가다.

 

 

곤충 극장

 

프롤로그

 

여행자

모든 게 핑글핑글 돌고 있다고. 이 행성 전체가. 전 우주가. 오로지 나를 위해서. 황송하기 짝이 없군.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미안하네 이거. 내가 지금 우주적 화음의 중심이 될 만큼 옷을 잘 차려입지 못해서 말이야. (모자를 벗어 땅바닥에 던진다) 거기, 거기가 이제 네 중심이다. 저걸 축으로 돌아, 튼튼하니까…. 그래, 짊어진 십자가 무게에 못 이겨 좀 넘어졌다. […] 캐모마일, 이건 베인 상처에 좋다지 ─ 자, 여기 내 심장 있다, 어디 고쳐 봐. 나한테 너 같은 뿌리가 있었으면 이렇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도 않을 텐데, 안 그래? […] 나비, 쇠똥구리, 개미. 인간이든 곤충이든, 난 아무 상관 없어. 말썽은 내가 일으키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관찰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늘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련만.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앉는다) 저 위의 천국 말이지! 멋져! 평생 저길 쳐다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아! (일어서서 또 다른 관객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난 그럴 수가 없어, 안 그래? ─ 나는 인간이라고! 동포인 인간들을 바라봐야만 해. 참 가관이지!

 

제1막 나비들

 

펠릭스

이리스, 이리스! 이리스에 맞는 운율을 찾을 수만 있다면! […] 그 앞에 뭔가 섬뜩하고 절망적인 게 있어야 되는데. 그래야 갑자기 반전으로 돌아서지. 〈그리고 심장은 빛나는 방패 같구나.〉 그녀가 나를 배반하면 운율이 맞는 알렉산드리아 시행으로 비가(悲歌)를 지어야지. 아, 괴로움은 시인의 운명이로다!

 

이리스  (깊이 한숨을 쉬며)

아, 남자들이란 어찌나 냉소적인지! 자기네 쾌락만을 위해서 산다니까. 단물을 다 빨아먹고 나서는 〈이제 질렸어〉라고 말하지. 여자로 태어나다니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 뭐야!

빅토르 

어째서?

이리스 

우리는 질리는 법이 없으니까.

 

빅토르

사랑은 합일하고자 분투하고

꿈들은 현실이 되기를 갈망하고

세상은 퇴각하네

그러니 내 사랑, 함께 추락하자

이리스 

퇴각?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리고 합일은 또 뭐야?

빅토르 

아, 그러니까 ─ 말하자면 ─ 목표에 도달한 사랑이라고나 할까.

 

펠릭스

나를 비웃어선 안 돼, 이리스! 상상 속에서 이미 끔찍한 괴로움을 겪었단 말이야! 끔찍한 낙담, 헤아릴 수도 없는 연애들 ─ 모두 내 꿈속에서. 시인에게 꿈은 현실이야. 나는 모든 여자들을 알지만 단 한 여자도 알지 못해, 이리스.

 

펠릭스 

아, 이리스, 남자들은 누구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기 마련이야.

 

이리스  (벌떡 일어난다)

펠릭스, 난 오늘 기분이 째져! 여자라는 건 얼마나 바보 같은지! 내가 남자면 좋겠어. 그러면 정복하고 키스하고 유혹할 텐데…. 난 무시무시하게 정열적인 남자가 될 거야, 펠릭스! 난 그냥 ─ 원하는 걸 움켜쥘 거야. 거칠게, 폭력적으로…. 네가 여자애가 아니라니 정말 아쉽다. 아, 알겠다 ─ 너는 이리스가 되고, 나는 펠릭스가 되면 되지!

펠릭스

아냐 이리스, 펠릭스가 된다는 건 위험한 일이야. 기다리고 갈망하고 욕망한다는 뜻이니까….

이리스  (황홀해하는 목소리로)

아냐 펠릭스, 만물을 욕망한다는 뜻이지!

펠릭스 

그렇지만 만물을 욕망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있어.

이리스 

그게 뭔데?

펠릭스 

불가능을 욕망하는 거지.

 

이리스

여자하고 같이 있을 때는 불가능을 욕망한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되는 법이야. 여기, 이 자리에 없는 거니까.

펠릭스 

그렇지만 불가능은 여기 있는걸.

이리스 

어디?

펠릭스  (거울을 가리키며)

저기, 거울 속에 비친 네 모습에, 이리스!

[…]

펠릭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잖아. 마치 너처럼.

