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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스토너 | 존 윌리엄스

2020. 7. 3.
스토너

스토너

존 윌리엄스 저/김승욱

지난 2013년, 영국 최대의 체인 서점인 ‘워터스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는 요즘 가장 주목받는 작가라는 줄리언 반스의 책도, 케이트 앳킨스의 책도 아니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했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던 내성적인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 소박하기만 한 이야기,《스토너》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 새삼스러운 이슈로 주목받은 것도 아니었다. 언뜻 초라한 실패담에 불과해 보이는 이 책은,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방식으로 슬픔을 받아들이는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이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유럽 독자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스토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출판계와 평론가,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50년의 시차를 가볍게 뛰어넘어,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세상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 ‘늦고도 새로운 감동’을 전한 베스트셀러이다.

 

1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는 젊은 나이였지만(아버지는 스물다섯 살, 어머니는 겨우 스무 살),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부모는 항상 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서른 살 때 이미 쉰 살처럼 보였다. 노동으로 인해 몸이 구부정해진 아버지는 아무 희망 없는 눈으로 식구들을 근근이 먹여 살리는 척박한 땅을 지긋이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는 삶을 인내했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대학 공부도 농장 일을 도울 때처럼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이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했다. 1학년 말에 그의 평균성적은 B학점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는 점수가 더 낮지 않은 것을 기뻐했을 뿐, 점수가 더 높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을 배웠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점수가 그에게 의미하는 것은 2학년 때에도 1학년 때처럼 해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교수가 숙제로 내준 작품들을 읽고 또 읽었다. 어찌나 많이 읽었는지 다른 강의를 제대로 준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가 책에서 읽는 단어들은 그냥 단어일 뿐, 자신이 책을 읽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아처 슬론이 수업시간에 한 말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말 속에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이끌어줄 열쇠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학부의 마지막 두 해.

그때의 시간은 익숙하게 흐르지 않고 발작처럼 뚝뚝 끊겨 있었다. 순간과 순간이 나란히 놓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 소외되어 있어서, 그는 자신이 시간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르지 못한 속도로 돌아가는 커다란 디오라마(배경 위에 모형을 설치하여 만들어 낸 장면-옮긴이)를 보듯이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밤에 다락방에서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 어둠이 빛 속으로 모여들어 그가 읽던 책에 나오는 상상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다. […] 과거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한데 모이고, 죽은 자들이 그의 앞에 되살아났다. 그렇게 과거와 망자가 현재의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오면 그는 순간적으로 아주 강렬한 환상을 보았다. 자신을 압축해서 집어삼킨 그 환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길도,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땅과 똑같은 갈색을 띠고, 땅처럼 수동적이던 사람. 부모도 거의 옛날의 자신만큼이나 낯설었다. 그는 부모에게 연민이 섞인 감정과 흐릿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진지한 문학도라면 자신의 지식이 흙을 다루는 데 딱히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

“모르겠나, 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

“그런 걸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스토너는 어머니가 소리 없이 마음 깊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좀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라 어색해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2

 

그리고 가을이 되기 전에 유럽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나이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 화제가 되었다. 그들은 미국이 궁극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궁금해하며 불투명한 자신들의 장래에 즐거운 듯 기대를 품었다.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자신 안에서 자신이 속한 세상으로 점점 빠져나와, 자신이 읽은 밀턴의 시나 베이컨의 에세이나 벤 존슨의 희곡이 세상을 바꿔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작품들이 자신의 소재이기도 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상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 스토너 군? 핀치 군?”

 

“스토너는 대학을 커다란 저수지처럼 생각하고 있을걸. 도서관이나 유곽처럼 말이야. […] 진실, 선함,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모퉁이 너머 바로 다음 복도에 있다는 것이지. 아직 읽지 못한 바로 다음 책, 아니면 아직 가보지 못한 바로 다음 서가에.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그 서가에 이를 것이고, 그러면…… 그러면……”

 

“자네(핀치)에게 이 대학이라는 기관은 선(善)의 도구야. 물론 세상 전반을 향한 선이지. […] 자네는 인자하게 녀석들의 머리를 두드려주고 돈을 받아 챙기는, 친절한 의사선생님이고.”

 

“하지만 자네들 둘 다 틀렸어.”

