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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채식주의자 | 한강

2020. 7. 18.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한강

10년전의 이른 봄, 작가는 한 여자가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 『내 여자의 열매』를 집필하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이다. 표제작인 『채식주의자』, 200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 그리고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작가가 2002년부터 2005년 여름까지 쓴 이 세편의 중편소설은 따로 있을 때는 일견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합해지면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기는 장편소설이 된다.

올해로 등단 13년째를 맞는 작가는 작품 속에 단아하고 시심어린 문체와 밀도있는 구성력이라는 작가 특유의 개성을 고스란히 반영시켜 놓았다. 표제작인 『채식주의자』는 지금까지 소설가 한강이 발표해온 작품에 등장하였던 욕망, 식물성, 죽음 등 인간 본연의 문제들을 한 편에 집약해 놓은 수작이라고 평가받는다.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를 바라보는 그의 남편 '나'의 이야기이다. '영혜'는 작가가 10년전에 발표한 단편 『내 여자의 열매』에서 선보였던 식물적 상상력을 극대화한 인물이다. 희망없는 삶을 체념하며 하루하루 베란다의 '나무'로 변해가던 단편 속의 주인공과 어린 시절 각인된 기억 때문에 철저히 육식을 거부한 채로 '나무'가 되길 꿈꾸는 영혜는 연관고리를 갖고 있다.

이 외에도 욕망과 예술혼의 승화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던 2부 『몽고반점』은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의 전체 줄거리에 연결되면서 소설의 텍스트를 더욱 확장시킨다. 상처입은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인 상상력에 결합시켜 아름다움의 미학에 접근하고 있다.

 

*** 밑줄긋기 왈, 모두 이해하긴 힘든 서사였으나 개인적으로는 채식주의자의 결말이 강렬했다. 영혜에게 강요하는 육식이 동박새의 목을 물어뜯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그녀의 원초적 육식은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가공된 육식은 정상으로 규정되는 사회.  

 

 

 

채식주의자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개성있어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림.

 

언제나 나는 과분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린시절에는 나보다 두세살 어린 조무래기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고, 자라서는 넉넉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지원했으며, 내 대단찮은 능력을 귀하게 여겨주는 작은 회사에서 내세울 것 없는 월급이나마 꼬박꼬박 받을 수 있다는 데 만족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올해로 결혼 오년차에 접어들었으나,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권태로울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내가 들어가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

 

다시 꿈을 꿨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겨줬는데,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면, 당신이 날 죽였던가……

 

이번 꿈이 처음이 아니야. 무수히 꿨던 꿈이야. 술에 취하면 예전에 취했을 때 기억이 나는 것처럼, 꿈속에서 지난 꿈 생각이 나. 수없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였어. 가물가물한, 잡히지 않는…… 하지만 소름끼치게 확고한 느낌으로 기억돼.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때, 다른 사람이 내 안에서 솟구쳐올라와 나를 먹어버린 때, 그때……

 

잘 수 있다면. 단 한시간이라도 의식을 놓을 수 있다면. 셀 수 없이 깨어나 맨발로 서성거리는 밤에 집은 식어 있어. 식은 밥, 식은 국처럼 싸늘해. 검은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두운 현관문이 간혹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 따위는 없어. 돌아와 이불 밑에 손을 넣어보면, 다 식어 있어.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저 여자가 왜 우는지 나는 몰라. 왜 내 얼굴을 삼킬 듯이 들여다보는지도 몰라. 왜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의 붕대를 쓰다듬는지도 몰라.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선 안되었다.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몽고반점

 

마지막 작품을 완성해 이 테이프에 저장한 것이 벌써 이년 전의 일이었다. 이년이라면 치명적으로 긴 휴식은 아니지만, 내면을 초조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공백이었다.

 

그가 거짓이라 여겨 미워했던 것들, 숱한 광고와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 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었던 작품이었다.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제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방법은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욕망을 실현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드러내지 않을 뿐, M에게도 욕망이 있을 것이고 그에 따른 번민이 있을 것이다. M의 감춰진 결핍을 동그란 배의 선이 드러내주는 데에서 그는 일종의 옹졸한 위안을 받았다. 최소한 M에게는 살찐 배에 대한 고민, 약간의 수치, 무너져버린 젊은날의 육체에 대한 그리움쯤은 있을 것이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힘들지 않았어?”

그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었다. 희미하지만 힘이 있는,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추운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자세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만큼 단단한 고독을 음영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마른 쇄골과, 누웠기 때문에 소년처럼 밋밋해 보이는 가슴, 드러난 갈빗대들, 관능 없이 벌어진 허벅지, 눈을 뜬 채로 잠든 것 같은 사막 같은 얼굴까지.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는 그런 육체를,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처음 보았다.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는 거지?

“대답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아니요.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실 테니까.”

그녀는 담담히 말하며 나물을 씹었다.

“……꿈 때문에요.”

“꿈?”

그는 되물었다.

“꿈을 꿔서……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아요.”

“무슨…… 꿈을 꾼다는 거야?”

“얼굴.”

“얼굴?”

“이해하지 못하실 거라고 했잖아요.”

 

마치 정상적인 여자 같았다. 아니, 실제로 정상적인 여자야. 그는 생각했다. 미친 건 내 쪽이지.