펠릭스 

참된 삶은 오로지 우리 손길이 닿을 수 없는 데 있는 법이야.

 

펠릭스 

난 사색 속에서 길을 잃었어.

클리티에 

그럼 그 길로 꺼져 버려! 넌 생각이 너무 많아!

펠릭스 

남자는 뇌가 있으니까. 그걸 사용해 한다고.

클리티에 

그럼 여자는?

펠릭스 

오용해야지.

클리티에  (일어선다)

이 끔찍스러운 남자는 날 미워해.

빅토르 

멋지군, 증오라 ─ 그건 사랑의 첫 단계지.

 

오타카르 

허, 시란, 아무 의미도 없단 말이야!

빅토르 

모두 거짓말이고 도망치기지.

 

펠릭스 

청춘의 숙명은 시련이야. 그리고 시인의 숙명은 백배의 시련이고.

 

여행자 

아, 이런 살롱에 모이는 부류들이 시를 논하며, 얄팍하기 짝이 없는 빨대로 삶의 기쁨을 홀짝거다니! 아, 이 달콤한 전율과 불화! 영원한 욕구 불만에 찬 영원한 연인들의 영원한 거짓말. 아, 다 지옥에나 가버리라고 해. 그저 곤충에 불과한걸.

 

제2막 청소부와 약탈자

 

쇠똥구리 씨 

재물, 난 재물이 너무 좋아! 온전한 나의 것! 개인의 꿈!

쇠똥구리 부인

우리 노동의 결실!

쇠똥구리 씨 

난 좋아서 미쳐 버릴 거야 ─ 아니면 걱정하다가 돌거나. 틀림없어.

쇠똥구리 부인 

아니 왜?

쇠똥구리 씨 

걱정, 책임감 때문에! 이제 하나 생겼으니 또 한 덩어리 만들기 시작해야겠군. 그 고생을 또 해야 한다니!

 

여행자 

갖고 가는 거, 그게 뭐요?

제3의 쇠똥구리 

하 ─ 공이지, 자본, 황금!

여행자  (뒤로 물러서며)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요, 당신 황금에서!

제3의 쇠똥구리 

황금은 냄새가 안 나요, 선생! 작은 자산의 공을 계속 굴려야 해. 데굴데굴 굴리는 거요. 순환하는 거지. 어서 가자! 하!

[…]

여행자 

재물이라, 뭐 안 될 거 없지. 누구나 자기만의 작은 공을 갖고 싶어하니까.

 

여행자 

온통 나비 생각뿐이었으니까 ─ 아름다운 나비들, 약간 빛은 바랬지만 여전히 최고의 상류층. 영원한 짝짓기, 부티 나는 사교계 아가씨들과 젊은 애인들, 제 몫의 쾌락을 누려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벌레들. 그런 부류에는 신물이 나. 적어도 이 친구들에게선 진한 노동의 냄새가 나잖아. 쾌락은 안중에도 없지, 그저 재물뿐.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딛고 선 평범한 사람들 말이야. 분수에 맞는 야망을 갖고 오래갈 행복을 건설한다고. 비록 그 토대가 똥이라 해도 말이지. 쾌락은 한순간이지만 똥 냄새는 영원해. 사랑은 자기만을 위한 거지만 건설은 뭔가 더 큰 명분을 위한 거잖아. 그러니 탐욕스러우면 좀 어때.

 

여행자 

그거 좋네, 번데기. 마음에 들어. 세상 만물이 태어나려고, 영원히 살려고, 백만 가지 감정을 느끼려고 발버둥 치지. 중요한 건 오직 하나뿐이야. 바로 존재한다는 경이로운 축복이지.

[…]

번데기 

나도 아직 몰라. 난 위대한 일을 이룩하고 싶어.

여행자 

위대한 일이라고? 진정해.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질 말라고. 똥 공을 굴리는 이 선량한 사람들은 이해 못 할 거야. 똥 공은 작고 뚱뚱하지만, 꿈은 커다랗고 공허하니까.

 

맵시벌

자식들이란 참으로 기쁨을 주는 존재지. 안 그렇소?

여행자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맵시벌 

그 말이 맞아. 일을 해야 할 이유, 싸워서 지켜 내야 할 이유를 준단 말이오. 분투와 투쟁, 그게 삶이잖아

 

쇠똥구리 부인 

진즉에 결혼을 했는데 아직 공도 없는 거요?

귀뚜라미 부인 

공을 어디다 써요?

