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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아우구스투스 | 존 윌리엄스

2020. 7. 18.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

존 윌리엄스 저/조영학

『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의 마지막 작품 『아우구스투스』. 스스로 폐기한 데뷔작을 제외하고 단 세 편의 장편소설만을 발표했던 작가의 생전 가장 주목받았던 작품은 로마의 가장 위대하고 격동적인 시기를 다루었던 세 번째 작품이자 1973년 전미도서 상 수상작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였다. 

이 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에서 시작해 아우구스투스의 최후까지 긴 시기를 압축적인 서사를 통해 접근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조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어머니인 아티아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하여 모든 내용이 수많은 인물들이 서로에게 쓰는 편지, 보고서, 회고록 때로는 공문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진중하고 솔직한 편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보고서, 열정적인 일기, 회한과 비통함의 회고록까지 『아우구스투스』가 갖춘 다채로운 형식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적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독특한 요소이다.

 

 

프롤로그

 

서한(서기전 45)

발신 : 율리우스 카이사르

수신 : 아티아

 

네 아들 가이우스는 지금도 내 오른팔이다만, 안전하게 권좌까지 물려받으려면 내 힘까지 배워야 한다.

 

 

BOOK

 

하나

 

서한(서기전 13)

발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수신 : 티투스 리비우스

 

우리는 젊을 때 더 현명한지도 모르겠네. 철학자들이야 발끈하겠지만 맹세할 수 있어. 우리는 그 순간부터 계속 친하게 지냈네. 멍청하게 웃던 그 순간이야말로, 그 후 어떤 사건보다 더 강한 유대였어. 승리와 패배, 충성과 배신, 슬픔과 기쁨, 그 무엇보다도. 하지만 어느덧 젊음은 떠나고 친구들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군.

 

가능하다면, 청년 4인방을(이제는 내게도 낯선 이름이네만) 이렇게 그려주게. 자신과 미래에 대해 무지하고, 이제부터 어떤 세상을 헤쳐 나가게 될지도 전혀 모르는 풋내기들.

 

서한(서기전 44)

발신 :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

수신 :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폴로니아

 

옛날을 생각하니 네게서 어렸을 때의 내 모습이 보이더구나. 그래서 네 젊음을 조금 받아들이고 네게는 대신 내 나이를 나누어주었다. 비로소 함께라면 어떤 일이든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았지.

 

특별한 정보라고 여겼는지, 안토니우스가 야심이 많다는 얘기를 하더구나. 솔직히, 베스타 신녀들이 정숙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이기는 했다. 나는 그 친구한테 고맙다 인사를 챙기고 충성의 본질이 어쩌고 하는 상투적인 얘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보나마나 놈은 안토니우스한테 달려가 내가 가장 가까운 친구들까지 의심한다며 개소리를 늘어놓았겠지.

 

도대체 그놈의 거짓말들은 어디에서 생명력을 빨아먹고 진실보다 강하게 자라는 걸까? 공화국의 이름으로 살인, 절도, 약탈을 하고는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부르면 그만이니. 키케로는 로마가 타락해 오로지 돈만 따른다며 세태를 개탄하지만, 그도 여러 번 백만장자 행세를 했지. 노예 백 명을 이 별장 저 별장으로 옮기기도 하고. 집정관은 평화와 안정을 외치지만, 군대를 키워서는 자기 이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동료를 살해하지. 원로원은 자유를 이야기하면서도 내게 이런저런 권력을 떠맡기는구나. 그럼 난 원치도 않는 권력을 손에 쥐고 로마가 버틸 때까지 휘둘러야 한단다. 거짓말에는 도대체 답이 없는 걸까?

세상을 정복했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구나. 사람들에게 자유를 보여주면 마치 질병이라도 만난 듯 달아나버린다. 믿을 만한 자들을 외면하고 언제든 배신할 인간들을 사랑하며,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 국가를 이끌고 있구나.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 일기를 위한 메모, 아폴로니아(서기전 44, 3월)

 

“자네가 그 천박한 외관에 빠져 있는 동안 난 시 한 수를 곱씹고 있었지. 활동적 삶과 명상적 삶을 대비하는 내용인데, 전자의 지혜는 이미 알고, 후자의 어리석음은 늘 지켜보던 바였어.”

옥타비우스가 자못 심각하게 끼어든다.

“종조부 말씀이, 시를 읽고 시를 사랑하고 시를 써먹되… 절대 믿지는 말라고 하셨지.”

 

“저들은 우리보다 내용을 몰라. 게다가 오로지 자기 앞날들만 걱정하지. 어제는….” 그가 잠시 말을 끊고 어둠 속을 노려본다. “어제는 친구들이었지만 이제는 믿을 수가 없군.” 그리고 다시 입을 다물고 상체를 숙이더니 손을 내 어깨에 댄다. “이 문제는 여기 세 사람하고만 상의하겠어. 진짜 친구들하고만.”

대답은 마에케나스가 한다. 목소리가 무겁다. 더 이상 여자 목소리 흉내를 내지도 않는다.

“자네를 사랑하지만 우리도 믿지 말게. 이 순간부터는 어쩔 수 없을 경우에만 우리를 믿게.”

 

“너무 많이 조심하나 지나치게 성급하나 황천길로 가기는 마찬가지라고.”

 

“지금껏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얘기했지만, 어떤 행동이든 그 목적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소. 친구여, 그대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이오?”

[…]

“그대들 모두에게 맹세하겠소. 이곳에서 살아남을 운명이라면, 그게 누구든 종조부님의 살인자들을 찾아 복수하고 말겠소.”

마에케나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우리의 첫 목표로 그 운명을 이룹시다. 맹세는 지켜야 하니까. 일단 살아야 하니까 신중하게 움직여야겠지만… 어쨌든 움직이기는 해야 하오.”

 

“세상이 혼란에 휩싸여 있으니 기회일 수도 있고. 어둠 속에서 겁 많은 적을 공격하면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벼랑 너머로 몸을 던지거나, 아니면 원치 않는 결과를 향해 돌진하는 격이 될 수도 있소.”

 

“이제 여러분들도 선택을 해야겠소. 누구든 나와 함께 돌아가면 운명을 나한테 맡기는 거요. 다른 방법은 없고 돌아올 수도 없소. 물론 내 자신의 운 말고 여러분한테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해요.”

 

저 앞에 놓인 길 끝이 죽음 아니면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까? 두 개의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고 또 헤집는다. 마침내 두 단어의 의미가 하나가 된다.

 

 

서한(서기전 44, 4월)

발신 : 아티아,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수신 : 옥타비우스

 

너를 아들이자 상속자로 지목하셨더구나. […] 그곳은 바로 로마 세계야. 피아의 구분이 불가능한 곳. 가치보다 특권을 존중하고 원칙이 이기심에 굴복하는 곳.

