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보겠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는 2012년 가을호부터 2013년 여름호까지 ‘소라나나나기’라는 제목으로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연재 종료 후 일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고한 끝에 주인공 소라와 나나, 나기의 감정선이 더욱더 깊고 선명해져 행간에서조차 세 인물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작품의 농도가 짙어졌다. 황정은은 앞선 두권의 소설집에서 기발한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해내는 뛰어난 언어 조탁력을 보여주었고 그의 첫 장편이자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인 『백의 그림자』에서 기저에 품은 서정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그 서정의 결을 이어가면서도 잔잔하게 흘러가 폭발적으로 파급되는 황정은식 서정의 마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소라 小蘿

 

내 이름은 소라. 소라의 라는 미나리 라蘿. 본래 열매 라蓏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러 간 할아버지의 실수로 미나리가 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버린 거야.

몸?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

 

언제고 그런 식으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덧붙였다. 너희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

허망하고.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고 애자는 말한다

 

그녀는 세계란 원한으로 가득하며 그런 세계에 사는 일이란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자초해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필멸, 필멸, 필멸일 뿐인 세계에서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애쓸 일도 없고 발버둥을 쳐봤자 고통을 늘릴 뿐인데. 난리 법석을 떨며 살다가도 어느 순간 영문을 모르고 비참하게 죽기나 하면서. 그밖엔 즐거움도 의미도 없이 즐겁다거나 의미있다고 착각하며 서서히 죽어갈 뿐인데. 어느 쪽이든 죽고 나면 그뿐일 뿐인데.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특별히 더 달콤하다.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스럽지 않다.

 

아이란 가졌다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아이는 가지는 것일까. 엄마가 가지는 것일까. 가져도 되는 것일까. 아이를 가졌다,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싫어서 묻지 못하나?

싫어서 묻지 못하는지도 몰라.

싫은가.

싫은지도 몰라.

아기 같은 건 싫다.

싫어.

실은, 싫어.

무서우니까.

모든 게 걱정될 테니까.

나나는 걱정되지 않을까.

모든 게.

어쩌자는 거야, 아기를 가져서.

숨 막혀.

화가 나.

어쩌자는 거야, 하고 화가 나.

어쩌려는 걸까, 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어쩌자는 거야, 하고 화가 나.

 

영혼은 어디에 있니?

어디에 있다고 믿어야 좋으니?

 

옷장에서 끄집어낸 옷가지들이 한무더기, 방으로 들어가는 문턱 부근에 봉분처럼 쌓여 있었다. 껍질만 남아 몇 겹으로 엎어진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광경이었다.

 

빨리, 빨리. 집에 당도하고 보니 애자는 우리가 나갈 때 보았던 것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곁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바지를 적시고 말았다. 오줌이 넓적다리 쪽으로 은근하게 번져갔다. 고요하고 따스했다. 눈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물은 숨길 수 없지만 오줌은 숨길 수 있다. 별다른 소리도 기척도 없어 애자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안도하며, 앉아 있었다.

 

[…] 그 나방을 생각했다. […]

죽었니 살았니.

그것을 향해 그렇게 묻는 순간이 있다.

죽었을까 살았을까.

이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회백색이더라도 선명하고 곱던 빛깔이 미심쩍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며칠이고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 미심쩍다.

 

정말 맛있었지.

특별하게 화려한 반찬도 없었는데.

[…]

새끼를 먹여본 손맛이지.

그런 연륜,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보잘것없을 게 뻔한 것을 보잘것없지는 않도록 길러낸 것.

무엇보다도 나나와 내가 오로지 애자의 세계만 맛보고 자라지는 않도록 해준 것.

그게 그녀의 도시락이었어.

 

엄마가 되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

그러므로 애초에 아기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우산뿐인 세상 같은 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상관없는 세상 같은 것은 상관없어. 그것은 또 어떨까. 상관없는 세상이란 어떨까. 그건 왠지, 좋을까. 그렇게 되면 좋을까

 

이게 나. 나는 간장이 좋지도 싫지도 않으니까. 간장이란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검은 것. 그렇게 여기고 있어. 봐 이 공간에 셋뿐인데 이렇게 다르잖아. 간장을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냐, 하다못해 그런 질문에도 답이 다르잖아. 다 달라. 사소하게도 다르고 결정적일 때도 다르지. 말하자면 나는 간장에 무덤덤한 부족, 소라는 간장을 좋아하는 부족, 나나는 간장을 싫어하는 부족.