 

부드럽게 뒤척이는 몸짓과 나신 가득 만발한 꽃들과 몽고반점–––본질적인, 어떤 영원한 것을 상기시키는 침묵의 조화.

 

“그래요. ……그럼 쉬어요.”

전화가 끊겼다. 차라리 아내가 다른 아내들처럼 소리치고 화를 낸다면, 잔소리를 하고 악담을 퍼붓는다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이토록 쉽게 체념하고, 그 체념의 앙금이 우울함으로 가라앉는 아내의 성격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것이 아내의 선하고 약한 면임을,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신이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아내의 인내와 선의가 숨막힌다고, 그래서 더더욱 자신이 나쁜 쪽이 되어가는 거라고 강변하고 싶었다.

 

그녀는 웃었다. 희미하게,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이. 혹은, 무언가를 조용히 조소하는 듯이.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

 

“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앞뒤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 듯 처제는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나무 불꽃

 

특히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그의 침묵은 고무처럼 질기고, 바위처럼 무거웠다.

 

당신의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 살아간다는 게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 그런 게 감동을 줘.

그 말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오히려 그가 사랑 따위에 빠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고백은 아니었을까.

 

그의 열정어린 작품들과,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 같은 그의 일상 사이에는 결코 동일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간격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마지막으로 끌려나가는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힘을 다해 그를 쏘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욕정도 광기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후회나 원망도 아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느낀 것과 똑같은 공포, 그것뿐이었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그애가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나는 이제 동물이 아니야 언니.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 아무도 없는 병실을 살피며 영혜는 말했다.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정말 나무라도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식물이 어떻게 말을 하니. 어떻게 생각을 해.

영혜는 눈을 빛냈다. 불가사의한 미소가 영혜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언니 말이 맞아…… 이제 곧, 말도 생각도 모두 사라질 거야. 금방이야.

영혜는 큭큭, 웃음을 터뜨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금방이야. 조금만 기다려, 언니.

 

집에 오면 밥을 먹을 거니? 먹는다고 약속하면 퇴원시켜줄게.

그때 영혜의 눈에서 빛이 꺼진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영혜야. 대답해봐. 약속만 하면.

고개를 외틀어 그녀를 외면하며, 영혜는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도 똑같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 마침내 그녀는 참았던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함께 살았던 팔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절시켰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눈을 그녀는 또렷이 기억했다.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은 낯선 것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려 애썼던 사람, 인내하고 보살피기 위해 몸을 으스러뜨렸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는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다.

나는 당신을 몰라.

[…]

용서하고 용서받을 필요조차 없어. 난 당신을 모르니까.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피곤해요.

정말 피곤하다니까요.

그는 낮게 말했다.

잠깐만 참아.

그때 그녀는 기억했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잠결에,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혼곤한 잠으로 고통을, 치욕마저 지우곤 했다는 것을. 그러고 난 아침식탁에서 무심코 젓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어지거나, 찻주전자의 끓는 물을 머리에 붓고 싶어지곤 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네가 정말 미친 거니.

그녀는 알지 못할 두려움을 느끼며 동생으로부터 주춤 물러나 앉는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병실의 정적이 물먹은 솜처럼 그녀의 귀를 틀어막는다.

어쩌면……

침묵을 깨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생각보다 간단한 건지도 몰라.

그녀는 망설이며 잠시 말을 끊는다.

미친다는 건, 그러니까……

 

지우가 아니라면–––그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자신 역시 그 끈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고.

다만 기적처럼 고통이 멈추는 순간은 웃고 난 다음이다. 지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녀는 문득 멍해진다. 어떨 때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더 웃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의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까울 테지만, 지우는 그렇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어린아이의 그런 필사적인 노력이 오히려 그녀에게 죄책감을 일으켜, 그녀의 웃음이 결국 흐려져버린다는 것을 지우가 알 리 없다.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한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의식을 놓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식을 어딘가에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그녀는 덩굴처럼 알몸으로 얽혀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영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 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는 무슨 마음으로 그런 테이프를 만들고 싶어했을까. 그 기묘하고 황량한 영상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전부를 잃었을까.

 

……엄마 사진이 바람에 날아갔어. 하늘을 봤더니, 응, 새가 날아가고 있었는데, 새한테서 ‘엄마다……’ 소리가 들렸어. 응, 새 몸에서 손이 두 개 나오구.

[…]

그런데 그게 왜, 슬픈 꿈이야?

[…]

훅, 숨을 들이켠 아이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를 웃기기 위해 지나치게 애쓸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막막하게 하는 울음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도, 도움을 청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슬픔을 느끼기 때문에 소리없이 우는 것이다. 달래듯 그녀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엄마새였구나.

[…]

봐, 엄만 여기 있잖아. 하얀 새로 변신하지 않았지?

강아지처럼 젖은 아이의 얼굴에 어렴풋이 미소가 어렸다.

……거봐, 그냥 꿈인걸. 정말 그럴까, 그 순간 그녀는 숨죽여 의문했다. 꿈일 뿐,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이건 말이야.

[…]

……어쩌면 꿈인지 몰라.

[…]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해설

 

앎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음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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