쇠똥구리 부인 

제대로 된 똥 공은 가족을 하나로 묶어 준다오. 진정한 삶 ─ 즉 안정을 주지.

귀뚜라미 부인 

아니, 아니에요. 삶이란 우리만의 가정이에요. 둥지를 짓고, 가게를 사고. 커튼도 달고요. 아이들도 있지요. 꼭 맞는 귀뚜라미 씨를 만나는 거예요. 우리의 작은 가정. 우리의 세계.

 

여행자 

다 고기 한 덩어리 얻어먹자고 하는 짓이군!

기생충 

그게 바로 내 말이야. 죄다 고기 한 덩어리 얻자고 하는 짓이라니까. 다른 딱한 새끼가 배를 곯더라고 말이야! 죄다 자기 배를 불려야 하는 거지, 안 그래?

 

여행자 

살인에 살인이 꼬리를 무는군! 심장이여, 멎어 버려라! 이건 인간들이 아니야, 벌레들일 뿐이지. 딱정벌레들. 풀잎 두 개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졸한 드라마. 벌레와 벌레가 싸우고, 딱정벌레가 딱정벌레와 죽도록 싸우지. 인간들이 아니야. 그저 벌레들일 뿐이라고. 다시 인간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들은 그냥 먹어 치우는 것 이상을 바라잖아 ─ 무언가 건설하기를 바라잖아. 목표가 있고 결말이 있어. 그들만의 작은 둥지를 짓는다고 ─ 아니, 그건 쇠똥구리였지! 똥 공은 쇠똥구리들한테나 줘버려. 인간들에겐 더… 인간적인 이상이 있단 말이야. 겸허한 인간은 온 존재를 바쳐 삶을 찬양한다고. 행복을 위해 필요한 건 별로 없어. 자기 일만 잘하고, 자기 가정을 가꾸고, 자기 자식들을 키우면 되지. 죽도록 노력하면서 다리를 퍼덕거리는 이웃을 구경하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 아냐, 그건 귀뚜라미잖아! 그 편협하고 치졸하고 백치 같은 귀뚜라미의 행복에 우리 인간들이 만족할 수는 없잖아. 우리는 그저 제 주둥이나 꽉꽉 채우고 안일하게 행복을 되새김질하는 것 이상을 원한다고. 삶이 요구하는 건 진짜 남자야. 삶은 투쟁이라고. 강력한 손으로 움켜잡는 거야. 영웅이 되고 싶어? 작아져선 안 돼. 약해선 안 된다고. 살고 싶어? 움켜잡아. 먹고 싶어? 그럼 죽여 ─ 아니, 아니야, 그건 맵시벌이야! 조용히 해봐. 온 세상의 턱주가리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 봐. 냠냠, 피를 뚝뚝 흘리면서! 아삭아삭, 살아 있는 살점들을! 삶이 삶을 먹어 치워! 삶이 삶을 먹고 산다고!

 

제3막 개미들

 

여행자 

나, 나, 나를 위한 무구한 투쟁! 자기 자식한테 무의미한 자기 존재를 영원히 새겨 넣기 위한 게걸스러운 축재! 이제 그만둬! 빌어먹을 마술 같으니! 나는 다시 인간의 길을 걷고 싶단 말이야. […] 인간의 발화 속에 담긴 표지판들. […]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고. 마을, 구역, 단체, 사회적 전체, 공통의 명분.

 

여행자 

인간은 오로지 위대한 의무를 통해서만 위대한 거야. 전체의 일부일 때만 온전해지는 거야. 〈훌륭한 삶을 살라〉는 〈목숨을 내놓으라〉는 뜻이야. 삶이 희생을 의미할 때 더 위대한 무언가가 되는 거지 ─ 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말이야!

 

기술자 1 

시간은 공간보다 더 크다. 시간의 주인이 우주의 주인이 될 것이다.

여행자 

잠깐만, 나 생각 좀 하고. 시간을 정복한다고? 오로지 영원만이 시간을 정복할 수 있어.

기술자 1 

속도는 시간의 주인이다.

기술자 2 

속도를 좌우하는 자가 시간을 지배한다.

기술자 1 

하나, 둘, 셋, 넷! 장님  (더 빨리)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개미들의 움직임이 더욱더 빨라진다)

기술자 1 

박자를 가속해.

