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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풍경45

가장 이상한 세 단어 Trzy stowa najdziwniejsze 가장 이상한 세 단어 Trzy stowa najdziwniejsze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無)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 미래 고요한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과거가 된 정적을 깨고 무언가 창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참, 이상하군.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중에서 2023. 3. 2.
새벽 네 시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중에서 새벽 네 시 Czwarta nadranem 밤에서 낮으로 가는 시간. 옆에서 옆으로 도는 시간. 삼십대를 위한 시간. 수탉의 울음소리를 신호로 가지런히 정돈된 시간. 대지가 우리를 거부하는 시간. 꺼져가는 별들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시간. 그리고-우리-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시간. 공허한 시간. 귀머거리의 텅 빈 시간. 다른 모든 시간의 바닥. 새벽 네 시에 기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네 시가 개미들에게 유쾌한 시간이라면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자. 자, 다섯 시여 어서 오라. 만일 그때까지 우리가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다면. ------ 삼십대를 위한 시간이라고 노래한 새벽 네 시. 오십대는 새벽 네 시를 넘기며 불면에 들 때가 있다. 공허한 시간. .. 2023. 2. 21.
들킨다는 것의 부끄러움 들킨다는 것의 부끄러움 무지일 수도 있고, 속물성일 수도 있고, 비밀일 수도 있고. 들켰을 때, 모멸감과 분노와 허탈함이 뒤따른다. 에이미와 이저벨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엄마, 예이츠예요. 이이츠가 아니라.” 이저벨이 돌아보았다. “뭐?” 당혹감이 벌써 목으로, 가슴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저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그들이 그 혐오스러운 만남을 이어가는 동안 자기에 대해 이따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음을 깨달았다. […] 그녀가 집 앞 진입로로 들어서면서 느낀 것은 깊은 분노와 고통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런 감정을 느끼고도 생명을 지탱할 수 있으리라고 절대 믿을 수 없었던, 그런 분노와 고통. ------ 이저벨은 낯선 존재, 딸 에이미와 함께 살고 있다. 에.. 2023. 2. 13.
그러니까 꿈을 꿔, 꿈을, 꿈을. 미국의 목가 / 필립 로스 하루가 끝나면 꿈을 꿔, 꿈을 꿔, 그러면 그것이 현실이 될지도 몰라, 세상이란 절대 보이는 것만큼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꿈을 꿔, 꿈을, 꿈을. - 조니 머서, 1940년대의 인기가요 에서 이반 일리치의 삶이 매우 단순하고 매우 평범했으며, 따라서 매우 끔찍했다. 스위드 레보브의 삶은 내가 하는 한 매우 단순하고 매우 평범했으며, 따라서 딱 미국인의 기질에 맞게 훌륭했다.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뭔가가 되어라! 그 생생한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충만함. […] 그 자잘함, 그 엄청난 자잘함, 그 자잘함의 힘, 자잘함의 무게. --- 미국 전후 세대는 뭔가 되라는 지상명령을 받습니다. 전쟁 세대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꿈의 나라, 미국에서. 그러니까 꿈을 꿔, .. 2023. 1. 28.
늙은 쭈그렁 할멈의 슬픔까지도...... 눈 먼 암살자 / 마거릿 애트우드 “당신은 왜 슬픈가요?” “저는 슬프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이 보여 주는 동정에 갑자기 마음이 무너질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슬퍼하면 안 돼요.” 그는 구슬프고 완고한 바다코끼리 같은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랑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젊고 예뻐요. 나중에 슬퍼할 시간이 있을 거예요.” 프랑스인들은 슬픔에 관한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슬픔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비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슬픔에 관한 그의 말은 틀렸다. 젊을 때 슬퍼하는 것이 훨씬 낫다. 슬퍼하는 젊고 예쁜 여자는 위로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슬퍼하는 늙은 쭈그렁 할멈과는 달리. --- 슬퍼하는 늙은 쭈그렁 할멈의 슬픔.. 2023. 1. 28.
격려, 핑계 그리고 미소 발레 학교로 떠나기 전 빌리와 아버지의 대화. “힘들면 돌아와도 되나요?” “네 방 세놓았다.” 영화 중에서 여지를 주지 않는 아버지의 야박한 격려. “네 아버지는 어디 있어?” “남미에서 바나나 농장에서 일해.” “언제 돌아와?” “그럼, 바나나는 누가 따?” 영화 중에서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에 대한 아이 나름의 핑계. 나는 문간에 쓰러져 있던 놋항아리를 바라보면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글쎄, 이게 내가 영영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징조였나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겔 스트리트 / V. S. 나이폴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어머니의 행복한 미소. * 영화 대사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흐릿한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했습니다. ^^ 2023. 1. 28.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 파트릭 모디아노 과거는 밝힐수록 어두워진다. 내가 사건의 실상을 알려줄 수는 없다. 그 그림자만 보여줄 수 있을 뿐. - 스탕달 작가 장 다라간은 잃어버린 수첩을 돌려주겠다는 남자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에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수첩이다. 남자는 수첩 속의 한 인물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며 굳이 만남을 요구한다. 만남에서 남자가 묻는 “토르스텔”이라는 인물을 떠올리려 하지만, 과거의 시간은 햇빛을 받으면 흩어지는 연무처럼 어슴푸레하다. 유년의 기억이란 공백에서 떨어져나온 작디작은 편린일 때가 많다. 다라간은 “토르스텔”이라는 이름에서 촉발한 불완전하고 파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자료'에 든 서류가 불러 온 감정 상태도 묘했다. 어떤 이름들 때문에, 그중에서도 아니 아스트랑이라는 이.. 2023. 1. 15.
홍학의 자리 / 정해연 우리는 그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호수가 다현의 몸을 삼켰다.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머리칼과 잘록한 허리, 밤을 새워 지분대던 가슴과 길쭉한 다리, 사랑을 나눌 때면 천장을 향해 만족스러운 듯 뻗던 희고 긴 손가락이 기억과 함께 호수 바닥으로 사라졌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그를 재촉하듯 질러대던 교성은 이미 숨을 잃은 다현이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준후는 교사이다. 준후는 이혼을 거부하는 아내와 별거 중이다. 다현은 외로운 아이다. 어머니는 사기로 수감된 감옥에서 자살하고 돌봐주던 할머니는 죽었다. 준후와 다현은 부적절한 관계이다. 첫 장면에서 준후는 다현의 시체를 호수에 유기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런데 다현은, 누가 죽였을까? 준후는 다현의 시체를 유기하지만, 다현을 죽인 것은 아니다... 2023. 1. 8.
2022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도어 / 서보 머그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그녀에게 작은 텔레비전을 선물로 가져왔다. 비밀스럽고 진중한 눈빛으로 마치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듯이 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실제로 그 선물을 받아들였기에 나는 기쁨에 완전히 도취되었다. 그 거리의 상像에 에메렌츠가 불쑥 들어와서 눈을 쓸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수건, 어깨, 등은 두꺼운 눈의 휘장 아래에서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에게 인도는 청소가 되지 않은 채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는 눈을 쓸고 있었다. 방금 태어나신 나의 주님, 저는 이 부인에게 무슨 선물을 한 것인가요? 아침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일들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데, 그녀는 몇 번이나 집에서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 2023. 1. 8.