 

나기는 이제 간장을 좋아한다.

좋아하나.

좋아한다기보다는 잘 다루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잘 다루게 되는 것과 좋아하게 되는 것은 같을까.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를까.

 

간장을 잘 다루는 나기가 나는 좋다. 간장을 다만 검은 것,이라고 말하던 나기와 마찬가지로 좋다. 마찬가지로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다. 세상엔 그런 게 별로 없으니까. 대단하다고 나는 생각해.

 

조은세탁소, 조은미용실, 조은약국, 조은베이커리.

그러고 보니 우리도 조은,이네요.

그렇죠 조은건설.

[…]

조은,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많은 이유.

글쎄요, 좋고 싶으니까 그렇겠죠.

좋고 싶다?

정말 지금 좋다기보다는.

 

좋은 것은 좋지.

좋은 것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감탄하고 호들갑이지.

좋은 것들이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말 그대로 귀하기 때문이란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감탄하고 칭송하는 거란다.

별로 없어, 좋은 건.

그러니까 그런 걸 기대하며 살아서는 안되는 거야.

기대하고 기대할수록 실망이 늘어나고, 고통스러워질 뿐인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애자의 말과 기척이 바람을 통해 빠져나가기를 빌며 창을 열고 달렸다. 나나도 나기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게 차 속을 훑고 돌아 여기저기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그것에 휘말려 숨을 들이쉬는 것이 간단하지 않았다.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가슴 부근부터, 사라질 것 같다. 무색무취로 이렇게.

세계엔 이런 일뿐, 하고 순식간에 애자의 말에 휩쓸렸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이런 일뿐인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애초부터 세계엔 그런 것뿐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다.

 

산부인과 전문병원의 문을 밀고 로비로 들어섰다. 쾌적하고 서늘하게 관리하는 공기로 충만한 공간이었다. […] 모든 게 편안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나는 불편했다.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생각건대 출산이란, 무엇보다도 비명과 고통과 출혈이었는데 그런 이미지와는 일부러 다른 것을 고르기라도 한 듯 부드럽고 환한 그 공간이, 이제 와 말하자면 조금 불편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으니까.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하다고 무책임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으니까.

 

물감으로 그린 듯한 사촌들과 간장으로 그린 듯한 우리 자매.

 

그러지 마.

[…]

보살피고, 친절하게 굴려고 하고.

친절하면 안돼?

친절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

싫으면서 그렇게 챙겨주는 거, 징그럽고, 싫어.

 

말 그대로야. 내버려둬. 싫으면 내버려둬. 싫으면 싫다고 차라리 말을 하든가. 싫다고 하지 못하겠거든 내버려둬. 거짓말로 친절하게 대하지 마. 보살피려고 하지 마.

 

언니가 그렇게 하니까 나는 굉장히 약해진 것 같고.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외로워져.

 

 

나나 娜娜

 

나나娜娜라고 씁니다. 앞 글자도 뒤 글자도 나娜.

나,라는 글자가 두번이나 반복되어서 나나. 앞으로도 뒤로도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아홉 가운데 여덟의 확률로 애자입니다. 애자답다,라는 것은 소라의 의견이고 애자가 지나치다,라는 것이 나나로서 당사자인 나의 생각입니다. 애자의 함량이 지나치게 높은 이름인 것입니다.

 

임산부,라고 말하자니 어색하네. 임산부의 부는 부婦. 나는 나나일 뿐 아직은 며느리도 아내도 아니라서 어색하게 여겨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나에게 나나라는 이름을 붙여준 애자는 본인의 이름 그대로 사랑으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넘쳐서 사랑뿐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랑뿐이던 애자는 그 사랑을 잃자 껍질만 남은 묘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라고 결심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더 이야기하면 울지도 모르고 나나가 울기 시작하면 소라가 운다. 소라가 울면 나나가 울고 나나가 울어서 소라가 울고 소라가 울어서 나나가 우니까 소라가 운다. 이것은 그냥 아는 것. 한번 작동하면 내내 돌아가는 톱니바퀴의 메커니즘처럼 멈추지 않을 거다. 나나도 이것을 알고 소라도 이것을 알지. 그 때문에 나나는 우는 법이 없고 소라도 우는 법이 없지. 좀처럼 없지. 울어버리다니, 그것은 제일로 당치 않은 일인 것입니다.