“대학은 보호시설이야. 아니, 요즘은 그걸 뭐라고 하더라? 요양소. 환자, 노인, 불평분자, 그 밖의 무능력자들을 위한 곳. 우리 셋을 보게. 우리가 바로 대학이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한테 공통점이 많다는 걸 모르겠지만, 우리는 알지, 안 그래? 우린 아주 잘 알아.”

 

“자네(핀치)는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고, 자네도 그걸 알고 있어. […] 세상에 나가면 항상 성공의 언저리에 서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파멸할 걸세.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된 사람이지. 신의 유머감각은 항상 재미있어. 신의 섭리가 자네를 세상의 턱 앞에서 낚아채 여기에 안전히 놓아준 거야. 자네 형제들 속에.”

 

“소박한 땅의 아들? […] 자네(스토너)도 환자일세. 자네는 몽상가이고 광인이야. 세상은 더 미쳤지만. 산초가 없는 우리만의 돈키호테. […] 자네는 꽤 똑똑해. […] 하지만 자네에게는 오점이 있네. 오래된 약점. 자네는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지. 여기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곧 알 수 있을 걸세. 자네 역시 처음부터 실패자로 만들어졌다는 걸. 자네가 세상과 싸울 거라는 얘기가 아냐. 세상이 자네를 잘근잘근 씹어서 뱉어내도 자네는 아무것도 못할 걸세. 그냥 멍하니 누워 무엇이 잘못된 건지 생각하겠지.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목화밭의 바구미, 콩줄기 속의 벌레, 옥수수 속의 좀벌레. 자네는 그런 것들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싸우지도 못해. 너무 약하면서 동시에 너무 강하니까. 이 세상에 자네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없네.”

 

“나(매스터스)도 자네들과 같지. 아니, 사실 더 심해. 너무 똑똑해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거든. 게다가 그 사실을 잠자코 숨기지도 않을 테고. 이건 불치병일세. 그러니 무책임한 짓을 해도 안전한 곳, 내가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는 곳에 날 가둬두어야 해.”

 

“우린 모두 가엾은 톰(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 왕>에서 글로스터 백작의 아들 에드가가 변장한 인물-옮긴이)이고, 차갑게 식었어.”

 

“신의 섭리인지 사회인지 운명인지, 하여튼 그것이 우리를 위해 이 누옥을 지어준 거야. 우리가 폭풍을 피할 수 있게. 대학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걸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군대에 가더라도, 제발 부탁이니 하느님이나 조국이나 친애하는 미주리 대학을 위해 가지는 말게. 자네 자신을 위해서 가는 거야.”

 

“물론 나는 그 전쟁의 기억이 없네. 너무 어렸으니까.”

“하지만 전쟁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네. 전쟁은 단순히 수만 명, 수십 만 명의 청년들만 죽이는 게 아냐.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뭔가가 죽어버린다네. 사람이 전쟁을 많이 겪고 나면 남는 건 짐승 같은 성질뿐이야.”

 

“자네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은 없네. 다만 이 말만 하지. 선택은 자네 몫이야.”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인류가 겪은 전쟁과 패배와 승리 중에는 군대와 상관없는 것도 있어. 그런 것들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할 때 이 점을 명심하게.”

 

“힘들 거야.” 매스터스가 말했다. “여기 남아 있으면.”

“나도 아네.” 스토너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스토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3

 

그해 1918년 여름에 그는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매스터스의 죽음은 인정하기 싫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유럽에서 발생한 최초의 미군 사상자 명단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전에는 죽음을 문학적 사건 또는 불완전한 육체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조용하게 마모되어 가는 과정으로만 생각했다. 전장에서 터져나오는 폭력이나 파열된 목에서 쏟아져나오는 피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처럼 다른 종류의 죽음이 존재하는 까닭, 그리고 그 차이가 지니는 의미가 궁금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의 살아 있는 가슴속에서 언뜻 보았던 씁쓸함이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점점 커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스토너는 처음 시작한 곳에서 다시 출발하게 되었다. 키가 크고, 깡마르고, 구부정한 소년의 모습으로 자신을 지금의 이 길로 이끌어준 강의에 귀를 기울이던 바로 그 강의실에서 키가 크고, 깡마르고, 구부정한 남자의 모습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둘이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해 12월 그날 저녁의 한 시간 반 동안 한 것만큼 그녀가 자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자신과 그녀가 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그런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또한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그녀가 받은 교육의 전제는 그녀가 살다 보면 불쑥 만날지도 모르는 거친 일들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보호를 해주는 사람의 우아하고 세련된 장식품이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런 보호를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생각하는 계급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와 가정에서 그녀가 받은 도덕교육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이었으며, 뭔가를 금지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고, 거의 전적으로 성적인 문제만을 다뤘다. 하지만 성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런 문제를 간접적으로 언급할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받은 교육의 다른 모든 부분에 성적인 문제가 가득 퍼져 있었다는 뜻이다.