부디 이 어미의 말을 들으렴. 유서를 포기해다오. […] 카이사르가 그랬듯, 저 선동가들의 사랑이야 받겠지만, 운명은 결국 그를 보호하지 못했단다.

 

서한(서기전 44)

발신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수신 :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안토니우스를 감내하느니 차라리 카이사르의 죽음을 후회하겠어.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 일기를 위한 메모(서기전 44)

 

옥타비우스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당연히 심각하겠지? 하지만 잘 봐. 그자는 우리를 두려워했어. 우리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런데 그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더군. 전혀 모르고 있었어. 그래서 더 재미있어.”

 

피아를 확신할 수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자를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외통수에 몰릴 것이다. 문제는? 우리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움직이게 만들지?

 

“그 양반을 믿지 못하겠어. 이유는, 그도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 양반한테 붙으면 우리도 그의 행보에 깊이 말려들고 말 텐데, 안토니우스도 우리도 그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제대로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면 그 양반을 우리한테 오게 만들어야 해.”

 

“잊지 말아. 연설은 간단해야 해. 시는 안 돼. 결국 자네의 터무니없이 복잡한 산문을 풀어내야 하겠지만 말이야.”

 

옥타비우스가 틀렸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우리는 물론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서한(서기전 13)

발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수신 : 티투스 리비우스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시를 쓰고 싶은 강한 충동에 떠밀리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감정이 단호한 의지로 굳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시를 쓸 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서한(서기전 44, 9월)

발신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수신 : 유니우스 브루투스

 

지난 몇 개월간의 사건들 때문에 한숨만 쉬고 있소. 옥타비우스와 안토니우스가 싸운다. 내 바람이오. 불화는 가라앉고 둘은 툭 하면 붙어 다닌다. 두려운 일이지. 다시 다투고 반역의 소문이 돌아다닌다. 당혹스러울 수밖에. 그런데 다시 불화를 극복해? 이보다 최악이 어디 있겠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꼬락서니인지.

 

 

서한(서기전 13)

발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수신 : 티투스 리비우스

 

내가 알기로는 마케도니아 4군단과 마르티우스 군단이었는데, 그가 장교와 병사 삼백 명을 참수했어. […] 그와 운명을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 안토니우스의 행동이 잔인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네. 병사들이야 가혹한 행위와 죽음에 익숙해 있으니까. 그보다는 그렇게 성급하고 무모한 자에게 목숨을 맡길 수 없었던 게지.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 일기를 위한 메모(서기전 44, 12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조하다. 불안해서 미치겠다. 처음으로 우리의 길이 옳은지 자신이 없어졌다. 성공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난제를 드러내고 승리는 예외 없이 패배의 가능성을 키워준다.

옥타비우스는 변했다. 아폴로니아의 친구는 더 이상 없다. […] 내가 아는 한 로마에 돌아온 후 그가 여자를 품어본 적은 없다.

‘내가 아는 한’이라. 무심코 그렇게 썼다. 한때는 서로에 대해 뭐든지 알았건만 지금 그는 꼭꼭 닫힌 채 비밀 속에 숨어 지낸다. […] 양부를 향한 슬픔이 그렇게 크기 때문일까? 그 슬픔이 굳어 야심이 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라도 있을까? 차가운 슬픔이 그를 휘감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누나.

 

키케로에 대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평. “키케로는 구제불능의 모사꾼이다. 친구들한테 글로 쓰지는 않아도 노예한테는 떠들어댄다.”

 

서한(서기전 13)

발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수신 : 티투스 리비우스

 

키케로의 말장난은 잘 들었네. […] 그의 행동은 열정과 허영, 맹신에서 비롯했겠네만, 우리는 진작부터 그런 식의 허영을 부릴 여유가 없었지. 행동해야 할 때 행동했지만 그 기반은 예외 없이 계산과 정책, 필요였으니까.

 

내 자신이 매우 냉소적이었기에 야심은 어떤 식으로든 추하고 천하다고 여겼다네.

 

지금도 자네가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문제라면 바로 이 점일 걸세. 구 공화국을 지탱하는 이상이 구 공화국의 실상과 하등 관계가 없으며, 허황된 언어로 가혹행위를 감추고, 전통과 질서의 명목으로 부패와 혼란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하며, 자유에의 호소가 심지어 착취와 억압, 허가된 살상의 현실에 호소하는 사람들의 정신까지 닫아버렸으니 왜 아니겠는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배웠네. 그러니 악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기만하든 흔들리지 않아야겠지.

 

생존. 생존은 동맹에 달려 있고 동맹은 우리 힘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결정된다네.

 

서한(서기전 43, 8월)

발신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수신 :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과거에 귀하를 오해했다면 모두 애국심 때문이었다고 이해해주시오. 애국심은 종종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경향을 외면하고 우리 모두에게 가혹한 선택을 강요하는구려.

 

서한(서기전 12)

발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수신 : 티투스 리비우스

 

한 번은 안토니우스가 목록에 더 올릴 이름이 없는지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이랬네.

“난 아직 젊습니다. 아직 적이 많을 나이는 못 되죠.”

 

친애하는 리비우스,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추방 얘기라면 지금껏 말도 많고 탈도 많았어. 잘했다는 평도 있고 저주를 받기도 했지. […] 병사들 일부가 혼란을 틈타 은원을 해결하고 돈을 챙기기도 했지만 그 정도야 예상 가능한 일이었지. 사랑이든, 전쟁이든, 열정은 늘 지나친 법이니까.

하지만 태평성대에 찬사나 비난의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늘 당혹스럽기만 하다네. 어느 쪽이든 다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 판단하는 사람들도 옳고 그름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단지 필요하다는 이유로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데 찬성하거나 저항하기 위해서였다네. 그렇지만 필요란 이미 일어난 일을 뜻하네. 과거에 불과하다는 얘기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야겠지만 물론 상대방이 인정해야 했겠지.

옥타비우스가 살비디에누스 루푸스의 이름을 꺼냈네.

다들 그렇겠지만 신기하게도 통찰력이 발휘될 때가 있을 걸세. 그러니까 논리와 인과관계를 넘어, 말 한 마디, 아니면 눈 한 번 끔벅하는 순간에 뭔가 예감이 오는 거야. 글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내가 종교인은 아니네만 이따금 신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믿고 싶을 때가 있네. 다만 경계를 완전히 풀어야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겠지.

 

“옥타비우스한테 전해요. 살아서 친구로 남을 수 없다면 죽어서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서한(서기전 43)

발신 : 아마시아의 스트라보

수신 :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 로마

 

지도만 보아서는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채로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여행은 새로운 차원의 교육이나 굳이 스승이 필요하지도 않다네.