 

집으로 모세씨를 불러들여 소라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나나의 세계에서 가장 연한 부분을 모세씨와 만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기 오라버니만이 접근하고 접촉할 수 있던 그 세계를, 금주씨의 죽음과 이미 상당히 죽어버린 애자와 뒤틀림이 담긴 세계를 열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나나의 내면에서 그 부분은 잠잠한 듯 보여도 끊임없이 떨고 진동하는 곳. 가장 민감한 비늘이 돋은 곳. 무엇보다도 나나는 소라를 애자를 나나 본인을, 실제라기보다는 나나 내면의 그들을 모세씨에게 열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 좀처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대로,라고 생각하는 마음과 부숴버리자, 그만 깨버리자고 생각하는 마음과 그밖의 마음이 뒤섞여 최근에 나나의 내면은 꽤 시끄럽습니다.

 

무섭지 않아? 하고 소라가 묻습니다.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 영향을 주고 그 아이가 뭔가로 자라가는 것을 남은 평생 지켜봐야 한다는 거…… 계속 걱정해야 하는 뭔가를 만들어버린다는 거…… 무섭지 않아? 하고 말입니다. 나나는 무섭지. 아직은 실감이고 뭐고 부족하지만, 무서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지만 모르니까 무섭다고 느끼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무섭더라도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어.

 

당시는 중학교로 진학한 소라와 헤어지고 홀로 초등학교에 남게 된 시기로 점심을 먹을 때도 혼자, 하교할 때도 혼자, 소라와 나기 오라버니의 하교 시간은 나나보다 훨씬 늦었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서도 혼자, 자기만의 황폐에 잠긴 애자 곁에서, 단지 혼자였습니다.

묘한 시간이었습니다.

소라와 나나는 둘이 아닌 하나처럼 밀착되어 있었는데 이제 혼자 남겨지자 하나도 아니게 되어버린 듯했습니다. 이때까지 밀착되어 있던 것이 떨어져나가 어정쩡하게 절반인 채로 나나는 혼자였습니다. 혼자서, 왼쪽과 오른쪽 공간의 적막 속을 떠돌며 놀았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으니까 너는 아파. 그런데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

[…]

금붕어를 건드릴 때, 너는 아팠어?

고개를 저었습니다.

같은 거야,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너하고 저것하고, 같은 거야.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억해둬,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야.

 

있지.

애자는 거두절미, 행복하니,라고 묻습니다.

이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기를 가져서 행복하니,라고 다시 묻습니다.

행복하니. 행복하니. 행복하니.

행복하니.

저주처럼 몇번이고 반복되는 질문을 듣습니다.

 

나나는 소라의 귀를 통해 애자의 말을 듣습니다.

있지.  

왜 너희는 행복하니.

왜 너희만 행복해지려고 하니.

 

나는 내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거야말로 나나가 가장 혐오하는 애자와 가장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그 옛날, 나기 오라버니가 나나의 뺨을 때려 가르쳐준 것을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수목원에 가고 싶다는 대답은 대강이었는데.

대강의 대답을 듣고 이렇게 노력하는 서툰 사람.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인데.

가족인데.

가족은 남이 아닌가요?

남이 아니죠.

 

모세씨에게 부부는 그런 것, 하고 생각합니다. 모세씨에게 가족은 그런 것, 남이 아닌 것. 그러면 나나도 모세씨의 가족이 되면 남이 아니게 되는 걸까. 모세씨네 이상한 텔레비전 시청. 그것은 시청이라고 해야 할지 대화라고 해야 할지. 나나도 언젠가는 텔레비전을 향해 말하게 되는 걸까.

 

어쨌든 남이 아닌 사람들. 보통의 가족이란 그런 걸까. 나나와 소라는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걸 모르는 것뿐일까. 하지만……

하지만, 하고 생각합니다.  

