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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소설/희곡

바리데기 | 황석영

2020. 8. 8.
바리데기

바리데기

황석영

청진에서 태어난 주인공 바리는 영혼이나 짐승과도 소통하는 능력을 가진 소녀로 중국을 거쳐 런던으로 밀항한다. 온갖 고생 끝에 파키스탄 청년과 결혼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자마자 9.11 테러와 아프간 전쟁이 터지고, 남편은 동생을 찾아 전쟁터로 떠난다. 바리의 아이는 돌을 넘길 무렵 친구의 잘못으로 숨지게 되는데…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용서와 구원의 ‘생명수’를 찾아가는 전통설화 속의 '바리'처럼, 소설 속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한반도와 전세계에 닥쳐 있는 절망과 폭력, 전쟁과 테러를 경험할 수 있다. 21세기 이주와 분열을 소재로 전쟁과 국경, 인종과 종교,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넘어 신자유주의 그늘을 파헤치는 동시에, 증오로 갈라지고 상처받은 인류를 위로하고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이번 신작은 거장 황석영만이 선보일 수 있는 대작이다.

 

 

 

이 가이가 우리게는 식구지만 넘들한테는 고기라 말입네다.

 

백두산 자락의 겨울은 아름답고 혹독했다. 우리가 몸을 기대어 살던 그 산도 아마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수백의 자식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뭇가지에 뾰족뾰족 얼어붙은 눈꽃들이 햇살에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그 눈꽃들이 예쁘기보다는 무슨 흉기처럼 무서워 보였다.

 

산 아래 주인집에 가서 봄이 오면 새로 농막을 짓는 데 쓰일 비닐을 얻어다가 몇해나 든든할 정도로 지붕을 새로 이었을지언정 주인네 집에 들어가서 살 수 없겠느냐고는 절대로 사정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도 밥과 같아서 오래가면 쉬게 마련이라 자꾸 폐를 끼치면 나중에 정말 도움이 긴요할 때는 냉정하게 돌아선다고 아버지는 말했고 할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누구나 보이지 않으면 생각도 그를 따라가버린다. 나는 아버지가 언제 우리와 한겨울을 났는지 까마득하게 옛날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생명수 약수를 달랬더니 그놈에 장승이가 말허는 거라. 우리 늘 밥해 먹구 빨래허구 하던 그 물이 약수다.

기럼 공주님이 헛고생한 거라?

바리야, 기건 아니란다.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을 얻었지비.

 

나는 나중에 다른 세상으로 가서 수많은 도시들과 찬란한 불빛들과 넘쳐나는 사람들의 활기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우리를 버렸고 모른 척했다는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너 식구들을 위해서라두 살아야 한다. 살아야 옛말을 남길 사람이라두 있지비.

 

내가 운 것은 아마도 자기 설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긴 어둠의 나날 속에서 껍데기인 내 몸을 벗어나곤 했다. 칠성이가 인도하는 대로 달빛처럼 하얀 길을 따라 할머니를 만나러 갔는데 나중에 잠깐 넋이 돌아와 살피면 저승이 이곳과 똑 같은 장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괘씸한 것! 네가 죽지도 않은 것이 감히 자기 꿈속에 우리를 불러내다니.

 

사나 죽으나 그게 그거 사나 죽으나.

 

세상 이치는 어디나 다 같은 거야. 힘센 부자는 그걸 누리기가 아주 힘이 든단다. 이를테면 집안 단속을 하려는 모양이구나. 바리도 패스포트가 없겠지?

있긴 있지만……

그래, 물론 위조된 거겠지.

나는 그동안 낯선 타관을 흘러다니며 좋은 상대방에게서 도움을 받으려면 정직하게 말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래, 무엇이 온 세상을 가르고 찢어놓았는지 앞으로 천천히 살펴보자꾸나.

 

사람들은 왜 국경 같은 걸 만들었을까.

 

너 가는 길에 부탁하는 사람덜 많이 만난다구. 제 괴로움이 무엇 때문인지 자꾸 물었지비.

응, 바리공주님이 저승 가서 알아가주구 오갔다구 기랬대서.

오라, 기러니까디 대답을 준비해둬야 하갔구나.

저승을 가야 알지.

거저 살다보문 대답이 다 나오게 돼 이서.

말 다르구, 생김새 다르구, 사는 데가 다른데두?