 

나는 종종 의혹에 빠지고 만다네. (그저 기분이겠지?) 우리가 혹시 그리스 역사와 언어의 자긍심에 빠져 너무 느긋한 것은 아닐까? 너무 쉽게 서로마의 ‘야만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정작 이들은 우리 주인으로 자처하는데? (이해하게나, 점점 더 철학자가 아니라 속세인이 되어가는 모양일세.) 우리 속령들도 물론 나름대로 특징과 문화가 있네만, 이곳 로마에는 생명력 같은 게 있다네. 그래, 일 년 전만 해도 전혀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았겠지. 그때는 로마 이름만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로마를 직접 보았네. 그리고 이 순간 솔직히 모르겠군. 동로마나 내 고향 폰투스로 돌아가야 할까 잠깐 고민도 해보네.

 

로마 사람들이 철학을 무시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네. 이들의 세계는 매우 직접적이라네. 원인과 결과, 소문과 사실, 혜택과 박탈이 한데 어우러져 있지. 지식과 진리의 추구에 평생을 바쳤네만, 솔직히 철학 경시 풍조를 야기한 원인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네. 이들은 학문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진리는 효용으로만 평가하려 한다네. 심지어 신들조차 나라에 이바지해야 하지. 그 반대가 아니라.

 

옥타비우스라는 인물에 대해 물었어.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나중에 뭐든 되겠지. 그야 저 아이의 성격과 운명의 장난이 결정할 일이니.”

 

서한(서기전 42)

발신 : 마르쿠스 율리우스 브루투스, 스미르나

수신 :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지금의 지위가 얼마나 위중한지 자네가 제대로 이해할 것 같지는 않구먼. 내게 애정이 남아 있지도 않겠지. 나 또한 바보가 아니니 자네를 걱정하는 척 위선을 부릴 생각은 없네. 이 편지를 쓰는 이유도 자네가 아니라 이 나라를 걱정해서일세. 안토니우스는 미친놈이니 편지를 받을 수 없고 레피두스는 멍청이라 편지를 이해조차 못할 터이니. 자네는 미치지도 않고 바보도 아니니,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주리라 믿겠네.

 

그러니 우리 추방과 암살을 잊게나. 자네가 카이사르의 죽음을 용서할 수 있다면 나도 키케로의 죽음을 용서하겠네. 우리가 친구는 될 수 없네. 둘 다 원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로마와 친구가 될 수는 있을 걸세.

 

다섯

 

서한(서기전 39)

발신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테네

수신 :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의 집권은 나뿐 아니라 자네한테도 쓸모가 있다네. […] 강한 군주가 현재의 위치에 안주하려 하는 편이, 허약한 군주가 불안해할 때보다 훨씬 다루기 용이하다네.

 

서한(서기전 13)

발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수신 : 티투스 리비우스

 

오래전부터 옛 정적의 죽음이 기이하게도 옛 친구의 죽음처럼 느껴지네.

 

자신의 열네 개 군단뿐 아니라 폼페이우스의 군단들까지 더해 도시를 약탈하기 시작했지. 항복을 했으니 당연히 보호해주어야 하거늘.

친애하는 리비우스, 자네도 이해하겠지만 전쟁이 아름다울 수는 없네.

 

“죽음보다 더 심한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옥타비우스가 미소를 지었다더군.

“어쩌면, 어쩌면 덕분에 행복해질 수도 있어.”

키르케이에서 망명 생활은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권력을 주물렀던 이들이 권력은 빼앗기고 목숨을 부지했어…. 그런 삶은 도대체 어떨까?

 

여섯

 

서한(서기전 36)

발신 :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 안티오케이아와 알렉산드리아

수신 : 아마시아의 스트라보

 

안부를 전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아버님도 기뻐하셨으리라 믿소. 이제 연세는 많고 힘은 부치실 게요. 그 시기가 되면 누구나 과거를 돌아보고 가치를 가늠한다더이다. 이제는 자기 확신이 필요하실 나이라는 뜻이겠지요.

 

서한(서기전 34, 겨울)

발신 : 클레오파트라, 알렉산드리아

수신 : 아르쿠스 안토니우스

 

파르티아에서 승리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옥타비우스의 농간이라네요. 파르티아뿐 아니라 로마에도 분명 야만인들은 있어요. 당신의 충정과 선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자들이죠. 그런 자들이 파르티아의 화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답니다. 동로마는 약탈뿐이나 서로마엔 세상이 있어요. 가장 위대한 자만이 꿈꿀 수 있는 권력도 있죠.

 

서한(서기전 12)

발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수신 : 티투스 리비우스

 

오해이기를 바라네만, 자네한테서 도덕주의자의 냄새가 난다네. 내가 보기엔 도덕주의자야말로 가장 쓸모없고 경멸스러운 존재들이야. 쓸모없는 이유는 지식을 얻기보다 판단을 내리는 데 에너지를 쏟기 때문이지. 단순히 판단은 쉽고 지식은 어렵기 때문에 말일세. 경멸스러운 까닭은 그들의 판단은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무지와 오만의 힘으로 세상에 강요하려 하기 때문이라네. 부디 간언하건대, 도덕주의자는 되지 말게나. 기필코 예술과 정신을 망치고 말걸세. 더군다나 아무리 우리 우정이 깊다한들 그 부담을 어찌 감당하려는가?

 

이탈리아는 두 세대에 걸쳐 내전으로 심한 몸살을 앓았네. 강하고 자랑스러운 시민의 근대사는 곧 패배의 역사였지. 내전에서는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으니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패한 후 평화가 가능할 줄 알았네. 그렇게 압도적 승리가, 오히려 우리 정부의 안정은 물론 시민들의 영혼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치명적인 패배라면 흔들리지 않고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네. 여전히 미래의 가능성과 희망이 남아 있으니까. 그런데 그 희망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진 걸세.

 

청원서(서기전 32)

청원자 : 퀸투스 아피우스, 백인대장, 에페수스

접수 : 무나티우스 플랑쿠스,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시아 군단 사령관

 

그럼 내 서약은 어디로 갑니까? 원로원이 로마 시민을 대변한다면, 그 원로원은 어디에 있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를 위해 죽기는 할 겁니다. 내 의무니까요. 병사는 정치를 생각해서도 안 되고 증오하거나 사랑해서도 아니 되니까요. 병사는 의무대로 서약만 지키면 되겠죠.

 

서한(서기전 12)

발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수신 : 티투스 리비우스

 

카이사리온 문제. (1) 그래, 그때 기껏 열일곱 살이었지. (2) 맞네,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했지. (3) 그래, 내 판단에는 분명 율리우스의 아들이었어. (4) 아니, 그를 죽인 이유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야심 때문이었네. 그것만은 분명했어. 옥타비우스한테 나이가 어리다고 얘기했지만, 옥타비우스는 자신도 열일곱 살 때 야심이 있었다고 상기시켜주더군.