 

 

5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불행해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이런 말을 꺼내면, 그녀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받아들여 그가 사랑의 행위를 할 때처럼 침울한 표정으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묘하게 단조로운 울음소리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그는 그녀를 위로하고 달래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서서 듣기만 했다. 얼마 뒤 그는 지금껏 이디스가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6

 

그는 데이브와 그랬던 것처럼 로맥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런 마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에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망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그를 슬프게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두 사람은 비슷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또는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그 사실을 시인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그는 아내가 학생들을 맞으러 나오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그녀가 아프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이렇게 거듭 사과하는 것이 아내의 부재를 설명해주기보다 오히려 강조한다는 사실을 그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고, 자신의 침묵이 설명보다 덜 구차하기를 바랐다.

 

 

7

 

그는 어머니가 오로지 죽음만을 바라고 있으며, 자신이 살아온 곳에서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땅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때보다 조금 더 척박해지고, 소출도 조금 더 인색해진 것 같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교육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책에 적은 내용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어리석음이나 약점이나 무능력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예술의 위엄을 얻은 사람.

 

 

8

 

책상 위의 스탠드 불빛이 아이의 머리카락에 부딪혀 반짝이고, 그 불빛에 작고 진지한 아이의 얼굴 윤곽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지난 1년 동안 아이가 많이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싫지만은 않은 작은 슬픔에 윌리엄은 잠깐 목이 메었다.

 

그녀가 그날 밤 거의 난폭하게 보일 정도로 갑작스레 그의 서재에 들이닥친 일을 되돌아보니 마치 기습공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이디스는 그보다 간접적이고,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전략을 사용했다. 사랑과 염려라는 가면을 쓴 전략이었으므로, 그는 그 앞에서 무기력했다.

 

“이것만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왠지 고요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를 증오하는군. 그렇지 않소, 이디스?”

 

“윌리, 내가 그레이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어요. 그건 알아두세요. 난 그 아이를 사랑해요. 내 딸이니까요.”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그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아이를 사랑했다. 이것이 진실임을 알기 때문에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을 뻔했다

 

 

9

 

“워커 군, 정말 놀라운 사람이군. 자네는 당연히 F학점을 받을 걸세.”

[…]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교수님. 사람이란 신념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군요.”

“게으름과 부정직과 무지 때문에도 고난을 각오해야 하지.

 

 

10

 

“세상에.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그래, 자네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일세. 하지만 어느 것도 진실은 아니야.”

 

 

11

 

이제 그는 예전처럼 학생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와 함께 있는 데에도, 함께 있지 않는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필요했다.

 

생각은 그가 들고 있는 책에서 멀어져 방황했고, 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마치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이 때로 머리에서 싹 비워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의지력이 모든 힘을 잃어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식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찔러 활기를 되찾아줄 뭔가를 갈망했다. 고통이라도 좋았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았다.

 

 

12

 

이제 마흔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말에 담긴 진실을 느낀 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절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절망이 그토록 무거웠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현기증이 날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다시 말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서투르고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손이 서로를 향해 뻗어 나갔고, 두 사람은 어색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두 사람이 함께 품고 있는 이 기묘하고 무서운 것이 도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13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鄕愁)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정숙함을 던져버릴 이유가 없을 때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정숙해 보이는지!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해요. 당신과 함께 있을 때 나는 가끔 내가 세계 최고의 헤픈 여자가 된 것 같아요. 헤프지만 열정적이고 신실한 여자. 그 정도면 정숙해 보이나요?

 

열정에서 시작된 감정이 욕망을 거쳐 깊은 관능으로 자라나 순간마다 계속 새로워졌다.

 

그는 자신이 자기성찰에 약하고 자기기만 또한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 로맥스의 솜씨는 정말 훌륭했네. 자기는 개인적으로 그 아가씨에게 반감이 없다는 거야. 오히려 감탄하는 편이라나. 하지만 자기는 우리 학과와 대학의 평판을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라더군. 우리는 중산층의 도덕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를 한탄하고, 개신교 윤리에 반항하는 사람들에게 학자들의 세계가 피난처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무기력하다는 결론을 내렸지.