 

여행자 

하나, 둘, 셋, 넷, 더 빨리! 늙은 시간에 속도의 채찍을 휘둘러! 시간을 철썩철썩 때리고 시간에 올라타서 달리게 만들어! 속도는 진보다! 세계는 결승점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고 점점 더 빨리 파멸로 치닫지. 계속 숫자를 외쳐라, 눈먼 이여. 하나, 둘 ─

장님 

셋, 넷 ─

 

독재자

전능하신 개미들의 신이여, 우리가 세계를 정복하는 이 위대한 순간에…. (조용히 기도를 한다)

여행자  (그를 굽어보며 조용히)

세계? 불쌍한 개미 같으니, 기껏해야 더러운 풀과 흙덩어리를 세계라 이름 붙이다니! 이 한 줌의 먼지를! 바보들! 네놈들의 개밋둑이 짓밟힌다 해도 연민에 살랑거릴 우듬지 하나 없단 말이다!

 

에필로그 삶과 죽음

 

여행자 

우리 모두, 살아가자! 만물이 살기를 원해! 생명을 꽉 붙들어라. 함께 생명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혼자뿐이다. 신이 우리에게 묘지의 망각에 맞서 싸우는 법을 보여 주시잖아!

 

여행자

누구야? 이 손 놔, 춥단 말이야. 너는 누구야? (텅 빈 공간으로 돌진한다) 그 차가운 손을 내 몸에서 떼지 못해? 싫어…. (일어난다) 꺼져! (허공을 공격하며 방어 자세를 취한다) 네가 내 목을 조르고 있어! 네가… 네가 누군지 난 알아 ─ 죽음이지! 오늘 너를 너무나 많이 봤단 말이다! 난 싫어…. 깡말라 가지고! 눈도 없고! 혐오스러워! 아악! (다시 텅 빈 공간으로 돌격한다) 그만둬!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제1막

 

에밀리아 

그냥 기적이에요!

그레고르 

그래요, 기적이죠. 그러나 기적에는 어김없이 해명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안 그러면 삶은 견딜 수가 없을 거예요.

 

에밀리아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가진 건 충분하니까.

그레고르 

실례지만 마르티 양, 거지들이나 충분히 가지는 법이죠. 부자들은 절대 만족을 모릅니다.

 

에밀리아 

아, 만물이 죽었거나 죽어 가고 있지. (침묵)

 

제2막

 

비테크 

죄송합니다 ─ 물론 저야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역사에 따르면 ─

에밀리아 

역사는 우리한테 거짓말을 한다니까요! 이봐요, 비테크 씨, 스트라다는 깩깩 소리를 질렀고, 코로나는 목에 만두가 걸린 소리를 냈고, 아구야리는 거위처럼 꽥꽥거렸어요. 파우스티나는 바다코끼리처럼 씨근거렸고요. 이게 역사란 말이죠!

 

제4막

 

그레고르 

만물의 영장, 전능 좋아하고 앉아 있네! 대부분의 인간사는 오로지 무지 덕분에 견딜 수 있다는 걸 당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소.

 

하우크-센도르프 

뭐, 난 사업가는 아니지만 사람이 늙어 가다 보면 돈 주고 조금만 더 사고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오. 그렇지만 3백 년은 너무 길어요.

비테크 

지식을 위해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암요.

하우크-센도르프 

지식을 사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요. 그러나 10년간의 행복이라면 ─ 기꺼이, 기꺼이 사겠지.

 

프루스 

자네하고 갑론을박할 생각은 없소, 비테크. 그저 평범하고 멍청한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얘기만 해두지. 자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평범하고 멍청한 인간들은 영원히 살게 되어 있소. 치졸함은 쉬지 않고 스스로 재생산을 해내거든. 파리나 쥐 떼들처럼 말이오. 오직 위대함만 죽는 법이오. 힘과 재능만이 죽는 법이라고.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어쩌면 그런 걸 보존하고, 영원한 귀족 계급을 옹립할 수 있는 힘을 우리가 갖게 된 건지도 모르지.

 

프루스 

아니, 주인들이 다시 그 권리를 빼앗아 올 거요! 가끔 최강자들 중 소수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뭐 어떻소? 혁명은 노예들의 특권인데. 작고 유약한 독재자들을 더 강하고 더 큰 독재자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진보요. 오래도록 특권을 누리며 장수하는, 선택된 소수의 통치. 대중을 지배하는 이성의 통치. 지식과 권력의 초인간적 권위. 이런 통치자들이 인류 부동의 지도자들이 될 거요. 그런 과업을 이룰 힘이 우리 수중에 있소, 신사 여러분. 그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단 말이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소이다. (앉는다)

 

콜레나티 

목소리 낮춥시다. 잠을 좀 재워야 하니까. (크리스티나에게) 이리 와봐라, 얘야. 너는 3백 년 동안 살고 싶니?