 

 

BOOK

 

하나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아래층 부엌에서 어머니가 하인한테 소리친다. […] 귀는 뚫렸으되 우리 라틴어를 알아듣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면 감정이라도 전달이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정신을 차리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리라. […] 나름의 질서로 주변을 통제하며 다녀도 결코 만족하는 법은 없다. 그래봐야 단 한 사람한테만 적용하는 원칙이건만 세상이 원칙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며 원통해 하기도 한다.

 

내가 남자로 태어나고 황제이자 신의 딸이 아니었던들 학자가 되고도 남았다고.

…하지만 오랜 습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지금도 이 일기 첫 구절을 쓰면서, 그 누구보다 괴팍한 독자, 나 자신만 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토록 머뭇머뭇 적절한 화제를 찾고 그 위에 논지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가

 

어제,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로마에서 편지 한 장을 받을 수 있었다. 두 아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죽었다. […] 이제는 분명해졌다. 이제 완전히 슬픔이 끝난 것이다.

 

서한(서기전 39)

발신 : 루키우스 바리우스 루푸스

수신 :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우스만큼이나 둘의 결혼 생활을 싫어한다네. 아이를 낳자마자 이혼하리라는 사실도 전혀 비밀이 아니야. […] 신들께 가까울수록 신의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우리야 차라리 다행일세, 베르길리우스, 자손을 낳기 위해 결혼하는 대신 영혼의 아이들을 만들어 미래에 아름답게 울려 퍼지게 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우리 아이들은 죽지도 변하지도 않아.

 

신들은 지혜롭게 우리 모두에게 우리 삶을 들려줍니다. 다만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들립니다.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마침내 그 상황을 이해할 나이가 되었을 땐 이미 아버지는 세상의 지도자이자 신이 되었다. 세상은 오래전부터 신을 맹신한다. 신의 행동이란 인간들에게 아무리 이상하게 보여도 자신에게만은 지극히 당연하며, 신을 숭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불가피하기까지 한 것이다.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책이라고 해봐야 사실 로마에서 가져오도록 허락받은 종류들뿐이다. 이 화려한 서재는 내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사치이나, 그 어느 것보다 이 망명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몇 년 전에 다시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행여 고독의 징벌에 처하지 않았던들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세상이 나를 벌하려 들면, 오히려 기이한 방식으로 보상이 되지 않나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도 그때는 행복했다.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으리라. 하지만 삼 년도 되지 않아 그 생활은 끝나고 난 여자가 될 준비를 해야 했다.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세상이건만 그 세상에서 추방을 당한 격이었다.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시인들 말이 맞는다면, 젊음은 피가 뜨겁게 들끓는 나날이다. 사랑하는 시간이자 열정의 순간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혜로 냉수목욕을 하면 젊음의 열병이 치유된다 했던가? 다 개소리다. 인생이 종국에 달해 더 이상 사랑을 잡을 수 없을 때까지 난 사랑이 뭔지 알지 못했다. 젊음은 무지하고 열정은 모호할 뿐이다.

 

서한(서기전 22)

발신 : 옥타비아, 벨레트리

수신 :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하지만 그 끔찍한 저녁, 베르길리우스가 마르켈루스의 시를 읽어주었을 때 그 기분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갑자기, 생전 처음으로 동생이 살아야 하는 세상과 내가 오랫동안 보지도 못한 채 살아온 세상을 깨달았어요. 초라하고 미미하지만, 사람이 사는 방법과 세상은 많고도 많답니다…. 하지만 저 무관심의 신들한테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성정이 차가운 덕에 온정까지도 완벽하게 연기해낼 수 있었다.

 

“결혼 얘기가 부담스러울 만큼 슬프지는 않지?”

나는 아버지 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의무를 다할 거예요.”

리비아는 그 대답을 기대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결혼은 그런 거야….

 

서한(서기전 21)

발신 :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수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아레조

 

예의 비방을 쓴 자는, 정말 장군 추측대로 티마게네스였더군요. […] 주변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자기 시라 주장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밀로 하려 든 모양이오. 이름도 얻고 익명성의 유희도 즐기고 싶은 모양인데 그런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소이까?

 

서한(서기전 20)

발신 : 테렌티아

수신 :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아시아

 

당신의 위대함을 거부하고 싶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은 늘 떠나고 낯설고 역겨운 고장에 갇혀 지내니까요. 나는 붙잡지 못하는데 그 나라는 놓아주지 않겠죠?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치기일 뿐이다. 언젠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하오나 그 지혜마저 당신 몸과 함께 내게서 달아나고 그저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렇게 치기만 부리네요.

 

당신을 따라가면 추문이 인다고 하셨죠? 하지만 상식이 있는데 추문이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당신 적들은 수군대고 친구들은 입을 다물 테죠. 우리 둘 다 알지 않나요? 관습이야 범인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든 관습을 초월해요.

 

내가 불행해지니 기분이 좋으신가요? 그래요, 당신이라도 기쁘면 다행이겠군요. 연인들은 늘 잔인하니까. 당신이 나만큼 불행하다면 나도 행복해질 것 같아요. 부디 불행하다고 말해줘요. 그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테니까.

 

서한(서기전 19)

발신 :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수신 :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에케나스, 아레조

 

우리는 생각보다 왜소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내 마음도 자꾸 사소한 일을 바라보는군요.

 

서한(서기전 19)

발신 :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

수신 : 아마시아의 스트라보

 

최근에는 결혼이 결합보다는 유기(遺棄)의 의미로 알려질 정도였죠.

 

로마는 들썩여도 정작 황제 자신은 느긋하게 산책을 즐긴다오. 마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 같구려. 아, 언제나 그렇지만 실제로는 다 알고 있답니다. 그의 또 다른 힘이죠.

 

하나 더. 옥타비우스는 철학자답게, 범인들의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다오. 그리고 그 반대로 농부들만큼이나 미신에 아주 약합니다. 사제들의 점괘를 이용해 상황을 자신한테 유리하게 만들고, 그 시도가 먹혀들 때마다 점괘를 맹신하죠. 토속 신의 소위 ‘초월적 거드름’은 농담처럼 비웃으면서 오로지 신 하나만 만들어내는 게으른 인종에는 코웃음을 친답니다. 한 번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신이야 많을수록 좋지. 사람들처럼 서로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아니, 당신네 유대인의 그 이상한 유일신이 우리 로마인들한테 먹힐 것 같지는 않아.” 언젠가 전조와 꿈을 맹신한다며 내가 나무라자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꿈을 믿은 덕에 목숨을 구한 적이 여러 번이야. 그러다가 목숨을 잃으면 그때부터는 절대 믿지 않겠네.”

