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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면 100% 아이는 내 옷자락을 붙잡고 내게 물었다. "꼬모, 이거 면이야?" "응. 순면 100%." 아이는 주저없이 내 옷자락으로 안경을 닦는다. "야, 너 뭐하는거야!" 아이는 어느새 그곳에 없다. 그리고 할머니를 찾는다. "할머니! 여기 안경." 2012. 12. 3.
깨어나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경칩이 되어도 안 깨나겠지?" 그녀는 거리를 가다가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뭐?" 라는 카페 앞이었다. "왜? 표본실에 있어서? 아니면, 청개구리래서?"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말을 참 오랜만에 들었다. 졸업과 동시에 내 머리 속에서 삭제해버린 듯 낯설게 들린다. 이유가 무엇이든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깨어날 리 없겠지만, 분명 그 단어가 내 기억을 깨우긴 했다. 염상섭 ? 표본실의 청개구리 ? 리얼리즘 ? 자연주의 주입식 암기교육의 효능은 정말 놀랍다. 정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소설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2012. 12. 3.
점(占) 가장 훌륭한 예언은 상식이다. - 에우리피데스 나는 점(占)을 믿기 때문에 점을 보지 않는다. 미선은 한 해를 시작하면서 신년 운수를 보고, 결혼, 이사, 승진, 임신 등등의 삶의 중요한 시점에 꼭 점을 보러 간다. 점괘가 그녀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원하는 점괘가 나올 때까지 철학관들을 찾아다닌다. 그녀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 정도는 나도 해줄 수 있건만 그녀는 먼곳을 돌아다닌다. 그녀와 대학로를 걸었다. 대학생인 듯 보이는 청년이 컴퓨터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야, 이거 한번 보자." "뭐하러." "왜 재밌잖아." 그녀의 재촉에 이끌려 2천원을 냈다. 두 장의 별자리 운수.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녀와 내가 같은 별자리라는 것이다. 똑 같은.. 2012. 12. 3.
치과 치과에 갔다. 잇몸에 이상이 있다고 한다. 사실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감기 같은 계절병은 몸으로 때우고, 무기력증 같은 만성병은 정신력으로 버틴다. 누군가에게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싫다. 이건 병일지도 모른다. 치과는 다른 이유로 잘 가지 않는다. 치과는 무서워서 싫다. 그렇다고 진료대에 앉아서 의사가 치료도 하기 전에, 비명을 질러대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웬만한 아픔도 곧잘 참는 편이다. 다만, 그 의자에 앉기까지가 무척 긴 시간이 걸린다. 고통이 다가서면 참을 수는 있지만, 참을만한 그 고통에 다가가기가 싫다. 하여튼, 치과는 무섭다. 나는 겁쟁이인지도 모른다. 이건 병은 아니다. 2012. 12. 3.
무관심 "미루씨는 왜 결혼을 안해?" 구부장은 뜬금없이 툭 내뱉곤 한다. 앞뒤 상황이 전혀 이 물음이 나올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그냥 툭 던진다. 회사 휴게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다가, 책상 앞에 앉아 주식동향을 살펴보다가, 또는 회식자리에서 안주거리로 뜬금없이 툭 던진다. 그때마다 어떤 대답을 하긴 했을 것이다. 그 대답을 기억하지 못해서 매번 다른 답을 지어내는 걸 보면, 한번도 진실을 이야기한 적이 없나보다. 그는 내 대답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해도 그는 설교를 해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들을 생각은 없다. 다만, 말할 대상이 필요할 뿐이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어김없이 우람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뜬금없이 툭 던진다. "꼬모는 언제 결혼해." "그건 알아서 뭐할려고?" "꼬모.. 2012. 12. 3.
삶의 양 병원 중환자실을 평생 두번 가보았다. 엄마를 만나러, 그리고 할머니를 만나러. 건강을 되찾은 엄마는 지금 내 곁에 있지만, 할머니는 그곳에서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그곳에서 생과 사를 선택한 사람은 그나마 나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전신마비인 딸의 고통을 보다 못해 딸을 총으로 쏜 어머니의 이야기가 해외토픽에 실린 적이 있다. 그 어머니의 유무죄는 관점에 따라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더 인도적일 수도 있고, 삶의 양이라는 측면에서 그 결정은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의 독단일 뿐이다. 인간은 삶의 질을 추구하지만 언젠가부터는.. 2012. 12. 3.
예의 직장인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난 도대체가 직장생활이 맞질 않아." 20년 직장생활을 한 구부장도 20년 내내 하는 말이다. "이제 때려치우던지 해야지, 원참." 이제 만성이 될 만도 한 직장생활 10년차인 나도 이런 말을 되뇌이곤 한다. 직장생활이 맞지 않는 사람이 직장생활에 내내 목매고 있고 오늘이라도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사람이 내일도 다닐 게 뻔하다. 직장인의 비애다. 한편으로는,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면 어쩌면 직장생활이 맞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10년 동안 회사를 때려치우지 않고 있다면 어쩌면 회사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든 직장인은 직장생활이 맞지 않다고 불평하며, 대부분의 직장인이 내일이라도 때려치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이 정도는 직장인의 .. 2012. 12. 3.
다양성 우연히, 케이블TV에서 방영하는 "삼사라"라는 영화를 보았다. 우리나라의 "꿈"이나 "만다라"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젊은 구도자는 세속의 욕망에 동요되어 구도의 길을 포기하고 늙은 구도자는 젊은 구도자의 삶을 바라보며 구도에 정진한다. 입적하는 노승은 세속으로 돌아간 젊은이에게 묻는다. "다음 생애 만나면 어느 것이 더 나은지 이야기해다오. 천가지 욕망을 쫓아 욕망을 채우면서 사는 삶과 한가지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수양을 하는 삶 중에서."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도 비슷한 갈등구조가 등장한다. 세속의 사랑과 수도사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 수도사에게 주는 말이다. "사랑(남녀간의 사랑)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평화롭겠느냐, 아드조. 안전하고 평온하고 그리고 지루하겠지." 사람살이가 다 거기.. 2012. 11. 29.
운동부족 어릴 적 나는 몸이 약해서 집안 어른들은 걱정을 많이 하셨다. 뚱뚱하고 다리가 짧아서 걸어다니면 말 그대로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짧은 다리로는 엄마 발걸음을 쫓아가지 못해서 뛰다시피 종종거려야 했고, 집을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는 거리에 오면 언제나 엄마 먼저 가시라고 손짓을 하곤 했단다. 그리고 쉬엄쉬엄 한참을 지나서야 집에 도착하곤 했다. 초등학교는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모두가 걸어다니는 그 등교길을 나는 두 정거장 거리를 버스를 타고 다녔다. 사실 꼬마 혼자 비집고 들어가 헤집고 나와 내려야 하는 그 만원버스가 더 위험하긴 했지만 말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 학교친구가 하나, 둘 생기자 하교길은 친구들과 걸어서 오기도 했지만, 등교는 꽤 오랫동안 버스를 탔던 것 같다. 현재 내 이미지도 어.. 2012.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