크리스티나 

아니요, 싫어요.

콜레나티 

너에게 묘약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니?

크리스티나 

몰라요.

비테크 

모든 사람들과 공유할 거냐?

크리스티나 

그렇게 오래 살면 그 사람들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콜레나티 

삶이란 더럽게 근사한 거라고 생각한다. 넌 안 그러니?

크리스티나 

전…. 제게 묻지 마세요.

 

에밀리아 

그래 봤자 달라질 건 없어. 죽는 거나 닫힌 문 뒤에서 사라지는 거나, 다 마찬가지야. 뭔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다 마찬가지야 ─

 

에밀리아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1백 년, 130년까지는 괜찮을지 몰라. 그러면… 그러면 깨닫게 되지. 그리고 영혼이 속에서 죽어 버려.

비테크 

뭘 깨닫죠?

에밀리아 

맙소사, 표현할 말들이 없다니까. 자기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아무것도. 그냥 이 공허함뿐. 기억하니, 베르티? 내가 노래할 때 얼음처럼 차갑다고 했지. 봐라, 삶이 의미를 잃은 지 오래인데도 예술적 기술은 그 의미를 보존하고 있어. 그저 일단 터득하고 나면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지. 크리스티, 코를 고는 것만큼이나 아무 쓸모가 없단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

 

에밀리아 

사람들은 절대 나아지지 않아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총격, 지진, 세상의 종말 ─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네들은 여기 있지. 그런데 나는 어딘가 멀리, 저 멀리, 3백 년은 떨어진 아득한 데 있어. 당신네들의 삶이 얼마나 수월한지 스스로 깨닫는다면 좋을 텐데!

 

에밀리아 

당신네들은 만물에 가까워요. 모든 게 뭔가 의미를 갖고 있죠! 얼마 안 되는 짧은 당신네 인생에서는 만물이 값어치가 있으니, 당연히 한껏 누리며 사는 거예요. […] 당신네들은 원숭이처럼 만사가 흥미롭잖아. 모든 걸 믿잖아. 사랑, 자기 자신, 명예, 진보, 인간성, 모든 걸! 맥시, 당신은 쾌락을 믿잖아. 크리스티나, 너는 사랑과 신의를 믿지. 프루스, 당신은 권력을 믿어. 비테크는 자기가 하는 온갖 헛소리를 믿고. 모두 다, 모두가 뭔가를 믿고 있어. 얼마나 멋진 삶이야, 이 바보들아! 얼마나 근사한 삶이냐고!

 

에밀리아

아무도 3백 년 동안 사랑할 수는 없어. 아니, 희망할 수도, 글을 쓸 수도, 노래할 수도 없어. 3백 년 동안 눈을 똑바로 뜨고 살 수는 없는 거야. 견딜 수가 없으니까. 모든 게 차갑고 무감각해져. 선에도 무감하고, 악에도 무감하고. 천국에도, 이승에도 무감해져. 그러다 보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지. 아무것도. 죄도, 고통도, 심지어 대지도, 아무것도. 오로지 의미를 지닌 무언가만 존재하는 법이야. 그런데 당신네들한테는 만사에, 만물에 의미가 있잖아. 아, 하느님, 한때는 나도 당신들 같았는데! 소녀였고, 여자였고, 행복했는데, 나도… 나도 인간이었는데! 맙소사, 하느님!

 

에밀리아 

봄비타가 해준 얘기를 당신네들은 모를 거야. 그는 우리 ─ 우리 늙은이들이 너무 많이 안다고 했지. 그렇지만 당신네들은 훨씬 더 많이 알아, 이 바보들아. 훨씬,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사랑도, 위대함도, 목표 의식도 알잖아. 모든 걸 갖고 있잖아. 이 이상 바랄 나위가 없잖아. 여전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잖아!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무감각하고, 얼어붙은 채로 계속,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해. 세상에, 더는 못 하겠어. 맙소사, 이 고독이라니!

프루스 

그렇다면 어째서 묘약을 가지러 돌아온 거죠? 어째서 또다시 그 삶을 반복하려는 겁니까?

에밀리아 

죽음이 무서우니까.

프루스 

세상에, 그렇다면 심지어 불멸의 존재들도 그건 피할 수 없단 말인가?

에밀리아 

그래요.