 

“남자 얘기. 너무도 어리석고 오만해서 자기 칼로 제 목숨을 찌른 아작스라는 인물이었네.”

“그 글도… 없어졌습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창피했거든. 그의 목숨을 재차 빼앗은 셈이지…. 지우개로. 별로 좋은 글이 못됐어. 베르길리우스도 형편없다고 확인해주었고.”

 

서한(서기전 17)

발신 :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수신 :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무엇보다 이 나라의 생존을 위해 폐하께서 얼마나 많은 행복을 내려놓으셨는지, 폐하께 맡겨진 권력을 얼마나 원망하시는지 역시 잘 압니다. 오로지 권력을 증오하는 자만이 권력을 잘 쓸 수 있을 겁니다.

 

간통법은 애초의 의도와 달리 훨씬 더 타락한 용도로 이용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법률로도 영혼을 정화하지 못하며 미덕의 열망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그건 시인이나 철학자의 영역입니다. 그들이 설득할 수 있는 까닭은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권력을(말씀드렸듯, 과거에는 실로 현명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인간 본성의 열정에 반해 휘두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열정이 질서를 해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무기력한 세계에서 기다림은 기이하기 짝이 없다. 그 무엇도 의미가 되지 못하는 곳. 내가 떠나온 세상은, 만사가 권력이라 뭐든지 의미 있었다. 심지어 권력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 사랑의 끝은 자체의 쾌락이 아니라 권력에서 비롯한 무수한 쾌락이었다.

 

권력은 공허하다. 철학자들의 말이다. 하지만 환관이 여자를 모르듯 그들 역시 권력을 모른다. 권력을 봐도 별로 감흥이 없는 것도 그래서다. 난 평생 아버지가 권력의 맛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권력을 수단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마르쿠스 아그리파와 행복하게 살았던 이유도 권력 때문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나를 비난한 적이 있다. 당신 친구를 대할 때 여자답지 않고 오만했다는 이유였다. 아버지가 황제임을 잊을지 몰라도, 내가 황제의 딸이라는 사실만큼은 절대 잊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왜곡된 형태로 한동안 로마를 떠돌았다.

 

나는 황제의 딸이었다. 아버지의 친구 마르쿠스 아그리파의 아내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황제의 딸이었다. 때문에 로마에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나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마음 한구석으로 그 의무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런 보상이 없는 의무였기에….

 

남자는 권력의 보상이자 양식으로서 자부심을 드러내나, 여자는 내면에 집착과 기쁨을 감추고 가면 속에 갈무리해야 한다.

 

 

서한(서기전 13)

발신 :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

수신 :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 아시시

 

“친애하는 오비디우스, 자꾸 그렇게 당신이 시만 야하고 삶은 정숙하다고 주장하시면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친애하는 율리아, 그럼 그 반대로 주장해보겠습니다. 제 삶은 음탕하나 제 시는 정숙하답니다.”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시민들은 파티의 성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손님들이 길들인 코끼리를 타고 온다거나, 동로마 음악가와 무용수들을 수천 명씩 불렀다는 소문도 있었다. 공상은 기대를 먹고 자라고 기대는 다시 공상의 양분이 되었다.

 

서한(서기전 12)

발신 : 리비아, 판노니아

수신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권력을 맡길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일 뿐, 너를 후계자로 만들 생각도 전혀 없단다. 그래, 다 사실이다. 네 말대로 넌 이용당하고 있다.

상관없다.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면 미래도 없다. 그렇게 되면 너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겠다는 이 어미의 꿈도 물거품이 되겠지. 너는 미미한 존재로 남아 사람들의 천대와 모멸을 견뎌야 할 테고.

[…]

우리 미래가 우리 자신보다 중요한 법이니라.

 

다섯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아버지, 과연 그럴 가치가 있었나요? 아버지의 권위, 아버지가 구한 로마, 아버지가 세운 로마. 정말 이 모두를 희생할 가치가 있었던가요?”

아버지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고 믿으련다. 우리 둘 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어.”

 

서한(서기전 10)

발신 :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

수신 :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

 

새 남편은 세력가인 반면에 누구보다 음험하고 불쾌한 인물이기 때문이죠. 자신이 행복을 찾지도 않지만 타인이 행복하면 가만있지 못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자랑스럽고 위대하다는 로마 제국이 바로 저 ‘낡은 가치들’, 이른바 계급, 특권, 명예, 의무, 신성 따위의 낡은 가치들에서 비롯했다는군요.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개념들이야말로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말살한다는 생각만 강해집니다.

 

서한(서기전 7)

발신 :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

수신 : 아마시아의 스트라보

 

내 친구 옥타비우스 카이사르에게서도 떠나야 하는군요.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자신이 로마니까요. 그 사실 자체가 그의 비극일 수도.

 

마에케나스가 죽고 그다음 주 황제를 만났습니다.

황제는 맑고 파란 눈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보더군요. 주름진 얼굴에 비해 눈은 놀랍도록 젊었습니다. 그가 가볍게 미소를 띠었죠.

“아, 우리 희극도 다 끝나가네. 그런데 이 희극이 너무 슬프군그래.”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었을 때 생각이 나는군. 마르쿠스 아그리파도 그때는 젊었네. 그때만 해도 우린 죽을 때까지 친구로 지낼 줄 알았네. 아그리파, 마에케나스, 나,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디에누스도 죽었지만 아주 오래전 일이야. 그래, 어쩌면 우리 모두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젊었을 때 이미.”

 

옥타비우스 카이사르가 죽으면 로마는 절대 버티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죽은 이상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역시 오래 못 갑니다.

 

여섯

 

서한(서기전 4)

발신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수신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로도스

 

전쟁이 나면 황제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똘똘 뭉치게 마련이죠. 전쟁만큼 결속력이 강한 전략도 없으니까요.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좋은 남자였던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죽은 이후였다. 그때부터 율리아, 아우구스투스 황제, 옥타비우스 카이사르의 딸은 내면의 힘을 깨닫고 쾌락을 찾아 누렸다. 그리하여 쾌락이 또한 권력이 되었다. 그녀에게 쾌락은 가문과 아버지를 넘어서는 권력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자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서한(서기전 3)

발신 :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수신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로도스

 

인간의 기억은 짧습니다.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유혹의 단계들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단계는 춤과 다르지 않다. 무희들이 춤을 출 때 기술이야말로 쾌락의 정수다. 최초의 눈빛 교환에서 최종 짝짓기까지 순서는 이미 정해져 있다. 남녀의 상호 위선은 멋진 경기를 위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각자는 열정의 무게를 못 이기는 척하는데, 밀고 당김, 일치와 불일치 하나하나가 게임의 완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게임에서 승자는 늘 여성이어야 한다. 여자는 상대를 어느 정도 멸시해도 좋다. 남자는 정복당하고 이용당하면서도 스스로 정복자이자 군림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도 삶이 따분해지면 게임을 포기하고 마치 정복군이 마을을 공격하듯 단도직입적으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면 남자는 아무리 섬세하고 위선적이라고 해도 하나같이 경악하고 만다. 그러면 결과는 같아도 내 입장에서 승리의 여부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숨길 비밀이 없으면 결국 지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한(서기전 2)

발신 :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수신 :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소문은 이제 로마의 생활방식입니다.