애자의 일은 비밀로 하자고 했으면서.

 

그것은 어째서일까. 남도 아니고 가족이라서 배설물을 맡기는 것은 괜찮다고 하면서, 왜 애자는 비밀이 되어야 하는 걸까. 왜 나나는 애자를 비밀로 해야 하는 걸까. 그게 왜 좋은 것이 되는 걸까. 이런 것을 모세씨는 왜 제대로 생각해주지 않는 걸까.

 

모세씨는 나하고 틀림없이 결혼할 생각인가요?

네.

아이가 있으니까?

그게 수순이기도 하고요.

수순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고 되묻는 모세씨에게 당연하지 않아요,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모세씨하고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소라는 뭘 생각해? 지금 뭘 생각해? 실은 나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아? 비난하고 있지 않아? 왜 더 묻지 않아? 왜 제대로 물어주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것을 제대로 묻지 못하는 있는 나나야말로, 연약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약하다니, 교활하게

 

아기는 괜찮아. 이모가 있으니까, 괜찮아.

……싫으면서. 아기 같은 건 싫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그러네 싫어.

그거 봐.

하지만 처음부터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도 미심쩍으니까. 그러니까……

의지해봐,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렇게 덧붙이지만 믿을 수 없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힘도 무엇도 나나보다 약한 사람이 하는 말 같은 건 신뢰할 수 없다고, 따끔따끔하게 올라오는 것을 삼키며 생각합니다.

 

순자와 애자.

[…]

순자의 전심전력보다는 애자의 전심전력이 완전한 것은 아닐까.

남몰래 이렇게 생각하고는 하는 나나는 아무래도, 애자와 가장 닮은 천성을 지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심전력, 그러므로 나나는 그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립고 즐겁고 애틋하고 두렵고 외롭고 미안하고 기쁜 마음이 뒤섞여 뒤죽박죽.

엉망진창입니다.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도 몰라. […]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잊으면 괴물이 되는 거야.

 

 

나기

 

전생을 믿어?

나는 믿지 않아.  

 

전생에 한번은 폭사爆死했다.

믿지 않는데 그렇게 믿고 있어.

 

전생의 흔적을 금생에도 간직하고 있는 나는 끈질긴 사람.

끈질기고 집요한 사람.

끈질기고 집요하게 너를 기다리는 사람.

 

조각난 가면처럼 한쪽 귀와 한쪽 눈꺼풀과 한쪽 눈썹만으로 이루어진 왼쪽 얼굴. […] 그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는 내 눈으로 목격한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은 너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나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너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너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

 

나는 나기.

무쇠로 만든 그릇.

나기의 나는 나鏍, 가마솥이라는 글자.

기基라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세는 단위일 것이다.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 정도 의미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 낯선 얼굴이 전혀 낯설지 않아 그가 싫다. 그가 가엾다. 안쓰럽다. 역시 싫다.

 

나는 이것을 아주 가끔 피운다.

[…]

이것은 너의 냄새.

너의 냄새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 자주 피우면 내 냄새가 되어버리지.

피우는 의미가 사라져.

 

모든 게 장난이었다. 장난이라서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색도 하지 못하고 붕괴에 이르고 마는 장난.

 

있잖아, 하고 나나는 말한다.

이기적인가 나는.

 

내가 무언가를 각오했다는 이유로 아기까지 무언가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러쿵저러쿵, 세계라는 것이 있으니까. 아니 도대체 세계라는 것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잖아. 세계는 어때? 괜찮아? 아기를 낳아도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은 괜찮아? 나를 왜 태어나게 했어, 아기가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지?

[…]

실은 모두들 부지런하게 이런 걸 고민한 결과로 아기를 낳고 살 결심을 하는 거야?

 

나는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몰라. 노동하는 그녀를 안다.

 

남녀 사이에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닌 사랑은 없습니다.

[…]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

 

애자 아주머니에 관한 내 어머니의 생각은 […] 어미로서는 몹쓸 지경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안됐다.

 

나비는 낮에 날고 나방은 밤에 날아. 어느 쪽이 좋아?

낮에도 날고 밤에도 날면?

피곤하지 않을까.