 

비테크 

영생! 이제 사람들은 영원히 그걸 찾아 헤매겠지.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영생을 누렸는지 모르겠군요.

콜레나티 

그랬다면 이미 영원을 다 산 셈이야! 고맙기도 하지!

프루스 

영원? 자식들이 있습니까?

콜레나티 

있소이다.

프루스 

그것 봐요. 영원한 삶! 죽음이 아니라 탄생을 생각한다면 우리 삶이 그리 짧지는 않을 것을! 우리는 생명의 창조자들이 될 수 있어요….

그레고르 

다 타서 불길이 잦아들고 있군요. 영원히 살다니, 얼마나 황당무계한 생각입니까? 맙소사, 그걸 갈구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니 기분이 한층 나아지는군요.

콜레나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아요. 크리스티나만이 죽음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저토록 아름답게 불태울 수 있었지. 고맙다, 크리스티. 참 잘했어.

하우크-센도르프 

미안하지만… 혹시… 여기 이상한 냄새가….

비테크  (창문을 연다)

…다 타버린 재의 냄새죠.

에밀리아 

하하하, 불멸의 끝이로군!

 

 

 

하얀 역병

 

제1막

 

나환자 2 

아니야, 나병이야. 하얀 죽음. 신의 천벌.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야. 이런 병은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니까.

 

나환자 1 

천벌, 천벌! 무슨 죄로! 말을 해보라고! 난 살아 보지도 못했어. 가난밖에 아는 게 없다고. 무슨 신이 이미 벌받고 있는 사람들을 또 벌하느냔 말이야!

 

나환자 1 

당연히 이유가 있지. 사람이 너무 많아 ─ 자리를 만들어 주려면 우리들 중 반은 꼴까닥 숨이 넘어가야지. 빵 장수면 또 다른 빵 장수한테 자리를 비켜 줘야 한다고. 나는 빈민이니까 또 다른 사람이 춥고 배고플 수 있게 비켜 줘야 하고. 그게 바로 역병의 이유야.

 

시겔리우스 

유행병 말입니다. 통제 불가로 확산되어 결국 세계 인구 전체를 감염시키고야 마는 질병이지요. 대단히 흥미로운 신종 질병이 거의 매해 중국에서 새로 등장하고 있단 말입니다. 다 가난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태껏 쳉 바이러스만큼 흥미로운 병은 없었어요. 이건 진정한 이 시대의 질병입니다!

 

시겔리우스 

그렇다면 1~2분만 보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이것 봐요, 친구. 과학적 연구에 집중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시겠죠?

기자 

영광이었습니다, 교수님. 귀한 시간을 빼앗은 점 용서하십시오.

시겔리우스 

괜찮아요, 친구. 과학과 인간은 서로 섬겨야 합니다. 뭐든 필요하면 부탁만 해요. (악수를 한다)

 

시겔리우스 

내 말부터 끝까지 들어요, 박사. 우리한텐 시간이 1~2분밖에 없으니까. 모르부스 쳉기로 말하자면, 안정성이 입증된 악취 제거제를 권하고 싶소이다. 그런 다음엔 모르핀이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통증을 덜어 주는 거니까요. 적어도 치료비를 내는 환자들에 한해서 말이오

 

갈렌 

페르가몬 출신입니다. 그리스인이죠.

시겔리우스 

유감이지만 우리 릴리엔탈 국립 병원에 외국인을 들일 수는 없소이다.

갈렌 

저는 이 나라 시민입니다. 여기서 태어났어요.

시겔리우스 

출신은 출신이지요, 친애하는 선생!

 

시겔리우스 

거기서 선생이 실수한 거예요! 난 항상 학생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지요. 과학에 몸 바칠 생각이라면 결혼하지 말아라! 결혼을 할 생각이면 돈과 결혼해라.

 

딸  (내내 잡지를 읽으며 소파에 누워 있다가)

이유는 뻔하잖아요, 아빠 ─ 젊은이들한테 길을 비켜 줘야 하니까요. 그들이 출세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아버지 

방금 저 소리 들었소, 여보? 부모가 먹여 주고 피땀 흘려 키워 줬더니 이제 앞길을 막겠다는군. 참 잘하는 짓이다! 자리가 필요하니까 이젠 죽어 버려라 이거지!

 

딸 

그렇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아빠! 우리가 사회에서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얘기일 뿐이에요. 일자리도 없고 말이죠. 우리도 인생을 살고 가정을 꾸리려면 뭔가 희생이 필요하다는 거죠….