할머니가 주름이 오글오글하게 가만히 웃는다.

거럼, 세상이나 한 사람이나 다 같다. 모자라구 병들구 미욱하구 욕심 많구.

내가 덧붙인다.

가엾지.

우리 바리가 용쿠나! 가엾은 걸 알문 대답을 알게 된다니까디.

[…]

모든 영혼은 탁한 데서 맑은 데루 씻기우는 거다.

 

신은 아끼는 사람들을 먼저 데려가신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분은 착하게 살다 죽어서 지금은 물이 흐르고 꽃이 만발한 낙원에서 천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끔씩 보는 무지개다리가 걸린 강 건너 풀밭 어디쯤에 그런 분들이 어우러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가야, 우리 옷과 음식이 서로 조금씩 다르듯이 그건 살아온 방식이 다를 뿐이다. 우주의 섭리는 하나로 모인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보통날.

 

홀리야가 무슨 뜻이에요?

응, 그건 자유라는 뜻이란다.

[…] 말이란 물건을 만나야 잊지 않게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 잠든 애 아기를 돌아보았다. 나는 홀리야라는 이름과 나란히 순이라는 우리말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려보았다. 홀리야 순이.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이 있다. 그렇지만 모두 자기가 풀어야 하는 거야.

 

스스로 살아갈 의지가 있어야겠지. 그래야 남들도 믿고 도와주지.

 

샹 나쁜 년, 널 죽여버릴 거야.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던 것이 샹이 건드렸을 뿐, 그것은 먼 길을 거쳐오는 동안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원한이었음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사고나 병으로 죽든 스스로 죽든 그건 새 출발이야. 홀리야는 새로 시작한 거다. 너도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런 악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신은 왜 저에게만 고통을 주는 거예요? 믿고 의지한다고 뭐가 달라지죠?

신은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는 게 그 본성이다. 색도 모양도 웃음도 눈물도 잠도 망각도 시작도 끝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있다. 불행과 고통은 모두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거야. 우리에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우여곡절이 나타나는 거야. 그러니 이겨내야 하고 마땅히 생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게 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거란다.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 거란다.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린다.

 

애쓰지 말라. 세상에 간직한 네 몸은 네가 아니야. 네 넋에 집이지. 몸을 버리구 떠나오문 너두 우리처럼 된다. 슬픈 거나 기쁜 거나 다아 세상에 속해 있지.

 

얼른 대답해다오.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

바리,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알려줘요.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도.

[…]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

여긴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들이 타고 있는 배다. 우리는 언제 풀려나게 될까?

[…]

그들은 목청껏 서로가 남의 말을 삼켜버리려고 더욱 큰 소리를 내기 때문에 뒤섞여서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한다.

 

나는 원래 형상이 없지만 너를 위해 지었노라!

당신도 풀어줄게요. 사납게 굴지 말아요.

 

생명의 물 따위는 없더라.

까막까치는 다시 자지러지게 웃는다.

까르르르 멍텅구리 네가 마신 그게 그거.

아무도 가져올 수 없지. 생명의 물은.

 

서로 양보해서 차례차례 말하든지, 목청을 합쳐 서로의 말을 해주든지, 아니면 그냥 침묵하면 좋을 텐데.

 

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이제 저들을 용서하면 그이를 돕는 일이 되겠구나.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 알아왔어요?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대. 이승의 정의란 늘 반쪽이래.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신의 슬픔. 당신들 절망 때문이지. 그이는 절망에 함께하지 못해.

 

부르카를 쓴 여인이 헝겊 안에서 희미한 소리로 말한다.

내 죽음의 의미도 말해요.

서양놈들하구 너희네 남자놈들이 그 헝겊때기 보자기를 같이 씌워놨어. 바깥놈은 그럴 벗겨야 개화시킨다구 그러구 안엣놈은 집안 단속해야 자길 지킨다구 그래. 신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이승의 얼굴이 너희들이야.

 

여긴 네가 가장 미워하는 것들이 타구 있다. 우리는 언제 풀려나지?

우리 엄마가 묶여 있어. 엄마가 미움에서 풀려나면 너희두 풀릴 거야.

불쌍한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그애는 아직도 저와 함께 있는걸요.

응, 그렇게 하려무나. 그래도 언젠가는 놓아보내야 할 거다. 모든 영들은 죽어서 새로 성장하게 되니까 말이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가 철없는 것들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낸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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