 

율리아의 일기, 판다테리아(서기 4)

 

역사가 나를 기억한다면, 후대는 나를 그런 여자로 알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럴 능력도 없다.

 

 

BOOK Ⅲ

 

서한(서기전 14)

발신 : 옥타비우스 카이사르

수신 :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

 

8월 9일

 

리비아가 노골적으로 그런 요구를 할 리야 없지. 성격은 강하네만 행동은 외교적이라네.

 

세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한다고 알리고 싶다면 그것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네. 합의는 만족스러웠어. 우리 모두 사람들 앞에 맨얼굴로 나서는 것보다 이런 식의 속임수가 더 편하니까.

 

두 번째는 내 장례를 위해 몇 가지 지시를 해두었네. 그 일을 맡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지시를 따를 게야. 지시는 노골적으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고 천박하네만 그렇게 해야 시민들이 좋아한다네.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 그나마 이 마지막 쇼는 내가 보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네.

 

지금도 자료 사본들을 앞에 두고 다른 사람이 쓰기라도 한 듯 이따금 들추어본다네. 글을 쓸 때는 다른 글도 적잖이 참고했지. 어떤 사건들을 기록하고 싶어도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든. 우스운 일이야. 이렇게 늙어서 다른 사람들의 글을 통해 내 생을 찾아야 하다니.

 

친애하는 니콜라우스, 이렇게 말해도 용서해주기 바라네. 결국 그 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듯하구먼. 모두 거짓말투성이야. 내 말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으리라 믿겠네. 자넨 무슨 뜻인지 알 게야. 어느 책이나 솔직하고 사실 관계가 잘못된 곳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거짓말이야.

 

그 책들을 읽고 내 글을 적다 보니, 문득 이름은 내가 맞는데 나도 모르는 남자 얘기를 하는 것 같더군. 이상한 얘기겠지만 지금은 그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 힐끔 일견이라도 하려 하면 안개 속으로 들어가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흐릿하기만 하니 하는 말일세. 행여 그가 나를 본다면 지금의 이 모습은 알아볼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희화화된 모습을 알아볼까? 아니, 알아보지 못할 걸세.

 

아, 내가 고용한 젊은 의사라네. […] 난 저 아이가 마음에 들어. 의학에 대해 아는 바는 별로 없지만, 환자를 속여 제 배를 채우는 위선자가 될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다네. 내 노환을 치료한답시고 처방을 내리는 일도 없고, 그간 의사들이 툭하면 강요했던 끔찍한 고문들로 괴롭히지도 않는다네.

 

친애하는 니콜라우스, 피곤하구먼. 나이 탓이야. 왼쪽 눈은 완전히 고장 났네만, 그 눈을 감으면 동쪽으로 이탈리아 해안의 달콤한 새벽 동을 본다네. 내 얼마나 사랑했던 새벽인가. 저 멀리 추억의 오두막들이 어렴풋이 드러나고 대륙 위로 그림자들이 살랑이는 모습도 볼 수 있지. 한가할 때면 저 소박한 사람들이 얼마나 신비롭게 살아갈까 상상도 해본다네. 그래, 삶은 어느 삶이나 신비롭지. 심지어 내 삶마저도.

 

저 글은 청동판에 조각해 묘지 입구 열주에 걸어둘 걸세. 열주는 각각 여섯 개 정도의 공간이 있고 청동판도 각각 한 행에 육십 글자, 오십 행 정도의 글을 담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내 업적의 기록은 일만 팔천 자 정도의 글자로 제한해야겠지.

아무리 중구난방으로 얘기하더라도 다음의 조건은 지켜야 했네. 내 삶이 그랬듯, 내 글 또한 국민들의 필요에 맞추어야 하니 당연하겠지. 또한 내 삶이 그랬듯, 이 글들도 진실을 드러내는 만큼이나 숨겨야 할 걸세. 진실은 새김글 아래, 그 글을 에워싼 대리석 속 어딘가에 묻힐 걸세. 그래, 너무도 당연한 얘기야. 삶의 대부분을 비밀 속에서 지냈으니 말일세. 정치에 몸을 담은 이상 타인에게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지.

다행히, 젊음은 자신의 무지를 보지 못한다네. 도저히 감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지. 무지에 눈을 감고 그래서 후일 자신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는 것도 필경 피와 살에 담긴 본능 덕분이겠지?

 

당시는 얘기할 단계가 아니었겠지만 내 운명은 아주 간단했어. 세상을 바꾸는 자.

 

일반 시민들을 향한 사랑이 감상적인 유행 같았네만, 나한테는 그런 싸구려 사랑조차 없었어. 인간 군상은 야만적이고 무지하고 무자비했어. 그런 속성을 농부의 싸구려 튜닉으로 가리느냐, 아니면 원로의 흰색과 보라색 토가로 가리느냐의 문제였지.

 

따라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안이한 이상주의나 이기적인 정의감 때문이 아니었네. 그랬다간 백발백중 실패했겠지. 재산과 권력에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네. 개인의 안위를 넘어선 부는 지극히 천박하고 필요 이상의 권력은 비열하기 짝이 없으니까. 육십 년 전 그날 오후 아폴로니아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운명이었네. 난 운명을 피하지 않기로 다짐했지.

 

하지만 세상을 바꿀 운명이라면 먼저 자신부터 변해야겠지. 그 사실을 이해한 것도 지식보다 거의 본능에 가까웠네. 운명에 복종한다? 그럼 무엇보다 자신과 타인, 심지어 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에 무관심할 수 있어야 하네. 자신의 내면에서 단호하고 은밀한 본성을 찾거나,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야 해. 물론 지금의 욕망은 물론, 개조하는 동안 발견하게 될 본성에 대해서도 눈을 감아야 할 걸세.