[…]

아버지 

그러니까 당신도 얘 편이다 이거군 ─ 그 말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인생의 전성기에 꼴깍 죽어 넘어가야 한다는 거네.

 

 

 

갈렌 

간단해요. 전쟁에서 물러서겠다고 저들이 약속하기만 하면, 내 백신을 넘기겠습니다.

기자 2 

이상주의예요! 그렇게 백신을 살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겁니다!

갈렌 

지독하게 슬픈 일이 되겠지요. 저로서는 도저히 백신을 풀 수가 없습니다.

기자 

그걸로 뭘 하려고요?

갈렌 

다시 빈민가로 가지고 갈 겁니다. 거기라면 환자들이 모자랄 일이 없으니까요! 하얀 역병이 치유 가능하다는 사실을 수백 번도 더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기자 

하지만 부자들은 치료해 주지 않겠다는 거죠?

갈렌 

유감이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자들에게는 권력이 있습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손가락만 튕기면 될 일이지요.

기자 

그거 부자들한테 좀 가혹한데요.

갈렌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가혹합니다. 빈민들은 더 젊은 나이에 죽어요. 그래야만 할 이유는 없어요. 살 권리는 누구한테나 있는데 말입니다.

 

제2막

 

아버지 

생각해 봐요 ─ 우리 딸은 이제 결혼을 할 수 있고, 그 녀석 애인은 취직을 하겠지. 그리고 우리 아들도 시험에 붙으면 우리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만, 이 모든 행운이 다 역병 덕분이라니까!

어머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아버지 

사실이니까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출세하는 데는 역병이 큰 도움이 됐어요. 안 그랬으면 우리는 별 볼 일 없었겠지. 그리고 이제 치료법을 찾았으니까 너털웃음을 치며 돈이나 모으면 되는 거지

 

어머니 

정말 전쟁이 일어날까요?

아버지 

저런 지도자가 있는데 전쟁을 안 하는 건 죄악이지!

 

아버지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여보! 우리가 군수 물자에 수백만을 쓰는 게 다 뭣 때문인데! 평화? 크루그의 공장들을 폐쇄하고 2십만 명을 실직자로 내몰게? 지금 평화를 논하는 건 범죄 행위나 마찬가지예요. 저놈은 감옥에 처넣어야 해!

어머니 

그렇지만 그 사람이 치료제를 갖고 있잖아요….

[…]

아버지 

반역자! 우리 국가의 영광은 어떻게 하고? 우리 삶의 공간은? 저들이 쟁반에 담아서 우리한테 순순히 내줄 것 같아요? 반전을 설교하는 건 우리 성스러운 이윤에 반대하는 짓이지, 알겠어요? 역병과 평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역병을 선택하겠어요!

 

시겔리우스

전투 의지가 충만하지요.

크루그 

질병과 싸울 기세 말이오?

시겔리우스 

아니요, 전쟁에서 싸울 기세요! 우리 조국은 총사령관과 영웅적인 군대와 남작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조짐이 상서로운 적은 아마 없었을 겁 ─

 

크루그 

아직도 부자는 치료하지 않겠다고 한답디까?

시겔리우스 

안타깝지만 완전히 광신입니다. 그 딱한 위인은 여전히 영원한 평화를 꿈꾸고 있어요. 이런 시대에 평화라니.

 

크루그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둘 거라 믿어 의심치 않소. 어떤 식의 격리를 염두에 두고 계시오?

시겔리우스 

수용소입니다, 남작님. 새로 병을 얻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병을 퍼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얀 반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조리 수용소로 보내 버려야지요.

크루그 

알겠소. 그런 다음엔 거기서 죽게 내버려 둔다?

시겔리우스 

인도적으로요. 적절한 의학적 치료를 받게 해야지요. 탈출을 감행하면 무조건 총살입니다. 마흔 살 이상의 시민들은 모두 한 달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의료 검진을 받게 하고요. 전염병은 힘으로 눌러야 합니다, 남작님. 저들이냐 우리냐의 문제입니다! 감상주의는 범죄예요!

크루그 

당신 얘기가 지당하다고 생각하오,

시겔리우스

그 생각을 좀 더 일찍 못 해낸 게 한스러울 뿐이군.

 

크루그 

그럴 수도 있지, 선생. 하지만 혼자 힘으로 세계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선생이 너무 순진한 거요.

갈렌 

저 혼자서가 아닙니다. 강력한 지원군이 있어요.