피곤해도 있지 않을까 낮에도 날고 밤에도 나는 것이 세상엔.

있겠지.

 

이름을 붙일까.

붙이자. 나비와 나방이 전부 있는 것으로.

[…]

소라, 나나, 나기가 합체하면, 나비바.

나비바가 되지.

[…]

죽었니 살았니.

살았다.

 

국화에 푹 파묻힌 영정이 보였다. 집요하고 잔혹하게 나를 가해한 녀석이었다. 어느 순간 너는 내게 물었다.

통쾌하냐.

아니.

슬프냐.

아니.

불쌍하냐.

아니.

왜 왔어.

널 보러.

 

거품 섞인 맥주가 단번에 상을 뒤덮고 네 무릎으로 흘러내렸다. […] 야 이거 봐라. 이게 뭔지 아냐. 술이다. 생명이다. 인생이다. 엎어지면 끝. 빌어먹게 엎어지면 끝. 너 이걸 손바닥에 담을 수 있냐. 담을 수 있냐고. 거짓말 마라 거짓말…… 잠깐 담을 수는 있어도 끝까지 담을 수는 없다. 잠깐 고였다가 사라지잖아. 이렇게 다 흘러서 어디로 가냐. 증발이지. 증발되고 나면 흔적이 남지. 자국이다. 그건 더럽지. 퀴퀴하고 시큼하게 얼룩이고 더럽지. 그런데 이것은 인간하고 어떻게 다른가. 어떻게 다르냐. 야, 니가 대답해봐라. 모두 이렇게 죽는데?

 

모두 증발이다. 증발. 증발. 그러고 나면 뭐가 남지. 멸종이다. 나는 증발되고 멸종이다. 너도 마찬가지.

 

외롭다고? 너 외롭다고? […] 외롭지. 외롭지 하나뿐이니까 하나뿐! […] 하나뿐이야. 하나뿐이라는 이름의 부족. 하나뿐으로 사라질 뿐이다. 그뿐이다. 너도 나도 결국은 이렇게 하나뿐이라는 부족으로 멸종하고 엎어지는 존나……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네 손등이 어떻게 구부러져 있었는지. 손바닥의 어느 부분이 오목하고 볼록했는지. 검지의 두번째 마디가 어느 방향으로 휘어 있었는지. 그것을 전부 기억하고 있고 또 그것을 얼마나 내 입에 넣고 싶었는지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감촉에 관한 기억이고 열망이므로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더라도 맨 마지막에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에야 사라질 것이다.

 

소라가 취했다. 나나는 마시지 않았지만, 취했다. 나는 소라가 남긴 것을 마셨을 뿐인데 취했다.

 

비통하게 아팠지만 선명했다. 차라리 분명하고 선명했다. […] 나는 웃었다. 비통하게 아팠지만 선명했으니까 차라리. 나는 그것을 네게 받았다. 이렇게 분명한 것을 받았다. 이것은 막연한 기다림보다는 낫다.

 

때때로 나는 네가 죽는 꿈을 꾼다.

[…]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렵다.

 

그러나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너의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엔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죽었다는 소식을 받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기다린다.

어딘가에 너는 있을 것이다.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세개의 혜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

아기가 태어났는데 세상이 그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모처럼 낳았고 모처럼 태어났는데 그냥, 세계가 끝나버린다면.

[…]

왜 끝난다고 생각해.

걱정되니까.

왜 그런 걸 걱정해.

글쎄 그런 게 걱정돼 요즘은.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어.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나나 娜娜

 

꿈에 본 달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몇번째 태몽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줍은 듯 일렁이던 달을 생각하자 묘하게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렇구나, 생각합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은 이런 말이었구나. 여러개의 매듭이 묶이는 느낌. 가슴이 묶이고 마는 느낌.

그나저나 정말 큰 달이었지.

언제고 정말 달이 그 정도로 다가온다면 지구는 망하겠지.

달이야 아름답겠지만 나나도 지구도 역시, 망하겠지.

언젠가 나나는 세상이 끝나는 날에 그런 달을 보게 되는 광경을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달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끝이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엔 똑같은 것을 두고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 소중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을 늘려버린 바람에, 나나는 예전보다 약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Posted by 밑줄긋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