 

그들은 내 친구였네. 더욱이 그들을 포기해야 하는 그 순간에조차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었지. 인간이란 얼마나 모순된 동물인지. 가장 아끼는 대상을 거부하거나 단념해야 하다니! 군인은 직업으로 전쟁을 선택하면서 평화를 갈망하고, 태평성대에는 검이 부딪는 소리와 전장의 혼란과 피비린내를 그리워한다네. 노예 또한 타고난 굴레가 싫어 돈을 주고 자유를 사들여놓고 결국 전주인보다 더 가혹하고 악랄한 주인한테 묶이지. 심지어 애인을 차버린 다음 그 애인을 이상화해놓고 꿈속에서조차 그리워한다지 않던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때 내 삶을 선택했네. 막연하나마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운명을 꿈꾸며 그 꿈속에 살기로 결심하고, 대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가능성을 버린 거야. 너무도 당연해서 거론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아무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식의 인간관계 말일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고민하지 않네. 그보다 그 결과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지. 나 역시 결정의 결과를 가슴속에 품고 사네만, 그 상실감의 무게가 이렇게 클지는 예상하지 못했어. 정말로 우정이 너무도 간절해 결국 거부해야 했다네. 내 친구들, 마에케나스, 아그리파, 살비디에누스도 그 간절함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걸세.

 

젊은이는 미래를 모르기에 삶을 일종의 서사적 모험으로 여기지. 오디세이처럼 낯선 바다와 미지의 섬을 여행하며, 자신의 힘을 실험하고 증명하고 그로써 자신의 불후를 발견하고 싶은 걸세. 중년이 되면 꿈꾸던 미래를 겪었기에 삶을 비극으로 본다네. 자신의 힘이 아무리 위대한들, 신이라는 이름의 사고와 자연을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자기가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다면 노인은 삶을 희극으로 볼 수 있네. 승리와 실패를 가감한다면, 누구도 타인보다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네. 그 힘들과 맞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영웅도 아니고, 그 힘에 파멸당하는 운명의 주인공도 못 돼. 늙은 배우처럼 너무 많은 역을 맡은 탓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일 수가 없는 거야.

 

난 평생 그런 역할들을 수행했네. 지금 이렇게 마지막 역을 남겨놓고 저 섣부른 희극이자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마지막 착각이자, 연극이 끝날 때의 희극적 결말밖에 더 되겠나?

 

 

태곳적에는 동물보다 사람 제물을 신들에게 바쳤다고 들었네.

[…]

지금도 (기억이든 실제든) 수많은 로마인들이 고대 신만큼이나 어둡고 추악한 신들에게 봉사하고 있지 않던가? 비록 그런 신을 파괴하기 위해서라지만 나 역시 악신의 사제였고, 신의 위력을 무력화한다는 명분으로 신의 지시에 따랐네. 그런데도 여전히 신을 파괴하지도 못하고 무력화하지도 못했어. 신은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불안한 잠을 달래며 스스로 일어나거나 누군가 깨워주기를 기다린다네. 야만은 한 사람의 무고한 생명을 미지의 두려움에 바치고, 계몽 정신은 수천의 목숨을 우리가 명명한 두려움에 바치려고 들지. 솔직히 둘 다 끔찍할 뿐이라네.

 

물론 내가 죽으면 원로원은 똑같은 방식으로 내 신성을 선언할 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이미 여러 마을과 속령에서 신으로 추앙받고 있네만 로마에서까지 이런 식의 밀교를 행하게 허락할 수는 없네. 평생 수없이 많은 역할을 해왔네만 이놈의 살아 있는 신 노릇만큼 불편한 것도 없었네. 난 인간이야. 누구나처럼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 다른 사람들보다 잘난 점이 있다면 나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타인의 약점도 안다는 정도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거나 똑똑한 척할 필요가 없었고, 바로 그런 자각이 내 힘의 원천이었다네.

 

나이의 저주가 많다지만 이놈의 불면증이 제일 괴롭군그래. […] 그나마 젊었을 때는 적절하게 요리할 수라도 있었지. 온 세상이 잠들고 나면 나 혼자 느긋하게 삼라만상의 휴식을 지켜보곤 했으니까. […] 실제로 주요 정책 상당수가 동트기 전 침대에서 만들어졌다네. 그런데 요즘의 불면증은 차원이 달라. 행여 잠이 들면 사고의 유희를 즐기지 못할까 하는 우려에 머리를 쉬지 못하는 그런 불면이 아니라, 그저 기다림의 불면증에 가깝다네. 그러니까 지금껏 알지 못했던 기나긴 휴식을 준비하느라 정신도 육신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걸세.

 

8월 10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쉰여덟, 지금 나보다 스무 살 가까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셨지. 종종 그런 생각을 하네만, 그분이 죽은 이유는 암살자들의 단검 때문이 아니라, 권태가 부주의를 낳아서였을지도 모르겠어.

 

지금은 세월이 탬버린과 루트와 트럼펫 가락을 한데 섞어놓은 것처럼 온통 하루처럼 보인다네.

 

친구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떠났어. 위업을 달성하고도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지. 게다가 삶이 무가치하다고 믿을 만큼 불운하지도 않았다네. 그리고 이십 년.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어. 알렉산더야 운 좋게도 일찍 죽기나 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도 세계 정복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게야. 세상을 지배하는 건 말할 나위도 없고.

 

시인들을 믿는 이유는, 그들의 바람을 내가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일세.

[…]

시인은 혼란스러운 경험과 난감한 사건, 이해 불가의 가능성 영역을 관조하네. 말하자면 우리 모두 살고 있으면서 거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이겠지. 관조의 결실이라면 무질서 속에서 사소하나마 조화와 질서의 법칙을 찾아내거나 만들고, 그 발견을 시적 법칙에 기반해 세상에 구현하는 것이겠지.

 

전술했듯이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존재했네. 그래, 어쩌면 세상이 바로 내 시라고 볼 수 있겠군. 부분을 전체로 통합하고 이 파벌을 저 파벌과 통합하고 그 파벌에 걸맞은 역할과 혜택을 부여했으니까. […] 베르길리우스가 숨을 거두며 자신의 걸작 시를 파기해달라고 애원한 바 있지. […]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을 실패자로 여겼다네. 하지만 그의 로마 건국 시편은 로마 자체보다 오래 살아남을 걸세. […] 시간은 시가 아니라 로마를 부순다네.

 

인간이 제일 살기 좋은 조건이라는 놈이 번영, 평화, 조화 따위와 거리가 멀 수도 있겠어. 권력 초기에 우리 국민들은 무척이나 듬직했다네. 빈곤의 와중에도 불평 한 마디 없고 때때로 즐겁게 웃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로마인의 얼굴에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네. 이 정직한 평화에 만족을 못하고는 자꾸 옛날의 타락을 훔쳐보지 뭔가.

 

필리푸스는 갑판에 서서 지켜보더니 이내 꾸벅꾸벅 졸다가 지금은 맨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있네. 머리를 두 팔로 감싸고 잠든 모습에서, 아침이 오면 당연히 잠에서 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여 잠시 부러워하기도 했다네.