크루그 

그렇지, 하얀 역병, 그리고 공포. 맙소사, 나는 그 공포를 잘 알아요. 공포로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다면 전쟁은 필요도 없을 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런데도 전쟁은 일어나지. 전쟁은 항상 일어날 거란 말이오.

 

갈렌 

그러면 제게 무엇을 주실 수 있습니까?

크루그 

오로지 돈뿐이오.

갈렌 

돈은 필요 없습니다. 돈은 무의미해요

 

크루그 

각하, 어젯밤에는 그의 조건을 받아들일 각오까지 했습니다.

총사령관 

크루그! 자네 미친 거 아닌가?

크루그 

그렇습니다. 공포는 사람을 미치게 하지요, 각하.

총사령관 

그토록 두려운가?

크루그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총사령관님, 공포가 온몸에 스며들어 손끝까지 퍼져 오는 소름 끼치는 느낌을 절대 모르실 겁니다. 역겨운 기분이지요. 철조망 뒤에서 횡설수설 소리를 지르는 제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총사령관 

자네, 정체가 뭔가? 광인인가, 영웅인가?

갈렌  (뒤로 물러선다)

영웅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야전 군의관으로 참전했습니다. 거기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걸 보고, 그것도 그토록 건강한 사람들이 ─

총사령관 

나 역시 참전했었네. 내가 본 사람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어. 정복자가 된 그들을 내가 이끌고 돌아왔지.

갈렌 

그게 다른 점입니다, 각하. 저는 각하께서 이끌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봤으니까요.

 

총사령관 

그럴 수 없네. 아기한테 하듯 설명해 주길 바라나? 자네는 정말로 전쟁과 평화가 내게 달렸다고 생각하나? 나는 조국의 이익을 따라야만 한단 말일세. 우리 민족이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들의 운명을 이끄는 게 내 의무일세.

갈렌 

각하가 없었다면, 애초에 싸울 일도 없었을 겁니다.

총사령관 

그래, 그랬겠지. 자, 천만다행히도 이제 우리 민족은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네. 나는 그저 저들 의지의 중개인일 뿐이 ─

갈렌 

그 의지는 각하께서 선동해서 만들어 낸 게 아닙니까.

총사령관 

그들의 의지를 흔들어 깨워 살려 낸 거지.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고 생각하나? 나는 승승장구하는 전쟁이 굴욕적인 평화보다 낫다고 생각하네. 우리 민족의 승리를 박탈할 수는 없어.

갈렌 

민족의 사상자들은요?

총사령관 

민족의 사상자들도. 쓰러진 영웅의 피만이 땅 한 뙈기를 아버지 조국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법이야. 오로지 전쟁만이 사람들을 민족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영웅으로 바꾸지.

갈렌 

그리고 시체들로 바꾸지요. 전쟁에서 저는 시체들을 더 많이 봤습니다, 각하.

총사령관 

그게 자네 일이니까, 의사 선생. 내가 일하는 쪽에서는 영웅들이 더 많이 보인다네.

갈렌 

그래요, 그들은 대개 후방에 있지요. 참호 안에는 영웅이 별로 없더군요.

 

갈렌 

신의 자식들은 투쟁 속에서 학살당하겠지요.

총사령관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승리하겠지.

갈렌 

그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역병으로 죽어 갈 테고요.

총사령관 

사람들이 늙어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네, 선생. 병사로서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제3막

 

정보부 장관 

이미 사태가 너무 진전됐습니다, 각하. 세계 여론이 맹렬하게 전쟁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결국 역병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저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그저 살고자 할 뿐이니까요.

 

총사령관  (벌떡 일어난다)

아니, 안 돼! 나는 평화를 원치 않아! 자네 미쳤나, 파벨? 지금 이겨야 할 전쟁이 있다고!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어! 그 굴욕이라니! 정의가 우리 편이란 말이야!

크루그 2세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총사령관님.

총사령관 

알고 있네, 젊은이. 그렇지만 우리는 승리해야 해. 나 자신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 국가가 중요한 거라고. 수화기를 내려놓게, 파벨. 나는 국가를 위해 죽고 싶어.

크루그 2세  (수화기를 아네트에게 건네준다)

그렇게 하실 수는 있습니다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총사령관 

내가 죽고 나서? 나는 그저 일개 유약한 인간에 불과해.

크루그 2세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이제는 각하를 대체할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돌아가시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결과는 참담합니다! 신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는 한 말이죠!

Posted by 밑줄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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