 

그동안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음속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바탕으로 몇 번이나 연습한 공연 같았다. 문법적으로 정확한 두 사람의 말 속에 그들이 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완료형에서 시작해서(“그동안 우린 행복했어요, 그렇죠?”) 과거형으로 나아갔다가(“우린 행복했어요.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같아요”) 마침내 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떠나기로 한다면…… 당신은 나랑 함께 가주겠지, 그렇지 않소?”

“그래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겠지, 그렇지 않소?”

“네, 알아요.”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스토너는 자신에게 설명하듯이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우리가 했던 모든 일과 우리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오. 내가 교단에 설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고, 당신은…… 당신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겠지. 우리 둘 다 지금과는 다른 사람, 우리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요.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거야.”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번 일에서, 적어도 우리 자신의 모습은 지킬 수 있었소. 지금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니까.”

[…]

“그저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우리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

[…]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도 세상의 일부인 거요.”

 

그녀는 얼마 전부터 떠날 계획을 미리 짜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스토너는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그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에, 그리고 그녀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담은 마지막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15

 

그해 겨울부터 열세 번째 생일 사이에 그레이스의 체중은 거의 50파운드(약 20킬로그램)가 넘게 늘었다. […] 그녀의 내면에 있던 어떤 것이 느슨하고 말랑말랑하고 절망적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스토너는 아이의 변화를 지켜보며 슬픔을 느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만을 보여주었다. 죄책감이라는 편안한 사치품을 자신에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타고난 본성과 이디스와의 생활이라는 조건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깨달음이 죄책감보다 훨씬 더 슬픔을 부추겼고, 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날짜는 1941년 12월 12일.

결혼식 닷새 전에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 그는 아주 깊고 강렬한 여러 감정들이 그 안에 혼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차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를 강타한 것은 국가적인 비극에 대한 감정이었다. 거기서 느낀 경악과 비통함이 무엇에든 배어 있어서 개인적인 비극이나 불행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16

 

마음 한쪽은 매일 헛되이 스러지는 생명, 냉혹하게 마음과 정신을 강타하는 수많은 파괴와 죽음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다. 이번에도 교수진이 고갈되었고, 강의실에서 젊은 청년들이 사라졌으며, 남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그 얼굴들에서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마음, 모질게 마모되어 사라지는 감정과 애정을 보았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한구석은 그가 움츠리며 피한 그 학살을 향해 강렬히 끌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도 몰랐던 폭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그 일에 참여하기를 갈망했으며, 죽음의 맛과 쓰라린 파괴의 기쁨과 피의 느낌을 원했다. 그는 수치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면서 또한 자신과 이 시대, 그리고 자신 같은 인간을 만들어낸 주변 상황에 쓰디 쓴 실망을 느꼈다.

 

공부를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모습.

 

방금 그녀를 만졌던 것처럼 손이 저릿거렸다. 그 상실감, 그가 너무나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그 상실감이 쏟아져 나와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의지를 넘어 그 흐름에 휩쓸리는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자신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억을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홀리, 이미 오랫동안 자네와 알고 지낸 만큼 자네가 나를 나름대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나는 자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나 내게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 전혀.” […]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세. 그건 한 번도 중요했던 적이 없어. 난 자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물론, 좋은 교수이기도 하고. 하지만 어떤 면에서 자네는 무식한 개자식일세.” […] “자네가 바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퇴직하지 않을 걸세. 이번 학년 말에도, 다음 학년 말에도.”

 

 

 

17

 

마침 그날 오후에 병원에 가서 재미슨이 긴장된 미소를 지으며 ‘치료’라고 부르는 것을 받고 온 참이었다. […] 이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반발하지 않았다. 반발하는 것은 매정한 일이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외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런 치료도 해볼 만했다.

 

“아버지가 가엾어요. 편안한 삶이 아니었잖아요.”

그는 잠시 생각해본 뒤 입을 열었다. “그랬지. 하지만 나도 편안한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떠난 뒤 조급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별로 여행을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여행을 떠나는 순간을 기대하는 사람처럼.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그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새삼 고요한 분위기가 자리를 잡았다. 그 조용한 분위기는 사랑이 시작될 때와 비슷했다. 스토너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도 왜 이런 분위기가 생겨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용서하고, 자신들의 삶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지 생각하는 일에 빠져 있었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무정한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이디스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그녀를 부르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죽음은 이기적이야. 그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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