 

법이 인간의 내밀한 열정까지 금할 경우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오로지 시인이나 철학자처럼 아무런 힘도 가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인간의 영혼을 향해 가치 있게 행동하라 말할 수 있다고.

 

결혼법과 간통법.

그놈의 법들은 지키라기보다는 마음에 품으라고 만든 것들이야. 미덕이라는 관념이 없으면 미덕의 가능성도 없고, 미덕의 관념을 효율적으로 만들려면 법으로 묶어야 한다고 믿었지.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의미가 없어질수록 세월을 버텨낸 힘에 대해서까지 점점 회의가 든다네. 인간이야 운명을 향해 발버둥친다지만 신들은 분명 그런 미천한 존재들한테 관심조차 없다네. 신탁도 모호하기 짝이 없기에 결국 그 예언도 직접 뜻을 헤아려야 하지. 사제 노릇을 할 때도 난 짐승 수백 두를 잡아 내장과 간을 실험했고, 그 결과 설령 신들이 실존한다 해도 인간사에 개의치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네. 그래서 내가 사람들한테 로마의 고대 신을 따르라 부추겼다면 그건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필요 때문이었다네. 그런 힘 따위는 오히려 개개인에게 넘쳐나네…. 그래, 친애하는 니콜라우스, 어쩌면 결국 자네 말이 맞겠어. 신이란 단 하나밖에 없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네는 그 신 이름을 잘못 지었네. 신의 이름은 우연이고 사제는 분명 사람일 거야. 당연히 사제의 유일한 제물 또한 자기 자신이겠지. 자신의 분열된 자아.

 

나는 미워한다. 고로 사랑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네. 누구나 살다보면,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있을 걸세. 이해 못 할 수도 있고 형설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사람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네. 아무리 초라하다 해도 본질을 넘어선 그 누구도 되지 못해. 나는 지금 말라빠진 정강이, 쭈글거리는 손, 세월에 얼룩지고 처진 살갗을 보고 있네. 한때 이 육신이 그 자체에서 벗어나 타인의 육신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니 우습기까지 하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혹자는 쾌락의 찰나에 온 생을 걸고는, 육신이 말을 듣지 않으면 괴로워하고 외로워하지.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육신이 아는 것이 오로지 쾌락뿐이건만, 그 쾌락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모르기 때문이야. 오히려 우리 믿음과 달리, 성애란 그 무엇보다도 이타적이라네. 타인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를 탈피하려 하기 때문일세. 그 때문에 대부분 가장 저급하다고 여기네만 성애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네. 성애가 더욱 소중한 이유는 우리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이야. 하지만 일단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자아에 갇히지도, 자아 속으로 쫓겨나지도 않는다네.

 

하지만 혼자로는 부족해. […] 로마에서는 지금 유행처럼 소년을 사랑하네. […] 동성애는 내가 볼 때 육체적 쾌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네. 동성의 몸을 애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애무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야. 요컨대 자아의 탈출이 아니라 자아로의 구속이라는 뜻이라네. 친구를 사랑할 경우 자신을 타자화할 수 없어. 온전히 자신으로 남아, 될 수도 없고, 되어본 적도 없는 자아의 신비를 관조해야 하지.

 

바로 내 딸에게 추방령을 내리는 날이었는데 도중에 누군가를 만났네. 히르티아, 옛 유모의 딸이었지. […] 그녀가 아이들과의 삶을 얘기하더군. 고향으로 돌아가 옛 생각을 하면서 기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얘기였네. […] 나야 로마와 내 권위를 위해 딸을 추방해야 했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히르티아에게 선택을 하게 했다면 로마는 멸망하고 딸은 살았을 거라는. 그래, 말할 수 없었네.

 

정부들은 늙거나 먼저 떠나고, 육신은 허약해지고 친구들을 죽고 아이들은 자라서 배신을 하네.

 

내 딸에 대해서라면 더 이상 원망도 없다네. 비록 반란에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율리아는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이였어. 지나치게 요구만 하는 아버지였건만….

 

누구나 다른 사람의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그 증오심만큼 그대로 상대를 사랑할 수 있어. 이젠 이해할 수 있네. 언젠가 율리아를 작은 로마라 불렀네만 그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지. 원래는 로마를 율리아만큼이나 잠재력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는 뜻이었네. 그런데 결국 둘 다 나를 배신했군그래. 그렇다 해도 미워할 수는 없다네.

 

티베리우스는 경멸하지 않을 수가 없군. 그의 영혼은 그 누구도 이해 못 할 정도로 증오가 깊고, 성정은 특별한 대상 없이도 가혹하기가 이를 데 없다네. 그렇다고 나약한 인물이나 바보는 아니라네. 황제라면 나약함이나 어리석음보다는 잔인성이 미덕이 될 수 있을 걸세. 로마는 이제 티베리우스의 자비와 시간의 우연에 맡겼다네. 도리가 없으니까.

 

나는 온 세상에 학교를 세워 라틴어와 로마어를 익히게 하고, 그 학교들이 번성하도록 지원했네. 로마의 법이 속령의 무자비한 풍습을 다스리고, 그 반대로 속령의 풍습을 들여와 로마의 법을 보완했지. 그리하여 세상이 로마를 우러러보네만, 허물어져가는 흙덩이에서 대리석으로 로마를 변모시킨 사람이 바로 나였네.

 

지금껏 투덜댄 절망도, 비로소 내 위업에 비하니 하잘것없어 보이는구먼. 로마는 영원하지 않겠지만 상관없어. 로마가 무너져도 상관없고 야만부족들이 쳐들어와도 개의치 않겠네. 로마는 이미 존재했으니 앞으로도 완전히 죽지는 않을 걸세. 야만인들이 정복하면 그들이 로마인이 되고 로마어가 그들의 거친 말을 다듬어줄 테지. 그들이 파괴한 유산은 이제 그들의 핏속을 흐르고, 지금 내가 위태로이 떠 있는 이 염해만큼이나 시간은 장구하다네. 바로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치른 비용은 사소할 뿐이네. 더없이 사소하고말고.

 

 

에필로그

 

서한(서기 55)

발신 : 아테네의 필리푸스, 나폴리

수신 : 루키우스 안나이수스 세네카

 

“우리가 서로를 용서할 필요는 없소. 결혼이 다 그러니까.”

 

하지만 그가 건설한 로마 제국은 티베리우스의 폭정을 견디고 칼리귤라의 극악무도한 폭력과 클라우디우스의 무능력까지 모두 이겨냈습니다. 이제 새 황제를 맞이할 때입니다. […] 네로 휘하에서 로마가 마침내 옥타비우스 카이사르의 꿈을 실현하기를 신들께 간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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